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당의 전진과 노선적 차이에 대하여



전근대를 강타한 제국주의에 대해 숙고하는 동안 러시아 혁명에 대해 생각한다. 영국 공산당원이었던 에릭 홉스봄은 『제국의 시대』에서 역사적 고찰을 수행했으나, 당시 한국의 분단 체제가 안고 있던 깊은 균열 구조까지는 포착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두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자 ‘필연적 귀결’이라 평한 바 있다. 봉건제에 매여 있던 인민이 체제 내 모순을 자각하기까지 각국 혁명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그러한 높은 경지의 역사적 도약은 결코 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선을 현대로 불리는 오늘날로 돌려보자. 우리가 ‘신냉전’이나 ‘신제국주의’의 여파를 반복해서 거론할 때, 그것이 과거 부르주아지가 규정한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라는 낙인만큼이나 부르주아적 전쟁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오늘날 각국이 충돌하는 복합적인 경제 문제에서도 선명히 확인된다.

 

오늘날 금융 자본은 전 인민의 노동을 자본에 귀속시겨 체제의 지속성을 포장하고, 인민을 회유하며, 공포를 조장한다. 이는 아시아 내에서도 제국주의의 기생적 횡포가 극에 달한 채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한다. 혹자는 후기 소비에트를 두고 ‘국가자본주의’라 비판하지만, 이는 건재한 제국주의의 부상과 사회주의 공화국의 역사적 시도를 좌절시키려는 반동적 획책이었음을 간과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사회주의노동당이 보여준 불충분한 강령적 토대야말로 우리 공산당과 갈라서는 지점이다. 그들의 행태야말로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며 언급한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구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우스운 책동일 것이다.

 

혁명이란 일련의 투쟁들이 모여서 나타난 결실이다.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는 깊이 있는 심층적 학습과 자국 인민들이 도달한 계급적 수준의 정당한 표출이어야 한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현실은 얼마나 후퇴해 있는가! 부상하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진행성에 대해 직시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어용학자들이야말로 노동 인민의 가장 큰 적이다.

 

소비에트의 전신이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있음을 망각한 채, 곧바로 국제 무대에 진입하여 혁명만을 열망하는 사상적 주입은 과거 비판적으로 학습되지 못했던 사회혁명당(SR)의 오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외주의자들은 당의 건설을 위한 합류 대신 국제적 단결의 범주에서 탈선하여 운동의 소국적인 태도를 정당화할 뿐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혁명당이 사회민주노동당과 척을 지며 보였던 반동적 경향과 마찬가지로, 운동의 단편적인 순간만을 수집해 이를 대의로 포장하는 국제사회주의노동당이야말로 당의 전진을 막아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러한 사상적 동요와 타협이 모여 제국주의가 공산주의자를 탄압할 빌미를 제공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체제 내 인민들이 스스로 자본의 굴레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저 정권 교체만을 바라는 통령 정부 내 ‘노동자’로 복무하는 데 만족하고, 해방을 위한 투쟁을 감행하지 못한 채 지연되고 있는 근본적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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