시인의 흔적을 찾아서


문득 전라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경상도 일대는 자주 방문했지만, 전라도 광주와 해남 땅긑마을로 향하는 길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일주일 남짓의 여정을 계획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김남주 시인의 생가와 묘역을 직접 둘러보고 싶어서였다.

 

여정의 시작은 시인의 생가가 있는 해남이었다. 작은 고속버스가 드물게 다니는 해남의 한 시골 마을.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기보다 택시에 올라타 기사님께 김남주 시인의 생가로 가달라고 부탁드렸다. 기사님은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이가 김남주 시인을 찾아가다니 대단하다”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정말 논밭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한가운데 작은 초가집 한 채가 덜렁 놓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시인의 동상은 무엇보다 우직하고 당당했다. 생가 옆에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 숲, 그리고 그가 겪었던 오랜 옥고의 세월을 증언하듯 보존되어 있던 감옥의 흔적을 마주하니 묵직한 여운이 밀려왔다. 치열했던 그의 땀이 생생했다.

 

광주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5·18민주묘지였다. 여러 민주화 주역들이 안장된 그곳에서 안내원분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군부 독재 시절의 잔혹한 진압과 희생자들, 그리고 아직도 신원을 찾지 못한 채 남아있는 수많은 비극의 참상을 접했다. 예전에 서울에서 방문했던 ‘서대문 형무소’나 ‘대공분실’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었다. 화면으로 접할 때는 재를 뿌리는 추모 공간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 넓은 땅 전체가 묘역이라는 점이었다. 세대 간의 시간 차이로 그 시절을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왜곡되지 않은 시선으로 역사의 숨결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이어 김남주 시인의 기념관이 있다는 모 대학교 인문 강당을 찾았다. 교무실에 사정을 전하여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생전에 출판된 그의 시집들과 보존된 기록물들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고, 시인의 발자취를 다시 한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해남으로 다시 내려가 둘러본 땅끝 마을의 바다는 아득할 만큼 넓었다. 케이블카 대신 경사를 따라 직접 걸어 오르며 마주한 바다, 그리고 유리가 깔린 전망대 바닥 너머의 풍경은 장관이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행군 군인들을 촬영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스산하리만치 긴 버스 대기 시간과 드문 배차 간격을 겪으며, 이곳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들과 학생들의 정주 여건이 쉽지만은 않겠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광주 시내로 돌아와 5·18 유적들을 살펴보았다. 특히 당시 헬기 사격의 총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건물을 올려다보았을 때는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번 여정은 겉으로 보기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유적지를 둘러본 역사 탐방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오롯이 김남주 시인을 기리고 그의 발자취를 추적한 여정이었다.

 

광주와 해남은 여전히 깊은 여운을 준다. 그 여운이란 단순히 ‘민주화’라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우직한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혁명의 숨결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김남주 시인 동상>



<광주 내 5·18 추념탑>



<광주 5·18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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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마주한 자본


사업이 불안정할 때 지인을 초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2023년 무렵, 정규직으로 입사했던 첫 회사를 퇴사하고 생계를 유지할 여력조차 바닥을 치던 때였다. 사업도 어느덧 끝물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업장 바로 옆 구역에는 대형 기업형 카페가 들어섰다. 대자본을 쥔 유명 기업가가 찾아왔을 때 지인과 직접 방문해 보았지만, 소자본으로 버티던 사업장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점심 무렵 찾아오는 동네 지인들이나 간간이 들르는 여행객만이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본의 아니게 사업장 대표를 맡고 있었으나, 훗날 사업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탕감받기 전까지 사업장에 갚지 못한 대출금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중소 사업장의 경우, 이처럼 누적되는 채무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생계를 위해 가업처럼 사업을 계속 이어나가야 하는 비극이 종종 발생한다.

 

당시 아파트에 거주하면서도 사업장 옆 작은 별채에서 가족과 분리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배달업체의 수수료와 배달료를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판단해, 배달 영업을 가장 먼저 중단하자고 제안한 것도 본인이었다.

 

그 무렵은 초기 AI 기술이 막 개화하던 시기였다. 평소 영문학 교수의 논문을 구독해 읽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신행정주의’, ‘기계에 대한 불안’을 다룬 메일과 영상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상 매체 ‘알고리즘’은 디스토피아적인 콘텐츠로 이끌었고, SNS 역시 자극적인 기계 문명의 암울한 전망을 끊임없이 띄어주었다. 고립된 공간에서 접한 그 정보들은 심리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중에야 깨달았다. 하얀색 긴 옷을 입고, 아파트 안 대형 칠판에 적어 두었던 수많은 단상들을 지우며 점차 기계처럼 강박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는 것을. 사업에 대한 불안은 어느새 ‘기계가 언제가 자신을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망상으로 번져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AI 시대를 맞아 직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의 불안이나 당시 본인이 겪었던 망상들은, 지배 계급이 은연중에 부추긴 시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가질 수 있게 된 시선이다.

 

결국 배달 영업을 끊고, 사업장 문 앞에 임시 휴업을 알리는 표지판을 걸어둔 채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힘든 시간을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붉은 라디오’로 시작하여 글을 게시하기 시작한 것도 2023년 무렵이었다. 가까웠던 지인과의 연락마저 두절되자 심리적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가족과의 갈등도 깊어졌다.

 

첫 번째 걸음은 첫 회사를 향해 나선 길이었다. 사업장에서 출발해 중산간 도로를 지나 북동쪽으로 올라갔다. 약 22~24km 달하는 먼 길이었고, 5시간 반에서 6시간 반가량이 걸리는 고된 여정이었다. 물 한 모금 없이 앞치마만 두른 채 길을 나섰다. 이었다. 이른 점심에 출발했찌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중간에 화장실이 급해 염치 불구하고 타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실례가 되지 않도록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용변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직접 바느질해 만든 컵 받침대를 가지고 그 집을 다시 찾아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걸으면 금방 도착할 거라 생각했던 길이었지만, 이른 점심에 출발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당시 걸어가던 길목은 주위의 나무를 밀어내고 도로를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 옆을 걷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렇게 도착한 첫 회사 터에는 그토록 아끼던 나무가 이미 뿌리째 뽑혀 있었다. 깊은 실망감을 안고 다시 돌아섰다. 돌아오는 5시간 반 동안 차선 불빛들이 아스팔트 위에서 마치 자궁의 형상처럼 피어오르는 환영을 보았다. 탈진 직전의 순간,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한적한 야밤, 캄캄한 도로를 혼자 걸어가는데 소형차 한 대가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운전자는 위험하다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집으로 가는 중이라 답하자, 가로등이 나오는 도로까지 헤드라이트를 비춰주며 안내해 주었다. 곧이어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다가왔다. 생전 처음으로 경찰차를 타고 사업장까지 이송되어 돌아왔다. 그 후로도 한동안 운전 중 좌회전만 고집하거나, 맨발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근처 학교 운동장을 정처 없이 거니는 등 기행을 이어갔다. 사업의 불안 속에서 일자리를 잃고 사회 밖으로 내던져진 자의 방황이었다.

 

바닷가를 바라보며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라디오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이번에는 시내까지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상으로 섬 절반을 하루 만에 돌겠다는 무모한 시도였다. 걸음은 망설임 없이 떼어졌다. 95~105km에 달하는 거리, 꼬박 24~26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여전히 물 한 모금 없이 앞치마 하나만 두른 채였다.

 

한겨울의 해안 도로에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 불빛만 남았을 때는 엄습하는 추위에 ‘이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침내 공항 근처에 다다랐을 때 비행기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소방서의 모습도 보였지만, 사람들을 피해 계속 걸었다. 한밤중에 앞치마를 두르고 걸어가는 본인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오직 걷는 데만 집중했다.

 

시내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지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물도 마시지 못한 채 버티다,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폐 몇 장으로 편의점에서 간신히 간식을 사 먹었다. 하루 전 공항에 도착해 본인을 찾고 있을 가족들 생각이 나, 공항 전화기를 빌려 부모님께 연락을 드렸다. 몇 번이나 사라진 자식 때문에 덜컥 겁이 났었다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하다.

 

이러한 무모한 수행 같은 걸음에도 사업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버틸 수 없는 구조였고, 동네 지인들이 그토록 아끼던 공간이었음에도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기를 끄고 세상을 차단해 버렸다. 소자본으로 시작해 10년 넘게 이끌어온 가계 사업이었지만, 노후화된 시설과 대자본의 공세 앞에서 한 개인인 소생산자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훗날 마르크스, 『자본』을 공부하며 그것이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도시로 넘어온 지금도 그때의 무리한 시도와 심리적 불안이 가끔 떠올린다. 끊임없이 더 많은 돈을 추구하는 굴레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망가뜨리는지 깊이 실감하고 있다. 거대 자본을 쥔 이들은 한 개인으로서 사업장을 직접 운영하며 자신의 모든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을 결코 해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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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생애는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나 낭만적인 연애와는 거리가 먼, 투쟁 속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랑이 제도와 결합하고, 결국 이별을 반복하여 사랑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사랑은 오직 서로 간의 깊은 우정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인연이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성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 체제의 종식을 목도하는 때일 것이다. 계급적 위선으로 포장된 ‘가능한 사랑’은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을 체제에 안주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증폭시켜 개인의 사사로운 시각에 머물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랑과 ‘이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과거의 시각과 폐단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각의 자리에는 짙은 부르주아적 독백만이 남을 뿐이다.

 

예전에 한 호텔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무제한으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막대한 낭비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집밥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온 가정과 가족의 존재에 반하여, 페미니스트들은 고독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하는 ‘가능한 사랑’에 안주한 나머지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하기를 꺼렸던 태도는, 결국 그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빈약한 죽음을 담보로 소비된 사랑을 장려하는 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은 영화 매체조차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수많은 이들을 남몰래 만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안다. 온갖 사적인 비밀로 도배된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는 오직 고독한 인간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능한 사랑’이란 계급적 차이나 의식적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것을 내가 나눈다”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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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를 둘러싼 도덕적·윤리적 논란은 혁명의 본질을 가리는 구실에 불과하다. 우리는 혁명적 형벌로서 사형제 도입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한다. 부르주아 법체계는 무고한 민중을 억압해 온 반면, 정작 처발받아야 할 자들에게는 심판을 유예하며 민중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혁명기의 사형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억압 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를 단죄하는 민중의 혁명적 재판이어야 한다.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사유 재산을 사수하려 할 때, 생산 수단을 전유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 부르주아지를 청산하기 위해 혁명적 사형제를 단호히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제국주의와 대자본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해악은 명백하다. 단순히 감옥에 가두어 방치하는 온건한 처벌 방식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정한 단죄가 될 수 없다. 자본의 결탁과 인적·물적 영향력을 보존한 채 감금되는 것은 반혁명적 복권의 여지를 남겨둘 뿐이며, 이는 민중의 피해와 계급적 수탈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한다. 혁명적 사형제는 과거의 무차별적 숙청이 아니며, 단순한 경제 성장 가속화 수단도 아니다. 이는 지배 계급의 반혁명적 유산을 청산하고 역사를 진전시키기 위한 단계적이고 결정적인 단죄이다. 평화적 해법이라는 소시민적 착각은 대자본의 생산 수단 독점을 눈감아주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법적 기준은 주로 하층민이 저지르는 ‘거리 범죄’를 집중 처벌하지만, 실제 사회적·경제저 피해 규모는 부르주아지 (기업 및 대자본가)가 저지르는 범죄가 월등히 크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임금 체불 역시 중대한 범죄 행위임에도, 형사 처벌보다는 민사상 합의나 과태료 처분 정도로 유야무야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사법 체계가 계급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소액 절도나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하층민의 구속 및 실형 선고율은 매우 높은 반면, 수천억 원대 배임·횡령을 자행한 대기업 총수나 자본가에게는 집행유예, 보석, 사면이라는 특혜가 압도적인 비율로 부여된다. 전 세계 교도소 수감자의 80~90% 이상이 하층 계급 및 소외 계급 출신이라는 구조적 통계는 자본주의 형법 기구의 본질을 폭로한다. 결국 현행 법 체계는 자본가의 범죄를 ‘경영상 실수’나 ‘비폭력 범죄’로 포장하여 보장하는 반면, 소외 계급의 범죄만을 선별적으로 단속하고 진압하는 계급적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의 법집행이 무능과 범죄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접 집행하는 혁명 재판만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온 부르주아 '평화 정치'의 허구를 폭로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다. 부르주아지의 위선은 분야를 막론하고 점차 노골적이고 해악적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과제는 더 이상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수탈 방식에 대한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단호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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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OTT나 AI 등 기술 매체가 기획·개발 단계부터 ‘유료화’를 전제로 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기술 발전이 어떻게 공공재를 사적 소유물로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본래 이러한 매체와 기술은 사회적 생산 수단이자 공공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특히 AI·AGI (인공일반지능) 등의 유료화는 거대 자본의 사적 이윤 창출과 독점을 위한 민영화 기제 및 투자 수단으로 손쉽게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 매체의 사용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는 방식만으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기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거부론이나 비판은 때로 공허한 ‘종말론’을 부추기는 데 그치거나, 모순적으로 자본이 형성한 상품성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기술 사용을 거부하는 소극적 태도는 공공재를 부분적으로 유료화하며 사적 이윤을 정당화하려는 자본의 점유 시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대기업이 주도하는 AI 기술 등은 정치적·법적 권리를 바탕으로 자본가가 그 소유권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나 대중의 통제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본 기업은 공공적 가치를 지닌 기술마저도 부분적 유료화로 이윤 창출의 도구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내부의 개별 노동자나 대중이 이러한 유료화 공세에 맞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기업 경영진이 지닌 법적 권한과 거대한 법률 조직, 그리고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기술 발전과 공공재의 상품화를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술의 유료화는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만이 첨단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독점하는 ‘기술적 소외’를 정착시킨다. 이는 지식과 생산 수단에 대한 접근 권한을 자산 규모에 따라 제한하여 사회적 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한다. 자본 기업이 아무리 ‘할인율 적용’이나 ‘구독 방식의 정당성’을 포장하더라도, 유료화 전략의 본질은 개인적 자본 수탈에서 사적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개별적 수준에서 유료화 제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공공재의 사적 점유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기술 발전에 따른 결실이 사회 전체에 분배될 수 있도록 구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의 이점은 개인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사서 쓰는 상품이 아니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자유여야 한다. 이는 현대 예술계에서도 저작권을 둘러사고 벌어지는 법적·정치적 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사용자에 대한 기술적 제약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이를 독점하려는 자본에 맞서 공공재로부터 사적 이윤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통제와 제한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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