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농업 혁명과 산업 자본의 국내 시장
일시적 중단을 거쳤음에도, 끊임없이 재현된 농촌 주민의 수탈과 축출은, 전적으로 길드의 규제로부터 벗어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도시 공업에 제공하였다. 애덤 앤더슨(제임스 앤더슨과 혼동 불가)은 자신의『상업사』에서 ‘신의 직접적 간섭’이라 기술한다.
시초 축적의 이 요소에 대한 추가적 고찰이 필요하다. 조프로아 생틸레르가 우주 물질의 한 측면에서는 응축을, 다른 측면에서는 희박으로 설명했듯이, 독립적 자영 농민의 희박은 공업 프롤레아리아트의 응축과 직접적으로 상응한다. 그러나 이것이 결과의 전부는 아니다. 토지 소유 관계의 혁명은 경작 방식의 개량, 협업의 확대, 생산 수단의 집적을 수반한다. 따라서 경작자 수의 감소에도 토지는 동일하거나 증대된 양의 생산물을 산출하는 결과를 낳는다. 더욱이, 농업 임금 노동자들은 더 높은 노동 강도를 강요받았으며, 그들 자체 생존을 위한 생산 영역은 점진적으로 축소된다. 이처럼, 농촌 주민이 ‘풀려나면서(축출)’, 이들의 기존 생존 수단 역시 ‘풀려난다(박탈)’. 이러한 생존 수단은 이제 가변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된다. 오갈 데 없이 축출된 농민은 이 생존 수단의 가치를 임금 형태로 (자신의 새로운 주인인) 산업 자본가에게서 획득해야 한다. 국내 농업에 의존하던 공업 원료 역시 생활 수단과 동일한 사정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불변 자본의 한 요소로 변모하였다.
예를 들어,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 모두 아마 방적에 종사하던 베스트팔렌 농민 중 일부는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추방되며, 나머지 일부는 대규모 차지 농업가의 일용 노동자로 전락한다. 동시에 대형 아마 방적 및 직조 업체가 출현하여 ‘풀려난 사람들(축출된 사람들)’이 그곳에서 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고 가정한다. 이 과정에서 아마 자체는 겉보기에는 이전과 동일하다.
아마 섬유 한 가닥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 아마 속에는 새로운 사회적 영혼이 깃든다. 이제 아마는 공장제 수공업의 불변 자본 일부를 이룬다. 이전에는 (자신이 재배하여 가족과 함께 소량 방직하던) 무수히 많은 소규모 생산자들 사이에 분배되었던 아마가, 이제는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방적하고 직조하는) 한 사람의 자본가 수중에 집중된다.
아마 방적에 투입된 추가적 노동은 이전에는 무수한 농민 가족들의 추가 소득 또는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프로이센 왕을 위한 조세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소수 자본가의 이윤으로 실현된다. 이전에는 농촌 일대에 분산되어 있던 방추와 직기는 지금 노동자와 원료와 함께 소수의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된다. 나아가, 방추, 직기, 원료는 이전에는 방적공과 직조공의 독립적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었으나, 이제는 그들을 지휘하고 지불받지 않은 노동(잉여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환된다.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이나 대규모 농장의 외관만으로는, 그것들이 수많은 소규모 생산 거점들을 합병한 것이며, 독립적 소생산자들의 수탈로부터 형성된 것임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편견 없는 분석가는 이러한 외모에 속지 않는다. ‘혁명의 사자’ H. 미라보의 시대에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을, 오늘날 우리가 합병된 농지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 또는 합병된 작업장이라 불렀다. 미라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수백 명의 사람이 한 명의 지배인 밑에서 노동하며, 통상 합병된 공장제 수공업이라 불리는 대규모 공장제 수공업에 대해서만 주목한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산되어 각자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작업장들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완전히 무시된다. 이것은 큰 오류이다. 이들이야말로 국민적 부의 핵심적 구성 요소를 이루기 때문이다. 합병된 공장은 소수 기업가를 막대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반면, 노동자들은 임금 수준과 무관하게 일용직 노동자 역할에 머무를 뿐, 사업의 성공을 누릴 수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분산된 공장에서는 누구도 막대한 부를 이루지 못하지만, 많은 노동자가 행복하게 생활한다. 근면하고 검소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그들은 현명한 생활 방식(곧 근면)이 자신들의 처지를 본질적으로 개선하는 수단임을 인정하며, 소액의 임금 인상 (이는 장래에 중요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하루살이 살림을 조금 낫게 해줄 뿐이다)을 위한 수단으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소규모 농업과 결합되어 있는 분산적, 개별적 공장제 수공업만이 자유로운 공장제 수공업이다.’
농촌 주민 일부의 수탈과 추방은 산업 자본을 위해 노동자와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재료를 풀려나게(해방) 했을 뿐 아니라,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실제로 소농을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키고 이들의 생활 수단 및 노동 수단을 자본의 물질적 요소로 전환시킨 사건들은 동시에 자본을 위한 국내 시장을 형성하였다. 이전에는 농민 가족이 생활 수단과 원료를 스스로 생산하고, 그 대부분을 스스로 소비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 원료와 생활 수단은 상품으로 변모하였고, 대규모 차지 농업가는 공장제 수공업에서 자신의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발견하였다. 이전에는 각 농민 가족이 자신의 원료로 소비를 위해 방직하고 직조하던 실, 아마포, 거친 모직물 등의 물건들이 이제 공장제 수공업의 제품으로 전환되고, 그 제품의 판로는 다름 아닌 농촌 지방이 된다.
종래에는 자신의 타산에 따라 노동하는 다수의 소생산자들이 다수의 분산된 고객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이제 이 고객들은 산업 자본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의 큰 시장으로 집합한다. 따라서 농촌 부업의 파괴와 공장제 수공업 및 농업의 분리 과정이 이전의 자립적 농민들의 수탈 및 생산 수단으로부터의 격리와 나란히 진행된다.
농촌의 가내 공업을 파괴하는 일만으로도 한 나라의 국내 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 필요한 규모와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 시기는 아직 이 변혁을 근본적이고 완전히 수행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공장제 수공업은 도시의 수공업과 농촌의 가내 부업을 폭넓은 배경으로 삼으면서 국민 생산을 매우 부분적으로만 장악할 따름이다.
공장제 수공업은 이러한 부업과 수공업을 특정 형태, 공업 부문, 지점에서 파괴하는 한편, 원료 가공을 위해 일정 정도 이를 필요로 하기에 다른 형태, 다른 부문, 다른 지점에서 재생시킨다. 그러므로 공장제 수공업은 토지 경작을 부업으로, (그 생산물이 직접 또는 상인의 손을 거쳐 공장제 수공업에 판매되는) 공업 노동을 본업으로 삼는 새로운 소농민 계급을 탄생시킨다.
이 사실은 잉글랜드 역사 연구가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이다. 이 연구가는 한편으로 15세기 마지막 1/3부터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농업이 발달하고, 농민층의 몰락이 더욱 심해진다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불평을 접해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농민층이 수는 감소하고, 형편은 악화되고 있지만, 계속 존재하고 있음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그 주요 원인은, 잉글랜드에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곡물 재배 또는 목축업이 우세하게 되면서 농민 경영의 규모가 변동한다는 데 있다.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기계 형태로 자본주의적 농업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하며, 농촌 주민의 압도적 대다수를 근본적으로 수탈하고, 농촌 가내 공업의 근본인 방적업과 직조업을 파괴하면서, 농업과 농촌 가내 공업 사이의 분리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오직 대규모 공업만이 비로소 산업 자본을 위해 전체 국내 시장을 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