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함부로 나대지 마라.’ 참 좋은 우리 말이다. 쿠데타로부터 내란 모의 뒤로는, 대체로 국민들은 자본 시장과 경제 사정에 따른 국가 원수에 대한 우려는 주로 전쟁에 대한 시행에 있다. 국내에서도 그러한 내란 모의 뿐만 아니라 전쟁법으로부터도 처벌될 수 있음은 물론, 민주주의 요구에 따라서도 헌법에 대한 해석을 이중적으로 바라 본 여당 의원들에게도 모순을 잘 보였고, 권리는 줄어들고 기회를 노리는 일부 과거 야당 의원들도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방으로 압박을 가하는 기존 야당 의원들에서도 그러한 양상들로 나타났다. 늘 혼란을 틈 타 쿠데타로부터 정권을 유지하려는 특성이 아닌 일반적인 속성을 보더라도, 헌법을 위시한 전시 행정 돌입에 찬성할 국민들도 주동자들은 아니던가. 그들에게 국민이란 과도한 애국자들 뿐이었고, 또한 사회·민주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토론 요구 또한 배제한 채로 그리고 빼버린 채로, 국격 뿐만 아니라 태도 역시나 변함 없음을 잘 보여주고는 말았다.

 

1. 퇴장하는 여당 의원들을 보더라도, 그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던 기존 야당 의원들을 보노라면, 개판이 된 정치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한국 정치가 가진 유치하고, 치사한 상대할 경제적 가치마저 없다고 본다. 해임된 국방부 장관은 원점 타격을 결정해서, 북측에다 선제 공격을 유발하려는 무모한 음모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들려오는 시끄러운 확성기를 비롯한 전시 행정 체제에 대한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풍선에 대해서도 맞도발이자, 대응으로 풍선을 날리는 헛수고를 보더라도, 도발 수위를 높이고, 원색적인 공격을 가하고 단지 쿠데타 내란 모의를 결단한 성격을 보더라도, 따라서 전쟁 뿐만 아니라, 쿠데타를 막고자 하는 여야당 의원들에 대한 협조는 필요하다고 본다.

 

2. 쿠데타는 정권 유지라는 부르주아 독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전쟁에 대한 전시 행정 체제 돌입으로부터 국정 마비 뿐만 아니라 복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끌어 놓는 퇴역한 군인들에 대한 언론 협박과 강제된 정치적 결단으로부터 수행된 내전까지 이끌고는 말았다. 그리고 탄핵 국면에서 자진 사퇴와 퇴진이라는 요구 속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도피하고, 침묵하고 숨기는 쿠데타 내란 모의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다음 과제마저 배반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엇도 양보하거나 약속을 이행하지도, 또 보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정치 복수여서가 아니라 무슨 처벌이든 받아야만 하고, 또한 여태까지도 국민들을 속인 밝혀진 몫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본다. 매우 원시적이고, 속물적인 정치적 집단 난교를 벌이고 있다.

 

3. 계엄 지도부를 비롯한 여야당에 대해서도 다음 대선만 치르고자 준비하는 현 시점을 보노라면, 사퇴와 탄핵에 대한 문제는 역시나 안중에도 또한 거론도 없다. 섣부른 판단이 때로는 과오를 부른다. DMZ도 아니고 NLL 군사 분계선까지 넘고자 한 정황에 대해서도 오히려 남한 쪽에서 군사 도발과 긴장을 감행하고 있다는 분위기도 같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 조기 대선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헌법이라는 도덕 질서와 정치법과 세금과 예산 절차까지 빼돌리고는 자의적으로 급하게 아니면 내용도 없이 형식적으로만 진단하거나 결단하고는 자기들끼리만 협의하고, 일제히 똑같이 모의하고야 마는 정당이라는 축도 아닌 이익 집단이자 부르주아 독재로 자명한 사실에 대한 거론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들에게 계급에 대한 의식과 계급 투쟁까지 무마하고는 대의 민주주의로부터 대체하고 바쁜 일터로만 만들어 먼저 모욕하고, 모든 언어까지 파괴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축하는 낡아빠진 연대만 지속할 수도 없다. 우리는 불편한 상태에서도 더욱 침착하고 또 신중하게, 또 할 수 있는 한 직접 민주주의로부터 참가하는 국민이자 또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는 바로 닿을 수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요구한다.

 

부디 현실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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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자본주의 사회 내 무산 계급 혁명

 

우리로는 우리식으로, 사회민주주의 대책들과 방안들에 기초해서, 그리고 수정주의 견해들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차단하더라도, 매우 독립하고, 또 민주적인 토론으로부터 건설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도 지배 구도와는 다른 이론 구축에 대해서도 동지들과 혁명에 대한 여러 논의를 펼쳐볼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 진영에서 제기한 여러 논의를 들어봐도 이론 투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정치 정당에서만 제시한 문제보다 더 많은 임무를 우리 쪽으로는 개시하기도, 더욱 수행하기도 했고, 또한 지면에다 80%를 쓰고 있는 평화 연대 호소로나, 전쟁 반대만을 앞세우는 언론이나 신문들을 보더라도, 정작 내전에 대한 문제와 혁명에 대한 물음을 대부분 제기하지도 못하거나, 또 놓치고는 만다. 그리고 대체로는 단기 정치 현안 및 의석 수 확보 문제로만 나머지 20%를 할애하고 있다! 가당찮지도 않은가!

 

토론과 대책 없는 사회주의 체제 전환. 참 우스운 말이다. 당 조직과 선전을 말하지도 않으면서, 그들로는 똑같이 말로만 떠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타협주의와 기회주의로부터 또 손 잡고는 여러 동지이자 혁명가들을 또한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매우 가소로울 뿐이다. 혁명이란 논리적인 머리로만 사고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유치한 장난감 놀이 따위도 아니다. 과연 그들은 현재까지 혁명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또한 여러 서적들에 대한 노동 교육들에도 헌신하고자 했는가. 노력은 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조직에 대한 원칙, 흐지부지한 당 강령을 제시하지도, 그리고 전개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노동 회의를 개최하지도, 심지어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는 혁명 전개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학자들로부터만 여러 가지로 방법이나 원칙을 전개하거나,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로는 일반적인 투쟁이나 집회 모의로만 머물렀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혁명 조직 수립에 대한 문제나 물음을 놓쳤다. 그리고 일부로는 무산 혁명을 지지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부터,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갇혀 지낸 채로, 목표나 대의를 잃어버리고는 말았고, 운동이라는 양상으로만 머물고는 만다. 그리고 아무도 노동 계급과 심지어는 무산 계급과 연락하지도, 보다 가깝지도 않았다.

 

특히 노동 계급 여러 시위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협상을 위한 단기적인 기획, 활동, 타협을 위한 정책 추진이나 활동가들에 대한 법적 보호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도들은, 아니 역사적으로도 읽어 볼 때도, 혁명가들은 대학 논의나, 학술적인 태도와는 매우 거리를 두기도 했었고, 그러한 시각들에 대한 한계를 보다 명확하게 짚었고, 또 대결해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혁명 논의로는 바로 노동 계급과 무산 계급들과 어울릴 수 있는 혁명 조직과 논의로까지 진전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혁명을 모의하거나,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비합법적인 행동까지 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전투로도 가담할 수 있다.

 

그나마 자본주의 체제가 매우 심각하고, 또 여러 문제들을 생기도록 한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로는,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문제점에서 비로소 배울 줄 아는 사람들로는, 최대한 노동 대중 조직에 대한 연대 조직으로만 호소한다면, 곧바로 기회주의와 운동 전멸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혁명 조직 건설에 있어서도 분열을 지지하는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차단할 필요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생성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생적인 노동 조합에만 기대를 거는 여러 지역 연대와 조직들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방안들을 검토하고, 정책 수립으로만 머물지 말기를 또 강조하고 요구하는 바이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전야에서도, 보이는 단결이라는 힘에서 원천이란 과연 무엇인가. 역사적 실패를 단지 두려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산 계급들에 대한 적들과도 투쟁한다. 그리고 전쟁을 조장하고, 내부를 분열하도록 내세우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하게 대하고자 한다. 1년을 되돌아본다. 그들로는 1년이란 파괴를 위해 허비해서 낭비된 시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1년이란 준비를 위해 오래 기다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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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의무 교육과 대학교

 

여러 일각에서는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많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해당하는 초중고를 꼭 나와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대학을 나오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는 전제가 늘 붙는다. 검정 고시를 제외한 오래된 편견,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남아 있는 시험들도, 매우 낡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성적에서 멀리 벗어났거나, 진로를 찾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는 방황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할 줄 몰라서, 태도가 불순하다는 단 하나로, 교육은 훈육으로 제어해왔다. 그리고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교육을 배웠으므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로 교육 운동은 까막눈을 고치는 운동으로만, 고작 계몽으로만 늘 끝나고는 만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본가들은 선생을 겸해서 학생들에게 자본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르치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발언들도 자주 가시화됐다. 교육 제도란 늘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소수 선생들만 늘 발언을 했고, 또 요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 차기 교수로 임용되고자, 연구 경쟁, 연구 비리, 성폭행 등 학교는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었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교수들은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배움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러한 교재들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제도로부터 낡은 수업들과 취업에 대한 상담과 의사를 묻고자, 단지 '형식적인' 수업이었으므로, 아무리 토론이라는 '선진적인' 수업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대학교를 4년제 도서관으로 나오고, 졸업을 위한 이수 과정으로도, 과도한 외국어, 쓸모 없는 논문들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는, 체제로부터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한데 모아, '융합'해서 뒤섞는다.

 

국가는 의무 교육을 행하지만, 이면에는 자본가들로부터 답습한 착취라는 차별을 배우고, 계급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안전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울타리만 존재한다고 보거나, 아무도 혁명에 대한 실천을 말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무용하다고만 말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바로 자본주의 아래로부터 수행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보람이나 하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로부터 생존만이 남은 취직이라는 '의무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형식적인' 시험 대상으로만 다룬다.

 

군대

 

군부심이란,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리고 심화된 계급으로 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은폐된다. 사실도, 진실도, 진리마저도, 전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군생활을 복무했다는 이유라는 건, 단지 애국심만을 위해 국가로부터 봉사한다는 낡은 '봉건적인' 계급이란 말도, 군대에서는 여러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총과 칼로, 제국주의로부터 국가에 종사한다. 여러 경찰들도 학살과 시위를 진압하고자 입막음하고, 시위자를 향해서는 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자본가들은 말한다. 군대가 있어 튼튼하다고. 그러나 제국 간 전쟁에서도 죽으면 남의 새끼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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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부르주아라는 대자본가 아버지, 프티부르주아라는 소시민 어머니

 

자본주의 논리이므로. 거꾸로도 같다. 자산을 가지고 있는 소시민들은, 부르주아지를 지지할 수 있다. 대체로는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 장기적인 경제 전망을 고려해서 판단한다. 훗날 법적으로는 상속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자본가들은 '로펌'을 가졌고, 전문 변호인단들로 구성한다. 큰 이혼이나 파혼이 아닌 이상으로는, 법적인 다툼들이라는 여러 소문이라는 '스캔들', 작은 소문이라는, '가쉽'거리를 짧게 다루는 건 바로 언론들이다. 여기서 주류나, 비주류 언론이라는 매체로는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언론들은 바로 상당한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고 또, 내부 경쟁이라는 심화된 양상으로도 수익을 창출하고자, 광고를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존 리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인물이 다름 아닌,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러시아 혁명은, 외부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에게도,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었고, 러시아에서 전 인민들은 모두,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바로 현장 보도였기 때문이다. 레닌도 존 리드를 알았고, 미국인이었음에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지만, 단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 여러 국가들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을 취재했고, 또한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지만, 결 다른 언론인도 있다. 바로 에드거 스노우다. 그는 마오를 취재했고,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중국의 붉은 별>은 홍위병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거나, 스탈린주의라는 지도 아래에서 마오주의를 지지하는 흔적들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해당 저서는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도 같이 보인다. 존 리드, 에드거 스노우는 모두 미국인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존 리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도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갔지만, 미국인들과 자주 서신이나 연락을 교환했고, 스탈린 첩자에게 암살 당하기 전까지도, 미국에서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단지 내전이라는 양상이 아니라,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뿌리를 여러 인종들로부터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역사로도 다룰 줄 알았다. 트로츠키 이론들에 대한 비판들은 뒤로 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는 앞서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이전에도 미국은 바로 혁명 국가로 일어날 수 있는 큰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곧 자본가들이 몰려든 제국주의를 완성한 국가라는 걸 증명했다.

 

한국은 미국과 많은 관계를 맺어왔고, 또 서구식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국 뿌리를 잃고자 하지 않았다. 뼈 아픈 분단이라는 역사를 가진, 스탈린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사상 대립으로부터도, 미국은 자본가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탄압도 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들을 제거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드넓은 대륙으로 걸친 유럽인들을 모방한 국가이기도 했다. 인종 우월주의가 만들어진 국가들도 다름 아닌 '건강한' 서구인들로부터 왕성한 활동지이자, 활력소였기 때문에, 링컨의 노예들은 아직도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민들은 때로는 계층으로는 중간층, 계급으로는 중간 계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배부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과 유산을 남기고자 하듯이, 소시민들은 배부른 자본가들로부터, 세월이 가기 전에도, 남길 재산과 유산을 먼저 걱정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모른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채로 전쟁을 지지한다. 부모는 그들 모두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다음에도 커서, 똑같은 사람으로 말할 것이냐고. 그러나 이윽고 자녀들은 한때는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부모에게 배운다. 도대체 똑같이 크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서, 몸만 자랐느냐고.

 

신성 가족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다같이 말했던 신성 가족에서 말하고자 한 본모습이란 바로 그들을 그려낸다. 그래서 엥겔스와 구상을 두고는 다투기도 했다. 덕분에 신성 가족은 자본가에서 지배가로 부상하기까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쓴 저작이다. <신성 가족>은 때로 현대로는 '재벌'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고자, 산업화된 구조로부터 자본주의가 매우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말 그래도 이윤과 축적으로부터 보여진 그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다루는 큰 법과 소송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류된 큰 인물들과 조연들을 무대로 이끌고, 또 이루기 때문이다.

 

매우 '화목한' 미국식 안방 극장인 셈이다. 그리고 노동 가족들의 잔인한 희생으로 곁들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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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체제주의

 

미리 정의 내리자면, 체제주의로부터 드러난 일부 '형식적인'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더욱 나눠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젠더라는 여러 성별 관계는 따로 기각한다. 중요하지만, 단지 지배법을 정의하는 '울타리 문제'로 치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로 진단할 때는 우선 그러한 전체주의로 진단한 사람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모든 집단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단 하나 이유만으로, 전체 집단을 두고는 전체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제로부터 성격을 파악하지 않는 한, 그러한 지적들은 개인적인 도덕관이나 윤리관으로만 오류나 편견을 빠진 채로 설교로만 다루기에도 매우 쉽다는 점이다.

 

지배주의

 

가끔 지배주의를 빼버리기도 한다. 공산주의를 그저 원시 사회로만 받아들인다면, 역시나 난교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리고 원시 사회에서 난교라는 행위란 동물들의 집단 무리로부터 파생해서, 강간으로 성립해왔다. 사적 소유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도 없는 자연계란 더욱 문란하게 보일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어느 집단이든 그러한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두고 정당화하려는 일부 머릿 속으로 든 공상적인 경향들을 '실현하고자' 속출한다.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거나, 맞지 않다면 지적해야만 옳음에도. 그러나 지배가들은 그러한 범죄를 실제로도 행하도록 오히려 언행과 행실로도 억누를 수 있고, 자본으로 감출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점이다. 여러 무리들로부터 짝 지어진 사회일수록, 더욱 자본화했거나, 유통 관계로 들어간 집단적인 문화들은 결정적으로는, 계급이라는 지배 구도 속으로 갇혀 성을 다루게 된다. 비슷하게는, 이를테면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인 무리로도, 그토록 성범죄를 금기시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더욱 수동적으로 성폭력을 강요하는 모순을 보이는 경우들도 많다. 바로 은폐하고 싶어라 하는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지적과는 유일하게 다른 점이다. 그러나 부정한 그러한 지배가들도 숨기거나 또 행할 수 있다는 점을 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파렴치하거나, 불순한 태도로부터도, 자신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정작 갇혀진 환경 속에서 더욱 개방된 상태라면, 범죄마저 무엇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교회로부터 억압했던 성문화들도 부르주아지들이라는 이름으로 개방해서, 쉽게 자본주의라는 착취로 어느 정도 기여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증거들은 바로 그들이 내세우는 여러 차별들에 대한 재생산에 기여하는 구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권위주의

 

아직도 있지도 않은, 아니 있을 수 없는 권위를 드러내고자, 또는 자신들의 나약함을 감추고자, 성적인 접촉으로부터 은밀하게 관계를 맺는 경우들도 참 많다. 이를테면 많은 여성들은 일터에서 일어난 피해 사례를 호소함에도, 대책으로는 정작, 연락소가 없거나, 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고 여기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다는 회의적인 결론에 도달해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지만.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지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도 있지도 않는 자신의 지배권을 만들어서 드러내고는, 상대를 그러한 목적이자, 수단으로 사용해버리기가 참 쉽다. 자칫 전문적인 지식으로는, 통계를 다룰 때도, 여성에 대한 성범죄 피해가 많다고 해서, 증거로부터 미리 예방하고자 정작 치안에서 안전하지 못하거나, 앞서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는 신고로만 보기도 쉽고,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심심해서 일어난 범죄에 대해서는 더욱 용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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