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 자본주의 비판과 노동자의 현실

   

맑스의자본1권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근본 구조와 그 작동 원리를 과학적으로 해명한다. 33장까지는 그의 생전에 완성된 유일한 부분이며엥겔스의 헌신적인 편집이 없었다면 세상에 나오기 어려웠을 만큼 방대한 지식과 심오한 안목을 담아낸다거꾸로 선 헤겔의 변증법을 올바로 세우고자본주의의 경제 법칙을 밝혀낸 이 작업은 실제로 성경 다음으로많이 읽히는 노동자의 책이라는 역사적 지위를 얻었다자본은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의 문제점을 엄밀하게 짚어낸 정치경제학 비판서이다당대의 모순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며이 저작은 자본가의 수중에 있던 생산 수단과 그들이 행하는 착취의 진실을 노동 계급에게 폭로한다.

 

수공업에서 공장제 수공업그리고 기계화로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역사는 현재에도 반복되는 중이다특히 노동층 독자들에게 자본 독서는 이를 파악할 의미를 곱씹는 기회가 된다. 다만마르크스주의와 여러 운동들은 자본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그의 과학적 증명에도오늘날 노동 현장의 생산 수단은 여전히 자본가의 수중에 놓여 있다자본주의와 식민지 발달에 따라 생산 수단과 생산 조건에 대한 자본의 논리는 더욱 교묘하고극악무도하게 진화했다.

 

새로운 사회주의가 반동적 사상을 낳고잘못 전파된 공산주의가 또 다른 통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에도자본은 노동자가 충분히 조직을 이룰 수 있으며 그 성과를 발휘할 날이 온다고 밝힌다노동자의 유산은 다름 아닌 자본가의 수중에 있는 노동 수단과 조건이며노동자 집단은 현재의 수단들을 자신들의 수중으로 되돌릴 수 있다그러나 모든 만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이는 계급 투쟁을 요구하는 중대 문제이다따라서 현실에 가려진 노동자의 투쟁은 여전히 중요하며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소멸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바라는 ‘이상적 낙원을 문제로 여기고자본주의라는 현실을 진단했다정치경제학은 이 현실을 증거로 삼아 자신들의 논리를 강화하고 있다각국의 노동자들이 이 논리를 구분하고,자본을 학습하는 일은 비판적 의미에 있어서도 매우 유익하다.

 

노동자들이 언젠가 자본가의 수중에 있는 공장을 점거하고 자신의 온전한 시간을 쏟게 될 때비로소 우리 사회는 자본의 고질적인 해악자본가의 잉여 가치 창출을 위한 합법적 독재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의 독단적 국부와 법을 문제 삼을 수 있게 된다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모여 새로운 모습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노동자들이 자신을 낙담만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우리의 로도스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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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근대적 식민 이론


정치경제학은 본질적으로 상이한 두 유형의 사적 소유, 곧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기반한 소유와 타인 노동 착취에 기반한 소유를 혼동한다. 후자는 전자의 직접적 대립물일 뿐 아니라, 오직 전자의 무덤 위에서만 성장한다는 사실을 정치경제학은 간과한다. 정치경제학의 발원지인 서부 유럽에서 시초 축적 과정은 대체로 완료되었다.

 

자본주의 체제는 국민 생산 전체를 직접적으로 정복하거나, 또는 그 경제적 관계가 덜 발전한 곳에서는 (낡은 생산 양식에 속하나 여전히 존속하며 몰락 중인) 사회층을 간접적으로나마 통제한다.

 

정치경제학자는 현실이 자신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을수록, 더욱더 열렬하고 그럴싸한 감언이설로 전()자본주의 세계의 법률 및 소유 관념을 이 완성된 자본 세계에 적용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자본주의 체제는 도처에서 독립적 생산자가 제기하는 방해에 직면한다. 이들은 자신이 노동 조건의 소유자이며, 자본가를 살찌우는 대신 스스로 치부한다.

 

이 두 정반대 경제 체제 간 모순은 두 인간 집단 사이의 실제적 투쟁으로 나타난다. 자본가가 본국 권력을 배경으로 삼는 곳에서는, 그는 독립적 생산자의 개인 노동에 기반을 둔 생산 및 취득 방식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려 시도한다.

 

사리사욕에 이끌려 자본에 아부하는 정치경제학자는, 본국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이론적으로 그 정반대와 동일하다고 거짓 선언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그는 두 생산 방식 사이의 대립을 '있는 그대로 실토하고', 소리 높여 선언하게 된다. , 그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 발전, 협업, 분업, 기계의 대규모 사용 등이 노동자를 수탈하여 그들의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결국, 그는 이른바 국부를 증진시키기 위해 국민을 빈곤하게 만드는 인위적 수단을 모색한다. 식민지에서는 그의 변호론적 갑옷은 썩은 불쏘시개처럼 허물어진다.

 

웨이크필드의 위대한 공적은 식민지에서 본국 자본주의적 관계의 진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보호 무역 제도가 본국에서 인위적으로 자본가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웨이크필드의 식민 이론 (영국이 한동안 의회 법률로 시행하려 했던)은 식민지에서 임금 노동자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는 이것을 '조직적 식민'이라 부른다.

 

웨이크필드가 식민지에서 발견한 핵심은, 화폐, 생활 수단, 기계, 기타 생산 수단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필수적인 보완물인 임금 노동자 (곧 자유 의사로 자신을 판매할 수밖에 없는 타인)가 없다면 자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본이란 물건이 아니라 (물건들을 매개로 형성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미스터 필이 총액 50,000파운드의 생활 수단과 생산 수단을 잉글랜드에서 서부 오스트레일리아의 스완 강 지역으로 가져갔다는 사실에 개탄한다. 필은 노동 계급의 남녀 성인과 아동 3,000명을 함께 데려가는 선견지명을 보였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미스터 필에게는 잠자리를 돌보거나 강물을 길어다줄 하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불행한 필은 모든 것을 준비했지만, 잉글랜드의 생산 관계를 스완 강으로 수출하는 일만은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다!

 

웨이크필드의 발견을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예비적 언급이 필요하다.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이 직접 생산자의 소유인 경우, 그것들은 자본이 아니다. 그것들은 노동자의 착취 및 지배 수단으로 봉사하는 조건 하에서만 자본이 된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자의 사고 속에서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의 자본주의적 성격(영혼)은 그것들의 물질적 실체와 너무나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 그는 그것들을 어떤 사정 아래서도 (심지어 자본과 정반대물인 경우에도) 자본이라 부른다. 웨이크필드 또한 그러하다. 더욱이, 그는 생산 수단이 다수의 상호 독립적인 자영 노동자들의 개인 소유로 분할된 상태를 자본의 균등한 분할이라 부른다. 이는 (전적으로 화폐적인 관계에 봉건적 법적 딱지를 붙이곤 하는) 봉건적 법학자와 비슷한 방식이다.

 

웨이크필드는잉글랜드와 미국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자본이 모든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균등하게 분배된다면,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려는 동기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토지 소유에 대한 열망이 임금 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가로막고 있는 아메리카의 새로운 식민지들에서 어느 정도 그러하다.’

 

따라서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축적할 수 있는 동안, 곧 그가 생산 수단의 소유자로 남아 있는 동안은 자본주의적 축적과 생산 양식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이에 필요 불가결한 임금 노동자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옛 유럽에서는 노동자로부터 노동 조건의 수탈, 곧 자본과 임금 노동이 어떻게 생겨났는가.

 

웨이크필드에 따르면, 그것은 매우 독특한 사회 계약의 결과이다.

 

인류는 자본의 축적 (이는 물론 아담의 시대로부터 인류 존재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목적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을 촉진하는 간단한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인류는 스스로를 자본의 소유자와 노동의 소유자로 분할했다. 이 분할은 자유 의사에 의거한 합의와 제휴의 결과였다.’

 

간단히 말해, 대다수 사람들이 '자본 축적'의 영광을 위해 스스로 수탈당했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이러한 광신적인 자기 희생의 본능이 특히 식민지에서 만발할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회 계약을 꿈에서 현실로 옮겨놓을 수 있는 인간과 조건들이 오직 식민지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연 발생적 식민에 대립하는 '조직적 식민'이 왜 필요한가.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메리카 연방의 북부 주들에서는 임금 노동자층이 주민의 1/10이나 되는지 의심스럽다. 잉글랜드에서는 국민의 대부분이 임금 노동자다.’

 

자본의 영광을 위해 노동 인류가 자기를 수탈하는 (스스로 거지가 되는) 본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노예 제도는 웨이크필드에 따르더라도, 식민지 부의 유일한 자연적 토대다. 그의 조직적 식민 이론은 그가 상대해야 할 대상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민이기 때문에 생겨난 응급책에 불과하다.

 

산 도밍고의 최초 스페인 이주민들은 스페인에서 노동자를 한 사람도 데리고 오지 못했다. 노동자가 없이는 (곧 노예 제도가 없이는) 자본은 소멸했거나, 또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손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적은 규모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영국 사람들이 건설한 최후의 식민지 (스완 강 식민지)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데, 거기에서는 종자, 가축, 도구 등 거액의 자본이 그것을 사용할 노동자의 부족 때문에 소멸했으며, 또한 어떤 이주자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를 초과하는 자본을 유지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인민 대중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일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를 이룬다. 이와는 반대로, 자유 식민지의 본질은 대량의 토지가 공공 소유로 남아 있어, 이주자마다 그 일부를 자신의 사적 소유이자 개인적 생산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또한 이는 후속 이주자들이 자신과 동일하게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여기에 식민지 번영의 비밀이 있으며, 동시에 식민지의 암적 고민거리 (곧 자본의 정착에 대한 식민지들의 저항)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토지가 대단히 값싸고, 모든 사람이 자유로우며, 또한 각자가 자기의 희망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한 조각의 토지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서는, 노동은 대단히 비쌀 뿐 아니라(생산물 중에서 노동자가 받는 몫으로 보아), 어떤 대가로도 결합 노동(집단적 노동)을 얻기는 힘들다.’

 

식민지에서는 노동 조건과 그 근원인 토지로부터 노동자가 아직 분리되어 있지 않거나, 분리가 드물거나 제한적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아직 공업과 농업의 분리도 없으며, 농촌 가내 공업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자본을 위한 국내 시장이 어디로부터 생기는가.

 

노예와, 특정 사업을 위해 자본과 노동을 결합하는 노예 사용자를 제외하고는, 미국 주민 중 농업만을 전업으로 하는 계급은 없다.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자유 미국인들은 동시에 다른 많은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필요한 가구와 도구의 일부를 대개 자기 손으로 만든다. 흔히 자기 집을 자기 손으로 지으며,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대단히 먼 시장에까지 가지고 간다. 그들은 방적공인 동시에 직조공이기도 하며, 자기 손으로, 자가 소비용 비누, 양초, 신발, 의복을 만든다. 미국에서는 토지 경작이 흔히 대장장이, 제분업자, 소매 상인의 부업이 되어 있다.’

 

이러한 괴물들 사이에서 자본가의 절욕 분야가 어디에 남아 있겠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큰 장점은, 그것이 임금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끊임없이 재생산할 뿐 아니라, 자본 축적에 비례하여 임금 노동자의 상대적 과잉 인구를 항상 생산한다는 점에 있다. 이로부터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은 적당한 궤도에서 유지되어, 임금 변동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적합한 범위 안에 제한된다. 또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사회적 종속이라는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보장된다. 이러한 종속 관계는 절대적 종속 관계이다.

 

본국의 정치경제학자는 이것을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 관계, 곧 대등하고 독립적인 상품 소유자들 (자본이라는 상품의 소유자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 사이의 관계로 교묘하게 기만한다. 그러나 식민지에서는 이 아름다운 환상이 깨진다. 여기에서는 많은 노동자가 이미 성인으로 이주하여 인구의 절대적 증가는 본국보다 훨씬 빠르지만, 노동 시장은 항상 공급 부족 상태이다.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은 완전히 무너진다. 한편으로, 옛 세계 (식민 모국 등)는 착취와 절욕을 열망하는 자본을 식민지에 끊임없이 투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임금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규칙적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전혀 어찌할 수 없는 장애에 직면한다. 하물며, 자본의 축적에 대비한 과잉 임금 노동자의 생산이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오늘의 임금 노동자도 내일에는 독립적인 농민 또는 수공업자가 된다. 그는 노동 시장에서 사라지지만, 결코 구빈원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자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노동하며, 자본가를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치부하는 독립적 생산자로 임금 노동자가 끊임없이 전환하는 것은, 이번에는 노동 시장의 상황에 매우 해로운 반작용을 미친다. 문제는 임금 노동자의 착취도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낮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임금 노동자는 금욕적인 자본가에 대한 종속 관계 및 그에 대한 종속 감정까지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웨이크필드가 그렇게도 솔직하게, 웅변으로,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모든 폐단이 바로 식민지에 있다. 그는 임금 노동자의 공급이 연속적이지도, 규칙적이지도, 충분하지도 않다고 개탄한다.

 

노동의 공급은 언제나 적을 뿐 아니라 확실하지도 않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분할해야 할 생산물은 비록 크다고 하더라도, 노동자가 너무나 큰 몫을 차지하므로, 곧 자본가로 된다. 보기 드물 만큼 장수하는 경우에조차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의 더욱 많은 부분의 지불을 자본가가 절제하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비록 자본가가 아주 치밀하게 자본과 더불어 자기 자신의 임금 노동자를 유럽으로부터 수입해 온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은 곧 임금 노동자이기를 그만두고, 독립적 농민이 되거나, 또는 노동 시장에서 임금 노동자를 구하려고 자기들의 이전 고용주와 경쟁하게 된다.’

 

얼마나 몸서리칠 일인가! 이 훌륭한 자본가는 바로 자기 자신의 귀중한 화폐로 자기 자신의 경쟁자를 유럽에서 수입해 온 셈이다! 그러니 만사는 다 틀렸다!

 

식민지에서는 임금 노동자의 종속 관계와 종속 감정이 없다고 웨이크필드가 개탄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제자 메리베일은식민과 식민지에 대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이 높기 때문에 식민지들에서는 더 값싸고, 더 공손한 노동에 대한 갈망 (곧 노동자 자신이 자본가에게 조건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조건을 강요할 수 있는 그런 계급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 옛 문명국들에서는, 노동자는 비록 자유롭기는 하지만 자연 법칙에 따라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있는데, 식민지들에서는 이 종속 관계를 인위적 수단으로부터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웨이크필드의 의견으로는 식민지의 이와 같은 폐단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자와 국부가 갈라 흩어지는 것 (분산)이 일으키는 야만화 경향이다.

 

무수한 자영 소유자들 사이로 생산 수단을 분산시키는 것은 자본의 집중을 파괴함과 동시에 결합 노동의 모든 토대를 파괴한다. 여러 해에 걸쳐 고정 자본이 지출되어야 하는 장기적 사업은 모두 수행하기 어렵다. 유럽에서는 자본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국에서는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살아있는 부속물이 되어 있으며, 항상 과잉 상태로 존재하고 자본에 봉사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식민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웨이크필드는 매우 비통한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그는 캐나다와 뉴욕 주의 일부 자본가들과 면담했는데, 거기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이민의 유입이 자주 정체되어 놀랍게도 과잉노동자가 밑바닥에 가라앉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 통속극에 등장하는 한 인물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자본은 장기간 걸려야 완성할 수 있는 사업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곧 우리를 떠나갈 (예컨대 서부로 이동해갈) 노동자들을 데리고 이와 같은 사업에 착수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동하려는 사람들의 노동을 붙잡아 둘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우리는 즐겨 즉석에서, 그것도 높은 가격으로, 그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떠나가리라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우리가 필요할 때 언제나 이주민의 새로운 공급이 확실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고용했을 것이다.’

 

웨이크필드는 결합노동을 사용하는 영국의 자본주의적 농업과 미국의 분산적 농민 경영을 비교한 뒤, 자기도 모르게 안 보여야 할 것을 들춰 보였다. 그는 미국의 인민 대중을 넉넉하고, 독립적이며, 모험적이고, 비교적 교양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 반면,

 

영국 농업 노동자들은 가련하며 거지다. 북아메리카와 일부 새로운 식민지들을 제외하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유 노동의 임금이 노동자의 필요 불가결한 생존 수단을 훨씬 초과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의심할 바 없이, 영국의 경작용 말은 귀중한 재산이므로, 영국의 농업 노동자보다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국부는 원래 그 본질상 인민의 빈곤과 동일한 것이니까.

 

그러면 식민지의 반()자본주의적 암은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 모든 토지를 한꺼번에 공공 소유에서 사적 소유로 전환시킨다면, 그것으로 재앙의 근원은 파괴되겠지만, 이와 함께 식민지 또한 파괴될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일석이조의 묘책이 있다. 정부로 하여금 미개척지에 수요 공급의 법칙과는 상관없는 인위적 가격을 붙이게 해야 한다. 이 가격은 이주민이 토지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벌기 위해서는 비교적 장기간 임금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가격이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임금 노동자에게 매우 높은 가격으로 토지를 판매하여 형성되는 기금 (신성한 수요 공급의 법칙을 짓밟아 버리고 노동자의 임금에서 짜내는 이 화폐 기금)을 사용해 유럽에서 식민지로 빈민들을 끌어들이면서, 자본가를 위해 임금 노동 시장을 포화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에서는, ‘최대한 최선의 세계에서는 만사가 최선의 상태에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조직적 식민의 큰 비밀이다. 웨이크필드는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이 계획에 따르면, ‘노동의 공급은 연속적이고 규칙적일 수밖에 없다. 첫째, 어떤 노동자도 일정한 기간 노동하여 돈을 벌 때까지는 토지를 구입할 수 없으므로, 모든 이주 노동자는 임금을 얻기 위해 결합 노동을 수행한다. 이로부터 그들은 고용주에게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자본을 생산해 줄 것이다. 둘째, 임금 노동을 그만두고 토지 소유자가 되는 노동자는 누구나 토지 구입으로부터 식민지에 새로운 노동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결정하는 토지 가격은 물론 충분히 높은가격이어야 한다. 토지 가격은 노동자가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들이 나타날 때까지 독립적 농민으로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만큼높지 않으면 안 된다. 충분히 높은 토지 가격이란, 노동자가 임금 노동 시장에서 농촌으로 은퇴하는 허가를 받기 위해 자본가에게 지불하는 몸값을 완곡하게 바꿔 말한 데에 불과하다.

 

노동자는 먼저 자본가로 하여금 더 많은 노동자를 착취할 수 있도록 자본을 그에게 생산해 주어야 하며, 다음에는 자기의 비용으로 자기의 대리자를 노동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이 대리자를 정부는 노동자의 부담으로, 자기 이전 주인인 자본가를 위해 바다 건너에서 수송해 오는 것이다.

 

웨이크필드가 특히 식민지에 적용하기 위해 제시한 시초 축적의 이 방법을 영국 정부가 여러 해 동안 실시했다는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이것의 실패가 필(Robert Peel) 은행법의 실패 (1844년의 은행법은 1847, 1857, 1866년의 공황으로 일시 정지되었다)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는 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이민의 흐름이 영국 식민지들로부터 미국에 쏠렸기 때문이다.

 

그 사이 유럽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은 정부 개입의 증가를 수반하면서 웨이크필드의 처방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한편으로, 해마다 미국으로 몰려가는 대규모의 끊임없는 인간 흐름은 미국 동부에 정체적 침전물 (과잉 인구)을 남길 정도였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온 이민 파도는 미국 서부로 가는 이민 파도가 사람들을 서부로 옮기는 것보다 더 빠르게 미국 동부의 노동 시장에 사람들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남북 전쟁 (1861-1865)은 방대한 국채, 무거운 세금, 비열하기 짝이 없는 금융 귀족의 창출, 철도, 광산 등의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투기 회사들에 대한 방대한 공유지 증여 등을 일으켰다.

 

간단히 말해, 그 전쟁은 자본의 매우 급속한 집중을 가져왔다. 따라서 대공화국 미국은 이제 이주 노동자들의 희망의 땅이 아니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임금의 저하와 임금 노동자의 종속이 아직도 유럽의 평균적인 수준에 도달하기에는 멀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파렴치하게 귀족과 자본가들에게 식민지 미개간지를 마구 팔아버린 사실 (웨이크필드까지도 크게 비난하는), 특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 채굴로 인한 외부인의 큰 유입, 그리고 수입된 영국 상품과의 경쟁이 가장 소규모의 수공업자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결합되어, 충분한 상대적 과잉 노동 인구를 낳았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정기선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동 시장이 공급 과잉이라는 악재를 전달하고 있으며, 또 몇몇 지역에서는 매춘이 헤이마켓 (런던 웨스트엔드의 번화가)에서와 같이 성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로 삼는 것은 식민지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오직 구세계의 정치경제학이 신세계에서 발견해 소리 높이 선언한 비밀이다. 곧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축적 방식,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개인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두는 사적 소유의 철폐, 다시 말해, 노동자로부터 노동 조건을 빼앗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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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자본주의적 축적의 역사적 법칙

 

자본의 시초 축적, 곧 그 역사적 발생은 노예나 농노를 임금 노동자로 직접 전환하는 단순한 형태 변화가 아니다. 이는 오직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노동에 토대를 둔 사적 소유의 해체를 의미한다.

 

사회적·집단적 소유의 대립물로의 사적 소유는 노동 수단과 노동의 외부 조건이 개인에게 귀속될 때에만 존재한다. 다만, 이 개인이 노동자인지 아닌지에 따라 사적 소유의 성격은 변화한다. 얼핏 드러나는 이 사적 소유의 다양한 종류는 노동자의 사적 소유와 비노동자의 사적 소유라는 두 극단 사이의 중간 상태를 나타낼 뿐이다.

 

생산 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기초이다.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소경영 생산 방식은 노예제, 농노제 등 예속 관계 아래에서도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번성하고,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발휘하며 적절하고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가 자신이 사용하는 노동 조건의 자유로운 사적 소유자일 경우뿐이다. 이는 농민이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를, 수공업자가 자신이 능숙하게 다루는 도구를 소유하는 경우를 말한다. 소경영 생산 방식은 토지 분할과 기타 생산 수단의 분산을 전제한다.

 

이 생산 방식은 생산 수단의 집중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생산 과정 내의 협업과 분업, 자연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 그리고 사회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을 이뤄질 수 없도록 만든다. 따라서 이 방식은 생산과 사회가 자연 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움직일 때에만 적합하다. 이 생산 방식을 영구화하려는 시도는 페케르가 지적하듯, '만인의 획일화를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일정한 발전 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 방식은 스스로를 파괴할 물질적 수단을 창출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태내에서는 이 생산 방식을 속박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한다. 이 생산 방식은 필연적으로 철폐되며, 실제로 철폐된다. 그 철폐, 곧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생산 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그 결과,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폭넓은 인민 대중으로부터 토지, 생활 수단, 노동 도구를 수탈하는 것, 바로 이 처참하고 가혹한 인민 대중의 수탈이 자본 역사의 전주곡을 이룬다.

 

이 과정에는 일련의 폭력적 방법이 포함되었으며, 우리는 그중 자본의 시초 축적을 위한 획기적인 방법들만을 위에서 고찰하였다. 직접적 생산자에 대한 수탈은 가장 무자비한 만행과 더불어 가장 비열하고, 가장 추악하며, 가장 야비하고, 가장 얄미운 정열의 충동 아래 수행되었다.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 곧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노동하는 개인과 자신의 노동 조건 사이의 결합에 토대를 둔 사적 소유는, 타인들의 형식상 자유로운 노동, 곧 임금 노동의 착취에 토대를 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부터 축출된다.

 

이 전환 과정에서 낡은 사회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그리고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의 노동 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 스스로 서게 되자마자, 수탈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노동이 더욱더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 토지와 기타 생산 수단이 더욱더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공동의 생산 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이 그 새로운 형태이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 작용, 곧 자본의 집중으로부터 수행된다. 상시적으로 하나의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 집중(소수 자본가의 다수 자본가 수탈)과 더불어, 다음 요소들이 대규모로 발전한다.

 

· 노동 과정의 협업적 형태

·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적용

· 토지의 계획적 이용

· 노동 수단의 공동 형태로 전환

 

모든 생산 수단이 결합된 사회적 성격을 띠는 노동의 생산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절약되는 것, 그리고 각국 국민이 세계 시장의 그물 속에 편입되는 자본주의적 체제의 세계적 성격 등이다. 이 전환 과정에서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든다. 그러나 빈곤, 억압, 예속, 타락, 착취는 더욱더 증대하며, 이와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저항도 함께 성장한다. 이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원리 그 자체로부터 그 수가 항상 증가하며,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이다.

 

자본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번성해 온 생산 방식을 속박하는 지점에 이른다. 생산 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적 성격은 마침내 생산 수단과 노동의 자본주의적 겉껍질과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겉껍질은 갈라져 망가진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소수의 대자본가가 소유를 빼앗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자본주의적 취득 방식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낳는다. 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 과정에서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의 부정은 생산자에게 사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협업, 그리고 토지를 포함한 모든 생산 수단의 공동 점유를 바탕으로 개인적 소유(개인들이 연합한 사회의 소유)를 재건한다.

 

개인들의 자기 노동에 토대를 둔 분산된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은, 이미 실제로 사회적 성격을 띠는 생산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환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래 걸리고, 힘들며, 어려운 과정인 것은 당연하다. 이는 전자에서는 소수의 횡령자가 인민 대중을 수탈하지만, 후자에서는 인민 대중이 소수의 횡령자를 수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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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산업자본가의 탄생

 

산업 자본가의 출현은 차지 농업가의 경우처럼 점진적 과정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물론 길드의 장인들, 나아가, 자립적 소규모 수공업자들, 심지어 임금 노동자들까지도 소규모 자본가로 변모하였다. 이들은 임금 노동 착취를 확대하고, 자본 축적을 강화하며 본격적인 자본가로 전환하였다.

 

중세 도시의 초기 단계에서 도주한 농노들 중 누가 주인이 되고, 누가 하인이 될지는 대체로 그들의 도주 시점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자본주의적 초기 단계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처럼 달팽이 걸음과 같은 느린 발전으로는, 15세기 말 대발견이 창출한 새로운 세계 시장의 상업적 요구를 충족할 수 없었다. 한편, 중세는 두 가지 독특한 자본 형태를 물려주었다. 그것은 다양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발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시대 이전에도, 이미 자본으로 기능하던 고리대 자본과 상인 자본이다.

 

현재 사회의 모든 부는 먼저 자본가의 수중에 귀속된다. 그는 지주에게 지대를, 노동자에게 임금을, 그리고 조세와 십일조 징수자에게 그들의 요구액을 지불한다. 그리고 연간 노동 생산물의 대부분, 아니 그 최대 부분이면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부분을 자기 몫으로 남긴다. 자본가는 이제 사회 전체 부의 최초 소유자로 간주된다. 비록 이 소유권을 부여한 법률은 없으나, 이러한 소유상의 변화는 자본에 대한 이자 수취로부터 비롯된다. 유럽 전체의 입법자들이 고리대금업을 법률로 방지하려 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나라의 전체 부에 대한 자본가의 권력은 소유권의 완전한 혁명인데, 이와 같은 혁명은 어떤 법령 또는 어떤 일련의 법령으로부터 수행되었는가.’

 

호지스킨,자연적 소유권과 인위적 소유권의 대비, 98-99.는 이 혁명이 결코 법률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답했어야 한다.

 

농촌의 봉건 제도와 도시의 길드 제도는 고리대 자본 및 상업 자본에서 조성된 화폐 자본이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는 일을 가로막았다. 이러한 속박들은 봉건적 가신단의 해체와 농촌 주민의 수탈 및 추방으로부터 제거되었다.

 

새로운 공장제 수공업은 해안 항구 또는 (옛 도시와 길드의 통제권 밖에 있는) 농촌 지역에 건설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공업 배양지들을 반대하는 자치 도시들의 치열한 투쟁이 일어났다.

 

아메리카에서 금과 은의 발견, 원주민의 섬멸, 노예화, 광산 생매장, 동인도 정복 및 약탈 개시, 아프리카가 상업적 흑인 수렵장으로 전환된 일 등은 자본주의적 생산 시대의 새벽을 알리는 요소였다. 이러한 목가적인 과정들은 시초 축적의 주요한 계기들이다. 그 뒤를 이어, 지구를 무대로 유럽 국민들의 무역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스페인에 대한 네덜란드의 저항으로 개시되었고, 잉글랜드의 자코뱅 반대 전쟁에서 거대한 규모에 달했으며, 현재까지도 중국에 대한 아편 전쟁 등으로 계속되고 있다.

 

시초 축적의 상이한 요소들은 대체적인 연대기에 따라 특히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에 분배된다. 잉글랜드에서는 이 상이한 요소들이 17세기 말에 식민 제도, 국채 제도, 근대적 조세 제도, 보호 무역 제도 등을 포함하며 체계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러한 방법들은 부분적으로는 잔인한 폭력에 의존하는데, 예컨대, 식민 제도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들은 봉건적 생산 양식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해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사회의 집중되고 조직된 힘인 국가 권력을 이용한다. 힘은 낡은 사회가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을 때, 조산사 역할을 한다. 힘 그 자체가 하나의 경제적 능력이다.

 

기독교를 전문으로 다루는 하위트는식민과 기독교에서 기독교적 식민 제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른바 기독교 인종이 정복할 수 있었던 세계 도처에서, 그리고 모든 주민들에게 가한 야만 행위와 잔인한 행위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도 그 유례가 없었으며, 아무리 난폭하고, 몽매하며, 무정하고, 파렴치한 인종이라도 그것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17세기 최고의 자본주의국이었던 네덜란드의 식민지 경영사는 배신, 매수, 학살, 비열의 유례없는 광경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인들이 자바섬에서 사용할 노예를 확보하기 위해 셀레베스섬에서 실행한 인간 약탈 제도만큼 특징적인 점은 없다.

 

이를 위해, 특별히 인간 도둑들이 훈련되었다. 도둑, 통역, 판매인이 이 거래의 주된 담당자였으며, 토착 군주가 주요 판매인 역할을 하였다. 훔쳐온 젊은이들은 노예 선박으로 운반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셀레베스섬의 비밀 감옥에 숨겨졌다. 한 공식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가령, 마카사르라는 이 도시는 비밀 감옥들로 가득 차 있다.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무서운데, 거기에는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쇠사슬에 얽매인, 탐욕과 포악의 희생자인 가엾은 인간들로 가득 차 있다.’

 

말라카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포르투갈 총독을 매수하였다. 1641, 총독은 네덜란드인들의 시내 진입을 허가하였다. 그들은 곧바로 총독의 집으로 달려가 그를 학살하였는데, 이는 약속한 매수 금액인 21,875파운드의 지불을 절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황폐화되고 인구는 감소하였다. 자바섬의 한 지방인 바뉴완기는 1750년에는 주민 수가 80,000명 이상이었는데, 1811년에는 8,00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바로 평화로운 상업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정치적 지배 외에도 차 무역과 중국 무역 전반, 그리고 유럽을 왕래하는 화물 수송의 배타적 독점권을 소유하였다. 나아가, 인도 연안 상업, 섬들 사이의 상업, 인도 내륙 상업은 이 회사의 고급 직원들이 독점하였다. 소금, 아편, 후추 및 기타 상품에 대한 독점은 부의 한없이 큰 원천이었다. 회사 직원들이 가격을 설정하고, 인도 사람들을 마음대로 약탈했다. 총독까지도 이러한 사적 거래에 가담하였다. 그의 총애를 받은 이들은 연금술보다 더 교묘하게 무()로부터 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하였다. 거액의 재산이 우후죽순처럼 하룻밤 사이에 불어났으며, 시초 축적은 한 푼의 투자도 없이 진행되었다. 워렌 헤이스팅스의 재판은 이러한 실례들로 가득하다. 그 중 한 예는 다음과 같다.

 

설리반이라는 인물은 아편 생산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인도의 한 지방으로 공무를 떠나려던 순간, 아편 납품 계약을 따냈다. 설리반은 그 계약을 40,000파운드에 빈이라는 사람에게 팔았고, 빈은 그것을 같은 날, 60,000파운드에 다시 되팔았다. 이 계약을 마지막으로 구매해 수행한 사람은 그렇게 하고도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의회에 제출된 한 문서에 따르면, 동인도 회사와 그 직원들은 1757년부터 1766년까지 인도인들로부터 600만 파운드의 선물을 받았다. 1769년부터 1770년까지 영국인들은 쌀을 전부 사재기하고, 그것을 엄청나게 높은 가격이 아니면 다시 팔지 않으면서 인위적으로 기근을 만들어냈다.

 

원주민에 대한 가장 횡포한 취급은, 물론 서인도와 같이 전적으로 수출 무역을 위해 설립된 재식 농장(플랜테이션 농장)들에서 발생하였다. 또한 멕시코, 동인도와 같이 약탈의 대상으로 내맡겨진 부유하고 인구가 조밀한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진정한 식민지들에서도 시초 축적의 기독교적 성격은 명백히 드러났다. 신교의 엄격한 주창자인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1703년 그들 의회의 결의에 따라 인디언의 머리 가죽 1장 또는 포로 1명에 대해 40파운드의 상금을 걸었다. 1722년에는 머리 가죽 1장당 상금이 100파운드로 증가하였다. 1744년 메사추세츠만 지역이 특정 종족을 반란자로 선언한 뒤에는, 다음과 같은 가격을 책정하였다.

 

12세 이상 남자의 머리 가죽은 새 통화 100파운드, 남자 포로는 105파운드, 여자나 아동 포로는 55파운드, 여자나 아동 머리 가죽은 50파운드였다. 수십 년 뒤, 식민 제도는 그사이에 본국(영국)에 반기를 들게 된 경건한 청교도의 자손들에게 복수하였다. 이 자손들은 영국인의 매수와 사주 아래 인디언의 도끼에 찍혀 죽었다. 영국 의회는 경찰견과 머리 가죽 벗기기를 신과 자연이 자기들에게 부여한 수단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하였다.

 

식민 제도는 무역과 항해를 급격히 발전시켰다. ‘독점 회사는 자본 집적의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하였다. 식민지는 싹트는 공장제 수공업에 판매 시장을 보장해 주었고, 이 시장의 독점은 축적을 더욱 강화하였다. 유럽 밖에서 직접적 약탈, 토착민 노예화, 살인 강도로 획득한 재물은 본국으로 흘러 들어와 거기서 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식민 제도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네덜란드는 1648년에 이미 상업적 위력의 정점에 도달하였다.

 

이 나라(네덜란드)는 동인도 무역과 유럽의 동남부와 서북부 사이의 교역을 거의 독차지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어업, 항해, 공장제 수공업은 다른 모든 나라를 능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공화국의 자본은 나머지 유럽의 모든 자본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귈리히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기를 잊었는데, 네덜란드 인민은 1648년까지 유럽의 다른 모든 인민들을 합한 것보다 더 과도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더 빈곤했으며, 더 참혹한 억압을 당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는 산업적 패권이 상업적 패권을 수반한다. 이와는 달리,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는 상업적 패권이 산업상의 우세를 보장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식민 제도가 당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식민 제도는 낯선 신이었다. 이 신은 유럽의 옛 신들과 나란히 제단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그 신들을 모두 한꺼번에 때려 엎어버리고, 치부가 인류 궁극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중세에 이미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공공 신용 제도, 곧 국채 제도는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유럽 전체로 확산되었다. 식민 제도는 이에 수반되는 해상 무역 및 무역 전쟁과 더불어 국채 제도를 발달시킨 온실이엇다. 그래서 국채 제도는 먼저 네덜란드에서 확립되었다. 전제 국가이든 입헌 국가이든 공화제 국가이든, 국가를 매각하는 국채는 자본주의 시대를 특징짓는다. 이른바 국부 중 현실적으로 근대적 인민 전체가 소유하는 유일한 부분이 바로 국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민이 국채를 많이 가질수록 그 인민은 부유하게 된다는 근대적 학설이 나오게 된다. 공공 신용은 자본이 굳게 믿는 신념이 된다. 그래서 국채의 성립과 함께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큰 죄는 성령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국채에 대한 불신이다.

 

공채는 시초 축적의 가장 강력한 지렛대 중 하나이다. 공채는 마술 지팡이처럼 비생산적 화폐에 증식의 힘을 부여하고, 이를 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때 이 화폐는 산업에 투하하거나 심지어 고리대금업에 투하할 때 반드시 수반되는 위험과 번잡을 전혀 겪을 필요가 없다. 국가의 채권자들은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대부한 금액은 쉽게 양도할 수 있는 공채 증서로 전환되며, 이것은 현금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수중에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파생된 놀고먹는 금리 생활자 계급, 정부와 국민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금융업자들, 그리고 온갖 국채의 상당 부분을 하늘에서 떨어진 자본으로 이용하는 징세 청부인, 상인, 사적 공장주들의 일확천금의 부는 제외하고도, 국채는 주식회사, 온갖 종류의 유가 증권 거래와 투기업, 한마디로, 증권 투기와 근대적 은행 지배를 발생시켰다.

 

국립이라는 칭호로 장식된 대은행들은, 그 출생 첫날부터 정부를 원조하여 받은 특권 때문에 정부에 화폐를 대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적 투기업자들의 연합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은행들의 자산이 계속 증가하는 것은 국채 누적의 가장 확실한 척도가 되며, 이와 같은 은행들의 전면적 발전은, 1694년 잉글랜드 은행(BOE)의 창립으로부터 시작된다.

 

BOE는 자기의 화폐(자기 자본)8%의 이자로 정부에 대부하는 것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이 은행은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의회로부터 받으면서 자기 자본을 은행권의 형태로 다시 한번 국민에게 대부하였다. BOE는 이 은행권을 가지고 어음을 할인하고, 상품 담보로 대부하며, 귀금속을 매입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은행 자체가 만들어낸 신용 화폐(BOE 은행권)는 유통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BOE는 이 은행권으로 국가에 대부하였고, 국가를 대신해 공채 이자를 지불하였다. 이 은행은 한 손으로는 주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되받았을 뿐 아니라, 되받으면서도, 은행은 자기가 빌려준 최후의 한 푼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영원한 채권자로 남아 있었다.

 

이 은행은 점차 영국의 퇴장 귀금속의 없어서는 안 될 보관 창고로 되었으며, 전체 상업 신용의 무게 중심이 되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마녀에 대한 화형을 중단하자마자 은행권 위조자의 교수형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은행 귀족, 금융업자, 금리 생활자, 중개인, 주식 투기업자, 증권 거래업자들의 일당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저술들, 예컨대, 볼링브로크의 저술이 명확히 보여준다.

 

국채와 더불어 세계 신용 제도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여러 국민의 시초 축적을 은폐한 원천 중 하나였다. 일례로, 베네치아의 추악한 강탈 제도가 낳은 각종 악행들(샤일록이 보여주듯이)은 몰락하고 있던 베네치아로부터 거액의 화폐를 빌린 네덜란드에게는 풍부한 자본의 비밀 원천 중 하나였다. 이러한 관계는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사이에서도 확인된다.

 

훨씬 뒤처지게 되자, 네덜란드는 더 이상 압도적인 상공업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1701년부터 1776년까지 네덜란드의 주요 사업 중 하나는 방대한 자본의 대부 업무였으며, 특히 자국의 강력한 경쟁국인 잉글랜드에 대한 대부 업무가 두드러졌다. 동일한 현상이 현재 잉글랜드와 미국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 나타나고 있는 출처 불명의 많은 자본은 어제 잉글랜드에서 자본으로 전환된 아동들의 피이다.

 

국채는 국가 세입에 근거하며, 이 세입으로 해마다 이자 지불 등을 충당해야 하므로, 근대적 조세 제도는 국채 제도의 필수적인 보완물이다. 국채는 정부의 임시 지출을 납세자가 당장 그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조달할 수 있게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금 인상을 피할 수 없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차례로 계약된 국채 누적이 유발하는 세금 증가로 인해, 정부는 새로운 임시 지출이 발생할 때마다 끊임없이 새로운 국채를 발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장 필수적인 생활 수단에 대한 과세 (따라서 이것의 가격 등귀)를 그 축으로 하는 근대적 조세 제도는 그 자체 안에 조세의 자동적인 점진적 증대의 싹을 품고 있다.

 

과중한 과세는 우연이 아닌, 오히려 과세 원칙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재정이 최초로 시작된 네덜란드에서 위대한 애국자 드 위트는 자신의네덜란드 국가의 정치적 격언(1669)으로부터 조세 제도를 임금 노동자들을 순종, 절욕, 근면하게 하며 과도한 노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제도라고 찬양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근대적 재정이 임금 노동자의 상태에 미친 파괴적 영향보다는, 이 제도가 농민, 수공업자 등 하층 중간 계급의 모든 구성원을 폭력적으로 수탈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 제도의 수탈적 효과는 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보호 무역 제도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공채와 이에 상응하는 재정 제도가 부의 자본화와 대중의 수탈에서 수행한 막대한 역할로 인해, 코베트나 더블데이와 같은 저술가들은 부당하게도 근대 인민 빈곤의 주된 원인을 여기에서 찾게 되었다.

 

보호 무역 제도는 제조업자를 육성하고, 독립적 노동자를 수탈하며, 인민의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자본화하고, 낡은 생산 방식이 근대적 생산 방식으로 이행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단축시키기 위한 인위적 수단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 발명의 특허를 얻고자 서로 경쟁하였으며, 잉여 가치 추구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간접적으로는 보호 관세로부터,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수출 장려금으로부터 자국 인민을 약탈하였다. 그뿐 아니라, 유럽 국가들은 주변 종속국의 모든 산업을 폭력적으로 전멸시켰는데, 예를 들어,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의 양모 공장제 수공업을 전멸시켰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 과정이 콜베르(J. B. Colbert, 1619-1683: 루이 14세의 재정 담당관으로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의 선례를 따라 더욱 단순화되었다. 여기서는 산업의 시초 자본 일부가 국고에서 직접 유입되었다. H. 미라보는프로이센 왕국에 대해. 6: 101.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7년 전쟁(1756-1763) 이전에 작센의 공업이 번영한 원인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먼 곳에서 찾으려 하는가. 군주가 빌린 18,000만의 국채에 눈을 돌리기만 하면 그만인데!’

 

식민 제도, 국채, 무거운 세금, 보호 무역 제도, 무역 전쟁 따위는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는 새싹에 불과했지만, 대규모 공업의 유년기에는 거대하게 번창하였다. 대규모 공업의 탄생은 헤롯왕이 행한 것과 같은 대대적인 아동 살해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영국 해군처럼, 공장들도 강제 징집으로 신병을 보충하였다.

 

이든은 15세기 마지막 1/3부터 자신의 시대인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농촌 주민으로부터 토지를 수탈한 참혹성에 대해서는 매우 냉담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농업과 경작지와 목장 사이의 올바른 비율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었던, 토지 수탈 과정을 큰 만족감을 가지고 경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을 공장제 생산으로 전환시키며 자본과 노동력 사이에 올바른 비율을 설정하기 위해 아동을 훔치고 노예화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앞서와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적 식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영 성과를 높이기 위해 빈민 아동들을 오둠막집과 구빈원에서 훔쳐내어 교대제와 야간 노동으로 혹사시키며 휴식도 없이 일하게 하는 공업, 게다가 나이와 성향이 서로 다른 수많은 남녀를 한곳에 몰아넣으면서 방탕과 음란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공업이 개인적 · 국민적 행복을 총체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아마도 국민의 관심사가 될 만하다.’

 

필든은공장 제도의 저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비셔, 노팅엄셔, 특히 랭커셔에서는 최근에 발명된 기계가 물레 바퀴를 돌릴 수 있는 하천가의 큰 공장들에서 사용되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는 수천 명의 일손이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인구가 희박했으며 토지가 척박했던 랭커셔에서는 무엇보다도 사람 손이 요구되었다. 아동들의 민첩한 작은 손가락이 특히 필요했다. 즉시 런던, 버밍엄, 기타 교구 구빈원에서 도제(!)를 모집하는 관습이 생겼고, 7세부터 13-14세까지 의지할 곳 없는 수천 명의 아동들이 북부로 수송되었다. 고용주 (곧 아동 도둑)가 자기 도제를 입히고, 먹이고, 공장 가까이 도제 수용소에 묵게 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다. 그들의 노동을 감독하기 위해 감시인이 배치되었다. 이 감시인의 급료는 아동들로부터 짜낸 생산량에 비례했기 때문에, 아동들을 될수록 더 많이 노동시키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었다. 그 결과, 당연히 학대가 심했다. 많은 공장 지대들, 특히 랭커셔에서 공장주의 손아귀에 맡겨진 이러한 천진하고, 고독한 아동들은 천인공노할 학대를 당하였다. 그들은 과도한 노동에 죽도록 시달렸고, 채찍으로 맞았으며, 쇠사슬에 얽매였고, 매우 교활한 학대로 고통을 받았다. 굶주림으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은 채찍으로 노동을 강요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자살에 이르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대중의 눈에서 멀리 떨어진 더비셔, 노팅엄셔, 랭커셔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산골짜기는 고문과 살인의 음산한 장소로 변하였다. 공장주들의 이윤은 막대한 것이었으나, 이는 그들의 탐욕에 불을 지폈을 뿐이다. 그들은 야간 노동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곧 그들은 주간 노동으로 피로에 쓰러진 직공들 한 조를 교체하기 위해, 야간 노동을 위한 다른 조의 직공들을 준비하였다. 주간 조는 야간 조가 방금 빠져나간 침대로 기어들어갔으며, 반대로, 야간 조는 주간 조가 빠져나간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침대가 식을 사이가 없었다고 랭커셔 사람들은 전한다.’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발전함에 따라 유럽의 사회 여론은 수치와 양심이라는 최후의 흔적마저 잃어버렸다. 여러 나라들은 어떤 치욕스러운 짓이라도 일단 그것이 자본 축적의 수단이 되기만 하면 그것을 파렴치하게 자랑하였다. 예컨대, 속물인 A. 앤더슨의 소박한상업 연대기를 읽어 보라. 거기에는 종래 잉글랜드가 흑인 무역을 아프리카와 영령(英領) 서인도 사이에서만 했는데, 이제는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아메리카 사이에서도 해도 좋다는 특권을 유트레히트 평화 조약 체결 시 아시엔토 협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강탈한 사실을 잉글랜드 정책의 승리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잉글랜드는 1743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4,800명의 흑인을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공급할 권리를 얻었다. 이것은 동시에 잉글랜드의 노예 밀수 무역을 은폐하려는 공식적 시도였다. 리버풀은 노예 무역으로부터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노예 무역은 이 도시 시초 축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리버풀의 명성은 여전히 노예 무역의 성공에 있으며, 이 노예 무역은, 애이킨의 저서에 따르면,

 

리버풀의 상업을 특징짓고, 그 상업을 현재의 번영 상태로까지 끌고 온 용감한 모험 정신에 부합했으며, 또한 노예 무역은 해군과 선원에게 큰 고용 기회를 창출했고, 영국 공산품에 큰 수요를 창출했다.’

 

리버풀 노예 무역 선박 수

 

1730: 15

1751: 53

1760: 74

1770: 96

1792: 132

 

면공업은 잉글랜드에 아동 노예 제도를 도입하였고, 미국에서는 종래 대체로 가부장제적 노예 제도를 상업적 착취 제도로 전환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사실상 유럽의 임금 노동자라는 은폐된 노예 제도는 신대륙의 노골적인 노예 제도를 자기 발판으로 삼아야만 그 죄악이 덜 두드러져 보일 형편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영원한 자연 법칙이 자유롭게 작용하고, 노동자와 노동 수단 사이의 분리를 완성하며, 한쪽 끝에서는 사회의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쪽 끝에서는 인민 대중을 임금 노동자, 곧 자유로운 노동 빈민’ (이는 근대사의 인위적인 산물)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모든 수고가 필요했다.’

 

화폐가, 오지에,공공 신용, 265.의 말대로, ‘한쪽 볼에 핏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면,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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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농업 혁명과 산업 자본의 국내 시장

 

일시적 중단을 거쳤음에도, 끊임없이 재현된 농촌 주민의 수탈과 축출은, 전적으로 길드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도시 공업에 제공하였다. 애덤 앤더슨(제임스 앤더슨과 혼동 불가)은 자신의상업사에서 신의 직접적 간섭이라 기술한다.

 

시초 축적의 이 요소에 대한 추가적 고찰이 필요하다. 조프로아 생틸레르가 우주 물질의 한 측면에서는 응축을, 다른 측면에서는 희박으로 설명했듯이, 독립적 자영 농민의 희박은 공업 프롤레아리아트의 응축과 직접적으로 상응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과의 전부는 아니다. 토지 소유 관계의 혁명은 경작 방식의 개량, 협업의 확대, 생산 수단의 집적을 수반한다. 따라서 경작자 수의 감소에도 토지는 동일하거나 증대된 양의 생산물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욱이, 농업 임금 노동자들은 더 높은 노동 강도를 강요받았으며, 그들 자체 생존을 위한 생산 영역은 점진적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농촌 주민이 풀려나면서(축출)’, 이들의 기존 생존 수단 역시 풀려난다(박탈)’. 이러한 생존 수단은 이제 가변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된다. 오갈 데 없이 축출된 농민은 이 생존 수단의 가치를 임금 형태로 (자신의 새로운 주인인) 산업 자본가에게서 획득해야 한다. 국내 농업에 의존하던 공업 원료 역시 생활 수단과 동일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불변 자본의 한 요소로 변모하였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모두 아마 방적에 종사하던 베스트팔렌 농민 중 일부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며, 나머지 일부는 대규모 차지 농업가의 일용 노동자로 전락한다. 동시에 대형 아마 방적 및 직조 업체가 출현하여 풀려난 사람들(축출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고 가정한다. 이 과정에서 아마 자체는 겉보기에는 이전과 동일하다.

 

아마 섬유 한 가닥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아마 속에는 새로운 사회적 영혼이 깃든다. 이제 아마는 공장제 수공업의 불변 자본 일부를 이룬다. 이전에는 (자신이 재배하여 가족과 함께 소량 방직하던) 무수히 많은 소규모 생산자들 사이에 분배되었던 아마가, 이제는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방적하고 직조하는) 한 사람의 자본가 수중에 집중된다.

 

아마 방적에 투입된 추가적 노동은 이전에는 무수한 농민 가족들의 추가 소득 또는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프로이센 왕을 위한 조세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소수 자본가의 이윤으로 실현된다. 이전에는 농촌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방추와 직기는 지금 노동자와 원료와 함께 소수의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된다. 나아가, 방추, 직기, 원료는 이전에는 방적공과 직조공의 독립적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을 지휘하고 지불받지 않은 노동(잉여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된다.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이나 대규모 농장의 외관만으로는, 그것들이 수많은 소규모 생산 거점들을 합병한 것이며, 독립적 소생산자들의 수탈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편견 없는 분석가는 이러한 외모에 속지 않는다. ‘혁명의 사자’ H. 미라보의 시대에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을, 오늘날 우리가 합병된 농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 또는 합병된 작업장이라 불렀다. 미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수백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지배인 밑에서 노동하며, 통상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에 대해서만 주목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산되어 각자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작업장들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완전히 무시된다. 이것은 큰 오류이다이들이야말로 국민적 부의 핵심적 구성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 합병된 공장은 소수 기업가를 막대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과 무관하게 일용직 노동자 역할에 머무를 뿐, 사업의 성공을 누릴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산된 공장에서는 누구도 막대한 부를 이루지 못하지만, 많은 노동자가 행복하게 생활한다. 근면하고 검소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들은 현명한 생활 방식(곧 근면)이 자신들의 처지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수단임을 인정하며, 소액의 임금 인상 (이는 장래에 중요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하루살이 살림을 조금 낫게 해줄 뿐이다)을 위한 수단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소규모 농업과 결합되어 있는 분산적, 개별적 공장제 수공업만이 자유로운 공장제 수공업이다.

     

농촌 주민 일부의 수탈과 추방은 산업 자본을 위해 노동자와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재료를 풀려나게(해방) 했을 뿐 아니라,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실제로 소농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키고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수단을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시킨 사건들은 동시에 자본을 위한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이전에는 농민 가족이 생활 수단과 원료를 스스로 생산하고, 그 대부분을 스스로 소비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 원료와 생활 수단은 상품으로 변모하였고, 대규모 차지 농업가는 공장제 수공업에서 자신의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발견하였다. 이전에는 각 농민 가족이 자신의 원료로 소비를 위해 방직하고 직조하던 실, 아마포, 거친 모직물 등의 물건들이 이제 공장제 수공업의 제품으로 전환되고, 그 제품의 판로는 다름 아닌 농촌 지방이 된다.

 

종래에는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다수의 소생산자들이 다수의 분산된 고객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제 이 고객들은 산업 자본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의 큰 시장으로 집합한다. 따라서 농촌 부업의 파괴와 공장제 수공업 및 농업의 분리 과정이 이전의 자립적 농민들의 수탈 및 생산 수단으로부터의 격리와 나란히 진행된다.

 

농촌의 가내 공업을 파괴하는 일만으로도 한 나라의 국내 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필요한 규모와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는 아직 이 변혁을 근본적이고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공장제 수공업은 도시의 수공업과 농촌의 가내 부업을 폭넓은 배경으로 삼으면서 국민 생산을 매우 부분적으로만 장악할 따름이다.

 

공장제 수공업은 이러한 부업과 수공업을 특정 형태, 공업 부문, 지점에서 파괴하는 한편, 원료 가공을 위해 일정 정도 이를 필요로 하기에 다른 형태, 다른 부문, 다른 지점에서 재생시킨다. 그러므로 공장제 수공업은 토지 경작을 부업으로, (그 생산물이 직접 또는 상인의 손을 거쳐 공장제 수공업에 판매되는) 공업 노동을 본업으로 삼는 새로운 소농민 계급을 탄생시킨다.

 

이 사실은 잉글랜드 역사 연구가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연구가는 한편으로 15세기 마지막 1/3부터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민층의 몰락이 더욱 심해진다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불평을 접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농민층이 수는 감소하고, 형편은 악화되고 있지만,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 주요 원인은, 잉글랜드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곡물 재배 또는 목축업이 우세하게 되면서 농민 경영의 규모가 변동한다는 데 있다.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기계 형태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며, 농촌 주민의 압도적 대다수를 근본적으로 수탈하고, 농촌 가내 공업의 근본인 방적업과 직조업을 파괴하면서, 농업과 농촌 가내 공업 사이의 분리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비로소 산업 자본을 위해 전체 국내 시장을 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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