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농산물의 기술적 가공
농업 연구자들은 주요 시장 생산물에 따라, 농업 체계를 분류했을 때, 산업적 또는 기술적인 농업 체계를 특수한 범주에다 할당한다는 점이다. 체계 핵심으로는, 농산물이 개인적 소비이거나, 또는 생산적 소비 이전에 기술적 가공을 거치게 된다. 가공을 담당하는 시설에서는 원자재가 생산되는 농민 일부를 구성하거나, 농민으로부터 원자재를 매수하는 특수 산업가에 속한다. 정치경제학적으로, 두 유형 차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농업 기술에 따른 무역 성장은 자본주의 발전에서도 매우 중요해진다. 발달 뱅경에는 상업적인 농업 발전으로부터 한 형태를 띠게 되며, 더 나아가 농업에 따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산업 분야로 전환되는 과정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준다. 농산물에 따른 기술적인 가공 발전으로는 일반적으로 농업의 기술적인 발전과 밀접하다. 가공을 위한 원자재 생산 자체가 농업 개선, 뿌리 작물 심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쪽으로는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은 농업에서도 자주 활용되어, 농업 효율도를 높이거나, 농업과 산업 간 균형에 따른, 상호 의존도를 어느 정도는 회복시킨다. 균형에 따른 상호 의존도가 깨지면, 자본주의로부터 매우 심각한 모순 가운데 하나가 발생한다.
다음으로는 개혁 이후로 러시아에서 기술적인 농업 무역 발전을 설명하겠다.
- 증류
여태까지 증류는 농업 관점에서만 고찰했다. 대규모 공장에서 증류는 급속도로 집중된 현상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소비세 부과 때문에, 공장 기술의 급속한 발전, 생산 비용의 절감, 소비세 인상, 소비와 생산 발달이 지연되는 현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러시아 제국 전체에 따른, 농업 증류 통계도 있다. 따라서 증류소 9/10 이상은, 전체 생산량에서 4/5 이상을 차지하는, 농업과 직접 연관된다. 시설로는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으로부터 설립된 모든 지주 농장에서도 동일한 성격을 부여한다. 증류소는 대부분 예외 없이 지주, 귀족층에 속했따. 검토 중이던 상업적인 농업 유형으로는 특히 러시아 제국 전체 증류소 수로부터 1/10이상, 1896-1897년 239개로, 225개는 농업 및 혼합 증류소에 집중된 증부 흑토 구베르니아 시로부터 발전했고, 총 주류 생산에서 1/4 이상을 생산했으며, 1896-1897년, 7,785,000베드로 가운데 6,828,000베드로로, 농업 및 혼합 증류소였다. 따라서 노동 용역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농업의 상업적인 성격으로는 다른 성격에 비해 곡물과 감자로부터 증류수(보드카)를 증류하는 데 매우 빈번하게 드러났다. 감자 증류는 개혁 이후로는 특히 급속한 발전을 이뤘고, 러시아 전체와도 관련됐다. 따라서 증류된 작물 양은 일반적으로 두 배로 증가했고, 사용된 감자 양은 약 15배로 증가했다. 감자 면적과 작물에서도 큰 증가로부터 농업 기술 개선과 더불어 3포기 체계를 다포기 작물 순환으로 대체하는 등 정확히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농업 발전을 확립시킨다는 명제를 뒷받침했다. 증류가 매우 크게 발전한 지역에서는 러시아 구베르니아 시로부터, 발트해와 서부 구베르니아 시를 제외하고는, 1인당 감자 순 수확량은 매우 컸다. 따라서 북부 흑토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1864-1866년, 1870-1879년 및 1883-1887 수치로는 각각 0.44, 0.62 및 0.60체트버트였지만, 유럽 러시아 전체 50개 구베르니아 시에서 해당 수치는 0.27, 0.43 및 0.44체트버트였다. 1880년대 초, <역사 통계 조사>에서는 감자 재배가 매우 크게 확장된 지역으로는 흑토 요대(벨트) 중부와, 북부에 따른 모든 구베르니아 시, 볼가 및 트란스볼가 구베르니아 시, 중부 비흑토 구베르니아 시를 포함했다. 지주와 부농으로부터, 감자 재배 확대로는 고용 노동력에 대한 수요 증가를 뜻했다. 감자 데시아틴 재배로는 곡물 데시아틴 재배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을 흡수해서, 중부 흑토 지역에서는 기계 사용이 여전히 매우 적었다. 따라서 증류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감소했지만, 뿌리 작물 재배로부터, 자본주의 농업 제도로부터, 노동 용역 제거는 농촌 일용직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 사탕무 설탕
사탕무 가공은 증류보다 대규모 자본주의 기업에 더욱 집중됐고, 지주 주로 귀족 영지로 부속됐다. 해당 산업에서 주요 지역은 남서부 지방이고, 다음이 남부 흑토 지방과 중부 흑토 지방이다.
당시에 사탕무 재배 면적은
1860년대: 약 100,000데시
1870년대: 약 160,000데시
1886-1895년: 230,000데시
1896-1898년: 360,000데시
1900년: 478,778데시
1901년에는 528,076데시
「재정부, 1906」, 토고보프로미 셸레나 가제타(Torgovo-Promysh/Ennaya Gazeta, 1901)에 따르면,
1905-1906: 483,272데시로 개혁 이후로 경작 면적은 5배 이상 증가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수확 및 가공된 사탕무 양이 증가했다.
가공된 사탕무 평균 무게
1860-1864년: 4,100,000베르코베트
1870-1874년: 9,300,000베르코베트
1875-1879년: 12,800,000베르코베트
1890-1894년: 29,300,000베르코베트,
1895-1896, 1897-1898년: 35,000,000베르코베트
가공된 사탕무 양은 1860년대 이후로 8배 이상 증가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방식으로 조직된 대규모 농장에서 사탕무 수확량, 노동 생산량은 크게 증가했다. 뿌리 식물과 같은 사탕무를 순환 농법에 도입해서, 개선된 경운과 가축 사료 등을 이용한 보다 발전된 경작 체계로 전환과도 불가피했다는 점이다. 『역사 통계 조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사탕무 토양 경운으로는 특히 남서부 일대와 비스툴라 구베르니아 시의 많은 사탕무 농장에서 고도로 완전해졌다. 많은 지역에서도
다소 개량된 많은 도구와 쟁기를 사용해서 경운했었고, 어떤 경우에는 증기 경운도 도입됐다. 대규모 자본주의 농업에 따른 발전에는 농업 임금 노동자, 특히 일용직 노동자에 대한 수용를 상당히 증가시켰으며, 특히 여성과 아동 노동 고용이 폭 넓었다. 『역사 통계 조사』에 따르면, 인접한 구베르니아 시 사이에서는 사탕무 지역 이주로 알려진 특수한 유형으로는, 이주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탕무 토지 1모로그, = 2/3데시아틴을 완전하게 경작하는 데는 여성과 청소년을 제외하고는, 남성의 경우 12일, 손으로 하는 경우에는 25일이 걸린다고 추산했다. 그러나 사탕무 재배 데시아틴 증가만으로는 고용 노동 수요를 완전하게 파악하기에는 어려웠다. 일부 일자리는 1인 당 평균 임금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수공예 산업 보고서 및 조사, 국유재산부 발행, 상트페테르부르크, 1894』를 살펴보자. 체르니코프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크롤레베츠 마을에서, 지역 여성들은 사탕무 밭일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가을에는 사탕무를 손질하는 데, 베르코베트 당 10코펙을 받았으며, 두 명의 여성은 하루에도 6-10베르코베트를 손질했었다.
그러나 일부는 재배 기간 동안에 잡초 제거와 괭이질 작업을 계약하기도 했다. 파기와 손질까지 포함한 전체 작업에 대해 손질된 사탕무 베르코베트 당 25코펙을 받았다. 사탕무 농장 노동자들의 처우는 극도로 열악했다. 「하르코프 주 의료 기록부, 러시아 보도지(루스키예 베도모스티), 1899」에 따르면, 붉은 사탕무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조건은 지극히 비참했다는 점이다. 아키트로이카 지역(Akhtyrka)에서 코델바 마을에 있는 젬스토보 의사였던 포돌스키(Podolsky) 박사는 가을에는 부농의 붉은 사탕무 농장에서 일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장미진(발진 티푸스)가 발생했었다고, 보고했다. 노동자들의 여가 및 잠자리로 지정된 헛간에서는 농장주들로부터 매우 더러운 상태로 유지됐다. 일이 끝났을 무렵에는 잠자리에 사용되던 짚이 문자 그대로 거름으로 바뀌었으며, 결코 변하지도 않았다. 감염의 번식지였기 때문이다. 한 곳에서 데려온 네다섯 명의 환자들은 장미진으로 즉시 진단됐다. 같은 농장에서는, 의사의 소견에 따르면, 대부분 매독 사례는 붉은 사탕무 농장에서 발생했다.
파인버그는 공장에서 일하는 것만큼이나 노동자 자신과, 주변 주민들에게 해로운 농장 작업으로부터, 특히 여성과 청소년들이 많이 참가했으며, 노동자들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방치되어, 기초적인 보호마저 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포돌스키 박사는 하르키우 구베르니아 시 제7차 의사회에서 로마넨코 박사가 표명한 의견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강제적인 규정을 발표할 때는 사탕무 농장 노동자들의 노건도 고려해야만 했다.' 노동자들은 매우 필수적인 것들이 부족했다. 몇 달 동안이나, 야외에 머물렸으며, 공동 그릇으로 식사했다. 사탕무 재배의 발달은 농촌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크게 증가시켰고, 이웃 농민들을 농촌 무산층으로 전락시켰다. 농촌 노동자 수 증가는 사탕무, 설탕 산업 종사자 수에 따른 미미한 감소로부터도 거의 저지되지는 않았다.
- 감자 전분
지주 농장에서만 이뤄지는 기술 생산 분야를 거쳐, 농민들이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분야로 넘어가보자. 여기에서는 주로 감자 일부는 밀과 기타 곡물 포함으로부터, 전분과 당밀로 가공된다. 전분 생산은 개혁 이후로, 섬유 산업의 큰 발달로부터 전분 수요가 증가하면서부터 특히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생산 분야가 담당하는 지역에서는 주로 비흑토 지대, 산업, 부분적으로는 북부 흑토 주베르니아였다. <역사 통계 조사>에 따르면, 1860년대 중반에는 약 60개 사업체가 있었으며, 생산량은 약 27만 루블이었지만, 1880년에는 224개의 사업체가 있었고, 생산량은 1,317,000루블이었다.
「공장 및 사업장 명부, 1890년」에 따르면, 192개 사업장에서는, 3,418명의 노동자가 고용됐으며, 생산량은 1,760,000루블이었다. 『역사 통계 조사』에서는 지난 25년 동안 전분 생산에 종사하는 사업장 수가 4와 1/2배, 총 생산량은 10과 3/4배 증가했다. 그럼에도 생산력은 해외에서 전분 수입 증가로부터 입증됐지만, 전분 수요를 충족시키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각 구베르니아 통계를 분석한 『역사 통계 조사』에서는 감자 전분 생산이 밀 전분과는 다르게, 농업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농민과 지주 수중에 집중됐다는 점이다. 차기에는 폭 넓은 개발을 보여줬으며, 농촌 인구에게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누가 이점을 누렸을까. 그러나 먼저 전분 생산 발전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었다. 새로운 소규모 공장 등장과 농민 생산의 발달과 대규모 증기 동력 공장으로부터 생산이 집중됐다. 1890년에는 증기 동력 공장이 77개가 있었다. 전체 노동자 수에 따른 52%와, 총 생산량 60%는 공장으로 집중됐다. 올로로브(Orlov), 「명부」에 따르면, 1870년대 이전에 설립된 공장에서는 11개에 불과했으며, 17개는 1870년대에, 45개는 1880년대에, 2개는 1890년대에 설립됐다.
농민 전분 생산 경제를 알아보고자, 지역 조사 표를 살펴보자. 1880-1881년 사이에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4개 군 지역으로부터 43개 마을이 전분 제조에 종사했다. 공장 수는 130개로 추산됐으며, 78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고, 생산량은 최소 13만 7천 루블에 달했었다. 산업은 주로 개혁 이후로 확산됐고, 기술은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더 많은 고정 자본을 필요로 했으며, 더 높은 노동 생산력을 보이는 대규모 공장이 형성됐다. 그동안 '손 강판'에서, '강판'으로 대체됐고, 마력이 등장했으며, 드럼 통 생산이 도입되어, 생산력이 크게 개선됐고, 가격도 저렴해졌다. 공장 규모에 따른 수공예인에 대한 각 호별 인구 조사를 수집한 통계도 있었다. 시설에 따른 생산이 확대됐고, 고용된 노동자들의 고용은 증가했으며, 노동 생산력이 향상된 소규모 자본주의 시설을 갖게 됐다. 해당 시설에서는 농민 부르주아에게 상당한 이윤을 가져다줬으며, 농업 기술도 향상시켰다. 그러나 작업자 노동자들의 상태는 극도로 비위생적인 노동 조건과 긴 노동 시간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다.' '격자' 시설을 소유한 농민들은 매우 유리한 조건들 속에서 농사를 지었다. 할당지, 주로 임대 토지로부터 감자를 심으면, 호밀이나, 귀리를 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작업장 주인들은 사업을 확장하고자, 빈농들에게서 상당한 양으로 할당지를 임대했다. 브론니치 지역, 치비노 마을에서는 마을에서 105개 농민 가구 가운데 18명의 전분 작업장 주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난 농민과 말 없는 농민들에게서 할당지를 임대해서, 자신들의 할당지 61개에 임대받은 할당지 133개를 더 추가했다. 이들의 수중에는 총 194개 할당지가 집중됐으며, 마을 전체 할당지에서는 44.5%였다. 정확히 비슷한 일들이 귀속(Returns)되어, 전분 산업이 다소 발전된 다른 마을에서도 발생했다. 전분 작업장 주인들은 다른 농민들보다도 두 배나 더 많은 가축을 보유했다. 가구 당 평균 3.5마리 말과 3.4마리 소를 가졌으며, 지역 농민 전체가 1.5마리 말, 1.7마리 소를 가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호별 인구 조사 표에 따라, 68명의 작업장 주인 가운데 10명은 매입 토지를 소유했으며, 22명은 임대 배정지 토지를, 23명은 임대 배정 토지를 소유했었다. 쉽게 말해서, '전형적인' 농민 부르주아지의 대표들이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비슷한 관계로, 블라디미르 구베르니아 시에서 유리예프 지역에 따른 전분 제조 산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작업장 주인들은 주로 임금 노동 도움으로부터 생산을 수행했다. 30개 작업장에서 128명의 노동자 가운데 86명이 고용됐다. 여기에서도 작업장 주인들은 축산업과 농업에 있어서, 일반 농민들보다도 훨씬 우위에 섰다. 감자 섬유질(펄프)를 가축 사료로 썼으며, 자본주의 농부조차도 농민들 사이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V. 프루가빈(V.Prugavin)은 12명의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 약 1,500루블 가치를 가진 전분 공장을 소유한 농부 농장에 대해 설명했다. 농부는 토지를 빌려 확장해서, 자신의 농장에서 감자를 재배했다. 작물 윤작은 7개의 밭으로 이뤄졌으며, 토끼풀(클로버)를 포함했다. 농부는 농장을 위해서 7-8명의 일꾼을 고용했으며, 봄부터 가을까지 고용했다. 섬유질은 가축 사료로 사용됐고, 농장 주인 폐수를 밭에다 쓸 계획이었다. V. 프루가빈은 사업들이 매우 '예외적인' 조건을 갖췄다고, 단언했다. 물론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든, 농촌 부르주아지는 늘 농촌 인구에서도 극소수를 차지했으며, 같은 뜻에서 '예외'라고 불리울 수 있었다. 그러나 해당 용어로는 러시아에서 다른 상업적인 농업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분 생산 지역에서도, 자본주의 농업을 조직하는 농촌 기업가 계급이 형성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는 없었다.
- 식물성 기름 생산
아마씨, 대마, 해바라기 및 기타 씨앗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것도 농업 산업이다. 1864년 식물성 기름 생산량은 약 1,619,000루블로, 1879년에는 6,486,000루블, 1890년에는 12,232,000루블이라는 점에서 개혁 이후로는, 식물성 기름 생산 발전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해당 생산 부문에서도 중복된 발전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기름을 판매하고자, 생산하는 소규모 농민, 한 쪽에서는 지주로부터 기름 압착기가 건설됐다. 다른 쪽에서는, 생산을 집중시켰으며, 소규모 시설을 밀어내는 대규모 증기 구동 공장이 개발됐다. 여기서는 기름을 함유하는 식물에 따른 농업 가공에만, 관심을 보였다. <역사적인 통계 조사>에 따르면, '대마씨 기름 압착기 소유주'는 유복한 농민층에 속했다. 가축에게 좋은 기름 빵 사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식물성 기름 생산에 따른 특수한 가치를 둘 수 있게 됐다. 프로가빈은 유리예프 지역, 블라디미르 구베르니아 시에서 아마씨 기름 생산에 따른 폭 넓은 발전을 언급하면서도, 농민들은 적지 않은 이점을 얻는다고 말했다. 작물과 가축 사육은 기름 압착기를 소유한 농민들에게는 대부분 농민들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에서 이뤄졌으며, 일부 기름 제분업자는 농촌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했다. 1894-1895년 페름 수공예 인구조사에서는 또한 수공예 기름 제분업자가 대다수 농민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작물 재배를 한다는 점에서, 작물 재배 면적이 더 넓었고, 가축이 훨씬 더 많았으며, 수확량이 더 많거나 하는 등, 경작 개선과 더불어, 농촌 노동자 고용이 이뤄진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시에서는 개혁 이후 시기에는 지역 언론에 따르면, 기름을 짜는 해바라기 씨앗에 따른 상업적인 재배가 특수하게 발전했다. 1870년대 러시아에서는 해바라기 재배 면적이 약 80,000데실로 추산했고, 『역사 통계 조사』에서는 1880년대에는 약 136,000데실로 추산했으며, 그 중에 2/3은 농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특정 자료에 따르면, 공장 면적은 상당하게 증가했고, 어떤 곳에서는 100% 이상으로 증가했다. 『역사 통계 조사』, 「생산력」에서는 알렉세예프카 마을에서만 버루크(Biryuch Uyezd) 지역, 보로네즈 구베르니아 시(Voronezh Guberina)에서 40개가 넘는 기름 압착기가 있었으며, 알렉세예프 자체로는, 해바라기 덕분에 번영했고, 초라한 작은 마을에서는 철판 지붕으로 덮인 집과 상점이 있는 부유한 도시 선박으로까지 발전했다. 농민 부르주아에 따른 부가 농민 대중에 따른 상태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는, 1890년 알렉세예프스카 마을에 등록된 2,273가구 남녀 수 총 13,386명 가운데 1,761가구는 가축이 없었고, 1,699 가구는 농기구가 없었으며, 1,480가구는 토지를 경작하지도 않았고, 33가구는 산업에 종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농민 기름 압착기는 '젬스트보 가정 방문 인구 조사'에서 '상업 및 산업 시설'로 포함됐고, 분포와 역할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미 언급했었다.
- 담배 재배
담배 재배 발전
러시아 평균 수확량
1863-1867년: 32,161데시, 1,923,000푸드, 농장 수: 75,000개
1872-1878년: 46,425데시, 2,783,000푸드, 농장 수: 95,000개
1880년: 50,000데시, 4,000,000푸드, 농장 수: 650,000개
같은 유형의 상업적인 농업에 이끌려온 소규모 재배자 수도 상당히 증가했다. 담배 재배에서는 상당한 수로 노동자가 필요했다. 따라서 농업 이주 유형 가운데 담배 농장 이주 특히 담배 재배는 이례적으로, 급속도로 확대된 남부 외곽 지역에 대한 언급도 필요했다. 담배 농장 노동자들은 이미 매우 고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무부 명령으로부터 발간된, 「러시아 담배 재배 조사, 상테르부르크, 1894」에서는 상업적인 농업 한 분야로부터, 담배 재배에 대한 매우 상세하고도, 흥미로운 자료가 담겨 있었다. V.S.셰르바초프는 말로로시아 지역에서 담배 재배에 대해 설명하면서,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 세 군(프릴루키, 도흐비차, 롬니)에 대한 매우 정확한 자료를 제공했다. 셰르바초프가 수집했던 폴타바 구베르니아 시 젬스트보 위원회 통계국에서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담배를 재배해는 세 군에 속하는 25,089개 농가를 포함하여, 담배는 6,844데시아틴, 곡물은 146,774데시아틴을 재배했다. 농가 분포 통계도 있었다. 담배와 곡물 재배 면적에서는 자본주의 농장 수중으로 집중됐다. 2만 5천 개 농장 가운데 3천 개 농장에서는 곡물 재배 면적은 절반 이상이었고, 14만 7천 개 농장 가운데, 7만 4천 데시아틴을 차지했으며, 농장 당 평균 25데시아틴에 육박했다. 담배 재배 면적으로는, 거의 절반인 6,800개 농장 가운데, 3,200데시ㅇ아틴이 해당 농장에 속했으며, 농장 당 평균 1데시아틴이 넘었지만, 다른 모든 집단에서는 담배 재배 면적은 가구 당 1/10-2/10데시아틴을 넘지는 않았다. 세르바초프는 또한 담배 부문에서도, 동일한 농장들이 지역에 따라 집단화됐음을 보여주는 통계를 제공했다. 따라서 담배 재배 지역에 따른 집중도가 곡물 재배 지역보다도, 상당히 높았다. 해당 지역에서 특정 상업적인 농업 분야는 일반적인 농업보다도, 자본가 수중에 더 집중됐다. 25,000개 농장 가운데 2,773개 농장이 6,844데시아틴 가운데 4,145데시아틴을 차지했으며, 3/5가 넘었다. 전체 농장 주로는 1/10이 조금 넘고, 그 수가 324개에 달하는 가장 큰 담배 농장 주는 2,360데시아틴이었으며, 곧 전체 면적으로는 1/3이상을 차지했다.
농민 당 평균 7데시아틴이 넘는 담배 재배 면적이었다. 농장 종류를 판단하고자, 담배 재배에 따른 담배 등급으로부터 여름철 4-8개월 동안, 최소 두 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해본다. 따라서 담배 생산지 7개 데시아틴을 소유한 사람으로는 최소 14명의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임금 노동에 기반해서, 농장을 운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로든, 담배는 데시아틴 당 두 명이 아닌, 세 명의 계절직 노동자를 필요로 하며, 일용직 노동자도 추가로 필요하다. 한 마디로, 농업이 상업화될수록, 자본주의적인 조직이 더욱 발전한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담배 재배 농가 가운데 소규모 농장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25,089개 농장 가운데, 11,997개 농장에서는 데시아틴의 1/10 이하를 재배했다. 그러나 상업적인 농업 부문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됐다는 점을 조금도 반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소규모 농장에서는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6,844개 농장 가운데 11,997개 거의 절반 가량의 데시아틴을 재배하고 있다. 흔히 접하는 '평균 수치'란, 실제 상태를 잘 보여주지도 않는다. 담배 재배 농가에서는, 농장 당 평균 데시아틴은 1/4데시아틴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농업 발전과 생산 집중이 더욱 두드러졌다. 로흐비치 지역 군(위예즈드)에서는 5,957개 농장 가운데 229개 농장이 각각 20개 이상의 데시아틴을 보유했다. 농장주들은 총 44,751개 데시아틴 가운데 22,799개 데시아틴을 보유했으며, 전체 면적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농부 한 명 당 약 100개 데시아틴 작물을 재배했다. 담배 재배 면적으로는 2,003개 데시아틴 가운데 1,126개 데시아틴을 보유했다. 담배 재배 면적을 기준으로 분류해보면, 해당 지역에서는 5,957개 농장 가운데 132개 농장이 담배 재배 면적 데시아틴의 2개 이상을 보유했다. 2,003개 농장 가운데 담배 재배 면적은 72%에 달했으며, 농장 당 데시아틴은 10개 이상이었다. 반면에, 로흐비차 지역 반대편에서는 5,957개 농장 4,360 농장이 담배 재배 면적에서 1/10 이하였고, 2,003개 농장 가운데 데이사틴은 113개로, 곧 6%에 불과했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조직에 따른 상인 자본은 상당한 발전과 생산 영역 밖에서도 온갖 착취를 수반했다. 소규모 담배 재배 농가들은 건조장이 없어, 담배를 발효시켜 완제품으로, 3-6주 동안 판매할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미완성 제품을 반값에다 매수자에게 판매했는데, 매수자는 가끔 임대 토지로부터 직접 담배를 재배했다. 그러나 매수자는 '소규모 재배 농가들을 온갖 방법으로 압박시켰다.' 상업 농업은 상업 자본주의적인 생산이다. 적절한 방법을 택할 수 있다면, 농업 분야에서도 명확하게 추적된다.
참고 주석
- 1890년 6월 4일 법률은 농업 증류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1). 증류 기간: 9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밭 작업이 없는 기간
2). 증류된 증류주 양, 영지 내 경작지 데시아틴 수의 비율. 농업과 산업을 병행하는 증류 시설은 혼합 증류소라고 불렀다. 「재정부, 1896: 25호, 1898: 10호」
- 증류 부산물(세척)은 농업 시설 뿐만이 아니라, 상업적 시설에서도, 상업용 육우 사육에도 사용됐다. 『농업 통계 자료』
- 『농업 통계 자료』에 따르면 중앙 농업 주베르니아에서 감자 증류용 사용은 빠르게 증가했다. 6개 주베르니아(쿠르스크, 오렐, 툴라, 랴잔, 탐보프, 보레니시)
감자 증류 수
1864-1865년부터 1873-1874년까지 연평균: 407,000푸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10,633,000푸드
1874-1875년부터 1883-1884년까지 연평균: 7,482,000푸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30,599,000푸드
1884-1885년부터 1893-1894년까지 연평균: 20,077,000푸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69,620,000푸드
주베르니아에 따른 증류소 수
1867-1868년에서 1875-1876년 사이 연평균: 29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739개
1876-1877년에서 1884-1885년 사이 연평균: 130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979개
1885-1886년에서 1893-1894년 사이 연평균: 163개, 유럽 러시아 전체 수치: 1,195개
- 니즈니노브고로드 주 발라흐나 지역 젬스트보 통계에 따르면, 감자 한 갑을 재배하는 데 77.2일이 소요됐다. 59.2일에는 여성이 파종, 괭이질, 잡초 제거, 땅 파기에 종사했다.
가장 큰 증가는 지역 어성 농민들의 일용직 노동 수요였다.
- 1867년 유럽 러시아에서 증류에서 고용된 노동자 수는 52,660명으로 추산했다. 1890년에는 26,102명이었다. 증류에 직접 종사하는 노동자 수가 적었으며, 농촌 노동자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반코프 박사는 "마을 증류에서 고용된 모든 노동자"라고 말했다. 게다가 여름에는 현장 작업으로 떠났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운영되지는 않았으며, 일반 공장 노동자와도 매우 달랐다. 그들은 농민복을 입었으며, 농촌 습관을 유지했고, 공장 노동자가 지닌 광택 특성도 갖추지 않았다.
- 폴라드 왕국이 없는 유럽 러시아에서는 1896-1898년 사탕무 재배 면적은 327,000데시였다.
- 1890-1894년 기간의 평균을 취했을 때, 러시아 제국의 사탕무 재배 면적은 285,000데스크였고, 그 중에 118,000데스크는 정유소에 속했으며, 167,000데스크는 농장주에 속했다.
- 유럽 러시아에서는 1867년에 사탕무 설탕 공장과 정유송에서 80,919명의 노동자가 고용됐다. 여기서도 수치를 과장시켜서, 92,000명으로 제시했으며, 같은 노동자를 두 번 세었다.
1890년의 수치는 77,875명이었다.
- 『역사 통계 조사』에서 제공된 통계가 가장 균일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재무부 수익 및 자료, 1866』는 상무 및 제조부의 공식 통계를 기반으로 삼아, 1864년 러시아에서 생산량이 231,000루블인 전분 제조 시설이 55개 있었다고 추정했다. 『군사 통계 초록』에서는 1866년 생산량이 563,000루블인 시설이 198개나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현재 공장으로 간주되지 않는 소규모 시설이 의심의 여지 없이 포함됐다. 해당 무역 통계는 매우 만족스럽지 않았다. 소규모 공장이 때로는 계산될 때도 있거나, 혹은 생략될 때도 있었다. 따라서 「오를로프 명부」에서는 1890년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 사업체 수를 25개로 기록했었지만,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 조사, 1896」에 따르면, 로스토프 지역에서만 전분 및 사업체는 810개 있었다. 따라서 본문에 제시된 수치는 현상의 역학 관계만을 나타냈을 뿐이며, 산업의 실제 발전 양상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 당시에 농민 작업장의 노동일은 13-14시간이었지만, 같은 산업의 대규모 공장에서는 12시간 노동일이 적용됐다.
- 모스크바 전체에 대한 오롤로프의 견해와 비교했을 때, 부농들은 가끔 빈농들의 토지를 임대했으며, 때로는 5-10개의 임대 토지를 보유했다.
- 당시에 모스크바 산업에서는 모두 일부 격자 시설이 여러 소유주에게 속한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아르텔) 원칙을 식별할 수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촌 기업가 연합에서 특수한 '원칙'만을 관찰했고, 농촌 기업가 계급의 존재와 발전 자체에서는 아직은 새로운 사회경제적인 '원칙'을 찾지 못했었다.
- 「재무부 보고서 및 자료, 1866」, 공장 통계에서는 소규모 농업용 착유 시설과 대규모 산업용 착유 시설을 혼동해서, 때로는 전자를 포함하거나, 때로는 다른 시기에 다른 주의 경우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설 수에 대한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1860년대에는 여러 소뮤모의 착유 시설이 공장에 포함됐다.
- 1890년에 383개 공장 가운데 11개 공장 생산량은 1,223만 2천 루블 가운데 717만 루블에 달했다. 농촌 기업가에 대한 산업계의 승리는, 농업인과 인민주의 사이에 깊은 불만을 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규모 공장은 노동 생산력을 높이고, 생산을 사회화한다. 그것이 요점이다. 또 다른 요점은, 대규모 공장의 노동자 조건이 소규모 농업용 기름 압착기보다 물질적인 측면뿐만이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더 낫기 때문이다.
- 「보로네시 구베르니아 비류흐 지역 통계 수익률」에 따르면 마을에 있는 산업 시설의 수는 153개였다. 1890년 오를로프의 「명부」에 따르면, 해당 마을에서는 34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6개의 기름 압축기가 있었고, 생산량은 17,000루블이었다. 「1894-1895년, 공장 및 작업장 목록」에 따르면, 6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8개의 기름 압착기가 있었으며, 생산량은 151,000루블이었다.
- 『재무부 연감, 1896』에 따르면, 담배 재배 면적은 해마다 상당히 변동했다.
1889-1894년 평균: 47,813데시, 수확량: 4,180,000푸드
1892-1894년 평균: 52,516데시, 수확량: 4,878,000푸드
- 벨보로도프(Belborodov)는 「북방지, 1896」(Severny Vestnik)에 따르면 크림반도의 담배 농장 주인을 고소한 20명의 여성 노동자 재판을 보도하면서 ‘재판에서 농장 노동자들은 묘사하기에도 매우 힘든 삶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4-5. 교외 농업과 채소 및 과일 재배
농노제의 몰락과 함께 지주 과일 재배는 러시아 전역에서 급격하게 쇠퇴했다. 철도 건설은 상태를 바꾸어, 새로운 상업적 과일 재배 발전에 큰 '추진력'을 주었고, 상업적인 농업 분야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남쪽에서는 값 싼 과일이 유입됐고, 이전에 과일 재배를 이뤘던 중심지 산업은 침체됐고, 다른 쪽으로는 과일 시장이 확대됐다. 코브노, 빌나, 민스크, 그로드노, 모길료프,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에서 산업용 과일 재배가 발전했다. V.파스케비치(V.Pashkevich)는 「1893-1894년, 과일 농사 상태에 대한 조사」에서, 지난 10년 동안 농업 산업 분야로, 과일 농사가 크게 발전했으며, 정원사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철도가 운송하는 과일 양도 증가했으며, 개혁 이후로 첫 10년 동안 증가했던 과일 수입은 감소했다.
과일 재배 보다 더 많은 인구에게 소비재를 제공하는 산업용 채소 재배는 훨씬 더 폭 넓고, 빠르게 발전했다. 산업용 채소 재배는 1). 도시 근처, 2) 공장과 상업 및 산업 거주지, 3). 러시아 전역에서 흩어진 채소로 유명한 특정 마을로 널리 퍼져갔다. 이러한 생산물에 대한 수요는 산업 인구뿐만이 아니라, 농업 인구에도 있었다. 보로네시 농민 예상에서는 1인 채소 지출이 47코펙이었으며, 지출의 절반 이상은 구매된 농산물로 사용됐다.
상업 농업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선, 특히 발발된 채소 재배 지역에 따른 현지 조사 통계를 살펴봐야만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로는 로스토프에서 온 이주 채소 재배자들이 도입했던 틀과 온실 채소 재배가 널리 발전했다. 대규모 재배자가 소유한 틀의 수는 수천 개에 달했으며, 중간 규모 재배자는 수백 개에 달했다. 일부 대규모 채소 채배자는 군대에다 수만 푸드의 절인 양배추를 공급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 젬스트보 통계에 따르면, 지역 주민 가운데 474가구가 채소 재배로 가구 당 약 400루블 소득에 종사했으며, 230가구가 과일 재배에 종사했다. 자본주의 관계에서는 이윤 추구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착취당한 상인 자본과 노동자 고용 형태로 매우 폭 넓게 발전해갔다. 이민자 인구 가운데 155명의 주요 야채 재배자, 각각 3,000루블 이상의 소득과 711명의 노동자 야채 재배자, 각각 116루블의 소득이 있었다.
모스크바 근처 농민 채소 재배자들은 전형적인 농촌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였다. 대략적인 추산으로는 매년 400만 푸드 이상의 녹색 채소가 모스크바 시장에 도달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절인 채소를 대량으로 거래했다. 노가티노 볼로스트(Nogatino Volost)는 공장과 병영으로부터 거의 백만 베드로스의 절인 양배추를 판매했으며, 심지어 크론슈타트에도 위탁 판매했다. 상업적인 채소 재배는 모든 모스크바 군에서 널리 퍼졌으며, 주로 도시와 공장 주변에서 이뤄졌다. 양배추는 볼로코람스크 군에서 온 고용된 노동자들이 다졌다.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 시에서 로스토프 군에 있는 알려진 채소 재배 지구가 존재했으며, 포레치예, 우고디치 등 55개의 채소 재배 마을이 포함됐다. 목초지와 초원을 제외한 모든 토지는 오래 전에 채소밭으로 바뀌었다. 채소의 기술적 가공 및 보존이 매우 발달했다. 토지 생산물과 함께 토지 자체와 노동력은 상품으로 전환됐다. 마을 공동체였음에도, 포레치예 마을의 토지 소유권에 따른 불평등은 매우 컸다. 어떤 경우에는 4인 가족이 7개의 '채소밭'을 가졌거나, 다른 경우로는 3인 가족이 17개를 가져갔다. 이곳에서는 주기적인 토지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았다. 오직 사적 재분할만이 이뤄졌으며,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 조사, 1897-1898년」에 따르면, 농민들은 그들의 채소 밭이나 채소 조각들을 자유롭게 교환했다. 밭일의 상당 부분은 남녀 일용직 노동자들로부터 수행됐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여름철에 이웃 마을과 이웃 구베르니아 시로부터 포레히에로 들어왔다. 야로슬라블 구베르니아 시 전체에서 농업 및 채소 재배에 종사하는 사람으로는, 10,322명이었으며, 그 중에 7,689명은 로스토프 출신으로 추산됐고, 이주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해당 직업이 임금 노동자였다. 농촌 노동자들은 대도시, 야로슬라블 구 등으로 이주했으며, 유제품 농업뿐만이 아니라, 상업적인 채소 재배에도 종사했으며, 또 발전했다. 채소 재배에는 온실 채소 재배도 포함됐다. 해당 산업에서는 모스크바와 트베리 현의 부농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발전해갔다. 첫 현에서는 「1880-1881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3,011개의 틀을 갖춘 88개 사업장이 있었다. 노동자는 213명이었으며, 그중 47명(22.6%)가 고용됐다. 총 생산량은 54,400루블이었다. 온실 채소 재배자들의 평균 투자액은 최소 300루블이었다. 가가호호 별 수익금을 받는 74명의 농민들 가운데 41명은 토지를 매입했으며, 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임대해서, 농민 한 명 당 평균 2.2마리의 말을 소유했다. 따라서 온실 채소 산업은 농민 부르주아 계급만이 가져갈 수 있었다.
러시아 남부에서는 멜론 재배도 상업 농업 유형이었다. 『재정부, 1897』에 따르면, ‘산업용 멜론 재배’에 대해 기사도 있었다. 생산 분야는 1860년대 말, 1870년대 초에 비코보(Bykovo) 마을에서 타사레브 군(Tsarev Uyezed), 아스트라칸(Astrakhan Gubernia) 시에서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볼가 강 유역으로 운송됐던 멜론은 철도가 생기면서부터 수도로 운성됐다. 1880년대에는 사업 초기 사람들은 엄청난 이익으로, 1일 당 150-200루블을 올린 덕분에 생산량은 최소 10배 증가했다. 진정한 소부르주아와 같이, 그들은 재배자 수가 늘어나는 걸 막고자, 모든 것을 했으며, 새롭고 수익성 있는 직업의 '비밀'들을 이웃에게 조심스럽게 보호했다. 치명적인 경쟁을 막고자, 농부 경작자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멜론 산업은 사라토프 구베르니아 시와 돈 지역으로 훨씬 더 넓게 퍼져갔다. 1890년대 곡물 가격 하락은 생산에 특히 강력한 자극을 주었고, 지역 경작자들이 작물 순환 체계의 어려움을 극복시킬 방법을 모색하도록 강요했다. 생산 확대는 고용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다. 멜론 재배에는 상당한 양의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1데시아틴을 재배하는 데만 30-50루블이 들어갔다. 고융주의 이윤과 지대도 훨신 더 크게 증가했다. '로그' 역, 그랴지-차리친 철도 인근에서 수박 재배 면적은 1884년 20데시, 1890년, 500-600데시, 1896년에는 1,400-1,500데시로 증가해갔다. 반면 임대료는 30코펙에서 1.50-2루블로, 각 연도에 데시당 4-14루블로 상승했다. 멜론 재배의 급격한 확대는 1895년 초과 생산과 경제 위기로 이어졌고, 상업 농업 부문에 따른 자본주의 성격을 공고히 했다. 멜론 가격은 철도 요금을 감당할 수 없을만큼 하락해갔따. 멜론은 수확되지 않은 채 밭에다 방치했다. 막대한 이익을 본 기업가들은 그제서야 손실을 깨달았다. 흥미로운 점은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들의 수단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해서, 농산물 가격을 낮추는 것이었다. 그리고 철도 관세로부터 사치품에서 민중 소비재, 생산지에서는 가축 사료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기업가들은 산업용 멜론 재배가 발전이 있었고, 높은 철도 관세 외에는 발달에 아무런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봤으며, 당시에 건설 중이던 차리친-티호레츠카야 철도는 산업용 멜론 재배를 위한 새롭고 폭 넓은 영역을 열어줬다고 장담했다. 산업의 미래에서, 멜론 위기의 역사적 교훈은 농업의 자본주의적인 진화를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는 점이다.
교외 농업과 상업 농업의 차이점은 교외 농업은 농장 전체가 특정한 주요 시장 상품에 맞춰 조정된다는 점이다. 교외 농업의 경우, 소규모 농부는 조금씩만 거래한다. 여름철 소작인과 영구 하수인들에게 임대해서 자신들의 집, 마당, 가축, 그리고 밭과 농장으로부터 생산된 온갖 종류의 농산물들을 거래한다. 수도 근처에서 아기를 기르고, 아내의 우유를 거래하며, 방문하는 마을 사람들게는 언급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용역을 제공해서 돈을 벌며, 고대 자본주의 유형에 따른 가부장적인 농부의 완전한 변형으로부터, 돈의 힘에 대한 완전한 예속이 드러나며, 교외 농민들은 보통 인민주의자들로부터 더 이상 농민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별도의 범주로 넣어진다. 그러나 교외 농부와 이전의 모든 유형 사이의 차이는 단지 형태적인 차이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소규모 농부로부터 이뤄진 전면적인 변형에는 정지적, 경제적인 본질도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도시의 수, 공장, 상업 및 산업 마을 동네의 수, 기차역 수가 더 빠르게 증가할수록, 마을 공동체 사람의 유형에서 농민으로 변형되는 유형은 더욱 폭 넓어지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통신의 발달로부터, '모든 마을이 교외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외딴 지역에서는 이미 예외였지만, 날로 갈수록, 고대 유물만큼이나 드물어졌고, 농부는 더 빠른 속도로 일반 상품 생산 법칙을 따르는 산업가로 변모해갔다.
- 1860년대에는 수입량이 거의 100만 푸드에 달했으며, 1878-1880년에는 380만 푸드에 달했고, 1886-1890년에는 260만 푸드, 1889-1893년에는 200만 푸드에 이르렀다.
- 1863년 유럽 러시아에서 인구 5만 명 이상의 도시는 13개가 있었고, 1897년에는 44개가 있었다.
- 실제로 통계에서는 야채 재배자가 훨씬 더 많았다. 대부분은 사유지 소유자 농업이었지만, 농민 농업만을 언급했다.
- 각 마을이 특정 종류의 야채 생산에 특화됐다.
- 통조림 공장 생산량도 크게 증가했다.
- 농업의 특징적인 전문화가 보였다. 농민 일부의 특정 직업은 야채 재배로부터 전환된 지역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야채를 거의 재배하지 않고, 지역 시장과 박람회에서만 구매했다.
- 트베리 지역에서는 '1886-1890 인구조사'에서 174명의 농민과 7명의 사유지 소유자에게 속한 4,426개 이상의 온실 채소 재배지가 집계됐는데, 소유자 한 명 당 평균 약 25개의
온실 채소 재배지였다. 농업에서 온실 채소 재배는 큰 도움이 됐지만, 부농에게만 해당됐다. 20개가 넘으면, 노동자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 수박을 기르기 위해선, 더 나은 경작이 필요하며, 나중에 곡물을 심을 때 토양을 더 비옥하게 만든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에서는 매우 많은 유형으로 된 소규모 무역 산업이 형태를 띠어갔다. 여름 임대, 숙박, 우유, 채소, 과일 판매, 가축 사육, 육아, 가재 잡기, 낚시 등이었다.
툴라 지역의 교외 농민 산업도 비슷했다.
좋은 도로와 운하, 항해할 수 있는 강은 운송 비용을 줄여서, 외딴 지역을 도시 주변 지역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까지 만들었다.
4-6. 농업 자본주의와 농업 위기
러시아 농업에서 두 가지의 자본주의 문제점으로는 개혁 이후 형성된 농민과 지주 경제에 따른 기존 사회적, 경제적 체계를 검토했다. 농민은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경제적으로 강력한 농촌 부유층과 무산층으로 빠르게 분열됐다. 농촌화에 따른 불가분한 관계로부터 지주들은 노동 용역에 따른 농업에서 자본주의 농업 체계로 전환시켰다. 농업은 상품 생산으로 전환되는 방식으로 시작됐으며, 각 주요 상업 농업 형태의 특징적인 사회적, 경제적인 관계를 검토했다. 매우 많은 농업 조건 아래에서 농민과 사유지 농업 모두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 개혁 이후 농업 발전의 주요 특징은 상업적, 기업가적 성격이 강화됐다. 사유지 소유 농업에서는 매우 자명했고, 소농에서는 쉽게 입증되지는 않았다. 첫째로, 고용 노동은 소규모 농촌 부르주아지들의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특징은 아니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모순에 기반한 일반 경제 체제를 전제로 삼아, 자영업으로부터 지출을 충당하는 모든 소규모 상품 생산자들도 포함한다. 둘때로는, 소규모 농촌 부르주아지는 여러 과도기적인 단계를 거쳐서, 소규모 농민 및 토지를 할당받은 농촌 무산층들과 관련된다. 이러한 상태는 농민 안에 농촌 부르주아지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의 존재를 구분하지도 않는 이론들이 타당성을 갖는 이유였다.
2). 농업 본질 자체로는 상품 생산 전환은 산업 대응과 달리, 특수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제조업에서는 각각 하나의 제품 또는 제품의 한 부분만을 생산하는 데 전념하는, 독립적인 개별 부문으로 분할된다. 그러나 농업은 완전히 분리된 부문으로 분할되지는 않으며, 한 경우로는 하나의 시장 제품에, 또 다른 경우로는 다른 시장 제품에 특화되며, 농업의 다른 모든 측면은 주요 시장 제품에 적응시킨다. 따라서 상업 농업의 형태는 지역뿐만이 아니라, 농장마다 매우 많다. 따라서 상업 농업의 발달 문제를 검토할 때는 농업 생산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통계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3). 상업 농장의 발달은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을 창출했다. 첫째로, 농업의 전문화는 많은 농업 지역 간, 사업체 간, 농산물 간의 교환을 발생시킨다. 둘째로, 농업에서는 상품 유통 영역으로 깊이 편입될수록, 농촌 주민들의 개인 소비에 쓰이는 제조업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급속도록 증가한다. 셋째로, 소규모 기업가든, 대규모 기업가든, 구식 농민 도구, 건물 등으로는 새로운 상업 농업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에 생산 수단에 대한 수요가 급속도록 증가한다. 넷째로,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창출된다. 소규모 농촌 부르주아지들의 형성과 지주들의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전환은 정규직 농업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의 형성을 전제한다. 상업 농업의 발달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개혁 이후 시기에 따른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농업의 발전, 공업 산업의 발전, 농업 공학 산업의 발전, 농업 산업의 발전, 고용 노동 등을 특징으로 삼는다.
4). 자본주의는 농업 인구 내에서도 이러한 생산양식이 존재할 숭 벗는 모순을 크게 확대하고, 심화시킨다. 러시아에서 농업 자본주의는 역사적 의미에서 큰 세력으로까지 발전했다. 자본주의는 경작자를 '장원의 영주', 가부장적이고, 종속적이던 농민들을, 현대 사회의 다른 모든 소유주와 마찬가지로 산업가로 변모시켰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러시아에서 농업이란 지주 사업이었고, 영주의 취미였을 뿐이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또 의무였다. 농업은 오랜 관슴에서만 운영됐고, 경작자는 마을 너머의 모든 일들로부터도 고립됐다. 경제에서 옛 시대의 생존을 보여주는 노동 용역 제도는 뚜렷한 역사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토지를 상품으로 전환함으로부터, 토지 소유에 있어 사회적인 신분제와 처음으로 결별했다. 농부의 생산물은 판매됐고, 사회적인 계산의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지역 시장에서부터, 그 다음에는 국가 시장으로, 마지막에는 국제 시장이 이뤄졌다. 이전의 세상과 고립됐던 서투른 농부의 상태는 완전하게 무너져내렸다. 농부는 파산의 위험을 무릅썼으며, 세계 시장으로부터 연결된 자국과 다른 나라들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까지도 마구잡이로 고려해갔다. 오블로모프에게는 아무런 위험도, 자본 지출도, 오래된 생산 관행의 변화도 없이 확실한 소득을 보장했던 노동 용역 체계조차도, 이제 미국 농부와의 경쟁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반세기 전, 서유럽에 대해 언급된 내용을 바탕으로도, 러시아에서 온전히 적용할 수 있었다. 농업 자본주의는 '역사의 흐름 속으로 낙원을 끌어당긴 원동력'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농업 자본주의는 농업의 오랜 침체를 처음으로 허물었다. 농업 기술 변혁과 사회적 노동에 따른 생산력 발전에서 엄청난 추진력을 제공했다. 자본주의가 수행한 파괴적인 노동에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역사 전체보다도 더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조로운 자연 경제는 많은 형태의 상업 노동으로 대체됐고, 원시적인 농기구는 개량된 농기구와 기계로 대체됐다. 구식 농업 체계의 부동성은, 새로운 농업 방식의 등장으로 인해 약화됐다. 이와 같은 모든 변화 과정은 농업 전문화 현상과 불가분한 관계였다. 본질적으로는 농업 산업에서 자본주의는 균등하게 발전할 수 없었다. 한 곳, 한 나라, 한 지역, 한 농장에서는 농업의 한 측면을 추진했고, 다른 곳에서는 다른 측면을 추진하는 식을 진행했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농업 운영의 기술이 변형했으며, 다른 경우로는 다른 농업 운영의 기술을 변형해서, 가부장적인 농업 경제나, 가부장적인 노동 용역에서도 분리시켰다. 이 과정 전체는 변덕스러웠고, 생산자는 시장 요구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에, 자본주의 농업은 각각의 경우, 각 지역, 때로는 각 국가로부터도, 이전 농업보다 일방적이고, 불균형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가부장적인 농업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상업 농업에 따른 분리된 유형의 출현으로부터, 농업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위기와 자본주의적인 초과 생산의 불가피한 사례가 이뤄졌으며, 이러한 위기로는 모든 자본주의적 위기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생산 발전과 노동의 사회화로부터, 훨씬 더 강력한 동기를 제공한다.
자본주의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기계 사용과 노동자의 폭 넓은 혁ㅂ력에 기반한 대규모 농업 생산을 창출했다.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농산물 생산이 농민들이 자영업을 하든, 지주를 위해 일하든, 비참할 정도로, 소규모로부터 이뤄졌으며, 토지 소유에 따른 공동체적인 특성으로는 크게 분산된 생산을 파괴시킬 수는 없었다. 분산된 생산과 불가분하게, 농민들 자신들의 분산된 특성도 있었다.
할당량에 따른 작은 마을 공동체에 묶여 있던, 농민들은 소속 범주, 과거 지주 농민, 국농 등, 소유 규모의 차이, 지주들로부터의 해방 조건의 차이로 인해 이웃 마을 공동체의 농민들조차 완전히 단절됐다. 자본주의는 중세적인 장벽을 무너뜨렸고, 매우 잘된 일이었다. 많은 농민층 간의 차이, 텃밭 규모에 따른 많은 계층 간 차이로는 각 계층, 각 마을 공동체 내 경제적인 차이보다 훨씬 덜 중요해졌다. 자본주의는 지역적 고립을 파괴시켰고, 경작들 사이에서 미세한 중세적 구분을 온 국민을 아우르는 거대한 구분으로 대체시켜서, 자본주의 경제에 따른 일반 체계로부터, 서로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계급으로 나뉘었다. 이전에는 경작자 대중이 생산 조건 자체로부터 거주지에 얽매였지만, 많은 형태와 상업 및 자본주의 농업 분야에 따른 창출은 전국적으로 큰 규모의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 그리고 인구의 이동성이 없다면, 주도적으로 발전시킬 수도 없다.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는 노동 용역과 농부의 개인적 종속성의 뿌리를 깎아냈다. 노동 용역 체계는 『러시아 법률』(루스카야 프라우다) 시대부터, 농민의 도구로 사유지 소유자의 밭을 경작하는 데까지 농업을 전적으로 지배해왔다. 농부의 비참하고, 무례한 성격은 농부의 노동이 봉건적이지 않더라도, 반자유적인 성격 때문에 저하됐고, 체제로부터 불가피한 수반이었다. 경작자의 시민권(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 신체적 처벌, 공공 사업 배정, 분배 애착 등) 이 손상되지 않는다면, 노동 용역 체계을 시행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농업 자본주의는 노동 용역을 고용 노동으로 대체하는 데 있어 큰 역사적 공헌을 했다. 러시아 농업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역사적인 역할에 대해 요약하자면, 농업 생산에 따른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농업이 최상층의 특권적 점유 또는 최하층의 의무에서도, 일반적인 상업 및 산업 활동으로 전환됐다는 점과, 경작자의 노동 생산물은 시장으로부터, 사회적인 계산의 대상이라는 점도, 너무나 일반적이고, 획일적인 농업으로부터 기술적으로 변형되고, 많은 형태의 상업 농업으로 전환된다는 점과 소규모 농가의 지역적 고립과 분산된 성격으로 무너지고 있다는 점, 많은 형태의 속박과 개인적 종속이 노동력 매매라는 비인격적인 거래로 대체됐다는 점, 농업 노동을 사회화시키고, 시장 변동에 따른 무정부성, 개별 농업 기업에 따른 개별적 성격과 대규모 자본주의 농업에 따른 집단적인 성격 사이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키는 단일한 고리를 형성한다.
따라서 러시아 농업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에서 역사적인 역할을 강조할 때는, 경제 체제가 역사적으로 일시적인 성격이라거나, 그 속에 내재된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잊을 수가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따른 '파괴적 활동'이라고 한탄하는 인민주의자들이 바로 이와 같은 모순을 극도로 피상적으로 평가하거나, 농민층 분화를 얼버무리고는, 농업 기계 사용에 따른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무시했으며, '농업 산업', '고용'과 같은 표기로부터, 농업 임금 노동 계급의 등장을 은폐하고 있었다.
-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이 즐겨 주장하던, '러시아 농민 농업은 대부분 자연 경제다.'라는 명제는 이 점을 무시하면서부터 성립됐다. 『수확과 곡물 가격 영향』에서도 농촌 부르주아지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두 묶어 놓는 '평균' 수치만 봐도 잘 알 수 있었다!
-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에 대해 말할 때 자료에 국한시킨다. 모든 농민이 자신이 소비하는 곡물만을 심고, 자신들이 소비하는 모든 종류의 곡물을 심으며, 소비되는 비율에 맞게 심는다는,
사실과 모순되고, 개혁 이후 주요 특징을 무시하는 자연 경제가 우세하다는 가정으로부터 추론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그 옛날의 가부장적인 삶, 단순한 예의범절 등으로부터 복귀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반동적으로 풍자하고, 경멸스럽게 묘사했으며, 토지를 다른 모든 산업을 지배하는 법칙에 종속시킨다고 비난했다.
- 인민주의자들이 제시된 주장 전체가 전혀 설득력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알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추프로크, 「곡물 가격에 대한 토론 보고서」에서, 토지 매매가 비정상적인 현상이라는 의견과 농민 배정지의 불가침함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제도라는 의견과 농업에 따른 노동 용역 제도가 자본주의 제도보다도 더 낫거나, 적어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 등과 같은 의견을 자세히 분석하는 것은 너무나 고맙지가 않다. 정작 인민주의자들이 그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고자 내놓은 정치적, 경제적 주장들을 반박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 서유럽 경제적 낭만주의자들과, 러시아 인민주의자들은 같은 과정에서도, 자본주의적인 농업의 일반성과 자본주의 만들어낸 불안정함, 위기를 강력히 강조했으며,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발전은 이전의 자본주의 정체와도 비교했을 때 발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 토지 소유의 형태 차이에도, 마르크스는 프랑스 소농에 대해 한 말은 러시아 농민들에게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소농은 거대한 대중을 형성하며, 구성원들은 비슷한 조건에서 살더라도, 서로 많은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그들의 생산 방식은 상호 교류를 유도하는 대신에 그들을 고립시킨다. 프랑스의 열악한 통신 수단과 농민의 빈곤은 고립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들의 생산지(Producktionsfeld)인 소농은 경작에 분업이 없으며, 과학을 적용할 수 없고, 많은 발전과 재능, 풍부한 사회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별 농가는 거의 자급자족하며, 소비의 대부분을 직접 생산하며, 따라서 사회적 교류보다는 자연과 교환으로부터 생계 수단을 얻는다. 작은 농지, 농민과 가족, 옆에 또 다른 작은 농지, 또 다른 농민과 가족이 수십 개가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며, 수십 개의 마을이 모여 부서를 세운다. 같은 방식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거대한 대중은 자루에 든 감자들이 감자 자루를 이루듯이, 동일한 크기에 따른 단순한 합으로 이루게 된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사와 조직의 필요성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커져갔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에서 이와 같은 필요성을 낡은 잣대로 측정한다는 건 완전히 터무니 없는 일이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첫째로, 결사가 지역, 사회적 신분 또는 범주에 따라 이뤄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요구한다. 둘째로, 결사의 출발점은 자본주의와 농민층 분화로부터 생겨난 지위와 이해 관계에 따른 차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요구한다.
레닌, 「경제적 낭만주의의 특징」 참조.
-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파괴적인 업적에 대한 인민주의자들의 수 많은 불평과 탄식 가운데 하나는 주목할 만하다. '영지 군주들 사이에서 갈등이나 타타르의 침략과 같은 것은 우리의 경제 생활 형태에서도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오직 자본주의만이 자신의 역사적인 과거로부터 경멸만을 보였다.' 진실로, 러시아 농업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것은 바로 오래되고, 신성한 시간을 지닌, 노동 봉사 제도와 노예 형태에 대한 경멸만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어떤 정치적인 폭풍, '영지 군주들 사이의 갈등', '타타르의 침략'마저 자본주의를 파괴시킬 수는 없었다.
- 레닌은 결론부에서 『철학의 빈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참고했다.
농업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주의 이론
자본주의에 따른 문제에 대한 특정 이론을 검토한다 대부분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근본적인 견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 솔직한 사람, V.V.보론초프는
마르크스 이론이 농업을 다루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며, 인민주의자들은 외교적으로 자신들의 가정과 마르크스 이론 사이의 관계 질문을 회피하기를 더 선호했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널리 퍼진 가정 가운데 하난 ‘겨울철 해방론’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농업은 다른 산업과는 별도의 산업이다. 그러나 농업이란 일 년 내내 지속되는 게 아니라, 5-6개월 동안만 지속된다. 따라서 농업의 자본화는 '겨울철의 해방', '농민의 노동 시간을 노동 연도의 일부로 제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며, 농민의 경제적 조건 악화에 따른 근본 원인과, 국내 시장 악화, 사회적 생산력의 낭비를 초래한다. 유명한 겨울 이론의 전체가 있다. 해당 이론에서는 농업에서 일자리가 연중 매우 불균등하게 분포된다는 점에만 근거해서, 매우 포괄적이고, 역사적이고, 철학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한 가지 특징으로부터, 추상적인 가정으로 나아가 부조리하게 만들고는, 가부장적인 농업을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전환하는 복잡한 과정에 따른, 다른 모든 구체적인 특징들을 무시한다는 건, 바로 이전의 자본주의적인 '인민 생산'에 대한 낭만적인 이론을 복원하려는 시도에서 사용된 간단한 방법이었다.
추상적인 가정이 얼마나 터무니없으며, 또한 편협한지는, 인민주의자들이 완전히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실제 과정의 측면들을 살펴보자. 농업의 전문화가 진전될수록, 농업 인구는 더욱 감소하며, 전체 인구에서 더욱 더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추상적인 개념 속에서 농업의 전문화를 실제로는 거의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파종과 수확 작업만이 별도의 산업이 됐고, 경작과 비료 공급, 농산물 가공 및 운반, 축산, 임업, 건물 및 농기구 수리 등 모든 작업이 별도의 자본주의 산업으로 전환됐다고 가정한다. 추상화를 현실에 적용한다는 건, 현실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농업이 완전한 전문화를 겪는다는 가정에는 농업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조직, 자본주의적인 농부와 임금 노동자로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한다. 여기서 농민에 대해 말한다는 건 비논리적이다. 농업에 따른 순수한 자본주의적인 조직은 다시 일년 내내 일자리가 더욱 균등하게 분배되는, 작물 순환, 합리적인 가축 사육 등으로부터, 많은 경우 생산물의 기술적인 가공과 농업과의 결합, 토양 준비에 더 많은 노동력이 투입된다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자본주의는 농업 기업과 산업 기업 간의 완전한 분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분리로부터, 농업과 산업 임금 노동의 결합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모든 곳에서 이와 같은 결합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숙련 노동자를 일반 노동자,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비숙련 노동자와 분리한다. 이 노동자들은 어떤 대기업의 일자리에 끌려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실업자의 대열에 들어가기도 한다. 자본주의와 대공업이 발전할수록, 농업뿐만이 아니라, 공업에서도 노동력 수요에 따른 변동은 커지게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최대 발전을 전제하면, 농업에서 비농업 직종으로 노동자를 최대한 쉽게 이전할 수 있는 여건, 온갖 고용주가 노동력을 끌어내는 일반 예비군의 형성을 전제한다. 농촌 고용주들은 농장에 노동자를 공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농촌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을 농장에 묶어두는 수단, 토지에 할당하는 등의 수단을 가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토지로부터 할당받은 농장 노동자 또는 일용직 노동자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공통적인 유형이다. 인민주의자들의 주요한 오류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에서 비슷한 유형이 형성된다는 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농민의 겨울철 노동 시간 확보 문제를 자본주의에 따른 초과 인구라는 일반적인 문제와 별개로 논의하는 것은 잘못됐다. 실업자 예비군에 따른 형성은 일반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농업의 특수한 특징으로는 단지 같은 현상의 특수한 형태를 생기도록 만들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상대적 초과 인구' 문제에 대해, 농업에서 고용 분포를 다뤘으며, '노동 기간'과 '생산 시간'의 차이를 논하는 장을 다룬 이유이다. 노동 기간은 노동이 생산물에 적용되는 기간이며, 생산 기간은 노동이 적용되지 않는 기간을 포함한 생산물이 생산되는 시간이다. 노동 기간은 많은 산업에서 생산 시간과 일치하지 않으며, 농업은 전형적인 산업일 뿐이지만, 유일한 산업은 아니다. 다른 유럽 국가와 비교해봐도, 러시아에서는 농업의 노동 기간과 생산 기간의 차이가 특히 컸다. 자본주의 생산이 나중에 제조업과 농업의 분리를 달성하면, 농촌 노동자는 단순한 부업에 더욱 의존하며, 따라서 그의 처지는 더욱 악화될 뿐이다. 자본으로는 모든 매출 차이가 균등화된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검토 중인 사례에서 농업의 특수한 특성에서 도출되는 유일한 결론이라면, 농업 노동자의 지위가 산업 노동자의 지위보다도 훨씬 더 열악하다는 점이다. 겨울철 이론이, '농업 계급'의 조건 악화에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인민주의자들의 이론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농업의 노동 기간이 12개월과 같다면,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똑같이 진행될 것이다. 전체적인 차이점으로는 농업 노동자의 조건이 산업 노동자의 조건에 다소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V.V.보론초프와 인민주의자들의 이론에는 농업 자본주의 발전가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러시아의 특수성에 대해서라면, 그러한 이론은 오히려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며 모호할 뿐이다. 농민들의 겨울철 실업은 자본주의 자체보다는 자본주의에 따른 불충분한 발전에 크게 좌우된다. 임금 자료로부터, 대러시아 주들의 겨울철 실업은 자본주의가 가장 덜 발전하고, 노동 용역이 우세한 지역에서 가장 만연하다는 점이다. 노동 용역은 노동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시키며, 산업과 농업의 발전도 저해시키고, 따라서 노동력 수요를 감소시킨다. 또한 농민을 할당량에 묶어두게 되며, 겨울철 일자리를 제공하지도, 열악한 농사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지도 못한다.
- 자본주의 유형에 가까운 사유지 농장의 예시로, 오렐 구베르니아 시를 살펴보자. 귀족 출신인 크흘류스틴(Khlyustin)의 영지는 1,129데시를 차지하며, 그 중에 562데시는 작물을 재배하며, 건물 8채와 많은 개량된 농기구가 있다. 인조 잔디 경작, 종마장, 목축, 도랑 파기 등와 기타 조치로부터 습지 배수는 주로 여가 시간에 이뤄진다. 여름에는 하루 50-80명, 겨울에는
최대 30명까지 일하는 노동자 수로는, 1888년에 81명의 노동자가 고용됐고, 그 중에서 25명은 여름철 노동자였다. 1889년에는 목수 19명이 고용됐다. 리보피에르 백작의 영지는 3,000데시로, 그 중에 1,293데시는 농작물 재배에 사용됐고, 898데시는 농민에게 임대됐다. 12작 윤작 제도를 시행했다. '토탄'을 베어 거름을 만들었고, 인산염을 추출했다. 1889년부터 30데시의 시험 경작지를 운영했다. 겨울과 봄에는 거름을 수레에다 실었다. 초지 경작을 했다. 10월부터 3월까지는 200-300명의 벌목꾼을 고용해서, 삼림을 적절히 개발했다. 소 사육과 낙농업을 했으며, 1888년에는 90명의 직원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 34명은 여름철 노동자였다. 모스크바 구베르니아 시 멘시코프 영지는 23,000데시로, 임엄에 종사했으며, '절취선'이 새겨진 토지를 대가로 인력을 고용했다. 여름에는 말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들판에서 바쁘게 일했다. 늦가을과 부분적으로는 겨울에 감자와 풀을 건조장과 풀 공장으로 실어 날랐고, 숲에서 목재를 역으로 실어 날랐다. 모든 일은 일년 내내 비교적 고르게 분포됐다. 월별 근무일 수를 보여주는 기록부에서도 분명해진다. 말의 평균 노동일은 월 293일이며, 변동은 4월 223일에서 6월 362일이다. 남성의 평균 근무일은 216일이며, 변동은 2월 126일에서, 11월 279일이다. 여성의 평균 노동일은 23일이며, 변동은 1월 13일에서 3월 27일이다. 이러한 현실로도 인민주의자들이 애쓰는 추상적인 개념과도 과연 비슷한가.
-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은 유목 노동계급도 만들어낸다. 이들은 농촌 인구로 구성됐지만, 주로 산업 직종에 종사한다. 자본의 경보병이며, 자본이 필요함에 따견 파견된다. 유목 노동은
건축 및 배수, 벽돌 제작, 석회 굽기, 철도 건설 등 많은 작업에 투입된다. 철도와 같은 대규모 사업은 노동 시장에서도 일정량의 노동력을 끌어내며, 농업과 같은 특정 경제 부문에서만 나온다.
- 모스크바 의학 통계에 따르면, 구베르니아 시 공장 노동자 수는 114,381명이다. 실제로 노동 중인 노동자였다. 가장 높은 수치로는 146,338명이었고, 가장 낮은 수치로는 94,214명이었다. 백분율로 표기하면, 128%-100%-82%였다. 노동자 수의 변동이 증가했고, 자본주의는 공업과 농업 간 차이를 평준화시켰다.
- 마르크스는 영국의 농업 관계에 대해, ‘농업 노동자는 늘 너무나 많고, 정작 예외적이거나 일시적인 토지 경작 필요에서는 늘 너무나 적었다. 그래서 영구적인 '상대적 초과 인구'에도 시골에서는 인구가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마르크스는 ‘다른 곳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농업을 장악하면서부터, 초과 농촌 인구가 형성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농업 인구의 일부는 끊임없이 도시 또는 제조업 무산층으로 전환될 위기에 처했다. 인구 집단은 만성적으로 실업에 시달린다. 그들이 얻는 일이란, 극도로 불규칙적이며, 임금이 가장 낮다.
- 마르크스는 농업에서는 노동 수요를 일년 내내 보다 균등하게 분배하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더 많은 제품을 재배하고, 3포기 농법을 순환농법으로 대체하고, 뿌리 작물, 풀 등을 재배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방법에서는 생산에 투입된 순환 자본의 증가, 임금, 비료, 종자 등에 투자되어야만 한다.
- 농업 노동자 조건 악화가 단순히 고용이 불규칙하기 때문만은 아니며, 어느 정도라는 점이다.
마을 공동체: 소규모 농업에 대한 마르크스 견해와 현대 농업 위기에 대한 엥겔스 의견.
공동체 원칙으로부터 자본이 농업 생산 장악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은 인민주의자들이 나타낸 또 다른 현대 인민주의 이론이었으며, 이전 이론과 마찬가지로 추성적으로 공식화됐다. 기본 전제에 따른 오류를 보여주는 인용이며, 농업 자본주의에 따른 시작 자체가 어떤 특수한 형태의 토지 보유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건 큰 오류이다. 초기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직면한 토지 소유 형태는 적합하지 않다. 먼저 농업을 자본에 종식시키는 데 필요한 형태를 자신이 만들어낸다. 따라서 봉건적 토지 소유, 씨족 소유, 마르크 공동체(Markgemeinschaft)에 따른 소농 소유를 법적 형태가 아무리 많더라도, 생산 양식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는 경제적인 형태로 변형시킨다. 따라서 토지 보유 제도의 어떠한 특수성도 농업과 법적인 관계, 그리고 삶의 방식에 따른 차이에서도 각기 다른 형태를 띠는 자본주의가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은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인가, 자본주의 인가'라는 막연한 주제에 관한 방대한 문헌을 만든 인민주의자들은 해당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광 귀족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농업을 도입하는 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준다면, 어떤 학계가 농민들을 농장에 정착시키는 계획을 내놓는다면, 어떤 게으른 정부 관리가 60데시아틴의 토지를 위한 계획을 꾸며낸다면, 인민주의자는 서둘러 도전장을 내밀어,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인민 산업이라는 '팔라디움'을 파괴하려는 부르주아적인 계획에 맞서, 싸움에 뛰어들 것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온갖 계획이 초안되고, 반박되는 동안에도, 계속 진행 중이고, 공동체 마을이 소규모 농민들의 마을로 변하간다는 점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농민 토지 보유 형태 문제에는 매우 무관심하다. 토지 보유 형태가 무엇이든, 농촌 부르주아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관계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토지 보유 자체가 아니라, 농민을 계속해서 짓누르는 순수하게 중세적인 과거의 잔재로부터, 곧 농민 공동체의 사회적이고, 신분적인 고립, 집단적인 책임, 사유지에 대한 과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농민 토지 세금, 농민 토지 매매와 농민 이동 및 정착에 대한 완전한 자유의 부재이다. 모든 시대에도 뒤떨어진 제도는 농민을 분열로부터 조금도 보호하지 못하지만, 많은 형태의 노동과 예속을 증폭시켜, 사회 전체의 발전을 크게 지연시킬 뿐이다.
다음으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 3권에서도 했던 발언들을 해석하려는 인민주의자들의 '독창적인' 시도를 다루고자 한다. 그들은 소규모 농업이 대규모 농업보다도 우월하며, 농업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는 큰 발전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견해를 옹호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인용했다.
'농업에 관한 다른 관찰에서도 추론할 수 있는 역사의 교훈은, 자본주의 체제가 합리적인 농업에 반대하거나, 합리적인 농업이 기술적 개선을 촉진시키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규모 농부의 손과 연합 생산자의 통제가 필요하다.'
해당 주장은 원자재 가격 변동이 이윤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완전히 고립된 단편으로부터, 농업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6부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도출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농업과 산업, 합리적인 조직과도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민주의자들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농업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점진적인 역사 역할을 특히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소농에 대한 언급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맥락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소규모 농업에 대한 일반 이론과 연결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본』에서 해당 구절의 요점은 원자재 가격은 얼마나 심하게 변동하고, 이와 같은 변동이 생산적 비례성과 체계적 작동으로부터 어떻게 교란시키며, 또한 농업과 산업의 조화를 어떻게 교란하게 만드는지이다. 생산적 비례성과 체계적인 작업 및 계획적인 운영에서만 마르크스는 소농 경제를 '연합 생산자' 경제와 동등하게 평가했다. 수공예와 같은 중세 소규모 산업조차, 연합 생산자 경제와 비슷하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으로부터 두 사회 경제 체제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논리로부터 마르크스는 소규모 농업의 생존을 인정했으며, 농업에서 자본주의에 따른 점진적인 역사적 역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 다음은 농업을 다루는 특수한 부분, 소농 경제에 대한 특수한 절에서, 마르크스가 말한 내용이다.
‘토지 소유권은 본질적으로는 사회적인 생산 노동력, 사회적인 노동 형태, 자본에 따른 사회적 집중, 대규모 가축 사육, 과학의 점진적인 적용 등의 발전을 배제시킨다.’
'고리대금과 조세 제도는 모든 곳에서 농업을 빈곤하게 만든다. 토지 가격에다 자본을 지출하면, 자본은 경작에서 배제된다. 생산 수단은 무한히 파편화되고, 생산자 자신도 고립된다. 인간의 힘에도 엄청난 낭비와 생산 조건에 따른 점진적인 악화와 생산 수단 가격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토지 소유권의 법칙이 된다. 이러한 생산 방식에는 계절적인 풍요와 재앙이 뒷따른다.'
'소규모 토지 소유권은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농촌에 살으며, 사회적 노동이 아니라 고립된 노동이 우세한다는 전제를 삼는다. 따라서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는 부와 재생산의 발전, 물질적, 정신적 전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합리적인 경작의 전제 조건도 맞출 수가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대규모 자본주의 농업에 내재된 모순을 외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가차 없이 폭로했다. 또한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역할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따른 주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농업을 사회의 가장 저개발층이 사용하는 경험적이고, 기계적인 자기 영속화 과정에서 사유재산의 조건 아래로부터, 의시적인 과학적 농업 적용으로 전환한다는 점이다. 또한 토지 소유를 지배 및 예속 관계로부터 분리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 도구로부터 토지를 토지 소유 및 토지 소유자로부터 완전히 분리한다. 농업의 합리화는 농업을 처음으로 사회적 규모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으며, 토지 소유에 따른 부조리한 축소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따른 위대한 업적이다. 다른 모든 역사적 발전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은 직접 생산자를 완전하게 빈곤하게 만들면서 성과를 달성해갔다.'
마르크스에 따른 단적한 진술로부터, 농업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 발전 역할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또 다른 궤변을 찾아냈다. 현재의 농업 위기에 대해 엥겔스를 인용하면서, 농업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발전 역할이라는 명제를 반박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차등 지대론에서 주요 명제를 요약한 뒤에, '토지로부터 더 많은 자본이 투자되며, 주어진 국가로부터 농업과 문명이 전반적으로 더 많이 발전할수록, 에이커당 지대와 총액 모두 더 많인 상승하며, 사회로부터 대지주에게 초과 이윤 형태로 지불하는 공물이 더 막대해진다는 법칙을 확립한다고' 지적했다. 엥겔스는 해당 법척이 막대한 빚을 축적하면서도, 모든 위기로부터 '자립하는', '대지주 계급의 놀라운 활력'으로 설명한다. 곡물 가격 하락을 초래한 영국 곡물법 폐지는 지주들을 파멸시키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대단히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토지 재산이 대표하는 독점적인 힘을 약화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모든 것은 덧 없을 뿐이다. 대양 횡단 증기선과 북미와 남미, 인도의 철도는 새로운 경쟁자들을 불러일으켰다. 북미의 대평원과 아르헨티나의 팜파스 등은 세계 시장에 따른 값싼 곡물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에 직면하여, 미개척 평야에서뿐만이 아니라, 과세로부터 토지를 갈아엎으려는 러시아와 인도 농민들로부터도, 유럽의 소작농과 농민들은 기존의 지대에서도 승리할 수 없었다. 유럽의 일부 토지는 곡물 경작과 관련해서 경쟁에서도 결정적으로 탈락했으며, 지대 또한 모든 곳에서 하락했다. 두 번째 사례로는, 추가 자본 투자로부터, 가격 하락과 생산력 저하가 유럽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따라서 스크틀랜드에서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남부에서 프로이센 동부에 이르기까지, 지주들은 탄식했다. 평야는 완전히 경작되지 않았다. 유럽의 모든 대지주와 소지주들을 파멸시킬 만큼 충분한 경작지가 남아 있었다.'
주의 깊게 읽은 독자들이라면, 엥겔스는 인민주의가 강요한 말과 오히려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엥겔스의 견해에 따르면, 현재의 농업 위기는 지대를 감소시켜며, 심지어 그것을 완전히 폐지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따라서 인민주의자들은 농업 자본주의로부터 토지 소유의 독점을 폐지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농업 자본주의는 또 다른 엄청난 진전을 이루고 있다. 농산물에 따른 상업적인 생산을 무한히 확대시키며, 여러 새로운 국가를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인도와 러시아와 같은 마지막 피난처로부터,가부장적인 농업을 몰아냈다. 농업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있다. 최신 기계를 갖춘 노동 대중의 협력에 기반한 산업적 곡물 생산이라는 점이다. 구 유럽 국가들의 지위를 엄청나게 악화시키며, 임대로를 감소시켜, 가장 확고하게 자리 잡은 듯이 보였던 독점을 훼손하며, 토지 소유를 이론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터무니 없는 수준까지 떨어뜨린다. 농업 생산의 사회화 필요성을 제기할 필요성은, 서구로부터 유산 계급 대표자들로부터도 실현해갔다. 엥겔스는 세계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를 '환영했다.'
사물이 진행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경작되지 않은 미개척 초원이 아직은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옛날의 '농부 경작자', '신성한 시간'을 위해서만 한숨을 쉬어댔다.
농업의 정체와 온갖 형태의 농업적 속박은 영지 군주들 사이에 갈등으로부터도, 타타르의 침략도 참혹하게 흔들 수 없었으며, 괴물 같은 자본주의로부터 철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공유지는 토지 소포 관리에 따른 두 번째 보충물'이라고 지적했다.
- 살아있는 현상의 발전 과정을 묘사하고자 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앞서가냐, 뒤처지냐라는 난제에 직면한다. 그리고 중간 경로는 없다. 모든 사실이 사회적 진화에 따른 성격에서 바로 그러하며, 이러한 진화는 이미 매우 멀리까지 진행됐다. 더 나아가 진화를 지연시키는 상태와 지나치게 높은 세금, 농민의 사회적 재산에 따른 배타성, 토지 매매와 이동 및 정착에 대한 완전한 자유의 부족과 같은 제도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앞서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인민주의자들이 이들 기관 중 일부를 옹호했으며, 심지어는 노골적으로 반동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점차 농민들과 가까워져만 갔다.
- 엥겔스는 가격 하락과 관련된 농업 위기가 드러났을 때, 소규모 농업의 생존 교리를 어느 정도 양보했던 프랑스 '제자들'에 대해 단호하게 항의하고자 했다.
- 「새로운 평판지」(Novoje Slavo)에 따르면, '역사의 교훈'에 대한 '인용문'이 있었다. 인민주의자들은 현재의 농업 위기를 이용해서, 농업 자본주의로부터 역사적 발전 역할론을 반박하고자 했던 수 많은 인민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명확한 경제론에 근거해서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농업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적 역할의 발전을 인정하게 된 근거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떤 근거로 부정하며, 왜 부정하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이론에 전면적으로 반대하지도 않았으며, '러시아 제자들'에 대해서만 모호한 암시만 던졌을 뿐이다. 해당 작업에서 러시아 경제에 국한시켜서, 문제에 대한 뒷밤침할 의견을 제시하고자 했다.
- 독일 제국 의회에서는 모든 오르내리는 '승강기'를 국유화하자는 미국 농부들의 제안은 전형적인 '새대의 징조'는 아닌가.
- 엥겔스의, 『프랑스와 독일 농민 문제』에서, 프랑스의 '제자들'은 검열을 염두에 뒀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엥겔스는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경향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