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금융 자본과 금융 과두제
힐퍼딩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산업 자본 가운데 그것을 사용하는 산업가의 것이 아닌 부분이 끊임없이 증대하고 있다. 산업가는 이 자본의 소유자를 대표하는 은행을 거쳐서만 이 자본을 사용할 수 있다. 한편 은행은 자기가 가진 자본의 점점 더 큰 부분을 산업에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며, 이렇게 하여 성격상 점점 더 산업 자본가가 되어 간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는 은행 자본, 즉 화폐 형태의 자본을 금융 자본이라고 부른다.” 금융 자본이란 “은행에 맡겨져 있으면서 산업가가 사용하는 자본”이다.
이 정의는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지적하지 않기 때문에 불완전한 정의다. 그것은 바로 생산과 자본의 집중이 독점으로 나아가고 있거나, 이미 독점에 도달했을 정도로 현저하게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힐퍼딩의 저술은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적 독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 정의를 내린 장의 앞 두 장은 특히 더 그러하다.
생산의 집중, 그로부터 성장한 독점 조직, 은행과 산업의 결합 또는 유착, 그것은 금융 자본의 형성사인 동시에 금융 자본이란 개념의 내용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자본주의적 독점 조직의 ‘경영’이 상품 생산과 사적 소유라는 일반적인 조건에서 어떻게 필연적으로 금융 과두제의 지배로 이어지는가를 기술하는 대목으로 넘어가야 한다. 유념해야 할 점은 리서, 슐체-게베르니츠, 리프만 등과 같은 독일(아니, 단지 독일에서만이 아닌) 부르주아 학문의 대표자들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와 금융 자본의 응호자라는 점이다. 이들은 과두제가 형성되는 ‘역학’과 수법, 그것의 ‘정당하거나 부당한’ 소득의 규모, 과두제와 의회의 유착 관계 등을 파헤치기는커녕 그것을 윤색하고 미화한다. 이들은 잘난 체하는 두루뭉술한 문구로, 은행 이사의 ‘책임감’에 호소하고 프로이센 관리의 ‘의무의식’을 치켜세우는 것을 수단으로, ‘감독’과 ‘규제’에 관한 전혀 중요하지 않은 법안을 구석구석 진지하게 분석하거나, 예를 들면 리프만 교수가 도달한 다음과 같은 ‘과학적’ 정의처럼 하찮은 이론적 유희를 앞세워 그 ‘골치 아픈 문제’를 회피한다. “상업이란 재화를 모으고, 보관해서, 그것을 사람이 사용하도록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생업 활동이다.” (강조는 그 교수의 저서 그대로) 그렇다면 상업은 교환을 아직 몰랐던 원시인에게도 존재했고, 사회주의 사회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금융 과두제의 가공할 지배라는 사실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즉 미국, 프랑스, 독일에서도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서 있으면서도 금융 과두제를 대체로 올바르게 서술하고(물론 소시민적인 관점이긴 하지만) 그것을 비판하고 있는 문헌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앞에서 이미 어느 정도 서술한 ‘지주 제도’다. 이 제도에 누구보다도 빨리 눈을 뜬 독일의 경제학자 하이만은 사태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영자는 본사, 말 그대로 ‘모회사’를 통제하고, 그 회사는 다시 그것에 의존하는 회사(‘자회사’)를 지배하며, 자회사는 다른 종속 회사(‘손자 회사’)를 지배한다. 이렇게 해서 그다지 크지 않은 자본을 갖고서도 거대한 생산 부문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의 50%를 가지고 주식회사를 언제나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면, 경영자는 100만 마르크의 자본만 갖고도 ‘손자 회사’에서 800만 마르크의 자본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러한 ‘연쇄 관계’가 더욱 확대된다면, 100만 마르크로 1,600만 마르크, 3,200만 마르크 등을 통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주식의 40%만 소유하면 충분히 주식회사의 사업을 운영할 수 있다. 흩어져 있는 소주주의 상당수는 실제로 주주 총회에 참가하는 일을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식 소유의 ‘민주화’를 두고 부르주아적인 궤변가와 기회주의적인 ‘얼치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의 민주화’, 소규모 생산의 역할과 중요성의 증대 등을 기대하고(또는 기대하는 척하고) 있지만, 이 주식 소유의 ‘민주화’는 사실 금융 과두제의 위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덧붙이자면, 더 선진적이거나 더 오래되어 ‘연륜이 풍부한’ 여러 자본주의 나라에서 더 작은 액면의 주식을 법률로 허용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까닭이다. 독일에서는 액면이 천 마르크 이하인 주식을 발행하는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 금융계의 거두는 법적으로 1파운드(20 마르크, 약 10루블)짜리 주식도 발행할 수 있는 영국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독일의 거대 산업가로 ‘금융 재벌’ 중 한 명인 지멘스(Siemens)는 1900년 6월 7일 제국 의회에서 “1파운드 주식은 영국 제국주의의 기초”라고 말했다. 이 사업가가,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지면서 제국주의란 특정 민족의 사악한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어느 무례한 저술가보다, 제국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깊이 있고 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주 제도’는 독점가들의 권력을 막대하게 증대시키는 데 복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처벌받을 위험 없이 교묘하고 더러운 방법으로 대중을 갈취할 수 있게 한다. 형식적으로 ‘모회사’의 경영자는 ‘독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자회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지만, 자회사를 이용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잡지 《디 방크》 1914년 5월호에 실린 사례 한 가지를 보자.
“카셀에 있는 스프링용 강철 제조 주식회사는 수년 전에는 독일에서 가장 수익이 높은 기업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부실한 경영으로 인해 배당율이 15%에서 0으로 곤두박질했다. 이 회사의 경영진이 주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회사’ 중 하나인, 명목상 자본금이 수십만 마르크밖에 되지 않는 하시아 유한 회사에 600만 마르크를 대부해 주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모회사’의 주식 자본의 거의 세 배 액수인 이 대부는 모회사의 대차 대조표에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은폐가 법적으로는 전적으로 적법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비밀은 만 2년이 되도록 밝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상법의 어떤 규정에도 저촉되지 않았다. 책임자로서 이 허위 대차 대조표에 서명한 감독 이사회 회장은 당시 카셀 상공 회의소의 회장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주주는 한참 후, 그 대부가 실패[이 글을 쓴 사람은 실패라는 단어에 인용 부호를 달았어야 마땅하다]했다는 것이 확실해져서야 그 사실을 알았고, 사정을 미리 알았던 사람이 벌써부터 스프링용 강철 제조 주식회사의 주식을 팔아 치우고 있었기 때문에 주식 가격은 거의 100%까지 떨어져 있었다.”
“주식회사에서는 매우 흔한 대차 대조표의 눈속임 곡예의 전형적인 실례는 주식회사의 이사회가 개인 기업가보다 훨씬 쉽게 위험한 일을 착수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현대의 대차 대조표 작성 기술은 이사회가 그 위험을 일반 주주에게 은폐할 여지를 제공할 뿐 아니라, 시도가 실패한 경우에는 주요 당사자가 적당한 시기에 그 주식을 매각하여 피해에서 벗어날 길도 제공한다. 반면 개인 기업가는 자신이 하는 일 전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많은 주식회사의 대차 대조표는 위에 쓰인 글자를 먼저 지워야만 그 아래에 있는 글의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중세 시대의 복기지(palimpsest)와 비슷하다.”(복기지란 먼저 쓴 글씨를 덮어 칠해 지우고 그 위에 다른 글씨를 쓴 양피지다.)
“대차 대조표의 진짜 의미를 볼 수 없게 하는 수단으로 가장 간단해서 가장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 ‘자회사’를 설립하거나 합병하여 단일한 사업을 여러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이 제도의 이점은(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갖가지 목적에 있어서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이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 대회사는 오늘날 극히 예외적일 정도다.”
글쓴이는 가장 광범위하게 이 제도를 이용하고 있는 거대 독점 회사의 예로 저 유명한 알게마이네 엘렉트리치테츠 게젤샤프트(이 회사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것이다)를 들고 있다. 1912년에 이 회사는 175~200개 회사에 출자하여, 당연히 이들을 지배하면서 전체적으로 약 15억 마르크의 자본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의를 지닌, 즉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미화하려는 대학 교수와 관리가 대중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려 하는 규제 법규, 대차 대조표 공개, 일정 양식에 따른 대차 대조표 작성, 감시 기구 설립 등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사적 소유는 불가침의 것이며, 누군가가 주식을 사고 팔고 교환하고 담보로 잡는 등의 일은 누구라 해도 금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은행에서 ‘지주 제도’가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E. 아가트(Agahd)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중국 은행의 직원으로 15년 동안 근무한 사람으로서, 1914년 5월에 『대은행과 세계 시장 (Großbanken und Weltmarkt)』이라는 별로 적합하지 않은 제목이 붙은 책을 출간했다. 저자는 러시아의 대은행을 두 개 주요 부류로 분류한다. 즉 (a) ‘지주 제도’하에서 활동하고 있는 은행과, (b) ‘독립(이때의 ‘독립’은 외국 은행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뜻으로 자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해 있는’ 은행으로 나누고 있다. 저자는 ‘출자’와 지배에 참여하고 있는 외국 대은행의 국적에 따라, 첫 번째 부류를 세 개 하위 범주, 즉 (1) 독일의 출자, (2) 영국의 출자, (3) 프랑스의 출자로 나누고 있다. 또 저자는 은행의 자본을 (상업과 공업에) ‘생산적’으로 투자된 것과(증권 업무와 금융 업무에) ‘투기적’으로 투자된 것으로 구분한다. 그는 타고난 소부르주아적·개량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유지한 채로도 투기적 투자에서 생산적 투자를 분리하여 투기적 투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가 제시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도표 참조>
이 수치에 따르면, 이 대은행의 ‘운전’ 자본을 구성하는 약 40억 루블 중 4분의 3 이상, 즉 30억 루블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외국 은행, 주로 파리의 은행(유명한 은행 트리오, 즉 파리 은행 연합, 파리-네덜란드 은행, 소시에테제네랄)과 베를린의 은행(특히 도이체방크와 베를린할인은행)의 사실상의 ‘자회사’에 불과한 은행이다. 러시아의 양대 은행인 러시아 은행(러시아 외국 무역 은행)과 국제 은행(페테르부르크 국제 상업 은행)은 1906년과 1912년 사이에 자본금을 4,400만 루블에서 9,800만 루블로, 적립금을 1,500만 루블에서 3,900만 루블로 증가시켰는데, 그 “4분의 3이 독일 자본이다.” 앞의 은행은 베를린의 도이체방크 콘체른에 속해 있고, 후자는 베를린할인은행 콘체른에 속해 있다. 순진한 아가트는 베를린의 은행이 주식의 대부분을 갖고 있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주주가 무력하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 자본을 수출한 나라가 단물을 빨아먹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베를린의 도이체방크는 시베리아 상업 은행의 주식을 베를린으로 가져가서 1년간 금고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가, 그 뒤 100대 193의 비율, 액면가의 거의 2배 가까운 상장가로 팔아 약 600만 루블의 이득을 ‘벌어들였다.’ 이러한 이득을 힐퍼딩은 “창업자 이득(promoter's profits)”이라고 불렀다.
이 저자는 페테르부르크 대은행의 전체 ‘자금력’을 80억 루블이 넘는 82억 3,500만 루블(거의 82.5억 루블)로 산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그는 외국 은행의 ‘출자’, 더 정확히 말하면 지배를 프랑스 은행 55%, 영국 은행 10%, 독일 은행 35%로 나누고 있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총액 82억 3,500만 루블 중 36억 8,700만 루블, 즉 40% 이상이 신디케이트, 즉 프로두골과 프로디메트 및 석유·야금·시멘트 산업 신디케이트의 수중에 있다. 자본주의적 독점 조직의 형성으로 인한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의 유착은 러시아에서도 이렇게 막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사실상 독점을 이루고 있는 금융 자본은 창업, 유가 증권 발행, 국채 등으로 갈수록 불어나고 있는 막대한 이윤을 획득하면서, 금융 과두제의 지배를 강화하고, 독점가의 배를 채울 공물을 사회 전체로부터 걷어 들인다. 힐퍼딩은 여기서, 미국 트러스트의 ‘경영’ 방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 가운데 하나를 제시한다. 1887년에 헨리 하브마이어는 15개의 작은 회사를 결합하여 자본 총액이 650만 달러에 이르는 설탕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그런데 이 트러스트의 자본은 미국식 표현으로 ‘물을 먹여’ 5천만 달러로 부풀려져 공표되었다. 이 ‘과대 자본화’는 유나이티드스테이츠 철강이 장래의 독점 이윤을 계산에 넣어 미리 최대한의 철광산을 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장래의 독점 이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설탕 트러스트는 독점 가격을 설정해서, 일곱 배나 ‘물을 먹인’ 자본에 대해 10%의 배당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트러스트를 설립할 당시 실제로 투입한 자본금의 약 70%를 배당금으로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09년에 이 트러스트의 자본금은 9천만 달러였다. 22년 만에 자본금이 열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금융 과두제’의 지배는(『프랑스의 금융 과두제에 반대한다 (Contre l'oligarchie financière en France)』는 퀴시스(Lysis)가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다. 1908년에 5판이 나왔다.) 아주 조금 다른 형태를 취했다. 거대 은행 네 개가 유가 증권 발행에 있어 상대적 독점이 아니라 ‘절대적 독점’을 누리고 있다. 이는 사실상 ‘대은행의 트러스트’다. 그리고 독점은 증권 발행(을 통해) 독점 이윤을 보장한다. 차관이 발생하면, 차관을 받는 나라가 총액의 90% 이상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보통이고, 10%는 은행 등 중개자의 수중에 떨어진다. 4억 프랑의 러시아-청나라 차관에서 은행이 얻은 이윤은 8%나 되었으며, 8억 프랑의 러시아 공채(1904년)에서는 10%, 6,250만 프랑의 모로코 공채(1904년)에서 18.75%였다. 소규모 고리대 자본에서 발전을 시작한 자본주의는 거대한 고리대 자본으로서 그 발전을 마치는 것이다. 퀴시스는 “프랑스인은 유럽의 고리대금업자”라고 말한다. 경제 생활의 모든 조건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변질 때문에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구, 공업, 상업, 해운업의 정체에도, 이 ‘나라’는 고리대금업으로 부유해질 수 있다. “800만 프랑의 자본을 대표하는 50명이 4개 은행에 예치된 20억 프랑을 통제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주 제도’ 역시 똑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거대 은행의 하나인 소시에테제네란이 ‘자회사’인 이집트 제당 회사의 회사채 6만 4천 장을 발행했다. 발행 가격은 액면가의 150%였다. 다시 말해 은행은 1루블당 50코페이카를 버는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의 배당금은 가공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대중’은 9천만 프랑에서 1억 프랑의 손실을 입었다. 게다가 “소시에테제네랄의 이사 중 한 사람은 제당 회사의 중역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가 “프랑스 공화국은 금융 군주국이다”라든지, “금융 과두제가 완전히 지배하고 있으며, 그것은 신문과 정부도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금융 자본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인 유가 증권 발행에서 생기는 유난히 높은 수익성은 금융 과두제의 발전과 강화에서 특별히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독일의 《디 방크》는 “국내에 외국 채권의 인수와 유통에 필적할 정도로 수익을 가져다주는 사업 분야는 없다”고 밝히고 있다.
“유가 증권 발행 사업만큼 높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은행 업무도 없다.” 《독일 경제 (German Economist)》의 자료에 따르면 산업 기업의 증권 발행에서 얻은 연평균 이윤은 다음과 같다.
1895년 38.6% / 1898년 67.7%
1896년 36.1% / 1899년 66.9%
1897년 66.7% / 1900년 55.2%
“1891년부터 1900년까지 10년 동안 독일에서 산업 증권을 발행해서 얻은 수익만 10억 마르크 이상이다.”
산업의 호황기에는 금융 자본이 유난히 높은 이윤을 얻고, 불황기가 되면 건실하지 못한 작은 기업이 쓰러진다. 대은행은 이렇게 쓰러지는 기업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벌이가 좋은 ‘구조 조정(Sanierungen)’, ‘구조 재편(Reorganisation)’ 작업에 참여한다. 부실 기업을 ‘구조 조정’할 때 “주식 자본은 감가되는데, 더 작아진 자본에 대해 수익이 분배되면서 적정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는 이윤이 전혀 없는 경우라면 새로운 자본이 조달되어 가치가 낮게 평가된 기존 자본과 합쳐져 이제 충분한 이윤을 낳게 된다.” 힐퍼딩은 여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구조 조정이나 구조 재편은 은행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는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궁지에 몰린 회사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도르트문트의 유니온 광업 주식회사는 1872년에 설립되었다. 약 4천만 마르크의 주식 자본이 발행되었고, 첫해 12%의 배당이 들어오자 상장 가격은 170%까지 뛰었다. 금융 자본은 약 2,800만 마르크의 이익을 벌어들이며 실속을 챙겼다. 이 회사의 설립에 주요 역할을 한 것은 독일 최대의 은행인 베를린할인은행이었는데, 그 자본금은 3억 마르크에 이르렀다. 이후 유니온의 배당금은 점차 줄어들어 0으로 떨어졌다. 주주들은 자본을 ‘감자’하는 것에, 즉 자본의 전부를 잃지 않기 위해 일부를 잃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몇 차례의 ‘구조 조정’을 한 결과, 유니온의 장부에서는 30년간 7,300만 마르크가 넘는 돈이 사라졌다. “현재 이 회사 최초의 주주는 주식 액면가의 겨우 5%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은행은 ‘구조 조정’ 때마다 계속 돈을 ‘벌어들였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대도시 근교에 대한 땅 투기도 금융 자본에게는 대단한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다. 은행의 독점은 여기서 토지 소득의 독점과 교통 노선의 독점과 결합된다. 토지 가격의 상승, 땅을 수익성 있게 분양할 수 있는 여지 등은 무엇보다 도심에 접근하는 교통의 편의성에 달려 있는데, 이 교통 노선은 지주 제도 및 이사직의 분배를 거쳐 바로 그 은행과 유착돼 있는 대회사의 관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디 방크》의 기고자이자, 토지 매매와 저당 등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독일의 저술가 L. 에쉬베게가 “수렁”이라고 부른 일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보스바우운트크나우어 같은 건설 회사가 ‘건설하며 거대한’ 도이체방크에서 1억 마르크를 끌어다가 도시 근교의 땅에 무모한 투기를 하다 파산(물론 은행은 이 과정에서 ‘지주’ 제도로, 즉 배후에서 은밀히 움직였다)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1,200만 마르크의 손실만 보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실한 건설사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 없고, ‘정직한’ 베를린 경찰이나 행정 관청으로부터 토지에 관한 자료나 시의회의 건축 허가증 등을 받을 수 없었던 소자산가와 노동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대학 교수나 점잖은 부르주아가 위선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개탄하고 있는 ‘미국식 윤리’는 금융 자본 시대에는 문자 그대로 어느 나라에서나 모든 대도시의 윤리가 되어 버렸다.
1914년 초, 베를린에서 운수업 트러스트, 즉 베를린의 세 운송업체인 고가 철도, 시가 전차, 버스 회사 사이의 ‘이익 공동체’가 형성될 것 같다는 풍문이 들렸다. 《디 방크》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러한 계획이 있는 것은 버스 회사의 주식이 반 이상 다른 두 운수업체에 넘어갔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부터 알려져 있었다. …… 이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신은 운수업을 통합하여 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절약된 금액의 일부는 결국 공공의 이익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성되려 하고 있는 이 운수업 트러스트의 배후에는 몇 개의 은행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운송 수단을 토지 매매의 이익에 종속시킬 수 있기 때문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와 같은 추정이 타당하다는 것을 납득하기 위해서는 이미 고가 철도 회사가 설립될 때부터 그 설립을 장려했던 한 대은행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말해, 이 운수업체의 이익은 토지 매매의 이익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 철도의 동부선은 나중에 철도 건설이 확정됐을 때 이 은행이 그 자신과 몇몇 관련자에게 막대한 이익을 남기며 매각했던 토지를 지나갈 예정이었다.”
일단 독점이 형성되어 수십억의 돈을 움직이게 되면, 그것은 정치 체제나 다른 어떠한 ‘세부적인 것들’과 관계없이, 절대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사회 생활의 모든 면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독일의 경제 문헌은 프랑스의 파나마 스캔들이나 미국의 정치 부패를 비꼬아 언급하면서 프로이센 관리의 청렴함을 맹목적으로 찬미하곤 한다. 하지만 실은 부르주아 문헌조차 독일 은행업에 대해 논할 때면 본연의 은행 업무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 논의를 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관료가 은행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은행을 향한 행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 실정이다.
“내심 베를린 가의 폭신한 의자를 동경하는 정부 관료의 청렴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베를린 가는 베를린에 있는 거리인데, 그곳에 도이체방크가 있다.) 《디 방크》의 발행인 알프레트 란스부르크는 1909년에 『비잔틴주의의 경제적 의의(The Economic Significance of Byzantinism)』라는 논고를 발표했는데, 이 논고는 내친김에 빌헬름 2세의 팔레스타인 여행과 “이 여행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난 바그다드 철도 건설, 즉 우리의 모든 정치적 실책을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포위’에 책임이 있는 저 저주해야 마땅한 ‘독일 기업가 정신의 대사업’”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포위’라는 것은 독일을 고립시키고, 제국주의적인 반독일 동맹의 올가미로 독일을 에워싸려고 한 에드워드 7세의 정책이다). 이미 우리가 언급한 적 있는 같은 잡지의 기고자 에쉬베게는 1911년에 『금권정치와 관료(Plutocracy and Bureaucracy)』라는 논고를 써서, 그 논고의 제목에 걸맞은 사례 가운데 하나로 푈커(Völker)라는 독일 관료의 사건을 폭로했다. 그는 카르텔 위원회의 위원으로 아주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얼마 뒤 최대의 카르텔인 철도 신디케이트에서 높은 급여를 받는 자리를 차지했다. 결코 우연이 아닌 그와 비슷한 일이 몇 차례나 벌어졌기 때문에, 이 부르주아 저술가는 “독일 헌법에 보장된 경제적 자유는 경제 생활의 수많은 분야에서 이미 내용 없는 빈말이 되었다”라거나, 현재와 같은 금권 정치 아래에서는 “가장 광범위한 정치적 자유조차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국민으로 전락하는 것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한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그치겠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에 모든 신문은, 신용 국장이었던 다비도프(Davydov)가 몇 년에 걸쳐 100만 루블 이상의 급여를 받는다는 계약 조건으로 관직을 떠나 대은행에 이직했다고 보도했다. 신용국이란 “국가의 모든 신용 기관의 활동을 감독”하는 임무를 갖고 있으며, 수도와 은행에 8억~10억 루블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관청이다.
자본의 소유가 자본의 생산적 투자와 분리되는 것, 화폐 자본이 산업 자본 또는 생산 자본과 분리되는 것, 화폐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으로만 생활하는 금리 생활자가 기업가나 자본 운용에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사람과 분리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일반적 특성이다. 제국주의 또는 금융 자본의 지배는 이러한 분리가 상당한 정도에 다다른 자본주의의 가장 높은 단계다.
금융 자본이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보다 우세하다는 것은 금리 생활자와 금융 과두제가 지배적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금융상의 ‘힘’을 가진 소수의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어 있는지는 증권 발행, 모든 종류의 유가 증권 발행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고 가늠할 수 있다.
A. 네이마르크(Neymarck)는 《국제통계협회 회보(Bulletin of the International Statistical Institute)》에 전 세계의 증권 발행에 대한 매우 상세하고 완전한 비교 자료를 발표했다. 이 자료는 그 뒤 몇 차례나 경제학 문헌에 부분적으로 인용되었다. 다음 표는 40년간 통계다.
| 10년 주기별 증권발행액 |
연도 발행액
1871~1880년 761
1881~1890년 645
1891~1900년 1,004
1901~1910년 1,978
1870년대에 세계적으로 증권 발행 총액이 높았던 것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그에 이은 독일의 회사 창업 붐으로 인해 이와 관련된 공채 발행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30년 동안에는 증가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뚜렷한 증가세를 나타내기 시작해서 발행액이 거의 두 배로 늘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초는, 앞에서 언급했던 독점 조직(카르텔, 신디케이트, 트러스트)의 성장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금융 자본이 성장했다는 점에서도 전환기라 할 수 있다.
단위: 억 프랑
국가 금액
영국 1,420
미국 1,320
프랑스 1,100
독일 950
러시아 310
오스트리아-헝가리 240
이탈리아 140
일본 120
네덜란드 125
벨기에 75
스페인 75
스위스 62.5
덴마크 37.5
스웨덴, 노르웨이, 루마니아 등 25
합계 6,000
1910년 전 세계 유가 증권 총액을 네이마르크는 대략 8,150억 프랑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는 중복 계산되었을 만한 액수를 어림잡아 빼서, 이를 5,750~6천억 프랑으로 잡았다. 이를 국가별로 나타낸 것이 앞의 표다(총액을 6천억 프랑으로 했을 때).
이 표에서는 각각 1,000억~1,500억 프랑의 유가 증권을 갖고 있는 네 개의 부유한 자본주의 나라가 두드러져 보인다. 이 네 나라 중 두 나라 영국과 프랑스는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나라이자, 나중에 보겠지만 가장 많은 식민지를 가진 나라다. 그리고 다른 둘인 미국과 독일은 발전 속도와 자본주의적 독점이 산업에 확산되는 정도에 있어 가장 앞서 달리고 있는 자본주의 나라다. 이 네 나라는 모두 합쳐 4,790억 프랑, 즉 전 세계 금융 자본의 거의 80%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의 거의 모든 나머지 나라는, 국제적 은행가이자 세계 금융 자본의 네 ‘기둥’인 저 국가들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든 채무국으로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금융 자본에 대한 종속과 유착으로 이루어진 국제적 연결망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자본 수출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를 상세히 고찰하는 것은 특히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