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제

 

로자 룩셈부르크

 

I

 

사회주의 역사상 유해 없는 독특한 임무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부과되 었다. 그 임무란 전제 국가에서 프롤레터리아트의 계급투쟁에 적합한 전술을 고안해 내는 일이다. 오늘날 러시아의 조건과 사회주의자 탄압법[1)] 시대의 독 일의 조건을 기계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그것이 러시아의 상황을 정치적 관점 이 아니라 치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 지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적 자유의 결여가 대중운동에 야기하는 장애는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러시아에서조차 대중운동은 전제적 제도의 장벽을 가까스로 무너뜨리고, 비 록 불완전하긴 하지만 스스로 가두 소요제도를 만들어 봤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제에 대한 최종 승리가 달성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러시아에서 사회민주주의적 투쟁이 직면하고 있는 주요한 장애는, 부르주이자의 계급 지 배가 전제적 압정의 지배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이 전제에 의한 지배는 필 연적으로 계급투쟁에 대한 사회주의적 교의에 추상적인 선전적 성격을 부여 하며 직접적인 정치선동에 현저한 혁명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부여한다. 사회 주의자 탄압법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을 헌법의 테두리 밖으로 밑이내려 했는데, 그것을 의회정치에서, 그 계급 대립이 완전히 적나라하게 드러난 고도로 발전된 부르주아 사회에서 이루려 했다. 이 점에 비스마르크의 모험의 평가와 어 리석음이 드러난다. 리시아에서는 그 역의 시도가 행해져야 한다. , 부르주 아지의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가 성립되어 있지 않은 가운데 사회민주주의가 창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은 리시아적 토양에 사회주의 교의를 이석하는 문제라든가 선동의 문 제뿐만이 아니라 조직의 문제에서도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는, 이전의 사회주의의 공상적 시도들과는 달리 조직 조차도 선진의 인위적 산물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역사적 산물로 간주되며 사 회민주주의는 다만 거기에 정치적 의식을 불어넣어 줄 뿐이다. 정상적인 상황, 즉 충분히 발전된 부르주아지의 계급 지배가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선행하는 상황에서는 노동자의 초기의 정치적 결정을 상당한 정도로 담당하는 것이 바 로 부르주아지다. 공산당 선언이 단계에서 노동자의 대중적 연대는 그 들 자신의 단결의 산물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단결의 산물이다라고 쓰고 있다. 리시아에서는, 주도 면밀한 개입을 통해 역사적 과정의 한 단계를 뛰어 넘어, 프롤레타리아트를 전제 정치의 기반이 되고 있는 정치적 원자화로부터 곧장 최고의 조직 형태 자신의 목표를 자각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계 급 로 끌어올리는 것이 곧 사회민주주의자의 파업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 정치가 부재한 가운데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뿐만 아 니라, 무엇보다도 그 조직을 마치 전능한 신처림()로부터, 허공 속에서, 다른 나라에서라면 부르주아 사회를 통해 이미 마련되어 있을 정치적 원자제 가 없는 가운데 창출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문 제에는 독특한 점들이 제기된다.

 

지난 몇 년 동안 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직면해 온 문제는 써클이나 지역 차원의 분산적이고 전적으로 자율적인, 그리고 예비적이며 주로 선진적인 운 동 단계에 적합한 조직 형태로부터 전국적인 대중의 일치된 정치적 행동에 필 요한 조직 형태로 전환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지역적 조직이 가진 분산성, 완 전한 자율성, 자치성이란 번거롭고 정치적으로 낙후된 구 조직 형태의 특징이 기 때문에, 새로운 단계의 표어, 즉 대규모로 정비된 조직 구조의 특징은 당연 히 중앙집권주의가 된다. 중앙집권주의 이념의 확립은, 사실상 창립 대회였던 지난번 당 대회를 준비하면서 이스크라가 추진했던 3년간의 눈부신 캠페인 의 중심 사상이었다. 또한 이 이념은 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가운데 청년 세대들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중앙집권주의가 어디에서도 사회민주주의적 조직 형태의 역사적 내용과 특질을 거의 포괄하지 못하는 슬로건이라는 점은 대회 에서 큰 명백해결도며 이후에는 더욱더 명백해결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마 르크스주의적 개념은 조직 문제의 분야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서도 엄 격한 공식에 짜랐을 수 없다는 것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러시아 당 대회를 준비하는 이스크라의 캠페인에서 탁월한 지도자이자 투사의 한 사람인 레너 동지가 쓴 일보 전진 이보 후퇴는 러시아 당 내의 초()중앙집권주의적 경향의 입장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다. 이 책에서 강력 하고 철저하게 표명되고 있는 견해는 비타협적인 중앙집권주의다. 그 끝자는, 한편으로는 철저하고 적극적인 혁명가들의 기간 조직을 무조직적인 혁명적 활 동가들로부터 엄격하게 분리·격리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규 율과, 지방 당 조직의 모든 활동에 중앙적 권위가 직접적·결정적으로 단호하 게 개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예를 들어 중앙위원회는 당의 모든 지방 당 위원회를 조직할 권리를 가지며 따라서 제네바와 리가에서부터 톱스 크와 이르쿠츠크에 이르기까지 모든 개별적 지방 조직들의 구성원을 결정할 수 있다. 또한 그 조직들에 미리 준비된 지방 강령을 제공하며, 명령을 통해 지방 조직들을 해산하거나 재구성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최고의 당 기관인 대 회의 구성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따라서 중앙위원회는 당의 실제적 인 활동 핵심이 되며 다른 모든 조직들은 단지 중앙위원회의 집행 기구에 불 파하게 된다.

 

레닌은 바로 이 엄격한 조직적 중앙집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대중운동의 결합에서 독특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거기에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줄 일련의 사실들을 정리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문 제를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자.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강력한 경향이 사회민주주의 전반에 고유한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양 속에서 그 중앙집권주의 적 경향이 성장하고, 그 투쟁에서 중앙집권적인 대부분주아 국가의 정치적 골 격에 의존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그 본성상 모든 형태의 연방주의와 지방주의에 철저하게 반대한다. 특정한 국가체제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특수 이 해나 집단 이해에 반대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반 이해를 대변하도록 요 구받는 사회민주주의는 어디서나 노동자계급 내의 모든 민족적, 종교적, 직업적 그룹들을 단일한 정당으로 결정시키고자 하는 필연적인 욕구를 갖는다. 연 방주의적 원칙에 대한 양보 같은 예외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와 같은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일 뿐이다.3)

 

이러한 점에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또한 러시아 제국을 위한 동질적이고 치밀한 당보다는 수많은 개별적인 민족적·지역적 조직들의 연합적 집단을 형 성해야 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단결되 고 동질적인 러시아사회민주당 내에서 중앙집권주의가 강력한가 미약한가 하 는 문제와 그 정확한 본질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투쟁정당으로서 사회민주당의 공식적 임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당의 전 투 준비와 힘은 그 조직에서의 중앙집권주의의 실현 여부에 직접 달려 있다는 점이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특징 한 역사적 조건은 어떤 투쟁조직의 형식 요건이라는 관점보다도 훨씬 더 중요 하다.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게금사회의 역사상, 그 모든 측면과 전체 발전 과정에 서 조직과 대중의 독자적인 직접적 행동이 전제된 최초의 운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의 조직 형태(예컨대 자코벨 - 블랑키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조직 형태를 창출한다.

 

레닌이 자신의 책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는 게금의식을 가진 프롤레 타리아트의 조직과 확고하게 결합된 자코벨”4)에 불과하다고 썼을 때, 그는 이 점을 경시했다고 생각된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와 블랑키주의 간의 확실한 차이점을, 소수의 음모에 반대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게금의식으로 보았다. 그는, 이것이 우리의 조직 개념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이고 완전히 새 로운 중앙집권주의 개념이며 또한 조직과 투쟁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임을 망각했다.

 

블랑키주의는 대중의 직접적인 게금 행동을 전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대중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범위한 인민대중은 혁명의 실제적 순간 에만 전쟁에 뛰어든다고 가정되는 한편 예비적 행동은 소수에 의한 혁명적 공 격의 준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이러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과 인민대중 간의 엄격한 구분은 그들의 사명이 성공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블랑키주의 조직의 음모적 행동과 인민대중의 일상적인 삶 사이에는 아무런 내적 관계가 없었으므로 이러한 구분이 가능했으며 유지될 수 있었다.

 

동시에, 활동의 전술과 명확한 임무는 미리 상세하게 산출되었고, 확고한 계획으로 결정되고 규정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기본적인 계급투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직의 활동기들은 당연히, 그들의 활동의 장 밖에서 미리 결정된 것을 수행하는 단순한 집행 기구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중앙위원회의 도구가 되었다. 또한 이것은 음모적 중앙집권주의의 두 번째 특징, 즉 중앙의 권위에 대한 모든 당 기관들의 절대적·명목적인 복종과 당 조직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중앙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민주주의의 활동 조건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기본적인 계급투쟁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군()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충원되며, 또한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투쟁의 목적을 의식하게 된다는 변증법적 모순 속에서 작용한다. 여기서는 조직과 교육과 투쟁이, 불량기주의 운동에서처럼 시기에 따라 기계적으로 분할되는 별개의 계기들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의 각각 다른 측면들이 뿐이다. 거기서는, 한편으로는 투쟁의 일반적·기본적인 원칙과는 별도로 중앙위원회가 사회민주당의 당원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미리 만들어진 세세한 투쟁 전술이 없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을 창출하는 투쟁의 과정이 사회민주주의의 영향권 내에 지속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는 중앙 권위에 대한 당의 투시들의 명목적인 복종이나 기계적인 순종을 기초로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이미 긴밀하게 결합된 당 기간 요원으로 조직된 계급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트의 핵과, 이미 계급투쟁에 뛰어들었으며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주변부 사람들 간의 폐쇄를 수 없는 벽이란 결코 형성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 가지 원칙 레닌이 말한 바와 같이, 첫째로는 모두를 위해 혼자 생각하고 행동하여 결정하는 중앙 권위에 모든 당 조직들과 그들의 활동이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명목적으로 복종하는 것과, 둘째로 조직된 당 핵심의 주변적인 인자로부터의 엄격한 분리 에 입각한 사회민주주의에서의 중앙집권주의의 확립은 음모적 셋틀들의 불량기주의적 운동의 조직 원칙을 노동자계급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기계적으로 이식한 것으로 보인다. 래닌은 자신의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의 조직과 결합된 자코뱅이라 규정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대자 가운데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이러한 입장을 특징지었다. 그러나, 사실상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의 운동이다. 그러므로 사 회민주주의의 중앙집권주의는 불량기주의의 중앙집권주의와 근본적으로 달라 야 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노동자 가운데 분리된 그룹들이나 개인들에 대한 노동자의 의식적이고 전투적인 전위의 의지의 권위주의적 표현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층의 자기중심주의이며 그 당 조직의 범위 내 에서의 다수의 지배다.

 

사회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의 진정한 내용에 대한 앞서의 검토를 통해, 현재 러시아에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그 조건들이란 이미 정치투쟁에 단련된 상당수의 프 롤레타리아 층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과, (당 대회나 당 출판물 등을 통해) 직 접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들의 전투 준비를 표현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후자의 조건은 정치적 자유라는 조건이 주어질 때 분명히 러시아에서도 실 현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 현명하고 계급의식으로 무장된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창출 는 지금 막 진행되고 있을 뿐이며, 당면한 선동·조직 작업의 기본적 주제로 생각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대규모의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노동자 정당의 실 현을 위한 모든 전제 조건들이 이미 러시아에 마련되어 있다고 뻐닌이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이제 조직과 규율이라는 면에서 자기 교육이 부족 한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내의 특정 지식 인들이하고 낙관적으로 주장한 것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규율을 완 벽하게 만드는 데 공장이 갖는 교육적 중요성을 찬양한 것은 사회민주주의적 조직에 대한 지나친 기계적 개념을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이다. 레닌이 상정하 고 있는 규율이란 단지 공장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병영과 근대 판료제도에 의해서도, 한 마디로 말해 중앙집권화된 부르주아 국가의 전체계에 의해서 프 롤레타리아트에게로 주입되는 것이다. 의지나 사상이 없이 기계적으로 지휘봉 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와 사회 계층의 의식적인 정치적 행동의 자발적인 협 력, 또한 피어업계급의 맹목적인 복증과 자신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계급의 조직적인 반란과 같이 정반대되는 두 개념을 규율이라는 말로써 동시에 규정 하는 것은 단지 말을 오용한 것일 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새로운 규율, 사회민주주의의 자발적인 자기 규율을 익힐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 의해 주입된 규율에 의해서나 단지 지휘봉이 부르주어지면서 사회민주당 중앙위원 회로 이전됨으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이 노예적인 규율에 도전하고 그것을 근 절함으로써만 가능하다.

 

나아가, 같은 맥락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의미의 중앙집권주의는 결코 노동운 동의 모든 단계에서 똑같은 비중을 갖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도 명백 하다. 오히려 그것은, 노동자 대중의 투쟁 과정에서 그들의 의식과 정치적 교 육이 발전됨에 따라 점차 실현되는 하나의 경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러시아의 운동에서 중앙집권주의가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 필요한 가 장 중요한 전제 조건들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막대한 장애가 된다. 그러나 아직 실현될 수 없는, 당 조직 내에서의 의식적 노동자의 다수의 지배를 일시적으로중앙 당의 위임권단일 권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거나, 마찬가지로 당 조직의 활동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공공연한 통제의 부재를 혁명적 노동자의 활동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역()통제로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볼 때 잘못된 생각으로 보인다.

 

러시아 운동사 자체가 이 후자의 의미에서의 중앙집권주의의 가치가 의심 스럽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증명해 주고 있다. 레닌이 제시한 것과 같이 거의 무제한적인 개입권과 통제권을 갖는 전능한 중앙기구는, 그 권력이 순전히 사 회민주주의의 기술적 측면, 즉 당 출판물의 공급과 같은 일상적인 선동 방식 과 선동적·재정적 지원의 적절한 배분에 대한 규제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면 틀림없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 권력이 투쟁 전술을 산출한다 거나 러시아에서 위대한 정치적 행동을 시작하는 데 사용될 때에만 그러한 중 앙기구는 다소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운동이 지금까지 겪어 온 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지난 10년간에 일어났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변화들은 모두, 지도 조직은 말할 것도 없고 결코 어떤 운동 지도자에 의해 정신된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운동의 자발 적인 산물이었다. 이 점은, 1896년 성 페테르스부르그의 거대한 파업의 자발 적인 적발로 시작되어 러시아 프롤레티아트의 대규모 경제투쟁의 기원을 열었 던 진정한 러시아 노동운동의 첫 단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또한 이 점은 19013월에 성 페테르스부르그의 학생 소요로 인해 완전히 자발적으로 시작 된 정치적 기두시위의 시기인 두 번째 단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술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 그 다음의 중요한 전환점은 돈의 로스트프에서 일어난 자 발적인대중파업으로, 거기서는 즉석 가두 선동과 옥외 공공 집회와 대중 연 설이 행해졌는데, 이 모든 것들은 몇 년 전만 해도 가장 열성적인 사회민주주 의자에게조차 마치 상상이나 생각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인 양 여겨졌다. 이 모든 경우에서,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5)] 사회민주주의 조직의 창의적이고 의 식적인 지도력은 극히 미미한 역할만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특별 한 조직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비록 그 점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또 당시에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내에 래너 식의 전능한 중앙 권위가 없었기 때문도 아 니다. 오히려, 그러한 권위는 개개의 당 위원회들의 우유부단을 조장하여, 격 렬한 대중과 결단성 없는 사회민주주의자 간에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 이와 똑같은 현상——전술 작성에서 당 지도부의 의식적 주도가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못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독일이나 기타 다른 곳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사회민주주의적 투쟁 전술의 주목점은 대체로 그것이 창안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적이고 때대로 자발적인 계급투쟁의 위대한 창조적 활동들이 지속된 결과라는 점이다. 여기서도 또한 무의식은 의식에 선행하며, 객관적인 역사적 과정의 논리는 그 주체들의 주관적 논리에 선행한다. 이 모든 것에서 사회민주주의적 지도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인 성격을 갖는데, 그것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이 일단 새로운 투쟁 영역을 확보하기만 하면 그들은 그것을 철저하게 활용하여 곧 그것을 더 큰 규모의 새로운 혁신에 대항하는 성체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재 독일 사회민주주의자의 전술은 그 탁월한 다양성과 유연성, 또한 그 확고함으로 모든 곳에서 찬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우리 당이 일상투쟁에서,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의회주의적 조건에 놓임도록 잘 적응해 왔음을 의미할 뿐이며, 또한 우리 당이 의회주의가 제공하는 모든 전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그 자체의 방식에 따라 지배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전술적 정식화는 너무나 효과적으로 더 넓은 지평을 가리기 때문에, 의회주의 전술을 영속화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며, 그것을 마치 사회민주주의 투쟁의 경향 그 자체인 듯이 생각하는 풍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풍조의 특징은 예를 들어, 보통선거권이 폐지되었을 경우에 적합한 전술 변화에 대한 논쟁을 당 출판물에 제기하려는 파르부스의 끈질긴 노력이 당 지도부가 그러한 개연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계속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지 부진함은 대부분, 아직 존재하지 않는, 따라서 추상적인 사유의 허공 속에서만 상상적으로 존재하는 정치적인 상황의 윤파와 확실한 형태를 제시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나타난다. 사회민주주의에 중요한 점은, 결코 미래 의 전술에 대해서 미리 완성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시기를 지배한 투쟁 방식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평가, 투쟁의 각 단계간의 상 호관계에 대한 생생한 감각, 그리고 프롤레티리아 계급투쟁의 궁극적 목표라 는 관점에서 본 혁명적 계기의 필연적인 증거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당 내에 유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당 지도부에 띠년이 의도한 바와 같은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일종 의 절대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그 본성상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보수주의를 인 위적으로, 그리고 상당히 위험할 정도로 강화시키는 것이다. 만약에 사회민주 주의 전술이 중앙위원회의 창조물이 아니라 당 전체의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운동 전체의 창조물이라면, 개별 당 위원회들에게는 특정한 상황에 의해 주어지는 투쟁 수단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혁명적 지도력을 발전시킬 기회를 줄 수 있는 활동 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띠년이 주창한 초중앙집권주의는 전 체적으로 보아, 긍정적인 창조 정신이 아니라 야경국가의 메마론 정신에 몰들 어 있는 것 같다. 그의 사고방식은 주로, 당 활동의 풍부화가 아니라 그 통제 에, 그것의 확대가 아니라 협대화에, 함께 운동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것을 없애는 쪽에 관심을 두고 있다.

 

특히 지금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이러한 종류의 실험에 파고드는 것은 배 나 더 위험해 보인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지금 전체를 타도하기 위한 위 대한 혁명적 전쟁의 전략에, 아니, 전술 분야에서 가장 격렬한 창조적 활동의 시기에 혁명적 시기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그 영향권이 열병과 같 이 발작적으로 팽창하고 수축하는 시기에 서 있다. 이 때 당의 창조성을 제한 하고, 그러한 급작스러운 팽창을 위한 당의 능력에 철조망을 둘러치는 것은 곧 사회민주주의가 운동의 위대한 과업을 수행하는 데에 애초부터 커다란 장 애를 설정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사회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의 특징에 대한 우리의 일 반적 고찰로부터 러시아 당의 조직 규약의 구체적인 초안을 끌어낼 수는 없다. 이러한 초안은 결국 어떤 특정 시기에 수행되는 활동들의 구체적 조건에 달려 있고 러시아에서 그것은 대규모 프롤레티리아 당 조직을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라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규약이) 그 자체의 무오류성을 주장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우선 실천이라는 불 속에서 검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적 조직 형태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개념으로부터 그 원칙적 특성, 즉 그 조직의 정신을 추론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특히 대중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사회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의 규제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 아니라, 주로 그 협조와 연대적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정치적 유연성의 정신이 운동의 원칙과 그 통일에 대한 확고한 충성과 결합되어 있다면, 또 그것이 당 대일 속에 뿌리 박고 있다면 조직 규약 내의 어떠한 문제점이라 할지라도(가장 잘못 작성된 것에서 일지라도) 큰 실천 속에서 해소될 것이다. 조직 형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규약의 문구가 아니라, 적극적인 투시들에 의해 그것에 불어넣어진 의미와 정신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일반 원칙,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현재 러시아가 처한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중앙집권주의라는 문제를 검토했다. 그러나 레난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주장된 초중앙집권주의를 낳은 야경관 정신은 결코 우연한 실수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조직 문제의 가장 세세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회주의에 대한 적대감과 관련되어 있다.

 

레난은, “그것은 조직 규약의 구절들을 통해 다소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회주의의 근원이 깊을수록 그것은 더욱 예리해진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레난은 중앙위원회의 절대권력과 당에 대한 엄격한 법규적 통제를 기회주의적 조류에 대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겼는데 그는 기회주의의 특징을, 자치주의와 무질서에 대한 지식인들의 본래적인 선호와 또 엄격한 당규율과 당 생활에서의 모든 형태의 판로우에 대한 지식인들의 공포로 규정했다. 레난의 전해에 따르면, 그 자신의 본래적 혼란과 개인주의로 인해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무제한적인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지 사회주의적 저작자일 뿐이고, 진정한 프롤레티리아트란 자신의 혁명적 계급 본능으로 인해 최고 당 기관의 엄격한과 혹독한과 결단성에 대해 특별한 즐거움을 느끼며 즐겁게 눈을 감은 채 모든 당 규율의 거친 집행에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관료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는 곧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의 조직 원리와 기회주의적인 조직 원리 간의 관계와 같다고 레닌은 말했다. 그는 중앙집권주의 개념과 자치주의 개념 사이의 갈등과 유사한 갈등이, 혁명적 조류와 개량적 또는 기회주의적 조류가 서로 대립되어 있는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사건들과, 선거구의 자치라는 문제에 대해 시작된 논의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만을 보더라도, 레닌이 이끌어 낸 등식을 재검토해 보는 것은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조직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타고난 능력에 대한 강조와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의 지식인분자들에 대한 의구에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거기에서 우리는 쉽게 기회주의적 견해와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인자와 비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식인 사회주의자 간의 대립은, ‘정치가를 경계하라라는 오랜 주장을 가진 프랑스의 준무정부주의적 순수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이데올로기적 기치로서 그들은 그 기치 하에서 사회주의적 환상에 대한 영국 노동조합주의의 불신과 제휴하고, 끝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노동조합주의적 편협성을 전제적 러시아에 도입한 라보차야 미즐의 순수한 경제주의와도 손을 잡았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실천 속에서, 조직 문제에서의 기회주의와 분권주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와 지식인 분자 사이에도 부정할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적 기초 위에서 발생한 이러

한 현상을 그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 보편적이고 절대적 가치를 지닌 추상적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신성한 정신’, 다시 말해 그 사적·변증법적 사고에 대해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추상에 매몰된 사람은, 본래부터 프롤레타리아트와는 다른, 부르주아지로부터 갈라져 나온 사회 성분으로서의 지식인은 그 자신의 계급성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념적인 길을 택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해야만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자신의 본래의 사회적 바탕과 프롤레타리아 대중에 대한 생생한 연계를 잃지 않는 한) 그 자신의 직접적인 계급 본능이 곧 확고한 혁명적 증거가 되는 계급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보다 기회주의적 일탈에 빠지기가 더 쉽다. 그러나, 지식인의 기회주의에 대한 이러한 경향이 취하는 구체적 형태, 특히 조직적인 경향에서 그것이 취하는 확실한 형태는 항상 해당 사회의 구체적인 사회적 환경에 달려 있다.

 

레딘이 언급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사회민주주의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은 매우 명확한 사회적 기반, 즉 부르주아 의회주의라는 기반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현재 서구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기회주의적 경향을 길러 낸 매장토인 동시에 기회주의의 독특한 분열성을 길러 낸 토양이기도 하다.

 

의회주의는, 우리가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현재의 기회주의적 환상들, 다시 말해 개량과 계급 간의, 개량과 정당 간의 협조, 그리고 평화적인 발전 등에 대한 과대 평가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 내에서조차 프롤레타리아 대중으로부터 지식인의 원을 분리시키고 프롤레타리아 대중 위에 지식인의 원을 세운으로써 이러한 환상이 실현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끝으로, 노동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의회주의는 노동운동을 정치적 출시를 위한 발판으로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의회주의가 노동운동을 부르주아지로부터 버림받은 야심가들의 손쉬운 도피처로 만드는 이유다.

 

이 모든 요소들은 또한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을 혼란과 규율 부재로 이끌었다. 현재의 기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두 번째 특징적 조건은 이미 고도로 발전된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영향력 있는 사회민주주의 당 조직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후자는 지금 부르주아 의회주의 경향에 대한 혁명적 계급운동의 요세가 되고 있는데, 그것은 탄탄하고 활동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혁이 무정형한 유권자 대중 속으로 용해되어야 한다면 해체되고 파괴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재 기회주의의 자치주의 적이고 분권적인 경향이 대두되었다. 그것들은 명확한 역사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특정한 정치적 목적에 매우 적합한 것으로, 레딘이 말한 것처럼 지식인의 분해적인 혼란과 무기력 때문이 아니라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필요에 의한 것임이, 또한 지식인에 대한 심리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회주의자에 대한 정치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들은 노동운동 내의 기회주의가 결코 서구에서처럼 사회민주주의의 강력한 성장의 산물이거나 부르주아 사회의 분열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치적 후진성의 산물인 전제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다르다.

 

사회주의 지식인의 보충원인 러시아 인텔리젠체가 서유럽의 인텔리젠체보다 훨씬 덜 명확한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 더 엄밀히 말하자면 훨씬 뒤처져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은 러시아 프롤레티아의 운동이 초보 단계에 있다는 것과 함께, 때로는 노동운동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완전한 부정으로, 때로는 유일한 구원으로서의 테러에 대한 믿음으로, 결국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자유주의의 수렁에, ‘철학적영역에서는 칸트적 관념론에 빠져 버리는 이론적 불안정성과 기회주의적 동요의 진폭을 한층 더 넓게 만든다.

 

우리의 견해로는,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자 지식인에게는 특히 혼란으로의 적극적 경향을 조장하는 부르주아 의회주의에 대한 경험이 결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사회 심리학적 환경도 결여되어 있다. 자신의 유명한 자아에 대한 예언에 몸을 바치고 이 지배민족 도덕을 사회주의 사상과 투쟁에까지 끌어들이는 현대 서구의 저술가는 부르주아 인텔리젠체가 일반의 전형이 아니라 단지 그 존재의 특정한 단계의 전형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그 자신의 계급 헤게모니라는 사악한 테두리 속에 이미 말려들어 간 퇴폐적이고 부패한 부르주아지의 산물이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지식인의 공상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환상들은 오히려, 그리고 당연히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의 이론적 형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한때의 인민에게로운동, 즉 지식인이 반드시 농민으로 가정해야 한다는 것은 구나로드니키에게는 요즈음의 못박한 손에 대한 성경한 예언이 순수한 경제주의의 사도들에게 그러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식인의 절망적인 고안이었다.

 

우리가, 서구의 엄격한 패턴을 기계적으로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가 아니라 러시아 자체의 특정한 구체적 조건들을 검토함으로써 조직 형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대신이 한 것처럼 분권주의와 같은 어떤 특정한 조직 형태를 향한 일반적 열망을 기회주의 탓이라고 보는 것은 기회주의의 내적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기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기회주의는 조직 문제에서도 단 하나의 원칙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큰 원칙의 부재라는 원칙이다. 그것은 그 목적에 부합된다면 언제나 상황에 따라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회주의를,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운동을 지배를 갈망하는 부르주아 인텔리전자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인 혁명적 계급운동을 손상시키려는 의도라고 규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분권주의가 아니라 (아직 불명확한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소수의 지식인 지도자들의 손에 맡기는) 엄격한 중앙집권주의를 통해 이 목적이 가장 잘 달성되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독일에서도 또한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 즉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력한 핵과 입증된 사회민주주의적 전술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라셀레의 전독일노동자동맹의 물론 극단적인 중앙집권주의와 아이제나와 그룹10)자치주의라는 두 가지 조직적인 조류가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이 가진 명백한 원칙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당 생활의 지적인 부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인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동자들 자신 속에서의 창조성인 무엇보다도 이들 그룹에 의해 발행된 많은 지방신문들이 이 점을 증명해 준다 을 더 많이 이끌어 내고, 그들 자신의 독재때문에 당연히 점차 막한 결과를 거두었던 라셀레주의자들보다도 더 강력하고 탄탄하게 자신들의 운동을 확장시켰던 것은 아이제나와 그룹의 전술이었다.

 

일반적으로, 노동자 대중의 혁명적 부분이 아직 조직되어 있지 않고 운동 자체가 동요하고 있는 상황, 간단히 말해 현재 러시아의 상황과 같은 상황에서는 바로 엄격한 전제적 중앙집권주의가 기회주의적 학자들이 선호하는 조직 경향으로 등장한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후기 단계에서는 의회주의적 배경에 반하여, 그리고 강고하게 결합된 노동자당에도 불구하고 분권화가 기회주의적 지식인에게 상응하는 경향이 된다.

 

레닌의 조직 개념은, 인텔리전자가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미치는 위험한 영향에 대한 바로 레닌 자신의 우려에 비추어 볼 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에 최대의 위험이 된다.

 

사실상, 전투적인 노동자를 위원회의 온순한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판료제적 중앙집권주의라는 명예를 운동에 씌우는 것보다 쉽고 확실하게 아직 초보적인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권력에 굽힌 지식인들에게 갖다 바치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한편, 노동자의 자발적인 혁명적 활동과 정치적 책임감의 제고보다 확실하게 야심적인 인텔리전자가 위원회를 기회주의적으로 남용하는 것으로부터 노동자를 방어해 주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오늘 레닌이 유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일은 금방 명확한 실체가 될 것이다.

 

러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투쟁의 전기반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러시아 인텔리젠차 또한 곧 그 부르주아 계급성분의 명확한 각인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은 사회민주주의가 러시아 노동자 대중의 유일한 지도자이지만 혁명의 내일에는 부르주아지가, 물론 그중에서도 특히 인텔리젠 차가 대중을 자신의 의회주의적 해게모니를 위한 발판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노동자 가운데 가장 자각한 계층의 자발적인 활동과 자유로운 창의성, 그리고 정치적 감각이 덜 발달할수록 그들은 더욱더 사회민주주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정치적인 억압을 받을 것이며 새로운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선동정치가들의 활동은 더욱 쉬워질 것이고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수확물은 더욱더 부르주아지의 곳간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직 규약을 통해 노동운동을 기회주의로부터 방어한다 는 생각 속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는 초중앙집권주의적 입장의 모든 기본적 방 침은 잘못된 것이다. 최근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서 일어난 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가운데도 기회주 의 일반을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무관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소와 함께 노 동운동의 외부로부터 노동운동에 도입된 어떤 요소로 보는 경향이 명백히 대 두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옳다면, 조직에 대한 규약적 규제란 기회주의적 요소들이 주는 압력에 대항하기엔 전혀 쏠모가 없는 것이라는 점이 자명해진 다. 만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프롤레타리아적 요소의 대량 유입이 뿐만 부 르주아지의 급속한 경제적 붕괴와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더욱 급속한 정치적 붕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폐지와 같은 심오한 원인에서 야기된 것이라면, 당 규약의 몇몇 조항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통해 이러한 조류를 저지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환상일 뿐이다. 규약의 조항은 단지 조그만 분파나 사적 결사의 존재를 규제할 뿐이다. 역사의 흐름은 언제나 가장 교묘한 범규 조항보다도 위에 있다. 나아가, 부르주아 사회의 정치적인 붕괴로부터 발생하 는 요소들의 대량 유입을 회피하는 것만이 노동운동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 는 것은 매우 그릇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대변자인 사회민주주 의가 또한 사회의 모든 진보적 이해와, 부르주아 사회 질서 내에서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대변자라는 생각은 단지 사회민주주의의 강령 속에 이 모든 이해들이 이상적으로 집약되어 있다는 의미로만은 이해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정당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가 점점 더 모든 다양한 불만 세력들의 배출구가 됨으로써 실제로 소수의 지배 부르주어지에 대한 전인민의 당이 되는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실현된다. 비프를테타리이트 출신 반대자들을 혁명적 프롤레타리이트의 행동 속으로 융합시키는 것, 한 마디로, 프롤레타리이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그들을 동화시키고 흉수하는 것은 어떻게 이 잘다한 동반자들의 현재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노동자계급의 궁극적 목표에 복속시키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독일에서와 같이, 분위기를 주도하며 후진적이고 뻐뚜부르주어적인 동반자들을 혁명적으로 이끌 수 있기에 충분한 의식을 가진, 이미 강고하게 훈련된 선진적 프롤레타리이트의 부대가 사회민주주의 내에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럴 경우에는 조직 규약에 대해 중앙집권주의적 개념의 엄격한 적용과 당 규율에 대한 엄격한 규정이 기회주의적 조류에 대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한 조건이 예비되어 있다면 조직 규약은 분명히, 그것이 조례스주의적인 혼란의 습격에 대항하는 프랑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에게 투쟁의 무기가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또 지금 독일 당 규약의 이러한 방향으로의 수정이 필연적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의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당 규약 그 자체가 기회주의를 방어하는 무기로 생각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단지 당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이트 다수의 권위 있는 영향력이 실행되기 위한 외적인 강제수단으로만 생각되어야 한다. 그러한 다수가 없는 곳에서는 가장 준법한 문서적 규정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부르주어적 요소들의 유입만이 사회민주주의 내의 기회주의적 경향의 근원인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근원이 오히려 사회민주주의 투쟁 자체의 본질 속에, 그 내적 모순 속에 있다. 승리를 향한 프롤레타리이트의 세계사적 전진은, 거기에서 사상 처음으로 인민대중이 모든 지배계급에 반해 자신의 의지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것이지만 이 의지는 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설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중은 현 체제와의, 다시 말해 현 체제의 테두리 내에서의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 서만 이 의지를 발전시킬 수 있다. 거대한 인민대중과 현존 질서를 초월하는 목표를 동일시하고 일상적인 투쟁과 혁명적 격변을 동일시하는 것은, 그 전체 발전 과정을 통해 두 개의 함정, 즉 그 대중적 성격의 상실과 목표의 포기 사이의, 그리고 분파로의 퇴행과 부르주어적 개혁 운동으로의 경사 사이의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할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변증법적 모순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 전술이 사전에 단호하게 결정될 수 있다거나 노동운동이 단번에 완벽하게 기회주의적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히 비역사적인 환상이다. 확실히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기회주의적 사고의 모든 기본적 형태에 대해 강력한 대항 수단이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대중운동이며 그것을 위협하는 두 개의 함정은 인간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므로, 기회주의적 오류에 대항하는 어떤 행동이 미리 취해질 수는 없다. 기회주의는 실제로 명확한 형태를 띠었을 때만 운동 그 자체에 의해(물론, 마르크스주의가 제공한 무기의 도움을 받아) 극복될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았을 때 기회주의 또한 운동 자체의 산물로, 운동의 역사적 발전에서의 필연적인 한 측면으로 나타나게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아직 초창기 단계에 있고 노동운동의 정치적 조건이 매우 비정상적인 러시아에서야말로 기회주의는 그 상당 부분이 이 근원으로부터, 다시 말해 피할 수 없는 전술적 모색과 실험으로부터, 그리고 극히 예외적이고 유해가 없는 상황 속에서의 현재의 투쟁을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을 갖춘 노선으로 이끌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나오게 된다.

 

만약 이것이 옳다면, 기회주의의 등장은 조직 규약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통해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저지될 수 있다는 생각은 더더욱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한 문서적 수단에 의해 기회주의를 파헤치는 시도는 사실상 기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자체를 손상시키며 또한 이러한 시도는 건강하고 생생한 조직의 맥락을 정지시킴으로써 기회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현 사회 질서에 대한 이 점이 특히 중요한 점이다 투쟁성을 약화시킨다. 즉 수단이 목적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착실하고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 노동운동을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중앙위원회의 감독을 통해 잘못된 경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회민주주의가 가운데 일과의 열망은 일반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러시아 사회주의 사상을 회복했던 저 주관주의의 냄새를 풍신다. 존경스러운 역사의 주체인 인간이 그 자신의 역사적 과정에서 연출하는 이 속임수는 흥미롭다. 러시아 전제주의에 의해 것들라고 갈갈이 찢긴 자아가 자신의 사상 체계 속에서, 자신을 권취에 올려 놓고 존재하지도 않는 인민의 의지당의 이름을 건 음모가의 위원회로서의 자신의 전능을 선포함으로써 원한을 푸는 것이다. 그러나 객관은 한층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며, 러시아의 매질은 역사적 과정의 특정 단계의 정당한표현이라는 것이 입증되기 때문에 곧 승리한다. 마침내 역사적 과정의 한층 더 정당한산물, 즉 러시아 노동운동이 등장한다. 그것은 러시아 역사 상처음으로 진정한 인민의 의지를 창출하는 데 무엇보다도 장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 혁명가들의 자아는 재배르게 노동운동의 선두에서 서서,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의 중앙위원회라는 존재로서 자신이 역사의 전능한 지배자임을 선포한다. 이 악상뻑론 곡예시는 이제 어디서나 자기 자신의 실수를 주장하고 스스로 역사의 변증법을 배워 가는 노동자계급의 대중 자아만이 이 지배자 역할을 하는 유일한 주체임을 알지 못한다.

 

끝으로, 우리 서로 솔직하게 말하자 진정한 혁명적 노동운동에 의해 저절러지는 실수는, 역사적으로 보아, 가장 흘름한 중앙위원회의 확고부동함보다 잘 수 없을 만큼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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