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사소한 불쾌감 때문에 커다란 기쁨이 손상받아서는 안 된다
연명이 연명 규약은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필요로 한다는 결의안을 부결시킨 것은(연명 의사록, 105쪽), 당 대회 다수파 전체가 즉시 지적한 바와 같이 ‘엄연한 당 규약의 위반’이었다. 이 위반을 원칙적인 사람의 행위로 간주할 때, 이는 순전히 부정부주의이며, 대회 이후의 투쟁 상황 속에서 당 소수파가 당 다수파에게 빛을 갖고자 한다는 인상을 지을래야 지울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연명 의사록, 112쪽), 당에 복종하거나 당에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명이, 규약 변경을 요구하는 중앙위원회의 성명에 의거한 결의 안의 채택을 거부한(124~125쪽) 결과 당 조직의 회의로 간주되기를 바라면서 도 동시에 당 중앙기관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 이 회합은 당연이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 다수파의 지지자들은 콜사나운 회귀에 가담하지 않기 위해서 즉시 이 사이버 당 회의에서 퇴장했다.
조직 관계를 판념적으로 이해하는 지식인적 개인주의 — 규약 제1조 문제에 대한 사상적 동요 속에 나타난 — 는 이렇게 해서, 내가 9월, 즉 한 달 반전에 미리 예언하였듯이 실천상에서는 당 조직의 파리라는 논리적 귀결에 이르고 말았다. 그때, 즉 연맹 대회가 끝난 그날 저녁에, 플레하노프는 당의 양중앙기관의 동료들에게 자기로서는 차마 “자기의 동료에게 총을 쏟” 용기가 없으며, “분열하는니 차라리 자기 머리에 총을 쓰는 게 낫고” (제1조에 관한 잘못된 입장에서 나타난 원칙들 때문이라기보다) 사실상으로는 개인적 양보 문제 때문에 지금 이토록 파리적인 투쟁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좀더 큰 해약을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의 개인적 양보를 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플레하노프 동지의 이 방향 전환은 일정한 전당적 의의를 갖는 것으로서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특정짓기 위해서는, 개인적 대화나 사신(이 방법은 최후의 비상 수단이다)을 갖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플레하노프가 이 문제에 대해 당 전체 앞에서 행한 진술, 즉 연맹 대회 직후, 중앙기관지 편집국에서 내가 사임한 (1903년 11월 1일) 뒤 마르토프파로 충원되기(1903년 11월 25일) 전에 씌어져 『이스크라』 제32호에 발표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그의 논문을 갖고 판단하는 것이 더욱 합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의 기본 사상은, 정치에서 완고하거나 지나치게 신탈하거나 양보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 때때로 수정주의자들(그중에는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자들, 혹은 일관성이 없는 자들도 있다)이나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다. 이 추상적인 일반 명제가 『이스크라』 독자 전체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의 사상이 고배하고 사람들이 변증법에 대해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플레하노프 동지의 위임 있고 지만한 성명서(추후 여러 논문 중에서는 웃지 않고선 읽을 수가 없다. 사실상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논문이 게재되었을 당시, 이 논문을 이해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제네바의 2개의 교외(60)에 — 두 곳 모두 같은 머리글자로 시작하는 — 살고 있던 10여 명령이었다. 플레하노프 동지의 블랭은 대회 이 후 소수파와의 투쟁의 모든 단계에 참가한 10명에게만 보냈어야 할 암시, 비 난, 대수적 부호, 수수께끼 등을 수만의 독자들에게 내놓은 데 있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이 불행에 빠진 것은 운 나쁘게도 그가 내세운 변증법의 근본 원칙, 즉 추상적 진리란 없고 진리란 항상 구체적이다라는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연맹 대회 이후 마르트프파에 대한 양보라는 지극히 구체적 사실을 추상적 형태로 표현한 것이 올바르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양보 — 플레하노프가 내세운 새로운 기치 — 라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에 정당하며 또 필요한 것이다. 즉, 양보하는 자가 양보를 요구하는 자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경우(이 경우에 진실한 정치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공공연하고 솔직하게 시인한다)와 더 큰 해악을 피하기 위해 불합리하고 헤로 운 요구인 하지만 이에 양보하는 경우이다. 현재 검토 중인 논문에서 저자가 후자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었음은 명백하다. 즉, 저자는 명백히 수정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이는 지금 모든 당원이 연맹 의사록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다시피 다름아닌 마르토프파이다)에 대한 양보, 분열을 피하기 위해 요구되는 양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보다시피, 플레하노프 동지의 소위 새로운 사상은 별로 새롭지 않은 동속적 지혜의 편인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소한 불쾌감 때문에 커다란 기쁨이 손상받아서는 안 되며, 사소한 기회주의적 행위와 무정부주의적 빈발이 당의 커다란 분열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이 논문을 발표했을 당시 그는 소수파가 우리 당내의 기회주의적 진영이며 그들이 무정부주의적 수단으로 투쟁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고 있었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베른슈타인과 싸웠던 것과 같이(다시 한 번 작은 것을 큰 것과 비교해도 된다면), 이 개인적 양보라는 수단으로 소수파와 싸울 계획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베델은 자신의 당대회에서 공공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른슈타인 동지(플레하노프가 이전에 부르기 좋아한 것처럼 베른슈타인 각하가 아니라 베른슈타인 동지)만큼 환경에 좌우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우리 가운데에다 갖다 놓자. 그런 다음 제국의 회원으로 만들자. 그리고 수정주의자와 싸우자. 그러니 도를 지나친 신랄함(소바케비치 – 파르부스식)으로 수정주의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부드럽게 죽여야’ 할 것이다. 회상컨대, 엠 베르(M. Beer) 동지가 영국 사회민주주의자의 어떤 회합에서 영국의 소바케비치 - 하이드만의 공격에 대해, 독일의 양보 정신, 평화 정신, 온화함, 유연성, 용의 주도함을 옹호하면서 표현했던 것같이. 이와 마찬가지로 플레하노프 동지도 악설로드 동지와 마르노프 동지의 사소한 기회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부드럽게 죽이기'를 원했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을 이주 명확히 암시한 반면 수정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고의로 막연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기획주의로부터 정통주의로 전환하고 있었던 '라보체에 젤로'파이지, 정통주의로부터 수정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한 악셀 로드와 마르토프는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박한 군사적 책략'일 뿐이며, 당의 공개성이라는 포화를 견딜 수 없는 빈약한 보루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정치적 시점의 구체적 상황을 잘 알고 있고 플레하노프 동지의 심리를 통찰한 사람이라면, 당시의 나로서는 내가 취해진 행동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편집국을 넘겨주었다고 나를 비난한 다수파의 지지자들을 향하여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연맹 대회 이후에 플레하노프 동지가 전환하여 다수파의 지지자로부터 어떤 회생을 치르더라도 조정한다는 입장의 지지자로 되었을 때, 나는 이 전환을 가장 좋은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플레하노프 동지는 자신의 논문 속에서 우호적이고 진정한 화해를 위한 강령을 주장하려 하였던가? 그런데 이러한 강령은 대개 당사자 쌍방이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귀착된 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다수파에게 지적한 잘못은 무엇이었는가? 수정주의자들에 대한 소비자비치식의 지나친 신발함이었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이 때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 자신이 말한 당나귀 운운하는 조동인지, 아니면 (악별 로드가 있는 앞에서) 경찰하게도 무정부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하여 언급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추상적으로’, 더욱이 타인에게 잘못을 온근히 전가하면서 진술하려고 했다. 물론 이것은 말하는 사람의 취향의 문제이다. 그러나 나는 공개적으로, 『이스크라』파에게 보내는 편지나 또 연맹 대회 에서 나의 개인적인 신발함을 시인하였다. 내가 다수파의 이러한 ‘잘못’을 어떻게 시인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소수파에 대해서는 플레하노프 동지는 그들의 오류를 수정주의(당 대회에서의 기회주의에 대한 그의 비평과 연맹 대 회에서의 조례스주의에 대한 그의 비평을 참조)와 분열애까지 이르게 하는 무 정부주의라고 명백히 지적했다. 개인적 양보와 일반적인 모든 ‘부드러움’으로 이 오류들을 시인하게 하고 그 오류로 인한 해악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어찌 내가 방해할 수 있었겠는가? 플레하노프 동지가 그의 논문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를 통해, 수정주의자 중에서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 다는 이유만”으로 수정주의자가 된 “적을 용서하라”고 직접 우리들에게 호소 하는 마당에 내가 그런 시도를 어찌 방해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내가 설 령 이 시도를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가 중앙기관지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양보하고 다수파의 입장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로 이동하는 것 말고 다 른 방도가 있었겠는가? 만약 10월 6일자 편지에서처럼 내가 우리의 분쟁을 오로지 ‘개인적 분노’의 탓으로 여기고 있었을 뿐이라면, 나는 이 시도의 실현 가능성을 절대로 부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기꺼이 이 임박한 분열의 모든 책임을 나 혼자 집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수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내 정치적 임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점에서 플레하노프 동지를 믿는다는 것은 곤란하고 위험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 든 점에서 보아 명백한 바와 같이, 플레하노프 동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 도자는 자신의 전투적 성향이 정치적 분별력과 상지될 때에는 그 성향에 따라 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단언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하여, 총을 쏘아야 한다면 다수파를 쓰는 것이 사례 깊은 것이다(11월의 제네바의 상황을 보면)는 의미로 해석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수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플레하노프 동지는 — 변증법은 구체적이고 다변적인 고 찰을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채 — 혁명기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언급할 때, 혁명기에 대한 신뢰의 문제, 당의 어떤 진영을 지도하고 있는 ‘프 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점검게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해 말하고, 규율의 위반에 대해 ‘매매로’ 못 본 체하라고 충고하고, “혁명적 사상에 대한 헌신성과는 전혀 무관한 감상에 근 거한” 지식인적 방중에 대해 ‘매매로’ 양보할 것을 훈계하면서도, 플레하노프 동지는 당 내 다수파의 자유(?)의지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과 무정부주 의적 개인주의자들에 대한 양보의 헌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실천적 활동가 라는 사실을 깨달게 되어버렸다. 유치한 무정부주의적 년세스와 문헌상에서 써우는 것은 쉽지만, 같은 조직 내에서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들과 실천적 인 활동을 함께 수행하기만 여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천에서 무정부주의에 대한 양보에 한도를 결정하려고 하는 문필가는 자신의 터무니없고 공론가적인 문필가격 자만심을 스스로 폭로할 뿐이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새로운 분열이 생기면 노동자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엄숙히(위임을 더해 주 느라 바자로프[62])의 말을 빌려 쓰기도 하면서)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시에 그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참된 구체적 의의를 이해 하지 못할 여러 종의 논문이 신[63]이스크라, 지면에 계속해서 발표되는 사태의 단서를 열었다. 한 중앙위원이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논문의 교정 해를 읽고 플레하노프 동지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한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몇몇 간행물(당 대회 및 연맹 대회 의사록)을 다만 약간이라도 줄 여 보려는 플레하노프 동지의 계획은 바로 이 논문 때문에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고, 이 논문은 호기심을 일으킬 것이며 자극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단 히 불명확한 것을 못사람에게 판결받으려는 것이어서, “무슨 일이 생겼는가?” 하는 당혹감을 불리일으킬 것이 틀림없다고, 플레하노프 동지의 이 논문은 그 추상성과 예매한 일시 때문에 사회민주당의 적대 진영에게 축제의 분위기— 『레볼루치오나야 로시아』(혁명의 러시아)63)의 지면에서는 캉캉춤을 추게 하고, 『오스보보즈제니예』의 철저한 수정주의자들에게는 황홀한 기쁨을 준— 를 안겨 주었다는 사실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우습고도 슬픈 오해— 나 중에 플레하노프 동지가 그토록 우습고도 슬프게 벗어나려고 했던— 의 근원 은 바로 변증법의 기본 원칙, 즉 구체적인 문제는 그 일체의 구체성 속에서 규명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반한 데 있다. 특히, 스트루베 씨의 기쁨은 지극 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플레하노프 동지가 추구했던(그러나 성공할 수 없었던) 그 ‘훌훌한’ 목적(부드럽게 죽이는 것)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목적하다시피 신『이스크라』지를 통해 시작된 우리 당의 기획주의적 진영이론의 전환을 스트루베 씨는 환영하였으며 또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떠한 사회민주당 내의 기획주의로의 어떠한 전환을— 비록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환영하는 것은 러시아 부르주 아 민주주의자들만이 아니다. 교활한 적이 내리는 판단에는 완전한 오해란 좀 처럼 없는 법이다. 어떤 사람의 오류는 누가 그를 칭찬하는가 보면 알 수 있 다. 플레하노프 동지가 독자의 부주의함을 기대하며, 그들로 하여금 다수파가 충원 문제에서 개인적인 양보를 고집스럽게 반대한 반면 당의 좌의으로부터 우의으로의 이탈에는 반대하지 않은 것처럼 보게 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 다. 문제는 플레하노프 동지가 분열을 피하기 위해 개인적 양보(이것은 대단 히 칭찬할 만한 일이다)를 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을 결여한 수정주의자들 및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자들과의 싸움의 필요성을 충분히 깨 닫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에 대한 실천상의 가능한 양보의 한도에 대해 그와 의견을 달리한 다수파와의 싸움을 선택한 데 있다. 문제의 요점은 그가 편집국의 인적 구성을 변경시켰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수정주의 및 무정부주의자와의 싸움이라는 자기의 입장을 저버리고 당 중앙기관 지에서 이 입장의 옹호를 그만둔 것에 있다.
그 당시 다수파의 유일한 조직적 대표자였던 중앙위원회에 대해서 말하면, 플레하노프 동지는 당시 오로지 무정부주의에 대한 실천상의 가능한 양보의 한도에 대해서만 중앙위원회의 의견을 달리했다. 내가 탈퇴함으로 해서 ‘부드럽게 죽인다’는 정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게 된 11월 1일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나갔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온갖 접촉을 통해서 이 정책의 타당성을 점검할 말은 기회를 가졌다. 플레하노프 동지는 그 시기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은 탈퇴자면 마르토프파가 편집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입장권이었으며 지금도 그려진다. 수정주의(우리가 싸움이 하면서도 용서해야 하는)와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우리가 환심을 사면서 부드럽게 죽여야 한다)라는 표어가 이 입장권에 강조의 이탈력체로 씌여졌다. 제군들, 제발 들어와 주시고, 나는 당신들을 부드럽게 죽이겠소—이것이 바로, 플레하노프 동지가 그 초대장을 통해서, 편집국의 자신의 새로운 동료들에게 한 말이었다. 중앙위원회로서는, 자신의 견해에서 보아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에 대한 실천상의 허용 가능한 양보의 한도에 관하여 자신의 최후의 탈(최후통집, 즉 평화의 가능성에 대한 최후의 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당신들은 화해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유화와 평화에 오와 양보 정신 등등을 입증할 만한 여러 지위를 제공할 때나(당 내의 평화—는 정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평화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가 당을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평화—가 보장된다면 그 이상은 줄 수가 없다), 이 지위들을 받아들이고 아키모프로부터 플레하노프에게로 조금씩 다시 전환해 오시고 혹은 그것이 아니라 당신네들의 입장을 고집하고 발전시켜서 중국적으로(설명 조직 문제 분야만일지라도) 아키모프 쪽으로 전환하여 플레하노프가 아니라 당신들이 옳다고 당을 설득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들 자신의 문턱가 그룹을 만들고 차기 대회 대표 선출권을 확보하여 정정 당당한 투쟁과 공개적 논쟁을 통해 다수를 장악하는 일에 착수하시고, 1903년 11월 25일발 중앙위원회 최후통집 속에서 마르토프파에게 매우 분명하게 제시한 이 양자택일(『게임 상태』와 『연맹 의사록 주체』를 참조하라*)은 1903년 10월 6일에 플레하노프와 내가 구편집국원들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서신의 내용은 개인적 분노(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라도 ‘충원’할 수도 있다)인가 아니라 원칙적 의견 차이(그렇다면, 우선 당을 설득해야 하며, 그 다음에야 비로소 중앙기관들의 인적 구성의 변경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인가 하는 것이었다. 마르토프 동지가 바로 그때 그의 신앙고백 『다시 소수파가 되어』 속에서 다음과 같이 써 준 덕분에 중앙위원회는 마르토프파가 스스로 이 까다로운 선택을 하도록 기꺼이 맡길 수 있었다.
소수파는 하나의 명예를 우리의 것으로서 주장한다. 그것은 ‘폐배자’가 되어도 새로 온 당을 결성하지 않는다는 우리 당의 역사상 최초의 실례를 보인다는 명예이다. 소수파의 이러한 입장은 당의 조직상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전해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과거의 당 활동과 관계 맺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수파는 ‘지면(紙面)의 혁명’의 신비적 힘을 믿지 않으며, 자신들의 노력이 생활 속에 내린 깊은 뿌리야말로 당 내부에서의 순수한 사상적 선언에 의한 자신들의 조직 원칙의 승리를 보장해 준다고 생각한다(나의 강조).
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훌륭한 말인가! 그리고 이것이 말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다면 또 얼마나 쓰라릴까……. 마르토프 동지, 당신에게는 미만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받을 지각이 없는 이 ‘명예’를 다수피를 대신하여 우리들의 것이라고 주장하겠소. 이 명예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며, 정말전을 벌 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요. 왜냐하면 써를 근성의 전통이 분열에 대한 대단 히 경솔한 자세와,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라는 격언의 극단적인 적용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겼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기쁨(단일의 당을 갖는 것)은 사소한 불쾌감(충원 문제를 둘러싼 꼴 사나운 입씨름)보다 훨씬 중요시되어야 했으며 훨씬 중요했다. 나는 중앙기관 지를 사임했고, (나와 플레하노프가 중앙기관지 편집국의 대표로 당 평의회에 파견했던) Y[갈페린의 암호 — 편집자] 동지도 평의회를 사임했다. 마르토프와는 평화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최후의 권고에 선전포고와도 같은 편지(앞에 인용 한 출판물들을 보라)로 대답했다! 그때, 바로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편집국에 공개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편지(7 이스크라, 제53호)를 썼다. 만약 수정주의에 대해 말하고, 일관성의 결여와 무정부주의적 개인주의 및 여러 지도자들의 폐 배에 대해 논쟁하게 되었다면, 여러분, 사실을 감추지 말고 일체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 바로 이것이 공개성에 대한 서신의 내용이었다. 편집국은 분연히 화를 내며, “써클 생활의 사소함과 꼴사나움”(『이스크라』 제53호)을 구태여 일으키지 말라고 근엄한 훈계조로 이야기했다.64) 오, 그렇습니까! “써를 생활의 사소함과 꼴사나움”이라? …… 과연, es ist mir recht(훌륭합니다 — 편집자). 여러분, 나도 거기에 찬성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충원’ 문제를 둘러싼 집착이 바로 써클적 꼴사나운 입씨름임을 여러분 자신이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옳다. 그런데 써클적인(그와 같다고 할 수 있는) 편집국이 같은 제53호 사설에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 등에 대해 지껄이고 있는 것은 도대체 웬 불협화음인가? 당신들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중앙기관지의 충원을 둘러싼 싸움의 문제를 제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물사나운 입씨를 올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중앙위원회의 충원 문제를 제기할 것인데, 이 때 이것을 물사나운 입시름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형식주의’에 대한 원칙적인 의견 차이라 불리야 할 것이다 하고, 안 될 말이오, 존경하는 동지 여러분.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없다. 당신들은 나의 요새를 포격하려고 하면서 나에게 대포를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참 옷기는 사람들이군! 그래서 나는 『편집국에 보내는 편지 — 나는 왜 『이스크라』 편집국을 사퇴하였는가?』를 『이스크라』와는 별도로 인쇄하였는데, 그 속에서 나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당신들에게는 중앙기관 지름, 우리에게는 중앙위원회를 배정하는 것에 기초하여 평화가 가능한가 이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물었으며, 그렇게 되면 어느 쪽도 당 내에서 ‘따돌림당 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고 나서 우리는 기회주의로의 전환에 대해 처음에는 문헌상에서 그 다음에는 아마도 제3차 당 대회에서 논쟁할 것이 다 하고 말했다.
평화에 관한 이 언급에 대한 대답으로서 적들은 평의회까지도 포함한 그들의 모든 대포의 포문을 열었다. 탄환이 내 머리 위에 폭우처럼 쏟아졌다. 독재자, 슈바이처, 판로주의자, 형식주의자, 초중앙, 일면적이다, 편협하다, 완고하다, 의심 많다, 호전적이다……. 좋다. 친구들! 말 다 했소? 더 이상 할 말은? 당신들 포문은 정말 형편없을……
이제 내가 말할 차례이다. 신『이스크라』의 조직상의 새로운 견해의 내용을 보자. 그리고 우리가 제2차 대회의 토론과 표결의 분석을 통해서 그 참된 성질을 이미 명확히 한 바 있는 우리 당의 ‘다수파’와 ‘소수파’로의 분열이 이 견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