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롭스키 선생이 싸우는 법
그럼 이제 미하일롭스키 선생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어떻게 싸우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 견해, 그들의 정치적·사회주의적 활동에 대해 어떤 주장들을 내놓고 있을까?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적 견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선언한 바에 따르면) 역사적 필연성의 내재적 법칙에 따라 러시아가 자체의 모든 고유한 모순을 안고 더불어 소수 자본가들이 막대한 몫을 빨아들이면서 스스로의 자본주의 생산을 발전시킬 것이라는 것, 그러는 사이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muzhik)들은 프롤레타리아로 변신해 통합되고 사회화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모자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의 머리에 씌워지는 마술이 일어나고 인류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가 아닌 오직 "전망"만을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만 다를 뿐, 어쨌든 간에 현실 인식에 있어서는 놀랍게도 '인민의 벗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하일롭스키 선생의 생각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예측에서 유토피아적인 부분은 전혀 없고, 모든 것은 엄밀한 과학의 요구에 따라 저울질되고 측정된다는 걸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종적으로, 그리고 훨씬 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믿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에 맞서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내놓을 게 없는 사람들 모두가 오랫동안 동원해온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시시하고 저속한 비난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인 역사 도식의 불변성을…… 주장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새빨간 거짓말,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다!
서구에 자본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러시아에 자본주의가 '존재해야 한다'고는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어디에서도 주장한 적이 없다.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마르크스의 이론을 역사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철학적 도식이라고, 특정한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한 설명 그 이상이라고 간주한 적이 없다. 오직 주관적 철학자인 미하일롭스키 선생만이 마르크스에 대한 이해 부족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며, 보편적인 철학 이론이라 주장했다며 마르크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미하일롭스키가 엉뚱한 문을 두들기고 있음을 아주 명쾌하게 해명해주었다.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현실과 주어진 역사, 즉 러시아의 사회적·경제적 관계 외의 다른 것을 근거로 하여 사회민주주의적 견해를 품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하려야 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인 마르크스가 직접 이론에 있어서의 그런 요구사항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하며 그것을 전체적인 교리의 주축들로 삼았기 때문이다.
물론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자신이 '자신의 귀로 직접' 추상적인 역사 도식에 관한 고백을 들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마음껏 이런 주장을 반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 선생이 직접 대화를 나눈 사람들로부터 그 모든 종류의 터무니없는 첫 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나 다른 그 누군가에게 있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그건 그저 그가 자신이 대화할 사람들을 선택할 행운을 누렸다는 걸 보여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물론 그 재치 넘치는 철학자의 재치 넘치는 대화 상대자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 등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요즘은 (오래전에 밝혀졌듯이) 악당들이 저마다 '빌려온' 옷으로 차려 입고 싶어한다는 걸 누가 모르냐?⁴⁷ 그리고 만약 미하일롭스키 선생이 너무나 명민한 나머지 그런 '광대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구별하지 못했다면, 또는 마르크스를 너무나 심오하게 이해한 나머지——마르크스가 아주 강력히 전개했던——교리 전체(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의 공식화)의 이런 기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지 미하일롭스키 선생이 영리하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증명해줄 뿐이다.
어쨌든 미하일롭스키는 해당 매체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사회주의자로서의 명성을 흘로——그래서 다른 이들과 혼동되지 않는——유지하고 글자 그대로 대표해온 플레하노프와 그의 서클⁴⁸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 그룹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품위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했어야 하는 행동이다——만약 그가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저작인 플레하노프의 '우리의 차이점들'을 참고 삼아 펴보기라도 했다면, 맨 처음 시작 부분에서 서클의 모든 구성원들을 대신해 플레하노프가 단호하게 천명했던 다음의 대목을 발견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위대한 이름의 권위로(즉 마르크스의 권위로) 우리의 강령을 잡식하는 걸 원치 않는다."
미하일롭스키 선생, 당신 러시아어 알아들을 수 있을 거 아니오? 러시아의 정세를 판단할 때 추상적인 도식들을 주장하는 것과 마르크스의 권위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의 차이를 이제 이해하겠소?
당신이 당신의 대화 상대에게 우연히 들은 첫 번째 견해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의견인 것처럼 말하고, 전체 사회민주주의 그룹을 대표해서 그 핵심 구성원 한 사람이 천명한 내용을 무시한 것이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었는지 깨달았소?
그런 다음 플레하노프의 선언은 훨씬 더 명확해진다.
그는 "되풀이하건대, 가장 일관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러시아의 현 상황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책은 "이런 특정한 과학 이론을 아주 복잡하고 서로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에 적용하려는 최초의 시도"라고 말한다.
과연 이보다 어떻게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들은 마르크스의 이론 가운데 매우 귀중한 방법론만을 주저 없이 빌려왔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회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판단 기준을 추상적인 도식 같은 헛소리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마르크스 이론의 정확도와 일치에서 찾았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이러한 주장을 할 때 필자가 실제로 다른 무언가를 머릿속에 그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가 상대했던 질문은 '러시아가 자본주의적 발전 단계를 거쳐야만 하는가?'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런 식의 질문은 마르크스주의 공식에서는 전혀 제시된 적이 없었고, 당국의 정책이나 '사회'의 활동, 또는 '인간 본성에 조응하는' 사회의 이상 같은 헛소리에서 그러한 '~해야만 한다'의 기준을 발견하는 우리의 여러 다양한 토박이 철학자들의 주관적 방법론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도식을 믿는 인물이라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어야 하는가를 묻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는 변증법적 과정의 명백함, 마르크스 이론의 전반적인 철학적 중요성, 모든 나라가 그 단계를 거쳐야 할 필연성 등에 대해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플레하노프는 거기에 어떤 대답을 내놓았는가?
마르크스주의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대답했다.
플레하노프는 '~해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은 완전히 제쳐두었다. 오직 주관론자들만 흥미를 느낄 법한 쓸데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오로지 현실 사회와 경제 관계와 그것들의 실제적 진화만을 다루었다. 그가 그런 잘못된 질문에 대해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기보다는 "러시아는 이미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대답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추상적 역사 도식들에 대한 믿음에 대해, 내재적인 필연 법칙에 대해, 그리고 그와 유사한 믿기 힘든 허튼소리에 대해 전문가인 척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 부른다!!
만약 이것이 격렬한 비판이라면, 나는 대체 대체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앞에서 인용된 미하일롭스키 선생의 주장과 관련해 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러시아는 스스로의 자본주의적 생산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이 철학자의 견해로는 러시아는 분명 "스스로의" 자본주의적 생산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 러시아 자본주의가 150만 노동자들에게 국한된다는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나중에 뒷부분에서 우리 '인민의 벗들'의 이런 유치한 발상과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맹세코 그들은 자유노동의 모든 다른 형태들을 다음의 주제 아래 분류하고 있다. "러시아는 스스로의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고유한 모순들 속에서 발전시킬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될 것이다." 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무는 더 많은 법! 그래서 오늘날 러시아에는 아직 "고유한 모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는 단순히 말해, 소수 자본가들에 의한 다수 민중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고, 인구의 절대 다수는 몰락하는 가운데 소수만 배를 불리는 현상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농민에 대한 대규모 강탈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개혁 이후 전체 역사가 어떻게 그렇게 비할 데 없는 강도로 전개될 수 있었을까? 실로 엄청난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고서야 저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생성돼 있는 프롤레타리아와 자본주의를 다뤘지만, 우리는 아직 그것들을 창출해야만 한다." 러시아는 아직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해야만 한다고? 러시아에서, 대중의 벗어날 길 없는 빈곤과 노동인민에 대한 후안무치한 착취가 목격되는 유일한 나라인 러시아에서? 러시아 빈곤층의 조건은 (아주 타당하게) 잉글랜드의 그것과 비교되어 왔다. 그리고 수백만 명이 영구적인 기아에 시달리는 나라에서 곡물 수출의 꾸준한 증가가 나란히 목격되고 있다. 이런 러시아가 아직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나는 미하일롭스키 선생의 살아생전에 그런 빼어난 주장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⁴⁹
말이 난 김에, 우리는 나중에 이것이 러시아 노동인민의 참을 수 없는 환경에 위선적으로 눈을 감고 그런 환경을 단지 '흔들린다'는 표현으로만 묘사함으로써 모든 게 정상 궤도에 놓이려면 '문명화된 사회'와 정부의 노력들이 필요할 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인민의 벗들'이 일관되게 끊임없이 사용해온 전술의 일환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들 기사 양반들은 노동인민들의 환경이 악화되는 것이 단지 '흔들려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후안무치한 소수 착취자들에 의해 수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자신들이 눈을 감는다면, 그러한 착취자들을 보지 않으려고 타조처럼 모래에 머리를 묻는다면, 착취자들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런 그들을 향해 당면한 현실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운 겁쟁이 짓이라고 말할 때, 착취라는 현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인민 대중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분리시키는 러시아 사회의 부르주아 구조와 부르주아 지배기구인 러시아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있다고 할 때, 따라서 유일한 탈출구는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있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말할 때, 이들 '인민의 벗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인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내쫓기를 원한다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우리 인민들의 경제구조를 파괴하기를 원한다고 으르렁대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점잖지 못한 행동 가운데서도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말해서 가장 패씸한 부분,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미하일롭스키 선생의 '격렬한 비판'으로 이야기를 옮겨가보도록 하자. 사회주의자들과 선동가들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수행한 활동들은 우리의 합법적 언론에서 정직하게 논의될 수 없고, 지독하게 검열을 거친 정기간행물이 이와 관련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요령껏 침묵을 유지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이러한 아주 초보적인 규칙을 망각했고, 독자 대중과의 접촉면을 독점한 자신의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의 얼굴을 더럽히는 데 활용하는 것에 전혀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비양심적인 비평가와 싸우는 수단들은 설사 합법적인 출판 영역의 바깥이라 할지라도 곧 발견될 것이다.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순진한 척 가장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있기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방관자들(변화 과정에 무관심한 관찰자들), 소극적 마르크스주의자들(그들은 오직 '산고를 누그러뜨릴 뿐'이다. 그들은 '땅 위의 사람들에는 관심이 없고 이미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에게만 관심과 희망을 기울인다), 그리고 적극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들은 농촌이 더욱더 몰락해야 한다고 통명스럽게 주장한다)."
이게 뭐지? 이 비평가 선생은 우리가 처한 환경의 현실이 자본주의 사회이며, 그것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부르주아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라는 관점을 출발점으로 삼은 사회주의자들이 바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틀림없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어떻게 그는 그들과 일종의 분별없는 속물들을 뒤섞을 수 있을까? 그는 무슨 권리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를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초보적이고 기초적인 신조들조차 받아들이지 않은 게 분명한 사람들, 결코 눈에 띄는 집단으로 행동한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구상을 발표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가?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허점을 남겼다.
그는 상류사회의 멋쟁이 분위기를 풍기면서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마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놀려대는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주장했다는 건가? 자유주의자들과 금진주의자들이 모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살롱에서? 사적인 편지에서? 좋다. 당신도 살롱이나 편지를 통해 그들과 실컷 이야기를 나눠보기 바란다. 하지만 당신은 언론에다 대고 어디에서도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마르크스주의 간판을 내건) 사람들에게 맞서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도 당신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당신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중 오직 한 그룹에 의해서만 사용된다는 사실과 그들을 다른 그 누구와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⁵⁰
이렇듯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나쁜 것을 하다 현장에서 볼잡힌 학생처럼 사실을 비틀고 왜곡한다. "내가 여기서 비난을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말을 믿게 하려 애쓰고 있다——. 나는 내 귀로 그것을 들었고 내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멋지군요! 당신의 눈에는 속물들과 비열한 악당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기꺼이 믿어드리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사회주의 활동뿐만 아니라 독립적이고 정직한 사회적 활동이라면 나로드나야 볼랴⁵¹이든 마르크스주의는 심지어 입헌주의든 간에 일정한 간판 아래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는 모든 이들이 언제든 정치적 탄압을 받을 수 있는 '현 시점'에, 그 이름 아래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비겁함을 감추고 미사여구나 늘어놓는 일부 사람들과 그에 빌붙어 자신의 동지를 깃털로 감싸는 몇몇 철저한 악한들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온갖 종류의 쓰레기에 의해 그 이름이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더럽혀진 사실에 대한 책임을 앞에서 언급한 사상적 경향들에 묻는 건 오직 천박한 속물들만이 가능한 행동이라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미하일롭스키 선생의 전체적인 주장은 일련의 왜곡, 곡필, 조작이다. 앞에서 우리는 그가 사회민주주의자의 출발점인 '진실'들을 왜곡했고, 언제 어디에서든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왜곡된 진실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만약 그가 러시아의 현실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제적 인식을 설명했더라면, 그는 오직 한 가지 방식, 즉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발전을 돕고 현 체제에 맞선 정치투쟁을 위해 그들을 조직하고 단결시킴으로써 그런 견해들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속임수 하나를 소매 속에 더 감추고 있었다. 상처 입은 무고한 피해자인 척 그는 위선적으로 눈을 치켜뜨며 능글맞게 이렇게 선언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매우 기쁘지만, 나는 당신이 반대하는 게 뭔지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그는 《루스코에 보가츠트보》2권에서 정확히 이렇게 이야기했다.) "소극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내 논평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보시오. 그러면 내가 말한 바를 알게될 테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을 거요."
물론 이는 그가 예전에 썼던 형편없는 속임수의 재탕에 불과하다.
부탁하건대 (다른 형태의 인민주의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은 시점에) 자신이 사회혁명적인 인민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넘어갔던 인물의 행동을 어떻게 특정지을 수 있을지 누가 좀 알려주기 바란다.
"내가 알고 있기로 인민주의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농민들의 생각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에 부응하여, 이를 최초리로 구타하는 행위나 인민 대처 방침이라 불려온 정부의 혐오스러운 대형 정책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일치시킴으로써 그것들을 촉진시켜나가는 일관성 있는 인민주의자, 일관성 있고 용감한 인민주의자로 변신시켜주는 언덕길이 있어 어쩌다 운 좋게 거기로 미끄러지지 않는 한 농민의 의견 따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고 오직 결사와 같은 방식을 통해 외국의 혁명운동을 러시아에 이식하려 애쓸 뿐 그에 반하는 목소리는 전혀 낼 줄 모르는 겁쟁이 인민주의자, 부농으로서 정직하게 살아가기 위해 진취적인 농민이라는 민중적 이상향을 철저히 실행에 옮겨 땅에 정착한 용감한 인민주의자 말이다." 물론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저속한 조롱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인민주의자들이 저런 주장에 대해 같은 지면에서 반박을 하지 않는다해도, 여태까지 인민주의 사상이 불법화돼 있던 탓에 설령 많은 이들이 그들의 사상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만 쉽게 믿어버린다 할지라도, 저런 사람이 어떤 인물일지에 대해서는 누구나 같은 의견일 것이다.
아마도 미하일롭스키 선생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똑똑히 잘 알고 있으리라.
어쨌든 이만하면 이제 됐겠지! 미하일롭스키 선생이 앞의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을 암시한 대목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그런 쓰레기 같은 글을 읽고 여기저기에 흩어진 내용들을 끌어모은 다음 그것들을 비교해 진지한 반박거리를 찾아내는 작업보다 더 피곤하고 생색 안 나고 구역질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189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