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벗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어떻게 싸우는가


 

1부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는 사회민주주의자에 맞서는 조직적 활동에 돌입했다. 작년에 발행된 제10호에서 핵심 인물 미하일롭스키는 “우리의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들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해 “격렬한 비판”을 펼치겠다고 예고했으며, 이후 크리베코의 「우리의 문화 용병들」(제12호)과 미하일롭스키의 「문학과 삶」(1894년 제1·2호)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또한 이 잡지가 러시아 경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은 유자코프의 「러시아 경제 발전의 문제점들」(제11·12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들은 진정한 ‘인민의 벗들’의 견해와 전술을 제시한다고 자임하나, 실상 사회민주주의의 최대의 적이다. 따라서 ‘인민의 벗들’이 가하는 마르크스주의 비판과 그들의 사상 및 전술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하일롭스키는 주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원리에 관심을 두고 유물사관을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그는 관련된 이론적 원칙을 명확히 밝히는 방대한 마르크스주의 문헌의 전반적 내용을 요약하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장광설로 비판의 포문을 연다.

 

“우선 ‘마르크스가 저작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 즉 모든 경제 문헌과 관련 사실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논리력과 결합한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잊히거나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를 발굴해 냈으며, 여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공장 감독관 보고서나 전문가 증언의 세세한 부분까지 지나치지 않았다. 즉 막대한 양의 사실 자료를 검토하여 자신의 경제 이론에 대한 논거를 제공하고 이를 명확히 실증했다. 그가 역사적 과정에 관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인류의 과거 전체를 설명하며, 기존의 모든 역사 철학 이론을 요약했다고 한다면 그의 열의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그는 알려진 모든 역사 이론을 검토·비판하고 세계사의 수많은 사실을 연구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흔히 다루는 다윈과의 비교 역시 이러한 믿음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다윈의 연구는 사실에 입각한 진정한 자료의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을 일반화하는 데 도달했다. 그러나 이에 비견할 만한 마르크스의 연구는 어디에 있는가? 마르크스의 그러한 연구는 존재하지 않으며, 방대하고 광범위한 특징에도 모든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장광설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자본』과 마르크스에 대한 그의 대중적 이해가 얼마나 미흡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마르크스 전개의 압도적인 논증력에 매료된 대중이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찬탄하면서도 이론의 핵심적 내용에는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주관적 사회학’이라는 진부한 주장을 진지하게 되풀이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해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의 경제학적 가르침을 다룬 저서의 서문으로 인용한 매우 적절한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클롭슈토크를 찬탄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모두가 그의 시를 읽지는 않는다.

 

우리는 덜 찬탄받더라도 더 많이 읽히기를 바란다.

 

정확히 그러했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에 대한 칭찬에 치중하기보다 그의 저작을 더욱 성실히 읽고, 적어도 자신이 읽은 내용에 관해 한층 깊이 고찰해야 했다.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박식함”과 “논리력”을 “결합하는 작업의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미하일롭스키는 말한다. 이 문구에서 그는 탁월한 문장이 부족한 본질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 그 전형을 보여주었다. 어느 마르크스주의자가 주장했듯, 그리고 정당하게 지적했듯 말이다. 실제로 마르크스의 논리력은 어떻게 드러났는가? 그 효과는 무엇이었는가? 미하일롭스키의 장광설을 읽다 보면 혹자는 마르크스의 논리력이 협소한 의미의 “경제 이론들”에만 전적으로 집중되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가 논리력을 발휘한 분야가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한층 강조하고자 “아주 세세한 부분”, “철저함”,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학 이론가” 등을 부각한다. 이는 마치 마르크스가 이러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본질적으로 새롭거나 주목할 만한 기여를 하지 않았고, 이전 경제학의 경계를 확장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경제학 개념을 세우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은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자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것이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허구임을 잘 안다. 이와 관련해 16년 전 미하일롭스키가 천박한 부르주아 Y. 주코프스키와 논쟁할 당시 마르크스에 대해 썼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시대가 다르고 대중적 호응도 신선했던 덕분인지, 당시 그가 쓴 글의 어조와 내용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현대 사회의 발전 법칙 (원문은 ‘경제적 운동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 목적이다’라고 명시했으며, 해당 방침을 엄격히 고수하고 있다.” 이는 미하일롭스키가 1877년에 밝힌 내용이다. 비판자인 그가 인정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현대 사회의” 경제적 “발전 법칙을 밝혀내기” 위해 엄격히 유지한 방침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서술은 설명이 필요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마르크스 이전의 모든 경제학자가 사회 일반을 논한 반면, 마르크스는 왜 ‘근대’ 사회를 언급하는가? 그는 ‘근대’라는 개념을 어떠한 의미로 사용하며, 이 근대 사회를 어떠한 특징으로 구분하는가? 나아가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으로 무엇을 규명하고자 하는가?

 

가치의 생산만이 경제학 법칙의 대상이며 분배는 정치, 즉 정부나 지식인 등이 사회에 행사하는 영향력의 성격에 결정된다는 주장은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가 속한 사회적 부류의 평론가들과 경제학자들이 매우 선호하는 발상 중 하나이다. 이러한 주장은 기존 경제학자들로부터 종종 들어 온 내용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떠한 의미에서 사회의 경제적 운동 법칙을 논하며, 나아가 이 법칙을 자연법칙 (Naturgesetz)으로까지 규정하는가? 수많은 국내 사회학자가 사회 현상은 자연사의 현상과 확연히 구분되므로 사회 현상 연구에는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이라는 별개의 접근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수없이 강변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연스럽게 곤혹이 생길 수밖에 없으며, 고의적인 무지가 아닌 한 『자본』을 논할 때 이러한 곤혹을 피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들을 명확히 해명하려면 『자본』 서문의 해당 단락을 인용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발전은 자연사적 과정이라 여겨진다.”

 

엄격한 일관성과 보기 드문 논리력을 보여준 『자본』의 핵심 발상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음은 서문에서 인용한 두 단락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충분히 확인된다. 우선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특정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발전”, 즉 자본주의 형성 과정만을 논하고 있으며, 그 스스로도 다름 아닌 자본주의 형성의 발전 법칙만을 연구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마르크스가 추론을 전개할 때 적용한 방법론을 주목해야 한다. 이 방법론은 미하일롭스키 역시 지적했듯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제 주관에 치우친 사상가가 노련하게 피해 가려 애썼던 『자본』의 기본 발상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의 본질은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구성체의 발전은 어떠한 의미에서 자연사적 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또 여겨져야 하는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핵심적인 물음이다. 

 

구시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의 관점에서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들은 사회 일반을 논하며, 스펜서 학파와 사회 일반의 성격, 목적, 본질 등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주관적 방법론을 취하는 이들 사회학자는 사회의 목적이 구성원을 이롭게 하는 데 있다는 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정의는 특정 조직체를 요구하며, 이러한 이상적 조직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체제는 파행적이므로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관적 방법론의 대표적 필자인 미하일롭스키가 “사회학은 일종의 유토피아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그들 방법론의 핵심을 명확히 보여 준다. 일례로 미하일롭스키는 ‘사회학의 본질적 임무가 인간 본성이 요구하는 특정한 조건들을 충족하는 사회적 조건을 규명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이 사회학자가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인간 본성을 충족하는 사회일 뿐이며, 소수의 다수 노예화와 같이 ‘인간 본성’과 불화하는 현상에 기초한 이질적 사회의 형성 과정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회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간주할 여지가 배제된다. 미하일롭스키의 논리에 따르면, 어떠한 현상을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의 실현 조건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의 제거 조건을 먼저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발전에 대한 체계적 논의는 성립하지 않으며, 단지 ‘바람직한 것’으로부터의 각종 일탈과 인간의 불완전한 의식으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결함들’만 다루어질 뿐이다. 나아가 인간 본성의 요구에 대한 올바른 이해나 이러한 이성 체계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 역시 도출되지 않는다.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발전은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마르크스의 기본 발상이 사회학의 학술적 권위를 사칭하는 유치한 도덕률의 근간을 해체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어떻게 이러한 기본 발상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회적 존재의 제반 영역 가운데 경제 영역을 추출하고, 다른 모든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적·주요한 관계로서 생산 관계를 선별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 스스로는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추론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 있다.

 

“이론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착수한 최초의 과제는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였다. 연구 결과, 국가 형태나 법률관계는 그 자체의 본질이나 인간 정신의 일반적 발전에 기초하여 파악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오히려 이는 헤겔이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상가들의 선례를 따라 ‘시민 사회’로 규정한 삶의 물질적 조건 전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시민 사회에 대한 규명은 정치 경제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도달한 핵심적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인간은 삶의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일정한 관계, 즉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에 부합하는 생산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이자 현실적 토대를 형성하며, 그 위에 법률적·정치적 상층 구조가 구축되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가 이에 부응한다. 물질적 삶의 생산 방식은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삶의 과정 전반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특정 발전 단계에 이르면, 기존에 생산력이 작동해 온 생산관계, 즉 그 법률적 표현인 소유 관계와 모순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생산력의 발전 형태였던 관계들은 족쇄로 전환되며, 비로소 사회 혁명의 시대가 도래한다. 결국 경제적 토대의 변혁과 더불어 거대한 상부 구조 전체가 급격하게 변동한다.

 

그러한 변화를 고찰할 때는 생산 조건의 물질적 변화와, 인간이 갈등을 의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념적 형식 (법률적·정치적·종교적·미학적·철학적 형식)의 변화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한 개인을 판단할 때 본인의 자기의식을 근거로 삼지 않듯, 이러한 변혁기를 당대의 의식에 기반하여 평가 판단할 수는 없다. 도리어 물질적 삶의 모순, 즉 현존하는 사회적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충돌로부터 그 의식을 설명해야 한다.

 

아시아적, 고대적, 봉건적,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 양식은 대체로 사회 경제 구성체가 단계적으로 이행해 온 대표적 역사적 기원으로 규정할 수 있다.”

 

사회학에서 이러한 유물론적 사고는 그 자체로 독보적인 통찰이었다. 한동안 가설에 머물렀음에도, 역사와 사회 문제를 엄격한 과학적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지평을 최초로 제시하였다. 기존 사회학자들은 생산관계와 같은 기초적 관계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정치적·법적 형태에 대한 직접적 조사와 연구에만 매몰되었으며, 그러한 형태들이 해당 시기 인류의 특정한 사고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포착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의식의 산물로 확립된 것으로 간주한 채 단절을 겪었다. 그러나 『사회 계약론』에 집약된 이러한 관념 (공상적 사회주의 조류 전반에서 뚜렷이 확인된다)은 모든 역사적 사실 및 실증과 완전히 모순된다.

 

사회 구성원이 자신이 영위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어떠한 법칙이 내재된 명확하고 완결된 체계로 파악한 적은 과거에도 없었으며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도리어 대중은 이러한 관계에 수동적으로 적응할 뿐, 이를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관계 자체로 파악하지 못한다.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교환 관계에 대한 해명이 최근에야 이루어진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유물론은 인간의 사회적 의식 자체를 근원으로부터 분석하여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였다. 의식의 도정이 물질의 도정에 종속된다는 유물론의 결론은 인간의 의식 및 행동에 대한 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관점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가설은 사회학을 최초로 엄밀한 과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간 사회학자들은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 현상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회학 내 주관주의의 원천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를 가늠할 객관적 기준조차 정립하지 못했다. 반면 유물론은 사회 구조의 핵심으로 ‘생산관계’를 선별하고, 주관론자들이 사회학에의 적용 타당성을 부인해 온 일반적·과학적 반복성의 기준을 해당 관계들에 적용하여 완전히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념적 사회관계’의 형성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을 거친 요소에만 매몰되는 한, 주관론자들은 제반 국가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의 반복성과 규칙성을 포착할 수 없었으며, 그 학문적 성과 역시 현상의 단순한 묘사나 파편적 자료의 나열에 그쳤다. 반면 인간의 의식과 독립하여 형성되는 ‘물질적 사회관계’ (생산물 교환 시 그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생산관계에 진입하는 경우)에 대한 분석은, 반복과 규칙성을 포착하고 제반 국가 체제를 ‘사회 구성체’라는 근본적 개념으로 일반화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처럼 사회적 현상의 관념적 평가나 단순 묘사에서 벗어나, 개별 자본주의 국가에서 기저의 핵심 구조를 추출해 내는 과학적 연구법은 바로 이러한 일반화에 힘입은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이 가설이 과학적 사회학을 최초로 성립하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 관계를 생산관계로, 생산관계를 다시 생산력 수준으로 귀결하여 사회 구성체의 발전이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개념에 확고한 토대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 없이는 사회 과학의 정립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예컨대 주관론자들은 역사적 현상의 법칙성은 인정하면서도 그 발전 과정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간의 사회적 의식과 목적에 가로막혀 이를 물질적 사회관계로 귀속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0년대에 이 가설을 제안한 이후 마르크스는 구체적 사실에 입각한 자료 연구에 착수하였다. 그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 중 하나인 상품 생산 체계를 추출하여, (25년 이상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해당 구성체의 운용과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분석해 냈다. 이러한 분석은 사회 구성원 간의 생산관계 영역에 철저히 국한되어 수행되었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 외부적 요인에 의존하지 않고, 사회적 경제의 상품 구조가 자본주의 구조로 발달·변형되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적대적 계급을 형성하는 과정을 규명하였다. 나아가 (생산관계의 범주 내에서 적대적인) 그것이 사회적 노동 생산성을 발전시켜 자본주의 구조 자체의 토대와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 요소를 내포하는 역학을 엄밀히 파악해 냈다.

 

이것이 『자본』의 골격이다. 그러나 핵심은 마르크스가 이러한 골격에 머물지 않고 통상적인 ‘경제 이론’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오로지 생산관계를 매개로 특정한 사회 구성체의 구조와 발전을 규명하면서도, 해당 생산관계에 상응하는 상부 구조를 다각적으로 면밀히 검토하여 그 골격에 유기적인 동력을 부여하였다. 『자본』이 거둔 압도적 성취는 자본주의 사회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로 포착하여, 독자들에게 생산관계에 내재된 계급 적대의 실질적 징후부터 자본가 계급의 지배를 관철하는 부르주아 정치 상부 구조, 자유와 평등 등과 같은 부르주아 이념, 부르주아적 가족 관계에 이르는 형성 과정 전반을 선명하게 제시한 데 있다. 

 

따라서 다윈과의 비교는 매우 적절하다. 『자본』은 “확실히 사실에 입각한 자료의 진정한 금자탑을 이루고, 사상들을 탁월하게 일반화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본』을 읽고도 이렇게 일반화된 사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서문에서부터 이를 명확히 지적한 마르크스의 오류가 아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교는 외부적 측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미하일롭스키의 주의를 끌었던)뿐만 아니라 내재적 측면에서도 정당성을 갖는다. 다윈이 동식물 종을 우연적이고 단절된 ‘신적 창조물’로 보던 기존 시각에 종지부를 찍고, 변이성과 세습성을 확립하여 생물학을 비로소 과학적 토대에 올린 것과 같다. 마르크스 역시 권력이나 사회·정부의 지배에 따른 임의적 재편을 허용하며 우연히 출현·변화하는 개인들의 기계적 집합체를 사회로 보던 관점을 종식시켰다. 그는 특정한 생산관계의 총체로서 경제적 사회 구성체 개념을 정립하고 그 발전이 자연사적 과정임을 입증하여, 사회학을 비로소 견고한 과학적 토대 위에 정초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제 『자본』의 등장 이래 유물론적 역사 개념은 더 이상 가설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 명제이다. 그리고 특정한 사회 구성체의 기능과 발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내놓는 또 다른 시도, 유물론만큼이나 '해당 사실들'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는 시도, 엄격한 과학적 해명을 제시하면서 명확한 형성 과정의 생생한 그림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시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사적 유물론 개념은 사회 과학과 동의어로 남을 것이다. 유물론은 미하일롭스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체로 과학적인 역사관'이 아니라, 유일하게 과학적인 역사관이다.

 

『자본』을 읽고도 거기에서 어떠한 유물론도 포착하지 못한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아연한 상황을 상정하기는 어렵다! “유물론이 어디에 있는가?” 미하일롭스키는 실로 곤혹감을 금치 못하며 이같이 묻고 있다.

 

그는 『공산당 선언』을 정독하고도 그 안에 담긴 근대 체제 (법률, 정치, 가족, 종교, 철학)에 대한 해명이 유물론적 접근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아울러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이론에 비판적인 관점들조차 실상 이러한 생산관계에 정초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는 『철학의 빈곤』을 읽고도 프루동 사회학에 대한 분석이 유물론적 관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각종 역사적 사안에 관해 프루동이 제기한 해결책 비판이 유물론적 원칙에 기초한다는 점과,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증적 자료의 출처로서 저자들이 언급한 내용이 모두 생산관계로 귀결된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자본』을 읽고도 정작 본인 앞에 가장 복잡한 사회 구성체에 대한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분석 전형이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 나아가 모두가 그 전형을 승인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이를 상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상세히 해명한 적이 있었던가?”와 같은 철학적 물음에 고도의 지적 역량을 허비하고 있다.

 

물론 마르크스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마르크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던가?”라고 반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는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명목하에 역사에 관한 궤변을 늘어놓은 카레에프류의 인물이 해당 연구들을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색인을 달아준 이후에야 비로소 마르크스의 유물론 연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미하일롭스키가 마르크스를 향해 “역사적 과정에 대해 알려진 모든 이론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대목은 실로 실소를 자아낸다. 그러한 이론의 90%는 사회나 발전의 본질을 두고 벌인 선험적이고 교조적이며 추상적인 담론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해당 이론들은 존재 자체와 그들이 채택한 기본 방법론, 그리고 특유의 고착된 형이상학으로 인해 이론적 유용성을 전혀 갖지 못한다.

 

사회와 발전의 개념을 해명하는 것으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방식이다. 단일한 사회 구성체를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그 개념조차 정립하지 못하고 일체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객관적·사실적 분석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면, 사회와 발전 일반에 대한 전반적 개념을 체계화한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이는 과거 모든 과학이 초기에 겪은 형이상학적 한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사실에 기반한 실증적 연구에 착수하는 방법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늘 선험적인 일반 이론을 창안해 냈으나, 이는 매번 무익한 시도에 그쳤다.

 

화학적 과정에 대한 실증적 연구 역량이 부족한 형이상학적 화학자가 화학적 친화력 이론을 가공해 내고, 형이상학적 생물학자와 심리학자가 각각 생명력과 영혼의 본질을 논하는 것 역시 동일한 오류다. 물리적 과정에 대한 개별적 해명 없이 의식을 논할 수는 없다. 과학적 발전이란 영혼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탈피하고, 특정한 물리적 과정에 대한 사실 연구를 엄밀한 과학적 토대 위에 놓는 데 있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의 비난은, 신경 과정이라는 물질적 근저에 관한 직접 연구에 착수하여 심리학적 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낸 연구자를 향해 “영혼에 관한 모든 기존 철학 이론을 검토하지 않았다”고 공박하는 형이상학적 심리학자의 타성에 불과하다. 실증적 서술과 사실 연구의 탁월함을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심리학적 개념과 과학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 방법론이 연구 어디에 설명되어 있는가? 연구에는 사실만 담겨 있을 뿐 영혼에 관한 철학 이론 검토가 부재한다!”며 분개하는 것은, 이론적 본질을 외면한 형이상학적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사회의 본질에 대한 선험적 주장의 무의미함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러한 방법론이 대상의 연구와 해명에 기여하기보다 영국 상인의 부르주아 사상이나 러시아 민주주의자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이상을 ‘사회’라는 개념에 산입하는 데 그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사회학자에게 『자본』은 결코 유용한 연구일 수 없다. 여러 역사·철학 이론이 출현했으나 당대의 사회적 사상과 관계를 표현하는 징표에 머물렀을 뿐, 진정한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는 데 전혀 기여하지 못한 채 소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가 이룩한 이론적 도약은 사회와 발전 전반에 관한 모든 주관적 담론을 벗어나,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사회와 발전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가 최종적 결론이 아닌 사실 분석에서 출발하고, 일반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념이 아닌 역사적으로 규정된 특정한 사회적 관계 연구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공박하며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적절한 연구란 과연 어디에서 이루어졌는가?” 주관주의에 빠진 사회학자의 이른바 현명함이란 실로 이러한 수준에 불과하다!!

 

주관주의 철학자가 순전한 곤혹감 속에서 유물론이 연구의 어느 부분에서 입증되었는지에만 관심을 국한시켰다면 그나마 참작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적 역사 개념에 대한 입증은 커녕 상세한 해명조차 포착하지 못했음에도, 결코 제기된 적 없는 교조적 주장을 공박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전혀 새로운 역사 개념을 창안했다는 취지의 블로스 (Blos) 단락을 인용하며, 지체 없이 마르크스의 이론이 “인류에게 그 과거를 설명해주었고” “인류의 과거 전체”를 해명해 주었다고 주장한다는 등 거짓 선언을 획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론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 구조를 해명한다고 주장할 뿐 그 이상을 강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회 구성체를 분석하고 해명함에 있어 유물론을 적용하여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면, 역사 유물론이 단순한 가설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검증된 이론으로 확립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구체적 사실 조사와 분석을 거치지 않은 여타 사회 구성체로 해당 방법론의 적용 범위를 확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는 특정 동식물의 진화를 완전히 확증하지 못했음에도 수많은 사실로 입증된 진화론이 생물학 전 영역으로 확장되는 이치와 같다. 진화론이 종의 변화라는 역사 ‘전체’를 해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명 방법론을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고 주장하듯, 역사 유물론 역시 모든 것을 해명한다고 주장한 바 없으며 단지 역사를 설명하는 『자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일하게 과학적인”을 제시했을 뿐이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가 역사 유물론을 “모든 것을 해명한다”거나 “모든 역사적 자물쇠의 열쇠”라는 식으로 왜곡하여 전달하고, (물론 마르크스는 서신에서 이를 신랄하게 반박한 바 있다), 자신이 가공해 낸 거짓에 반발한 다음, 마침내 “정치경제학은 여전히 형성되는 중이며 현재 소유한 경제학은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는 엥겔스의 명확한 사고를 인용하고는 “이러한 언급이 경제적 유물론의 활동 분야를 심하게 좁히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태도는 그가 동원한 논쟁 방식의 교활함과 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기만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한없이 단순하고 독단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취지를 왜곡하고, 자신이 가공한 거짓에 분개한 뒤, 정당한 명제를 인용하여 그들이 경제적 유물론의 영역을 좁히고 있다고 강변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하일롭스키의 왜곡 방식과 그 수준은 다음 사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경제적 유물론의 이론적 토대를 두고 “마르크스는 그것을 어디에서도 입증해 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철학의 역사와 역사 철학을 다루는 저작을 집필할 계획이었고, 실제로 한 편을 집필했으나 (1845~1846년) 출판되지는 않았다. 엥겔스는 ‘집필을 마친 부분은 사적 유물론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당대의 경제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여전히 불충분했다는 사실만 입증해 주었다’고 서술했다”는 점을 들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한다. “(그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경제적 유물론 이론의 핵심을 정립하여 『공산당 선언』에서 이를 상세히 해명하였으나, 당시는 필자 스스로 인정하듯 작업에 필요한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시기였다.”

 

미하일롭스키의 이러한 비난은 그 방식에 있어 자못 흥미로운 대목을 제시한다. 엥겔스는 ‘경제사’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철학사 ‘전반’을 포괄하는 저작의 출판을 보류했다고 명시했으나, 미하일롭스키는 이를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한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 비판을 수행할 지식조차 결여되어 있었다는 의미로 오인하였다. 이러한 오해는 그가 역사 철학 전반의 포섭과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과학적 해명 간의 격차를 구분하지 못했거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수행할 이론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했음을 보여준다. 전자라면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태도는 그의 자질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철학사 저작의 출판을 유예하고 단일한 사회 구조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연구 역량을 집중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택은 엄밀한 과학적 성실성을 입증한다. 반면 자신들의 견해를 정교화하기에는 지식이 불충분했음을 정직하게 고백한 두 학자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사실을 왜곡한 미하일롭스키의 태도는 논쟁자로서의 지적 역량과 이론적 윤리가 결여되어 있음을 명백히 보여줄 뿐이다.

 

미하일롭스키의 또 다른 비난 사례 역시 명확한 왜곡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동반자인 엥겔스가 역사 이론으로서 경제적 유물론을 입증하고자 추가적인 시도를 감행했다”고 주장하며, “엥겔스의 저작 『모건의 연구에 기초한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을 언급한다. 그는 미국인 모건의 저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제적 유물론의 원리를 발표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출간되었으며 경제적 유물론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을 지적한 뒤,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경제적 유물론자들은 이 책에 지지를 표하였다. 나아가 선사 시대에는 계급 투쟁이 부재했으므로, 그들은 물질적 가치의 생산에 더해 인간 자신의 생산, 즉 노동 생산성의 발달이 미성숙했던 원시 사회에서 생식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수용하여 유물론적 역사 개념의 공식에 ‘변개’를 가했다.”

 

엥겔스는 “모건의 커다란 공헌은 달리 해명할 수 없었던 그리스와 로마, 게르만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혈연 유대 관계에 기초한 북미 인디언 부족 집단에서 규명했다는 점에 있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미하일롭스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840년대 말에 완전히 새롭고 유물론적이며 진정으로 과학적인 역사 개념이 정립되고 선포되었다. 이는 다윈의 이론이 근대 자연 과학에 기여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역사학에 기여했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는 이러한 개념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결코 없다고 거듭 주장한다. 즉 “거대하고 광범위한 분야의 사실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본』은 사실 관계와 공들인 연구만을 담고 있을 뿐 ‘적절한 연구’가 아니라는 이유를 든다!) “역사 철학의 다른 체계에 대한 비판과 배제로조차 이론적 근거가 충분히 밝혀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엥겔스의 저작 『반뒤링론』에 대해서도 “지나가는 길에 시도한 재치 있는 모색일 뿐”이라 치부하며, 해당 저작에서 다룬 방대한 양의 본질적 물음을 완전히 무시해도 무방하다고 여긴다. 그 저작이 “유토피아에서 출발하는” 사회학의 부적절성을 입증하고 있으며, 그 저작은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기고가들이 열성적으로 옹호해 온 정치·법률 체계가 경제 체계를 결정한다는 이른바 ‘실력설’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담고 있음에도 그러하다. 유물론적으로 입증된 문제들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보다는 무의미한 문구를 늘어놓는 편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검열 당국의 번역 승인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 또한 작용하여, 미하일롭스키는 자기 철학의 주관적 한계에 대한 성찰 없이 해당 저작을 단지 ‘재치 있는 책’으로 낮추어 평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미하일롭스키의 언급은 그의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본』에 역사에 관한 탁월한 내용이 담겨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저작이 특정 역사적 시기에만 집중하여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 명제를 단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특정 역사적 현상의 경제적 측면만을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와 그 상부 구조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제공하는 『자본』의 성과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태도이다. ‘특정’ 시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대신 모든 시기를 포괄하고자 한 미하일롭스키는, 실상 어떠한 시기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공허한 상투어와 미사여구로 핵심 쟁점을 묵살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의 연구가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 명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단적으로 서술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들어 그 가치를 폄하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상품 생산자 간의 관계에서 시민적 평등과 자유 계약 등 법치 국가의 원리가 도출됨을 입증했음에도, 이를 유물론의 직접적 서술이 아닌 단순한 언급으로 치부한다. 이처럼 그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정면 논의를 회피한 채, 실질적 내용이 결여된 ‘미사여구’로 자의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왜곡으로 이어진다. “세계 역사를 해명한다던 이론이 선포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고대 그리스, 로마, 게르만 역사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 열쇠는 경제적 유물론과 무관한 인물로부터, 비경제적 요인을 매개로 제시되었다. 엥겔스는 경제적 유물론의 기본 공식과 최소한의 언어적 연관성을 유지하고자 ‘생식’이라는 개념을 포착했으나, 오랜 세월 인간의 삶이 이 공식대로 전개되지 않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방식은 왜곡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역사 ‘해명’의 토대를 관념이 아닌 물질적 사회관계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고대 유럽 역사에서 씨족 구조와 같은 주요 현상이 수수께끼로 남았던 것은 방법론의 결함이 아니라 실증 자료의 부족 때문이었다. 반면 모건이 수집한 풍부한 자료는 법이나 종교 등 관념적 관계가 아닌 물질적 관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이는 유물론적 방법론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가 이를 두고 경제적 유물론의 실패라 비난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를 드러낼 뿐이다.

 

아울러 그는 생식을 비경제적 요인으로 규정하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경제적 유물론의 핵심은 사회적 관계를 물질적 형태와 이념적 형태 (상부 구조)로 구분하는 데 있다. 후자는 단지 전자의 상부 구조를 구성하고, 전자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 활동의 형태 (결과)로서 인간의 의도나 의식과는 독립된 형태를 취한다. 정치적·법률적 상부 구조의 토대가 되는 “삶의 물질적 조건”에서 생식 관계를 제외하고 관념적 영역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생식이 고유한 생리적·심리적 뿌리를 갖는다”는 점을 들어 “경제적 유물론이 심리학과 단절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생식과 가족 관계가 상속 제도를 비롯한 법적·경제적 관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자의적 추론으로 논점을 교란하고 있다.

 

공허한 미사여구에 의존하던 미하일롭스키는 마침내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으며 본질을 은폐하기 어려운 실질적 논제로 논의를 전환한다. 그렇다면 그는 상속 제도가 생식과 가족 관계의 상부 구조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그는 “상속되는 대상은 경제적 생산의 산물”이며, “상속 제도 자체도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으로 결정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아이들에게 부모의 정신을 물려주려는 태도에서 보듯 비물질적 가치 역시 상속을 거쳐 전달된다”고 부연한다. 예컨대 러시아 민법이 부모에게 자녀의 도덕적 교화와 국가적 목표에 부응하는 교육 의무를 규정하고 있음을 들어, 자녀 양육 자체를 상속 제도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나아가 그는 “경제적 영역에 국한하더라도 상속 제도는 생산의 산물뿐만 아니라 생식의 산물 및 이에 수반되는 복잡한 심리 작용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즉, 상속이 생식에 의존하므로 상속 제도가 생식과 가족 관계를 토대로 성립하는 상부 구조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나 음식 섭취의 필요성이 재산 소유 제도를 직접 설명할 수 없듯, 생식이라는 생물학적 사실만으로 상속 제도의 본질을 규명할 수는 없다. 봉토제 시기 토지의 상속 여부를 봉건 영주의 심리적 작용이 아닌 당시 사회 구조의 특수성에서 찾은 바와 같이, 제도의 성격은 생식의 부수적 심리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관계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인민의 벗들’이라는 가면을 한 꺼풀 벗겨내면 그 실체인 부르주아지가 드러난다. 미하일롭스키의 고찰은 상속 제도가 자녀 양육만큼이나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신성하다는 부르주아지의 관념을 옹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상속 제도가 일정 정도 경제적 경쟁에 따라 결정된다”고 선언하며 회피를 시도하나, 이는 헛된 모색에 불과하다. 상속이 경쟁에 의존하는 구체적 정도나 경쟁과 상속 제도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상속 제도는 사유 재산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사유 재산은 교환의 등장과 사회적 분업, 그리고 시장에서의 생산물 소외 과정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아메리카 인디언 공동체처럼 필요한 물품을 공동으로 생산하는 사회에서는 사유 재산이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업이 확산하고 개별 구성원이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서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상품 생산자들의 물리적 고립이 사유 재산 제도로 형상화되었다. 이처럼 사유 재산과 상속은 소가족의 형성 및 교환의 발달이라는 역사적 조건에서 출현한 사회적 범주이므로, 미하일롭스키가 제시한 사례는 그의 주장과 달리 유물론적 역사관의 타당성을 입증할 뿐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사실에 입각한 또 다른 언급을 제시하는데, 이 역시 왜곡의 양상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유물론의 명제를 임의로 변개하며 “씨족 유대 관계는 문명화된 사회의 역사에서 생산 형태의 영향으로 부분적으로 무색해졌으나, 스스로의 연속성과 일반화를 거쳐 민족적 유대 관계로 이행하였다”고 주장한다. 즉 민족적 유대 관계를 씨족 유대의 단순한 연장이자 일반화된 결과로 본 것이다! 이는 사회 역사를 가족에서 출발하여 부족을 거쳐 국가로 확대된다는 피상적인 관념으로 이해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일례로 중세 러시아의 모스크바 차르 시대에는 이미 씨족 유대가 해체되어 있었으며, 국가는 씨족 연합체가 아닌 영토적·지역적 연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지주와 수도원이 여러 지역에서 농민을 확보함에 따라 형성된 사회는 순전히 영토상의 연관성에 기초하였다. 나아가 17세기 이전의 국가는 자치권과 행정적·군사적 특성을 지닌 여러 공국과 지역으로 파편화되어 있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된 민족적 유대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지역 간 교환이 이루어진 현대적 시기의 통일은 씨족 유대의 연속성이나 일반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다. 이는 지역 간 교환의 확대, 상품 유통의 증대, 그리고 지방 시장들이 단일한 국가 시장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 과정을 주도한 주체가 상인 자본가라는 점에서, 해당 민족적 유대의 본질은 부르주아적 유대의 형성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미하일롭스키는 생식과 심리 작용으로 상속 제도를 설명하고 씨족 유대로 민족성을 설명하여 ‘진부한 속물성’을 드러냈다. 아울러 상품 교환에 기초한 특수한 사회 구성체의 역사적 범주와 상부 구조를 자녀 양육이나 생물학적 성적 유대와 같은 보편적 범주와 동일 선상에 놓아 논리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자기 주관에 몰두한 비판자가 미사여구에서 구체적 사실로 논점을 옮기려 시도하자마자 논리적 난국에 직면한다는 점은 매우 특징적이다. 그는 역사 진동의 동인을 계급 투쟁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반박하고자 이를 ‘극단적’이라 규정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가 주도하고 계급 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국제노동자협회 (인터내셔널)가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 간의 무력 충돌과 약탈을 막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유물론이 “민족적 자만심과 민족 간 증오라는 요인”을 청산하지 못했음을 입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상공업 부르주아지의 실질적 이익이 민족 간 증오의 주요 토대이며, 민족 감정을 독립적 변수로 다루는 행위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비판자가 포착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제안하는 ‘공정한’ 교환 체제 내에서 국제적 연대 조직이 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교환이 부르주아적 질서를 전제로 하는 한 국제적 충돌의 중단이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하는 한 인터내셔널의 한계를 비웃는 데 머물 수밖에 없다.

 

결국 계급 억압에 맞서 각국의 피억압 계급을 단결시키고, 이를 세계 자본과 맞설 단일한 국제 프롤레타리아트 군대로 조직하는 것 외에는 민족 간 적대감을 극복할 대안이 없다는 명증한 명제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인터내셔널이 노동자 간의 충돌을 막지 못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파리 코뮌 당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교전 중이던 지배 계급을 향해 보여준 주체적 태도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미하일롭스키의 격렬한 비난에서 드러나는 비판 방식은 이론적 정밀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는 인터내셔널의 전술이나 사상에 이의가 있다면, 이를 직설적이고 명확하게 비판하며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견해와 건설적인 전술을 입증했어야 했다. 그러나 명시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공허한 수사와 부당한 비방으로 논쟁의 본질을 회피한다. 당시의 제약 아래 인터내셔널의 사상과 전술을 옹호하는 행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음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논쟁의 윤리를 저버린 형태에 불과하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향한 미하일롭스키의 비판 역시 동일한 왜곡을 반복한다. 자신의 논지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직접적이고 명료한 비판을 수행하기보다, 우연히 접한 단편적 주장을 전후 관계에서 이탈시켜 자의적으로 왜곡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마르크스는 역사적 필연성과 사회 현상의 법칙성을 규명한 주체가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을 만큼 이론적 안목을 갖추었으나, 그 하위 단계의 추종자들은 수세기에 걸친 지적 성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처럼 정밀한 이론적 검토 대신 왜곡된 단편에 의존하여 상대의 이론적 역량을 폄하하는 태도는, 비판자로서의 객관성과 논리적 엄밀성을 스스로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은 자못 그럴듯하게 다가갈 수 있다. 비판자의 목적이 상대를 왜곡하고 조롱하여 ‘정복’하는 데 있다면, 그 대상을 선동하여 의도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반적 지식을 갖춘 이라면 그러한 방법론이 완전히 거짓이자 사기라는 사실을 단번에 파악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그가 이전의 사회주의자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요소’를 정확하게 정립해 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새로운 무언가란, 예전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입증하기 위해 현존 체제하에 대중이 받는 억압을 고발하고, 각자가 생산한 결과를 수용하는 체제의 우월성을 제시한 뒤, 그러한 이상적 체제가 합리성과 도덕성에 기초한 ‘인간 본성’과 부합한다는 점을 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수준의 사회주의적 관점에 만족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현존 체제에 대한 단순한 묘사나 비판, 단죄를 탈피하여 이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각국에서 상이하게 발현하는 현존 체제를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라는 보편적 기반으로 체계화했으며, 객관적 분석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체제 내 착취의 필연성과 사회의 기능 및 발전 법칙을 정립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이나 주관적 사회학자들과 같은 방식으로는 사회주의 체제가 인간 본성과 부합한다는 주장을 이론적으로 성립시킬 수 없음을 파악했다. 대신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바탕으로 이 체제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한다는 점을 입증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필연성’의 토대는 바로 이러한 객관적 분석에 기반한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이론의 전체적 사실 관계와 본질을 생략한 채, 마치 전체 이론이 단지 ‘필연성’이라는 한 단어에만 의존하는 듯 왜곡했다. 그는 이론의 본질적 내용은 배제한 채 겉껍데기만을 붙들고 이를 마르크스의 가르침으로 변조하려 시도하고 있다.

 

비판자가 부레닌을 만족시키기 위해 부응하도록 내버려두어도 무방하다. 그가 마르크스에 대한 형식적 존경을 표한 뒤 뒤돌아서 비난을 퍼붓도록 놔두어도 좋다. “유토피아주의자 및 이상주의자들과 벌인 마르크스의 논쟁은 그 자체로 편파적이었다.”라는 식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되풀이하여 반박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공격은 근거 없는 비난에 불과하다. 비판자가 그러한 격렬한 비판에서 실제적이고 명확하며 진실한 반론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 사회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본 논쟁이 지닌 중요성을 아무리 깊이 다룬다 할지라도, 그러한 고함에 일일이 응대하기보다는 비판자의 논리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코끼리를 향해 짖는 걸 보니 꼬마 강아지가 참 힘이 센가 보군!

 

미하일롭스키가 역사적 필연성에 대해 전개한 논의는 ‘우리의 저명한 사회학자’가 지닌 이념적 상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역사적 필연성과 개인 활동의 중요성 간의 충돌”, 그리고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내재적 법칙에 종속된 꼭두각시”를 제시하며, 이를 근거로 해당 사상에서 도출된 결론 역시 “무익하고” “장황하다고” 주장한다. 결정론과 도덕성, 역사적 필연성과 개인의 역할 사이의 충돌은 그가 자주 다루어 온 주제로서, 그는 도덕성과 개인의 편에 서서 주관적인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은 결정론이 자신의 속물적 도덕성을 위협할까 두려워한 비판자가 만들어낸 허구적 산물에 불과하다. 결정론적 관점은 인간의 행위가 필연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혀 자유 의지 (무조건적 의지)에 대한 착각을 배제할 뿐, 인간의 이성과 양심, 행동에 대한 정밀한 평가를 담보하는 유일한 토대이다.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개념은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주체적 개인의 실천적 행위로 구성되며, 개인의 사회적 활동을 평가하는 데 제기되는 실질적 문제는 ‘어떠한 조건에서 인간 행동의 유효성이 보장되며, 이러한 행위들이 수많은 반대 작용에 묻혀 고립된 시도로 머물지 않도록 담보하는 방안은 무엇인가’이다. 이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여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상이한 답안을 제시해 온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체제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이 실질적 결실을 맺기 위해 대중을 어떻게 견인하고 조직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해답은, 러시아 사회 세력 간 구도와 러시아 현실의 본질을 구성하는 계급 투쟁에 대한 이해 방식에 직결된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본질적 사안을 정확히 정식화하고 해답을 모색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질문의 주변부를 회피하는 데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해답은 명확하다. 러시아의 경제 체제는 부르주아 사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변혁하는 유일한 길은 부르주아 체제 자체의 본질, 즉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에서 비롯된다는 전제에 기반한다.

 

따라서 진정한 비판이라면 당대 체제가 부르주아 체제라는 견해나 그 본질 및 발전 법칙을 직접적으로 겨냥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는 이러한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대신 ‘필연성’이 과도하게 일반적인 범주에 불과하다는 식의 상투적인 미사여구로 사안을 무마하려 한다. 내용이라는 본질을 배제한 채 겉껍데기만을 취한다면 어떠한 이론이든 일반적 범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당대의 시급하고 엄중한 과제를 외면한 채 겉껍데기 뒤로 숨는 것은 미하일롭스키의 전형적인 방식이며, 그는 “경제적 유물론이 개인의 역할과 대중의 문제를 무시하거나 왜곡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주요 논거로 내세우고 있다. 

 

당대 러시아의 현실과 그 토대를 구성하는 계급 충돌이라는 문제는 미하일롭스키에게 지나치게 일반적인 범주로 여겨졌기에 회피의 대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노동자와 농민, 공장주와 지주를 막론하고 개인의 역할과 대중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는 그에게 자못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러나 해당 주제가 지닌 ‘흥미성’ 유무를 떠나,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물론자들을 힐난하는 행태는 속물적 학문에 대한 굴종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미하일롭스키는 유물론 ‘비판’의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또 한 번의 기만을 감행한다. 그는 독일 내 수많은 대학의 존재를 근거로 내세우며 공인된 경제학자들이 『자본』을 무시했다는 엥겔스 지적에 의구심을 표하고, “마르크스가 노동자가 아닌 학자층의 인정을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학자들에게 공정성이나 과학적 비판을 기대할 수 없음을 명확히 간파하고 있었으며, 『자본』 후기에서 “독일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얻은 급속한 지지야말로 자신의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라고 피력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 후기에서 부르주아 관점을 대변하는 마이어 (Mayer)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 “마이어는 보불 전쟁 시기 출간된 소책자에서, 독일의 교육받은 계급 사이에서 사멸해 가던 이론적 수용 능력이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는 부활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처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학자들의 인정을 기대하기는커녕,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자신의 과학적 이론을 수용하고 실천할 진정한 주체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유물론에 대한 또 다른 왜곡 역시 첫 번째 사례와 동일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 주요 논지는 “(유물론) 이론이 단 한 번도 과학적으로 구체화되거나 입증된 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엥겔스, 카우츠키 등의 저작에 담긴 역사적 서술에서 ‘경제적 유물론’이라는 명칭을 제거해도 무방하다”는 점을 내세운다. 비판자들은 “경제적 요인이 주도적 지위를 지배하고 있을지라도, 해당 저작들이 사실상 사회적 삶의 총체를 다루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경제적 유물론이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결론 내린다.

 

실로 전형적인 왜곡의 방식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유물론의 근거가 희박함을 입증한다는 명목하에, 해당 이론이 사회적 삶의 총체를 외면한다는 왜곡된 전제를 먼저 덮어씌운다. 그러나 유물론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삶의 모든 영역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유물론자들이 “사실상” 경제학만으로 사회적 삶의 총체를 설명하려 했다고 강변한 뒤, 유물론이 “과학적 타당성을 스스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왜곡된 결론을 도출한다. 이론의 본질을 왜곡하여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비판자의 인위적 전개 방식만이 뚜렷하게 드러날 뿐이다!

 

미하일롭스키가 유물론 ‘비판’에서 전개한 논리는 이것이 전부다. 본 논의에는 실질적 비판이 결여되어 있으며, 공허하고 가식적인 미사여구만이 남발되어 있을 뿐이다. 생산관계가 여타 사회적 요소의 토대를 이룬다는 관점, 마르크스가 유물론적 방법으로 규명한 사회 구성체 개념 및 그 자연사적 발전 법칙의 정확성에 대해 비판자가 어떠한 반증을 제기했는지 검토해 본다면, 어떠한 논리적 반대나 실질적 오류도 입증하지 못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비판자는 문제의 본질을 수사적인 미사여구로 외면한 채 주변부만을 회피했으며, 그 과정에서 보잘것없는 논리적 왜곡만을 되풀이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미하일롭스키의 논박은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제2호에서도 계속되었으나, 그의 논의에서 이론적 엄밀성이나 진지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전과 차이점은 논리적 왜곡의 방식마저 독창성을 상실하고 타인의 논리를 단순 답습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점이다. 

 

사회적 삶의 ‘복잡성’을 언급하며 논의를 시작하는 비판자의 태도는 사안의 본질을 외면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갈바니 (Galvani)의 실험이 헤겔에게 준 “감흥”을 근거로 갈바니즘마저 경제적 유물론과 연계되어 있다는 식의 비약적 주장을 펼친다. 이처럼 자의적인 논리 연관을 남발하는 서술은 이론적 비판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하며, 단지 본질을 왜곡하고 논점을 교란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미하일롭스키는 역사의 본질이 “경제적 유물론의 원리를 회피하고 있다면서, 이 이론이 생산과 교환 형태의 결정적 중요성 및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두 기둥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역사적 과정의 본질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유물론적 역사관의 과학적 성과를 왜곡하고 개념적 겉껍데기만을 취하여 논점을 왜곡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유물론자들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는 주장, 즉 그들의 사회학 이론이 헤겔의 삼단논법(triads)에 기초한다는 시각은 마르크스주의에 헤겔 변증법의 혐의를 씌우는 상투적인 수법에 불과하다. 이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부르주아 학자들의 이미 진부해진 비난 방식이다. 원리에 반하는 근본적인 반론을 내놓지 못한 비판자들은 마르크스의 표현 방식에만 매달려 이론의 근원을 공격하여 본질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으며, 미하일롭스키 역시 이러한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는 엥겔스의 『반뒤링론』을 핑계로 삼으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공격한 뒤링에 대한 반론에서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헤겔의 삼단논법으로 무언가를 ‘입증하려’ 한 적이 없으며 오직 실제 과정을 연구했을 뿐이고, 이론의 유일한 기준은 현실과의 일치라고 명확히 밝힌 바 있다. 특수한 사회 현상의 전개가 헤겔의 법칙, 즉 정반합 이론과 부합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드문 일이 아니다.

 

엥겔스는 자연사 (종자의 발달)와 사회적 영역에서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원시 공산주의에서 사유 재산으로, 다시 자본주의적 노동 분화로 이행하는 과정이나, 초기 유물론에서 관념론으로, 그리고 과학적 유물론으로 발전하는 과정 등이다. 엥겔스가 강조한 핵심은 유물론자가 실제 역사 과정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규명해야 하며, 삼단논법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변증법을 내세우는 것은 헤겔주의적 표현 방식의 유산일 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삼단논법으로 무언가를 ‘입증한다’는 것이 성립할 수 없으며 누구도 이를 시도한 적이 없다고 선언된 이상, ‘변증법적’ 과정의 사례들은 단지 이론 원리의 역사적 근원을 가리킬 뿐이다. 이론의 근원을 이유로 이론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미하일롭스키 자신도 인정하고 있던 사실이다. 그럼에도 엥겔스의 논의에서 이론의 근원 이상의 의미를 도출하고자 했다면, 유물론자들이 구체적 사실이 아닌 삼단논법에 의존하여 역사적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했어야 마땅하다.

 

미하일롭스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마르크스가 공허한 변증법적 공식을 사실에 기초한 내용으로 채워 넣었기에, 내용의 변화 없이 변증법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실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형식적 틀을 두고 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그가 유물론자들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변증법적 과정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단지 겉껍데기와 씨름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둥과 맞서고 있다는 허위 주장을 남발하는 까닭은 본질적 논점을 왜곡하기 위함이다.

 

미하일롭스키는 단지 내용 변화 없는 형식적 틀에 불과한 요소에 매달리며 논점을 왜곡하고 있다. 자신이 실체 없는 형식적 영역을 공격하고 있으면서도,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원리와 대립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타당성을 결여한 기만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미하일롭스키가 삼단논법의 사례들을 분석한 방식을 검토하지 않는 까닭은, 해당 분석이 과학적 유물론이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본질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증법적 태도를 비판자가 왜곡한 원인에 대해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왜곡은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

 

첫째, 비판자가 이론의 피상적 현상만을 접했을 뿐 그 실체적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의 논리적 열세를 감추기 위해 의도적인 왜곡과 자의적 가공의 방식을 재차 감행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근거: 마르크스의 문헌을 접하면서 미하일롭스키는 사회과학의 ‘변증법적 방법론’과 사회 문제 영역의 ‘변증법적 사고’ 등에 관한 언급을 지속해서 확인했다. 그는 이러한 방법론이 헤겔의 삼단논법 법칙에 따라 모든 사회적 문제를 판단하는 틀에 불과하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러한 방식의 어리석음을 직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변증법적 방법론은 사회를 기계적이고 임의적인 요소의 결합이 아닌, 끊임없이 발전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규정하는 사회학의 과학적 방법론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이러한 유기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회 구성체와 그 기능 및 발전 법칙을 규명하는 생산관계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필수적이다. 후술하겠지만 미하일롭스키 자신의 주장에 나타난 변증법적 방법론과 형이상학적 방법론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론 역시 이에 포함된다) 사이의 관계를 실증할 것이다. (다만) 엥겔스 (뒤링에 대한 반론인 『사회주의: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나 마르크스 (『자본』의 여러 서술과 제2판 후기, 그리고 『철학의 빈곤』)가 제시한 변증법적 방법론의 정의를 검토해 본다면, 헤겔의 삼단논법은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오직 사회 발전을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자연사적 발전 과정으로 다루고 있음을 확인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1872년 《유럽 통보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제5호에 게재된 기사 『카를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관점』의 변증법적 방법론에 관한 서술을 상세히 인용한다. 마르크스 역시 『자본』 제2판 후기에서 이 기사를 인용하며, “독일 비평계가 헤겔식 삼단논법을 들먹이며 자신의 방법론을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연구 대상인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 특히 현상의 변화와 발전 법칙, 그리고 한 사회적 관계 질서에서 다른 질서로 전환되는 이행 법칙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에게 엄격한 과학적 연구의 핵심은 특정 사회적 관계 질서의 필연성을 증명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사실들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현존하는 질서의 필연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식이나 신념 여부와 무관하게 이전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운동을 인간의 의식이나 의도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향을 결정하는 객관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사적 과정으로 규정했다. (스스로 의식적인 ‘목표들’을 설정하고 명확한 이상에 따라 인도된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발전을 자연사의 발전과 분리하려는 주관론자들을 위해 참고 삼아 일러둔다). 

 

의식적 요소가 역사 과정에서 종속적인 역할에 그친다면, 사회 비판이 의식의 형태나 결과를 분석의 기초로 삼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즉 사상이 아닌 외부의 객관적 현상만이 비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비판이란 의식 형태 간의 비교가 아니라 주어진 객관적 사실들을 비교·대조하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두 사실을 정밀하게 연구함과 동시에, 그것들이 고유한 발전 단계를 구성한다는 점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아가 현상들의 연속성과 발전 단계 간의 상호 관계를 명확히 밝혀내는 것이 핵심이다.

 

마르크스는 경제 법칙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비역사적 전제를 거부하며, 각 역사적 시기마다 고유한 법칙이 작용함을 강조한다. 경제적 삶은 물리학이나 화학의 고정된 법칙이 아닌 생물학적 발전과 유기적인 특성을 지닌다. 초기 경제학자들은 경제 현상을 물리·화학적 법칙에 비유하여 그 본질을 오해했으나, 정밀한 분석은 사회적 유기체가 식물이나 동물과도 근본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본주의 경제 유기체를 연구한 마르크스는 엄밀한 경제학적 연구가 갖추어야 할 과학적 연구의 목표를 명확히 정립했다.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특정 사회적 유기체의 기원과 존재, 발전, 소멸, 그리고 보다 고등 유기체로의 이행을 지배하는 고유한 (역사적) 법칙을 규명하는 데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 관련 수많은 서평에서 찾아내 번역한 변증법적 방법론에 대한 서술이 바로 그러하며, 마르크스 본인 역시 해당 서술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비판자가 대립하는 삼단논법과 삼분법, 변증법적 과정의 명백성 따위의 논의가 과연 해당 서술에서 단 한마디라도 언급되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해당 서술을 거론하며 자신의 방법론이 헤겔의 방법론과 “정반대”임을 명확히 했다. 헤겔에 따르면 사상의 발전이 삼단논법의 변증법적 법칙과 일치하여 현실 세계의 발전을 결정한다. 삼단논법의 중요성과 변증법적 과정의 명백성은 오직 이러한 관점이 전제될 때만 논의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의식을 물질의 산물”로 규정하며, 핵심은 “현존하는 사물 상태와 그 필연적 발전을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오직 속물들만 관심을 갖는 외형적 껍데기의 역할 외에는 삼단논법에 표현 방식에 불과한 형식적 역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같은 후기에서 “헤겔 특유의 표현 방식을 유희적으로 차용한 바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과학적 유물론의 ‘핵심 원리’를 비판한다면서 변증법의 본질, 사회 발전의 자연사적 성격, 경제적 사회 구성체의 유물론적 개념, 객관적 분석 방법론, 그리고 사회적 이념의 결정 요인 등과 같은 본질적 문제는 일절 다루지 않은 채 지엽적인 논의만을 늘어놓는 비판 태도는 지적 빈곤과 논리적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두 번째 근거: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전개한 이후, 미하일롭스키는 헤겔의 삼단논법을 ‘동원하여’ 사물을 입증하는 방식의 소관을 마르크스에게 전가하며 이를 상대로 비판을 수행한다. 그는 “향후 전망에 관한 내재적 사회 법칙들은 순전히 변증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발전 법칙에 따른 착취자의 착취 불가피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순전히 변증법적’이며,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라는 마르크스의 ‘이상’ 역시 ‘그 불가피성과 확실성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헤겔식 삼단계 연쇄의 연장선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온전히 뒤링의 견해를 빌려온 것에 불과하며, 뒤링은 자신의 저서 『국민 경제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역사』(1879년, 제3판, 486~487쪽)에서 이를 상세히 논술한 바 있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는 뒤링에 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독자적인 힘으로 마르크스의 관점을 이처럼 왜곡하는 방식에 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엥겔스는 뒤링에게 적절한 답변을 제시하였으며 해당 비판 내용 역시 인용하고 있으므로, 논의는 엥겔스의 답변으로 한정한다. 이러한 분석은 미하일롭스키에게도 전적으로 적용된다.

 

뒤링은 다음과 같이 논술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개요는 마르크스의 저술 중 상대적으로 가장 뛰어난 부분이나, 이론적 논의가 변증법이라는 목발에 의존하지 않았다면 훨씬 우수했을 것이다. 더 적절하고 명확한 수단이 부재할 때, 헤겔의 부정의 부정 법칙은 과거의 모태로부터 미래를 출산하도록 돕는 산파 역할을 수행한다. 17세기 이래 앞서 지적한 방식으로 작용해 온 ‘사유재산’의 폐지는 첫 번째 부정을 이룬다. 이어 부정의 부정이라는 성격을 띠는 두 번째 부정이 뒤따르는데, 이는 바로 ‘사유재산’의 복귀를 의미한다. 다만 더 높은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이 복귀는 토지 및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에 기초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새로운 ‘사유재산’을 ‘사회적 재산’으로 명명하기도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헤겔식의 고차적 통일이 등장한다. 헤겔의 언어적 마술에 따르면, 모순은 지양되는, 즉 극복되는 동시에 보존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착취자 착취의 불가피성은 물질적 외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역사적 현실의 자동적 결과에 해당한다.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부정의 부정과 같은 헤겔식 언어 기교에 대한 맹신을 바탕으로 토지와 자본의 공동 소유가 지닌 필연성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개념들의 모호한 결합은 과학적 기초로서의 헤겔 변증법에 입각하여 어떠한 허황된 주장이 날조될 수 있는지, 또는 그로부터 어떠한 오류가 필연적으로 파생되는지를 파악한 이에게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이러한 논법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덧붙이자면, 헤겔의 첫 번째 부정은 원죄에 대한 교리문답적 개념이며, 그의 두 번째 부정은 구원으로 이어지는 고차적 통일의 개념이다. 종교적 영역에서 빌려온 이러한 부당한 추론을 바탕으로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자신의 모호한 재산 관념 속에 안주하며, 이러한 심오한 변증법적 수수께끼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사실 증명을 의존하고 있다.” 뒤링의 인용은 여기까지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마르크스에게는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활용하는 것 외에 사회 혁명, 토지의 공동 소유제 확립, 그리고 노동으로 창출되는 생산 수단의 필연성을 입증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종교에서 빌려온 이러한 부당한 비유에 근거 두었기에, 그는 미래 사회가 헤겔식으로 지양된 모순의 고차적 통일체로서 개인적이자 사회적인 소유관계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부정의 부정을 잠시 제외하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소유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뒤링은 이를 가리켜 모호한 영역이라 규정하였으며, 이 점에 한해서는 그의 지적이 타당하다. 다만 모호한 영역에 머물러 있는 주체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뒤링 자신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더 높은 단계로의 소유권 결합’이라는 개념을 마르크스에게 전가하여, 마르크스를 헤겔의 논리와 동일한 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이는 부정의 부정이다. 이 과정은 생산자에게 사유 재산을 단순 재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즉 토지 및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와 공동 운영에 기초한 사유 재산을 부여한다. 개인 노동에서 비롯된 산발적 사유 재산이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이미 실질적으로 사회화된 생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이 사회적 재산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과 폭력, 난관을 동반함이 자명하다.’ 요체는 이것이다. 착취자 착취로 형성된 구도는 사유 재산의 재확립으로 규정되나, 이는 노동 자체로 창출된 생산 수단 및 토지의 사회적 소유 관계에 토대를 둔다. 독일의 사정을 이해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정황이 토지 및 제반 생산 수단으로의 사회적 소유 관계 확장과, 생산품 즉 소비재로의 개인적 소유 관계 확장을 의미함을 파악할 수 있다. 나아가 문제의 직관적 이해를 돕고자 마르크스는 56쪽에서 공동 생산 수단으로 작업하며, 개별 노동력을 사회주의적 기반 위에서 조직된 하나의 결합된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를 상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공동체의 생산품 전체는 사회적 산물이다. 이 생산품의 일부는 다시 생존 수단으로 기능하며 지속적으로 사회적 성격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일부분은 구성원의 생존 수단으로 소비되므로, ‘구성원 간의 명확한 분배 방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지는 뒤링에게조차 충분히 명백하게 전달되는 바이다.”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재산이라는 개념은 혼란스러운 이종(異種)의 결합이자, 헤겔 변증법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모순적 주장이자 모호한 영역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헤겔 변증법의 해법을 자신의 숙달된 능력에 의존하도록 남겨두었다는 이 심오한 변증법적 수수께끼는, 뒤링에 이르러 또 다른 임의적 창작이자 주관적 구상으로 전락한다.”

 

이어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체계에서 부정의 부정이 담당하는 실질적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며” 논의를 확장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다룬 역사적·경제적 분석의 결말부 (791쪽 이하)에서 핵심적 결론에 도달한다. 자본주의 이전 단계, 적어도 잉글랜드에서는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한 노동자의 사유 재산에 기초한 소규모 제조업이 존재하였다. 이른바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란 이러한 직접 생산자의 재산 박탈, 즉 자기 노동에 기반을 둔 사유 재산의 해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전환은 소규모 제조업이 지닌 원시적·국소적 생산 양식의 한계와, 해당 양식이 특정 단계에 스스로의 소멸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내부에 형성한다는 특성으로 인해 성립하였다. 개인적·산발적 생산 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 수단으로 변모하는 이 소멸은 자본주의의 초창기 구도를 형성한다.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생산 수단이 자본으로 귀속되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확립되자, 노동의 사회화는 한층 심화되었으며 토지 및 제반 생산 수단의 자본화 역시 가속화되었다. 이에 따라 개별 소유주에 대한 재산 박탈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이제 박탈의 대상은 자립적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로 전환되며, 이러한 박탈은 자본주의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인 자본 집중에 의거하여 달성된다. 소수가 주도하는 다수 자본가의 재산 박탈과 병행하여, 노동 과정의 협동적 형태, 과학기술의 의식적 적용, 토지의 체계적 경작 등이 한층 확대된 규모로 발전한다. 노동 도구가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고, 이를 매개로 결합된 사회적 노동은 생산 수단의 집약적 절감을 실현된다.

 

이러한 전환의 모든 이득을 독점하는 거대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됨에 따라 곤궁, 억압, 노예화, 착취의 수준은 비약적으로 증대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 과정 자체의 구조적 동인으로 수적으로 증대하고 훈련되며 단결·조직화된 노동 계급의 저항 또한 고조된다. 자본은 자신이 출현하고 발전해 온 생산 양식의 족쇄로 작용하게 되며, 마침내 생산 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결국 이 외피는 산산이 폭발하고,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의 종말과 함께 착취자에 대한 재산의 몰수가 실현된다.”

 

“변증법적 장식과 퍼즐, 개념상의 아라베스크 무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모든 것을 동일시하는 모순되고 부당한 사상들, 독실한 추종자들을 위한 변증법적 눈속임, 그리고 헤겔식 이성 원리에 기반한 알 수 없는 변증법적 헛소리와 종잡을 수 없는 수수께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뒤링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이러한 요소들 없이 자신의 설명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르크스는 과거의 소규모 제조업이 스스로의 발전을 거치며 필연적으로 소멸 조건을 형성했듯, 자본주의 생산 양식 역시 자신을 소멸시킬 물질적 조건을 스스로 형성해 왔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고 이를 요약하여 명시하고 있다. 이 과정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이 동시에 변증법적 과정이라 하여 뒤링에게 반감을 준다 할지라도 이는 마르크스의 오류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경제적 사실에 기초해 입증을 종결한 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따른 착취 방식이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을 형성한다는 결론으로 도출한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 기반한다. 이는 소유자의 노동에 기반하여 형성되었기에 개인 사유 재산에 대한 첫 번째 부정에 해당한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불변성을 내포한 자본주의적 생산은 내재적 논리로 스스로에 대한 부정을 초래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정의 부정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그 과정을 부정의 부정이라 정의한 것은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과정이 이미 부분적으로 발생했고 향후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역사적으로 입증한 뒤, 이를 명확한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정의 부정을 과거에서 미래를 도출하는 산파로 보거나, 마르크스가 이를 근거로 토지 및 자본의 공동 소유에 대한 필연성을 설득하려 했다는 뒤링의 주장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125쪽).

 

독자들은 뒤링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이 미하일롭스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미하일롭스키 역시 마르크스에게 미래는 오직 헤겔 체계의 종착점에 존재하며, 그 불가피성에 대한 확신은 상투적인 믿음에 기반할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링과 미하일롭스키 간의 차이는 다음의 두 가지 지엽적인 지점에서 드러난다. 입에 거품을 물지 않고는 마르크스를 논할 수 없었던 뒤링조차 자신이 집필한 『역사』에서 마르크스가 『자본』 후기에서 헤겔주의라는 비난을 단호히 배격했음을 언급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미하일롭스키는 스스로 변증법적 방법론이라 여겼던 부분에 대해 마르크스가 명확히 해명한 사실을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둘째로, 미하일롭스키의 또 다른 특징은 시제 사용에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는 ‘마르크스가 미래를 논하면서 왜 현재 시제를 사용하는지’ 의기양양하게 따져 묻는다. 어떠한 문법서나 비평서를 보더라도 그 답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미래가 불가피하고 확고하다고 판단될 때는 미래 시제 대신 현재 시제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하일롭스키는 왜냐며 정당성을 재차 되묻고, 왜곡에 가까운 자신의 깊은 초조함을 내비친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도 마르크스는 지극히 명확한 답변을 제시했다. 그 해명이 불충분하거나 잘못되었다고 판단된다면, 헤겔주의 운운하는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왜 틀렸는지를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 자신도 그 답변이 무엇인지 알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타인에게 설파하기까지 한 시기가 있었다. 1877년 그는 주콥스키가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상을 억측으로 여길 근거는 충분했으나, “마르크스가 막대한 의미를 부여한” 노동의 사회화라는 문제를 무시할 “도덕적 권리가 없었다”고 서술했다. 1877년의 주콥스키에게는 그 문제를 회피할 도덕적 권리가 없었으나, 1894년의 미하일롭스키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용인되는 셈이다! 

 

《조국 연보》에서 거론된 바 있는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왜곡된 관점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잡지는 1883년 제7호에서 ‘포스트로니 (Postoronny)’라는 인물이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를 게재했는데, 그 역시 미하일롭스키와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마르크스의 ‘구상’을 단순한 억측으로 치부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의 사회적 형태란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한 공장 안에서 망치질, 이동, 운반 등 각기 다른 작업을 수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해당 체제의 본질은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는 속담에 집약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노동의 사회적 형태가 성립할 여지가 어디에 있는가?”

 

해당 인물이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노동의 사회적 형태”를 단지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작업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규정하는” 식이다!! 이러한 함량 미달의 발상을 러시아 최고 권위의 잡지에 실으면서도, 그들은 『자본』의 이론적 성과가 과학적으로 인정받는다는 상투적인 말로 독자를 유화시키려 한다. 정작 『자본』에 대해 이론적으로 진지한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했기에, 이른바 ‘대체로 인정받는 과학’은 해당 저작에 표면적인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지극히 규범적인 무지를 드러내며 기존 경제학 통설의 진부한 논리를 되풀이할 뿐이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가 관습적으로 회피해 온 문제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사안을 엄밀하고 철저하게 재검토해야 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비롯된 노동의 사회화는 단지 다수의 인원이 한 공간에 모여 일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분화, 특정 산업 분야 내 자본가 수의 감소 및 독립적 산업 분야의 수적 증가, 그리고 개별 생산 과정들이 하나의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포섭되는 경향의 강화를 동반하는 자본의 집중에 있다. 

 

예를 들어, 소규모 생산자가 직접 실을 자급하여 옷감을 짜던 수공업 직조 시대에는 제조업 분야가 방적과 직조의 결합 등 몇 개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바탕으로 사회화가 진행되면 면방적과 직조가 상호 독립되는 등 제조업의 전문화된 분야가 증대한다. 이러한 생산의 분업화와 집중은 기계 제작이나 석탄 채굴 등과 같은 새로운 산업 부문을 파생시킨다. 이처럼 특화된 각 제조업 분야에서 자본가의 수는 지속해서 감소하며, 이는 생산자 간의 사회적 연계가 한층 공고해지고 생산 단위들이 단일한 체계로 결합됨을 의미한다.  

 

고립된 소생산자는 다채로운 작업을 단독으로 수행하므로 상호 의존성이 극히 낮다. 가령 수공업자가 직접 실을 자급하여 옷감을 만드는 경우 타인에게 의존할 이유가 거의 없다.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신은 모두를 위해 일한다”라는 속담, 즉 무정부적 시장 변동을 대변하는 표현은 이처럼 영세하고 분산된 상품 생산자 체제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인해 달성된 노동의 사회화 체제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직물을 생산하는 제조업자는 면실 제조업자에게 의존하고, 후자는 면화를 재배하는 자본주의적 경작자 및 기술 업무 소유자, 석탄 소유자 등에게 의존한다. 그 결과 어떠한 자본가도 독자적으로 생산을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는 속담은 이러한 체제에 결코 적용될 수 없으며, 각자가 모두를 위해 일하고 모두가 각자를 위해 일하는 구조로 전환된다. (이 과정에서는 관념적 허상이든 현세의 ‘금송아지’든 관념적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생산 체제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소규모 고립 기업 체제에서는 특정 기업의 작업이 중단되더라도 그 여파가 일부 구성원에 그치며, 전체적 체계 교란이나 공공의 개입을 유발하지 않는다. 반면 고도로 전문화되어 사회 전체와 상호 의존하는 대기업의 생산 차질은 산업 전반의 마비를 초래한다. 개별 기업이 필요 제품의 수급과 자사 상품의 처분을 다른 기업과의 연계 속에서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생산 과정은 하나의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각 산업 분야는 독립된 자본가의 주도하에 운영되고 그에게 의존하며, 사회적 생산물은 그의 사유 재산으로 귀속된다. 이에 따라 생산의 사회적 형태가 점유의 사적 형태와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을 일으킴은 명백하다. 결국 점유 형태가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부합하도록 변화해야 하며, 이는 곧 사회주의적 형태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러나 《조국 연보》에 기고한 글에서 나타나듯, 전체를 단지 ‘한 지붕 아래에서 작업하는 문제’ 귀착시키는 주장은 지극히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조직화라는 과정의 사회적 측면은 파생적 현상이므로 제외하고, 여기서는 물질적 과정과 생산관계에서의 변화만을 서술하였다.)

 

러시아의 이른바 ‘민주주의자들’에게 이러한 기초적인 사실조차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이 소부르주아적 사상의 틀에 지나치게 깊이 침윤되어 있어, 소부르주아적 질서 이외의 여지는 상정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하일롭스키에게로 돌아가 보자.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발전 법칙 자체에서 필연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기초로 삼은 명제와 사실들에 대해, 미하일롭스키가 어떠한 반박을 제기했는가? 사회적 경제의 상품 구조 속에서 사회적 노동 과정의 분화가 실제로 증대하지 않는다거나, 자본과 기업의 집중이 일어나지 않으며 노동 과정 전반의 사회화도 부재함을 그가 입증했는가? 그는 이러한 반박을 단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노동의 사회화와 양립할 수 없는 무정부성이 자본주의 사회의 고유한 특성이라는 명제를 그가 흔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에 대해서도 그는 단 한 마디조차 남기지 않았다. 모든 자본가의 노동 과정이 단일한 사회적 노동 과정으로 집약되는 현상이 사유 재산제와 양립할 수 있다거나, 또는 이 모순에 대해 마르크스가 제시한 것 이외의 다른 해결책이 성립할 수 있음을 그가 증명했는가? 아니, 그는 여기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비판은 어디에 의존하는가? 날조, 왜곡, 그리고 공허한 언사의 나열이 전부였다.

 

3단계의 연속적 역사 발전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은 뒤, 마르크스를 향해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고 엄숙히 따져 묻는 비판자의 방법론은 기만성에 불과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과정의 마지막 단계를 지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묻는 식이다. 마르크스는 이론과 혁명 활동 초기부터 사회학 이론이 현실의 과정에 기초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요구했다. 이 원칙은 『자본』에서도 엄격히 유지되었다. 그의 연구 과제는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체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한정되었으며, 눈앞의 역사적 체제가 지닌 발전 동학과 이것이 필연적으로 소멸하여 더 높은 단계의 구성체로 이행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서 멈췄다. 그러나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 이론의 본질적 실천을 외면한 채 “그래서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반복한다. 나아가 “엥겔스가 어떻게 답변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이며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낸다. 이러한 태도는 ‘비판’의 탈을 쓴 사상적 무지와 미숙한 방법론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중세 시대 소유주의 자가 노동에 기초한 사유 재산 개념이 경제적 관계의 영역에서 유일하거나 지배적인 요인은 아니었다는 주장을 예로 들 수 있다. 수많은 ‘요인’이 존재함에도 마르크스의 구상”에서 “변증법적 방법론”은 초기 형태의 상태로 복귀할 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상들이 역사적 현실이나 그 비중을 충족하여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대상을 규명하려는 인간 정신의 지향을 만족시킬 뿐”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사안을 왜곡하는 이러한 방식은 구역질날 정도로 단조롭고 변함이 없다! 자본주의 발전의 실제 과정을 밝히려는 마르크스의 의도에 삼단논법적 증명 의도를 몰래 주입한 뒤, 그것이 자신이 왜곡한 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역사적 현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뻔뻔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식이다!

 

(엥겔스가 뒤링을 비판하며 지적한 바와 같이) 최소한의 정확한 인용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인물에게 엄밀한 비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어떠한 구체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해당 구상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만으로 대중을 기만하려는 태도와는 정당한 이론적 논쟁이 성립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관점을 실질적으로 비판하는 대신, 미하일롭스키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범주의 틀 안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 일례로 뒤링의 ‘영구적 진실’을 반박한 엥겔스는 “오늘날 제시되는 도덕”이 봉건적·부르주아적·프롤레타리아적 도덕이라는 세 범주로 나뉘며, 과거와 현재 및 미래가 이 세 도덕에 각각 귀착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미하일롭스키는 “역사의 3단계 분할 기초에 과거·현재·미래라는 범주가 자리 잡고 있다는 식의 추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 현상이든 그 발전 과정을 검토하면 과거의 유산, 현재의 토대, 미래의 기원이 규명된다는 사실은 극히 자명하다. 엥겔스가 도덕의 역사를 상기한 세 요인에만 한정했다거나, 봉건적 도덕 이전에 노예제 도덕이나 원시 공산주의 사회의 도덕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결국 미하일롭스키는 도덕 사상의 시대적 지향을 유물론적으로 해명하려 한 엥겔스의 시도를 진지하게 비판하기는커녕, 공허한 수사만을 늘어놓고 있다!

 

미하일롭스키가 동원한 ‘비판’, 즉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이 대체 어느 저작에서 설명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발언으로 시작되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가 해당 저작 중 하나를 접하고 높이 평가했던 과거를 되짚을 필요가 있다. 1877년 미하일롭스키는 『자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자본』에서 헤겔 변증법이라는 무겁고 불필요한 외피를 제거한다면, 형태와 그 존재의 물질적 조건 간의 관계라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답을 이 노작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며, 이를 명확한 영역으로 정식화하는 것 역시 성립해질 것이다.” 여기서 “형태와 그 존재의 물질적 조건 간의 관계”란 사회적 삶의 제반 측면 간 상호 관계, 즉 물질적 관계에 기초한 이념적·사회적 관계의 상부 구조를 의미한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법이 바로 유물론의 핵심 원리를 구성한다.

 

“전체로서의 『자본』은 하나의 사회 형태가 형성되자마자 생산 방식, 새로운 시장, 과학적 창안 및 발명, 기술적 개선을 스스로에 종속·흡수하며 발전하고 자신의 전형적 특징을 강화하는 과정, 나아가 이러한 부분 요소들이 해당 사회 형태를 위해 기능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그 주어진 사회 형태가 변화된 물질적 조건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1877년에는 “『자본』 전체가” 특정 사회 형태의 유물론적 발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인정했던 미하일롭스키가, 1894년에 이르러 이러한 유물론적 설명을 어느 저작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주장하는 태도는 실로 개탄스럽다!

 

1877년에는 『자본』이 ‘특정한 형태’가 ‘물질적 조건에서의 더 이상의 변화에 맞서지 못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었던 반면, 1894년에는 어떠한 물음도 없이 자본주의 형태가 생산력의 발전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확신이 ‘전적으로 헤겔 삼단논법에만’ 의존하는 것으로 강변된다! 1877년에 미하일롭스키는 “주어진 사회 형태와 그 존재의 물질적 조건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은 필자의 논리력과 방대한 학식에 대한 기념비로 불변의 가치를 지닌 채 남게 될 것이다”라고 서술했던 반면, 1894년에 이르러서는 유물론 원리가 어디에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되거나 증명된 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참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우선, 1870년대의 러시아 농민 사회주의는 완전히 쇠락한 나머지 자유주의가 농민층의 대규모 착취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속물적인 자유주의를 불러들였다. 본래 농민 혁명을 열망했던 이들은 부르주아적 특성으로 인해 자유를 배척하고 러시아 사회의 적대적 본질을 은폐하던 자유주의자들과 투쟁해 왔으나, 농민 농업의 선진적 경향에서 ‘고무적인 징후’를 확인했다는 이유로 태도를 전환한 것이다. 둘째로, 1877년 미하일롭스키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자유주의 비판가들로부터 방어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마르크스의 방법론과 자신의 방법론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엥겔스의 저술과 플레하노프 (Plekhanov)를 비롯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비판으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주관적 사회학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을 접하게 되자, 미하일롭스키는 사안을 근본적으로 되짚는 대신 반발하는 태도를 취했다. 오늘날 그는 과거처럼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대신 모호한 찬사 뒤에 숨어 그를 비난한다. 또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속물적인 진보 사상에 만족하기를 거부하고, 혁명적 태도를 유지하며 사회의 진정한 혁명 세력을 지도하고 조직하고자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과거 논쟁의 경과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미하일롭스키의 마르크스 이론 ‘비판’에 관한 결론을 종합하여 제시한다. 주요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그가 파괴하고자 착수한 원리는 첫째 유물론적 역사 개념, 둘째 변증법적 방법론에 기초한다.

 

첫째 원리와 관련하여, 그는 어떤 문헌에서 유물론이 해명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선언하며 논쟁을 시작했다. 해당 설명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자, 그는 유물론의 요체를 스스로 왜곡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유물론이 부당한 주장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유물론자들이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 전체를 해명했다는 주장을 편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단지 하나의 사회 구성체만을 해명 대상으로 삼는다는 진실이 실제 주장으로 드러나자, 그는 유물론자들이 범위를 축소하여 스스로 패배를 자초한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나아가 유물론의 작동 방식을 설명한다는 구실로, 그는 유물론자들이 과학적 사회주의를 해명할 지식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고백했다는 서술을 만들어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단지 1845~1846년 당시 경제사 전반에 대한 지식이 미비함을 고백했을 뿐이며, 출판된 저술에서 지식의 불충분함을 드러낸 적이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전주곡에 이어 본 본격적인 비판이 전개되었다. 그는 『자본』이 단지 한 시기만을 다루었기에 한계를 지닌 반면, 자신은 모든 시기를 포괄하고자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본』이 경제적 유물론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단지 언급하는 데 그쳤다고 강변했다. 이는 유물론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는 인식을 유도하려는 의도적 서술이었다. 나아가 다른 지역의 역사 이전 시기를 연구한 결과가 유물론적인 결론에 도달했음에도, 그는 인간이 유물론과 무관하다는 사실만을 인용했다.

 

또한 생식을 유물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 오류이자 언어적 기만에 불과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경제적 관계가 생식과 가족 관계에 기초한 상부 구조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 비평가가 유물론자들을 계도하겠다며 제시한 서술은 생식이 없으면 상속이 성립할 수 없고, 고차원적 심리 작용이 생식의 산물을 ‘수반하며’, 자녀가 부친의 정신을 물려받도록 양육된다는 명제를 포함한다. 덧붙여 민족이 씨족 유대의 연장이자 확장이라는 주장도 피력했다.

 

유물론 연구를 이어가며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 중 상당수가 부르주아 체제 아래 대중 억압과 착취의 ‘필연성’,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로의 ‘필연적’ 이행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고는 필연성이 과도하게 일반적인 개념이라는 이유를 들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관념론자이자 형이상학자로 규정했다. 끝으로 그는 관념론자들을 향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편향되어 있다’고 단정했으나, 주관적 방법론에 대한 관념론자들의 견해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의 둘째 원리인 변증법적 방법론 역시 상대의 직공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는 대상을 오인한 비판에 불과했다. 그는 무엇이든 삼단논법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반박하는 데 집중했으나, 정작 변증법적 방법론의 본질이 삼단논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학의 관념론과 주관적 방법론을 거부하는 데 있다는 사실은 외면했다. 뒤이어 마르크스를 향한 표적 공격이 전개되었다. 비판자는 뒤링의 논거를 빌려, 마르크스가 삼단논법이라는 수단으로 자본주의 파멸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했다는 왜곡된 구도를 씌운 뒤 이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허상의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우리의 저명한 사회학자’가 거둔 ‘승리’의 서사는 이처럼 극적이다! 그리고 그 경과를 목도하는 일은 매우 “교훈적” (부레닌)이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원리에 대한 비판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비평가의 이상과 현실 인식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또 다른 정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서구 노동 계급 운동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이다.

 

미하일롭스키가 “과학적”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주장한 유물론이 “노동 계급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된 현상”에 대해, 그는 이를 과학적 해명력 때문이 아닌 “경제적 유물론이 누려온 외연적 성과와 무비판적으로 확산된 현상은 주로 미래에 대한 전망에 기초하여 확립된 실천의 관행” 탓으로 돌렸다. 이는 유물론의 성과를 현실 분석의 정확성이 아닌 비현실적인 전망에 의존한 결과로 왜곡하는 주장이다. 그는 또한 “이러한 전망은 이를 수용한 독일 노동 계급이나, 비판적 고찰 없이 미래에 온정을 쏟아온 이들에게 요구되는 요소이며. 결국 맹목적 수용만을 강요할 뿐이다”라며, 유물론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확산이 노동자들에게 미래의 이익을 약속하고 검증 없는 교조적 믿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회주의와 서구 노동 계급 운동사의 기초적 사실에 배치된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미래에 대한 관념적 전망을 제시하는 대신 현재의 부르주아 체제를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의 발전 경향을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마르크스는 1843년 언급한 바와 같이, “시류에 맞춰 무의미한 구호를 외치는 대신 세상이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 명확히 제시하고 주체적 의식을 일깨우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실제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 저작인 『자본』 역시 미래 사회에 대한 서술을 최소화하고, 미래 체제의 출발점이 되는 현재의 물질적 요소들을 추적하는 데 주력했다.

 

오히려 구체적이고 이상적인 미래 사회를 묘사하여 인류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려 했던 이들은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인재들이 제안한 그들의 이론은 현실 삶과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대규모 기계 공업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유효한 투쟁 구호가 정립될 때까지 민중의 실제 정치 운동과 결합하지 못했다. 이 구호를 정립한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였다. 미하일롭스키가 1872년 언급했듯 그는 “공상주의자가 아니라 엄밀하고 건조하기까지 했던 과학자”였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적 전망이 아닌,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분석과 자본주의 체제하 착취의 필연성 및 발전 법칙 연구에 기반하여 도출된 결과였다.

 

결국 대규모 자본주의 기계 공업의 발전이 노동 계급 운동의 확산을 가져왔다는 점은 명백하다. 사회주의 이론이 본격적 발전 단계에 오른 시점 역시 추상적 인간관에 의존하던 사회적 조건 논의에서 벗어나 당대 사회관계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과 현재의 착취 체제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해명하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미하일롭스키는 이러한 태도의 원리에 ‘전망’이라는 혐의를 입혀,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물론이 거둔 실제 성과의 이유를 외면하고 서유럽 노동 계급 운동의 이론과 전술을 속물적 태도로 조롱한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의 사회화에 따른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이행 필연성을 논박하지 못하면서도, 자본가 계급에 몰수당한 생산 수단을 탈환할 준비를 갖춘 ‘프롤레타리아트 군대’의 주도로 ‘모든 계급 갈등이 종식되고 지상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구상을 왜곡하여 희화화한다.

 

미하일롭스키가 사회주의 달성의 방책으로 제시하는 길은 ‘인민의 벗들’이 제안하는 구체적 구상과 실질적 문제 해결에 의존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주도적 투쟁을 벌이는 것은 불필요한 자기 확신에 불과하며, “주머니 크기의 사회민주주의 소책자”나 계급 적대를 명확히 하는 이념은 배격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착취받는 대중에게 해방을 위한 독자적 투쟁을 촉구하고, 계급 적대를 호도하며 모든 권한을 위임받고자 하는 ‘인민의 벗들’을 배격하라고 가르치는 과학의 가치는 명백하다. 속물주의자들에게 큰 충격을 준 1페니짜리 출판물에서 해당 과학을 소상히 해명한 이들이 확고한 자기 확신을 지녔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인민의 벗들’에게 맡긴다면 사정이 어떻게 변하겠는가?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방대한 지식과 속물적 학문의 실체를 과시하고,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구체적 사회 구성체를 제시하려 들 것이다. 물론 이는 노동자 계급이 그들의 영도를 순응적으로 기다리며 독자적인 투쟁을 개시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나 이루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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