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이들의 생애는 처음부터 비극을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나 낭만적인 연애와는 거리가 먼, 투쟁 속에서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과의 이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사랑이 실패했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르주아적 사랑이 제도와 결합하고, 결국 이별을 반복하여 사랑의 실패를 초래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물론 사랑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사랑은 오직 서로 간의 깊은 우정 속에서 피어날 뿐이다. 이 지점에서 과거의 인연이란,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성이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벗어나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자각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 체제의 종식을 목도하는 때일 것이다. 계급적 위선으로 포장된 ‘가능한 사랑’은 노동자를 시혜적으로 바라보지만, 모순적이게도 진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인간을 체제에 안주하게 한다. 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증폭시켜 개인의 사사로운 시각에 머물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랑과 ‘이별’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과거의 시각과 폐단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으며, 새로운 시각의 자리에는 짙은 부르주아적 독백만이 남을 뿐이다.

 

예전에 한 호텔에서 값비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곳은 무제한으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지만, 막대한 낭비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집밥보다 무의미한 일이었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유지되어 온 가정과 가족의 존재에 반하여, 페미니스트들은 고독을 장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마주하는 ‘가능한 사랑’에 안주한 나머지 ‘불가능한 사랑’을 생각하기를 꺼렸던 태도는, 결국 그들에게 독약과도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 빈약한 죽음을 담보로 소비된 사랑을 장려하는 시대에, ‘불가능한 사랑’은 영화 매체조차 담아낼 수 없는 현실의 투쟁 속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수많은 이들을 남몰래 만나며 타인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을 채울 수 없음을 안다. 온갖 사적인 비밀로 도배된 불가능한 사랑의 끝에는 오직 고독한 인간만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가능한 사랑’이란 계급적 차이나 의식적 수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당신의 것을 내가 나눈다”는 실천 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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