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를 지나다
장기간 백수에서 미취업 노동자로 겨우 벗어났다. 그동안 하청 노동자로 동종 업계에 몸담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도 그렇다. 취업이라는 주어진 기간 동안 과거 가장 열악한 현장에 남아 일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일하는 사람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사용자의 미흡한 태도에 있었다. 가장 미천한 곳에서도,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업계 비밀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자신의 직위가 곧 존엄으로 여기며 직장이 주는 안전에 안주하고 마는 태도를 가진 이들도 참 많았다. 의외로 현장의 손님이자 청중과 관객들은 객체로 방문함에도 직장 내 모습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들이다.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있고, 주체가 객체로 상호 작용한다. 가까운 현장의 백수가 노동자가 되기에도 세대를 이어 기나긴 암흑 시절이 과연 당연한 것인지는 지금도 체감하고 있다.
한 동료가 이전의 직장에 대해 내게 말했다. "이곳은 일하기에는 더 이상 적합한 곳이 아닌 것 같아요." 맞는 말이다. 이전의 직장들은 모두 그러한 곳들 뿐이었다. 그 동료와도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내가 또는 당신이 여기에 존재함은, 단순히 눈 앞에 사물이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본질을 거치는 일이다. 여기에도 수많은 투쟁의 순간들이 깃들어 있다. 예전에 잠깐 읽은 『쇳밥일지』처럼 산업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는 분들에게 직장의 상실 또는 실직이 주는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같은 노동자 출신임에도, 자신들이 일하는 그때까지는, 직장이 주는 돈벌이에 쉽게 안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생존 투쟁의 과정이며 반복되는 업무와 일거리가 꾸준하게 들어오는 이상, 최선을 다해도 부족한 설명 하나 없는 비체계적인 구조가 여전히 노동자를 위협하고 억압한다는 말이다.
불안이 감도는 기나긴 시절이다. 누구처럼 일찍 결혼에 성공하여 꽃 피운 '화양연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백수의 공백기에는 끊임없는 잠적만이 남는다. 마음의 불꽃은 일그러진 채 잠식되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혹자는 "일할 수 있음은 큰 다행"이라 말한다. 예전에는 '죽음'을 주로 직시했고, 그것은 늘 생존과 직결된 부분이었다. 최근에 면접관들은 당돌함에 코웃음을 쳤지만 정작 그들이 간과한 사람의 존중은 없었고 자신들의 경력을 과시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들이 놓친 것을 본다.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인재가 아닌가 싶다. 비록 백수임에도 자신의 건강과 성장, 그리고 용기마저 꾸준하게 노력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인생도 헛된 일은 없다. 그 실패에 대해 누군가가 함부로 단정할 때에도, 세계는 또다시 나아갈 것이며, 지금의 후퇴에 설레발보다는 더 나은 한 걸음을 위한 전 일보가 된다. 치열한 생존의 전장 속에서도 인간은 성인이 된다. 이는 마치 폭격기를 뚫고 공중전까지 치른 후, 겨우 살아남은 이가 남기는 최후의 전보와도 같다. 결국 겪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백해무익'하더라도 꾸준히 알고자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