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의무 교육과 대학교

 

여러 일각에서는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많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해당하는 초중고를 꼭 나와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대학을 나오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는 전제가 늘 붙는다. 검정 고시를 제외한 오래된 편견,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남아 있는 시험들도, 매우 낡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성적에서 멀리 벗어났거나, 진로를 찾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는 방황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할 줄 몰라서, 태도가 불순하다는 단 하나로, 교육은 훈육으로 제어해왔다. 그리고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교육을 배웠으므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로 교육 운동은 까막눈을 고치는 운동으로만, 고작 계몽으로만 늘 끝나고는 만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본가들은 선생을 겸해서 학생들에게 자본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르치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발언들도 자주 가시화됐다. 교육 제도란 늘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소수 선생들만 늘 발언을 했고, 또 요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 차기 교수로 임용되고자, 연구 경쟁, 연구 비리, 성폭행 등 학교는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었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교수들은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배움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러한 교재들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제도로부터 낡은 수업들과 취업에 대한 상담과 의사를 묻고자, 단지 '형식적인' 수업이었으므로, 아무리 토론이라는 '선진적인' 수업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대학교를 4년제 도서관으로 나오고, 졸업을 위한 이수 과정으로도, 과도한 외국어, 쓸모 없는 논문들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는, 체제로부터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한데 모아, '융합'해서 뒤섞는다.

 

국가는 의무 교육을 행하지만, 이면에는 자본가들로부터 답습한 착취라는 차별을 배우고, 계급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안전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울타리만 존재한다고 보거나, 아무도 혁명에 대한 실천을 말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무용하다고만 말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바로 자본주의 아래로부터 수행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보람이나 하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로부터 생존만이 남은 취직이라는 '의무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형식적인' 시험 대상으로만 다룬다.

 

군대

 

군부심이란,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리고 심화된 계급으로 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은폐된다. 사실도, 진실도, 진리마저도, 전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군생활을 복무했다는 이유라는 건, 단지 애국심만을 위해 국가로부터 봉사한다는 낡은 '봉건적인' 계급이란 말도, 군대에서는 여러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총과 칼로, 제국주의로부터 국가에 종사한다. 여러 경찰들도 학살과 시위를 진압하고자 입막음하고, 시위자를 향해서는 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자본가들은 말한다. 군대가 있어 튼튼하다고. 그러나 제국 간 전쟁에서도 죽으면 남의 새끼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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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부르주아라는 대자본가 아버지, 프티부르주아라는 소시민 어머니

 

자본주의 논리이므로. 거꾸로도 같다. 자산을 가지고 있는 소시민들은, 부르주아지를 지지할 수 있다. 대체로는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 장기적인 경제 전망을 고려해서 판단한다. 훗날 법적으로는 상속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자본가들은 '로펌'을 가졌고, 전문 변호인단들로 구성한다. 큰 이혼이나 파혼이 아닌 이상으로는, 법적인 다툼들이라는 여러 소문이라는 '스캔들', 작은 소문이라는, '가쉽'거리를 짧게 다루는 건 바로 언론들이다. 여기서 주류나, 비주류 언론이라는 매체로는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언론들은 바로 상당한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고 또, 내부 경쟁이라는 심화된 양상으로도 수익을 창출하고자, 광고를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존 리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인물이 다름 아닌,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러시아 혁명은, 외부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에게도,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었고, 러시아에서 전 인민들은 모두,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바로 현장 보도였기 때문이다. 레닌도 존 리드를 알았고, 미국인이었음에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지만, 단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 여러 국가들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을 취재했고, 또한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지만, 결 다른 언론인도 있다. 바로 에드거 스노우다. 그는 마오를 취재했고,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중국의 붉은 별>은 홍위병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거나, 스탈린주의라는 지도 아래에서 마오주의를 지지하는 흔적들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해당 저서는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도 같이 보인다. 존 리드, 에드거 스노우는 모두 미국인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존 리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도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갔지만, 미국인들과 자주 서신이나 연락을 교환했고, 스탈린 첩자에게 암살 당하기 전까지도, 미국에서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단지 내전이라는 양상이 아니라,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뿌리를 여러 인종들로부터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역사로도 다룰 줄 알았다. 트로츠키 이론들에 대한 비판들은 뒤로 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는 앞서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이전에도 미국은 바로 혁명 국가로 일어날 수 있는 큰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곧 자본가들이 몰려든 제국주의를 완성한 국가라는 걸 증명했다.

 

한국은 미국과 많은 관계를 맺어왔고, 또 서구식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국 뿌리를 잃고자 하지 않았다. 뼈 아픈 분단이라는 역사를 가진, 스탈린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사상 대립으로부터도, 미국은 자본가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탄압도 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들을 제거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드넓은 대륙으로 걸친 유럽인들을 모방한 국가이기도 했다. 인종 우월주의가 만들어진 국가들도 다름 아닌 '건강한' 서구인들로부터 왕성한 활동지이자, 활력소였기 때문에, 링컨의 노예들은 아직도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민들은 때로는 계층으로는 중간층, 계급으로는 중간 계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배부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과 유산을 남기고자 하듯이, 소시민들은 배부른 자본가들로부터, 세월이 가기 전에도, 남길 재산과 유산을 먼저 걱정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모른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채로 전쟁을 지지한다. 부모는 그들 모두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다음에도 커서, 똑같은 사람으로 말할 것이냐고. 그러나 이윽고 자녀들은 한때는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부모에게 배운다. 도대체 똑같이 크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서, 몸만 자랐느냐고.

 

신성 가족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다같이 말했던 신성 가족에서 말하고자 한 본모습이란 바로 그들을 그려낸다. 그래서 엥겔스와 구상을 두고는 다투기도 했다. 덕분에 신성 가족은 자본가에서 지배가로 부상하기까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쓴 저작이다. <신성 가족>은 때로 현대로는 '재벌'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고자, 산업화된 구조로부터 자본주의가 매우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말 그래도 이윤과 축적으로부터 보여진 그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다루는 큰 법과 소송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류된 큰 인물들과 조연들을 무대로 이끌고, 또 이루기 때문이다.

 

매우 '화목한' 미국식 안방 극장인 셈이다. 그리고 노동 가족들의 잔인한 희생으로 곁들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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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체제주의

 

미리 정의 내리자면, 체제주의로부터 드러난 일부 '형식적인'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더욱 나눠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젠더라는 여러 성별 관계는 따로 기각한다. 중요하지만, 단지 지배법을 정의하는 '울타리 문제'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로 진단할 때는 우선 그러한 전체주의로 진단한 사람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집단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 하나 이유만으로, 전체 집단을 두고는 전체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제로부터 성격을 파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지적들은 개인적인 도덕관이나 윤리관으로만 오류나 편견을 빠진 채로 설교로만 다루기에도 매우 쉽다는 점이다.

 

지배주의

 

가끔 지배주의를 빼버리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그저 원시 사회로만 받아들인다면, 역시나 난교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원시 사회에서 난교라는 행위란 동물들의 집단 무리로부터 파생해서, 강간으로 성립해왔다. 사적 소유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도 없는 자연계란 더욱 문란하게 보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느 집단이든 그러한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두고 정당화하려는 일부 머릿 속으로 든 공상적인 경향들을 '실현하고자' 속출한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거나, 맞지 않다면 지적해야만 옳음에도. 그러나 지배가들은 그러한 범죄를 실제로도 행하도록 오히려 언행과 행실로도 억누를 수 있고, 자본으로 감출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이다. 여러 무리들로부터 짝 지어진 사회일수록, 더욱 자본화했거나, 유통 관계로 들어간 집단적인 문화들은 결정적으로는, 계급이라는 지배 구도 속으로 갇혀 성을 다루게 된다. 비슷하게는, 이를테면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무리로도, 그토록 성범죄를 금기시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더욱 수동적으로 성폭력을 강요하는 모순을 보이는 경우들도 많다. 바로 은폐하고 싶어라 하는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지적과는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부정한 그러한 지배가들도 숨기거나 또 행할 수 있다는 점을 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파렴치하거나, 불순한 태도로부터도, 자신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정작 갇혀진 환경 속에서 더욱 개방된 상태라면, 범죄마저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교회로부터 억압했던 성문화들도 부르주아지들이라는 이름으로 개방해서, 쉽게 자본주의라는 착취로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들은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여러 차별들에 대한 재생산에 기여하는 구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권위주의

 

아직도 있지도 않은, 아니 있을 수 없는 권위를 드러내고자, 또는 자신들의 나약함을 감추고자, 성적인 접촉으로부터 은밀하게 관계를 맺는 경우들도 참 많다. 이를테면 많은 여성들은 일터에서 일어난 피해 사례를 호소함에도, 대책으로는 정작, 연락소가 없거나, 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는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해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지만.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있지도 않는 자신의 지배권을 만들어서 드러내고는, 상대를 그러한 목적이자, 수단으로 사용해버리기가 참 쉽다. 자칫 전문적인 지식으로는, 통계를 다룰 때도, 여성에 대한 성범죄 피해가 많다고 해서, 증거로부터 미리 예방하고자 정작 치안에서 안전하지 못하거나, 앞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신고로만 보기도 쉽고,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심심해서 일어난 범죄에 대해서는 더욱 용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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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두 국가론이 강조되는 현 시점에서, 무산계급 통일관을 내세우고자 한다. 오로지 혁명을 모색하고, 몰두 할 때만이 비로소 쓰여질 수 있겠다. 빌린 저서 가운데로는, 김수행, 박승호,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 사상운동>을 읽고 있다. 윤소영,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도 저자 발언 및 논란도 있었지만, 아마 다 정리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 사상운동>은 1980년대를 중심으로, 국내 마르크스주의 전망에 대한 사상적인 기조만 다뤘다. 긴 분량에 걸맞게, 어느 정도, 개요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경제학마저 다뤄야 하기 때문에, <현대 마르크스 경제학 쟁점들>, <마르크스와 한국 경제>도 정리해서 읽고는 싶다.

일부 대학가에서도 마르크스주의 토론회들이 열린다. 정작 너무나 벗어난 주제들을 보자면, 일반인들은 참석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정리하지도 못하고, 심화하지도 못한, 학문적 유행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더욱 복잡한 논의들이다.

 

주로 스탈린주의(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 사상에 대한 평가는 주를 이루거나, 역사적이고, 비교 문헌들로 구성했다. 아직은 수입에 의존된 마르크스주의를 기반하거나, 바탕으로 서술했다는 흠이 있다. 또한, 북한과 주체 사상에 대한 이전, 근거 자료 부족도 보인다. 보다 심화된 사상적 서술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대체로는 중복된 내용들도 상당 수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 국내 마르크스주의와 경제학들을 정리한, 저작들은 드물지만, 실천에 기반한 역사적인 의의를 되짚어 볼 기회였다. 그러나, 국내 여러 운동가들에 대한 소개보다, 주로 사상에만 치우친 탓에, 통계나, 분석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은, 산별적이거나, 분산됐다.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카치, 코르쉬,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과 영향력에 비견할 때도, 짙은 수정주의 경향과 경제 결정론, 자연 변증법에 대한 엥겔스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인터내셔널(국제노동협회)에 대한 혁명에 대한 성과들과 뜻을 되새겨보지는 않았고, 그대로 혁명에 대한 패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초기화를 반동화라고 부르고자 한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와도 깊은 이론적 관계를 맺었고, 다름 아닌 상부적 토대와도 지배적으로 교류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단지 소수 견해가 아니라, 통일관에 대한 일부로는 대중들의 선택을 고려하자는 주장들도 있다. 그러나, 꼭 자유 진영에서만 통일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역대 정부들은, 평화적인 통일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북진 통일을 내세워서, 자주적인 통일에 기여하자는 생각들도 있어왔기 때문이다. 바로, 북한과의 전쟁으로부터 무력으로 통일을 내세운다. 그러나 대체로 무력을 내세우거나, 도발하는 쪽은 늘 남한 쪽이었다. 단지 대중들의 선택을 고려하기에는, 서동독이 분단됐을 때를 생각해봐도 장벽이 무너지고, 아무리 서로의 진영에 대한 우세를 강조하고, 계급적 타협과 통일에 대한 염원들을 지우는게, 곧바로 현실적이라 말한다. 노동계급들은 비참하고, 비루한 삶을 견딘다. 겉으로는 아무리 기적 같이 보여도, 부정된 현실에는 직면하고 도전한 현실도 있기 때문이다. 자국의 편의를 내세우고, 자국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대중만을 위한 그러한 통일이라면 죽는다. 지배자들과 (소)자본가만을 위한 무리 섞인 대중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과 실천을 방치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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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3. 03. 


프롤레타리아라는 실업자로 말하자면, 요즘에는 컴퓨터에 대해 알아가고 있다. 최첨단 시대에 컴퓨터도 과거의 유산은 아닐런지. 청년 시절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워왔다면, 이제는 무언가를 알아가는 단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명 같은 주제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은 필자와 똑같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수확의 철이 다가오듯이, 인생에서도 중요한 시기를 보내오는 것 같다. 대체로 사람들은 흘러가듯이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자주 어리석다고 느낀다. 그것은 수 많은 수정을 덧대는 방식으로 작업한 결과물이 결국에는 정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인간으로는 맨 처음부터 잘못된 값을 입력했을 뿐이다. 기계적 유물론의 오류는 여기에 있다. 대부분은 대상에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대충 넘어간다. 

 

컴퓨터는 알아갈수록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이전에 빌 게이츠와 제프 베이소스와 같은 프로그래머들이 접근했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그리고 자본주의 색채가 묻어나지 않은 컴퓨터에 대한 다른 접근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수 많은 아키텍처, 디자이너, 개발자, 철학자들이 동원되더라도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공산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복무하고 있는 나약한 사람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통상의 출판물이 아니다. 

 

예전에 철학자들은 <매트릭스>를 자주 인용하곤 했다. <매트릭스>는 바로 이진법으로 된 기계어를 매우 잘 표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을 이념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접근한 사람들도, 모두 디자이너와 개발자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기계어를 가족으로만 다룰 수는 없듯이, 식물이라는 생명으로 다루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자연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듯이, 노이만, 괴델, 앨런 튜링이 천재가 아니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옳다고 배워왔을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도 지적했지만 컴퓨터의 언어란 갈수록 공산주의를 닮아가고 있다. 관념이란 인식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듯이, 컴퓨터라는 언어는 이진법으로 된 숫자 언어일 뿐이라는 점을 알아간다면, 세상에는 기계어 외에도 수 많은 언어가 있어 왔음을 알 뿐이다. 우리는 변증법으로 내용을 표현한다. 바로 유물론이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계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는 없다. 기계는 인간을 지배하고자 고안된 동작 매체가 아니라면 그것이 인간이 저지른 수 많은 오류였음을 알게 된다.

 

컴퓨터에서 코드(암호문)로는 C언어와 자바도 있다. 기계어를 고안하는 사람들은 늘 그것을 이중적으로 분리하거나, 구분해서만 사고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고리즘이란 제어된 반복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기계어가 고급이든, 저급이든, 컴퓨터 구조를 다루는 하드웨어든, 컴퓨터 언어를 다루는 소프트웨어든, 컴퓨터는 결국 인공 언어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다 현대적인 외래어를 뒤섞는다. 쉽게 말해서 융합으로 사람을 죽이는 기괴한 혼종으로 만들어놨다. 그러나 기계어는 동시에 매우 수학적으로 계산된 언어다. 건축가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에서도 건축(아키텍처)과 설계(디자인)는 존재한다. 


디자인과 스타일(개성)이 다르듯이. 어떤 규칙(패턴)으로 프로그램을 탑재하는가에 따라서도, 컴퓨터는 누군가에게 소유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파장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컴퓨터는 금융 체계를 만들었고, 자본주의에 더욱 복무하고 있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보안과 해킹들도 모두 누군가를 위해 고안된 디자인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그래서 디자이너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액자식으로 프레임 속 프레임처럼 틀 속에다 죄다 주사바늘처럼 모두 주입해서 집어넣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물론 그것이 오류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작 틀(프레임), 쪽(섹션)으로 다룰 줄 알고, 설계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드물게 된 까닭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수 많은 창조론은 많다. 실제로 그것은 수 많은 개발이라는 땀과 노동 시간이 들어간 산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늘 강조하지만, 인공 지능 우려 좋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 마크 저크버그, 앨런 머스크, 샘 앨트먼이 그토록 우려해서 놓친 것은 아무리 인공 지능으로 고안된 세련된 설계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본주의가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예상할 수도 있다. 그들이 가속화한 결과지만 우리는 그것이 더욱 빨라졌음을 실감할 뿐이다. 더 이상 '좋아요'를 말하는 정치적인 민주주의가 예술이 아니라, 투쟁하는 공산주의가 예술이기를.

 

예를 들어, 컴퓨터를 놀이로 생각해보는 사람들을 보면 쉽다. 무언가를 추상적으로 대상화하기는 즐겁기도 하지만, 그러한 관념적 추상화 작업은 폭력적이다. 오히려 자유라는 개념조차 교양과 유흥으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지금도 전쟁을 단순히 오락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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