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이 『“인민의 벗들”이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투쟁하는가』를 집필하고 발표했던 1894년 전후 시기 (1893년~1895년)는, 그가 청년 혁명가로서 이론적 기틀을 확립하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실천적 지도자로 본격적으로 도약하던 전환기였다.
1893년 집필된 『이른바 시장 문제에 관하여』는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자생적인 국내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통계 자료로 입증한 초기 경제학 논문이다. 이는 인민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러시아 자본주의 불가능론’을 과학적으로 논박하는 이론적 발판이 되었다.
이어 1894년 발표된 『농민 생활에서의 새로운 경제적 현상』에서는 젬스트보 통계 자료를 분석하여, 러시아 농촌 내부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의 계급 분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실증적으로 규명했다.
1894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집필 및 출간된『“인민의 벗들”이란 누구이며…』는 사마라 시절부터 준비해 온 강의안을 바탕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완성한 대작이다. 정식 출판이 차단되어 등사기로 복제된 원고는 ‘노란 공책’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전역의 지하 마르크스주의 소조에 은밀히 배포되었다. 레닌은 이 저작에서 나로드니키 (인민주의자)의 개량주의적 허구를 철저히 폭로하고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정당성을 확립했다.
정치·조직적 실천 측면에서 레닌은 1893년 가을 사마라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한 직후 혁명적 청년들과 마르크스주의 소조를 조직했다.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직접 낭독하고 토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 모임에는 동지이자 평생의 반려자가 되는 나데즈다 크룹스카야도 함께했다.
나아가 이론적 논쟁에 그치지 않고 공장 노동자 야간 학습회 강사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의 『자본』과 정치경제학을 노동자들에게 쉽게 해설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파편화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을 의식적인 계급 투쟁으로 결합하고자 시도했다.
당대 합법 지면인 《러시아의 부 (루스코예 보가츠트보)》 등을 무대로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던 미하일롭스키, 크리벤코 등 자유주의 인민주의 지식인들과 치열한 이념 투쟁을 전개했다. 이 시기의 이론적·실천적 활동은 레닌을 단순한 이론가나 연구자에 머무르지 않고, 러시아 노동 계급의 독자적 정당 건설과 과학적 사회주의 노선을 굳건히 세운 혁명적 지도자로 정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부
레닌, 『“인민의 벗들”이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투쟁하는가』 (1894) 제1부는 당대 러시아의 대표적 자유주의적 인민주의 (나로드니키) 세력이자 잡지 『러시아의 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N. K. 미하일롭스키 등 이른바 ‘인민의 벗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미하일롭스키, 크리벤코, 유자코프 등은 스스로를 ‘인민의 벗’이라 부르며 민중을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옹호하며 사회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하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이들이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맞서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비판을 개시했으므로, 이들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이 가진 허구성과 관념론적·소부르주아적 본질을 폭로할 필요가 있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의 『자본』과 유물사관을 집중 공격하지만, 레닌은 그 비판이 완전한 오해와 왜곡에 기초해 있음을 밝혀낸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가 유물사관을 체계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며, 방대한 사실 자료를 연구한 진화론의 다윈과 달리 역사 철학 전체를 종합·해명한 독립된 저작을 내놓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마르크스가 추상적이고 선험적인 ‘역사 일반’을 논하는 형이상학적 방식을 배격했음을 지적한다. 대신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유물사관을 완벽히 입증해 냈으며, 『자본』 자체가 유물사관의 가장 완성된 실증적 전형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윈이 생물학에서 신의 창조론을 배격하고 변이·세습이라는 객관적 법칙으로 생물학을 과학으로 세운 바와 같이, 마르크스 역시 사회를 임의적 개혁의 대상이 아닌 ‘자연사적 과정’으로 이행하는 객관적 유기체로 포착하여 사회학을 비로소 엄밀한 과학의 반열에 올렸다.
레닌은 미하일롭스키의 관념론적 사회학 (주관적 사회학)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을 대비하여 유물론의 과학적 우위성을 정리한다. 과거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이나 이념, 정치·법적 형태만을 조사하여 본질과 부차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했고 ‘주관주의’에 빠졌다. 반면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의 제반 영역 중 생산관계를 핵심으로 추출하고, 이 생산관계가 인간의 의식과 독립하여 형성되는 물질적 관계임을 밝혔다. 이러한 분석으로 사회적 현상에서 반복성과 규칙성을 포착하고, 개별 국가들의 구조를 ‘사회 구성체’라는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에게 토대란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에 부합하는 생산관계의 총체 (경제적 구조)이며, 상부 구조란 그 위에 구축되는 법률적·정치적 체제 및 이에 부응하는 사회적 의식 형태를 의미한다. 즉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레닌은 미하일롭스키가 제시한 구체적 사례들을 하나씩 짚으며 그 논리적 난국과 속물성을 비판한다. 논쟁의 쟁점은 미하일롭스키의 주장이 관념론과 주관주의에 매몰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L. H. 모건의 연구와 ‘생신 요인’을 들어 엥겔스가 선사 사회 해명을 위해 ‘생식’을 도입한 것이 경제적 유물론 공식의 파산이자 변개라고 주장했다. 반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물질적 형태’와 ‘이념적 형태’로 나눌 때, 생식 (인간 자신의 생산)은 명백히 물질적 조건에 속한다는 점을 밝히고, 엥겔스의 적용은 유물론의 정당성을 증명했음을 밝힌다.
상속 제도에 관해서 미하일롭스키는 상속이 도덕적으로 교육하려는 부모의 심리와 생식 작용에 기반한 영원하고 신성한 제도라고 본 반면, 레닌은 상속 제도가 생물학적 생식이 아니라 사유 재산의 존재, 상품 교환 및 사회적 분업의 발달이라는 역사적·경제적 조건에서 출현한 사회적 범주라는 점을 지적했다.
민족적 유대의 형성에 관해서 미하일롭스키는 민족적 유대가 씨족 유대 (가족)의 자연스러운 연장 및 일반화라고 강조한 반면, 레닌은 중세의 파편화된 지역들이 통일된 민족으로 발전한 것이 씨족의 연장이 아니라 지방 시장들이 단일한 국가 시장으로 통합된 결과이며 그 주체는 상인 자본가 (부르주아지)임을 폭로한다.
계급 투쟁과 인터내셔널과 관련하여 미하일롭스키는 제1인터내셔널이 국가 간 전쟁을 막지 못했으므로 계급 투쟁론은 민족적 자만심과 적대를 설명·해결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은 민족 간 적대의 본질이 상공업 부르주아지의 이익이며,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각국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로 조직하여 세계 자본에 맞서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파리 코뮌이 이를 입증했음을 밝힌다.
미하일롭스키를 비롯한 ‘인민의 벗들’은 도덕적 미사여구와 주관적 유토피아로 포장하고 있으나, 실상은 부르주아적 사유 재산과 상속 제도를 옹호하는 소부르주아지·부르주아 관념론자들에 불과하다. 이들은 구체적 사실에 기반한 과학적 연구 (유물사관)를 외면한 채, 형이상학적 궤변과 논점 이탈로 사회민주주의를 비방하고 있다.
이러한 미하일롭스키의 사적 유물론 오해를 지적한 레닌은, 이어서 미하일롭스키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필연성 (결정론)’, ‘변증법적 방법론’, 그리고 ‘노동의 사회화’를 어떻게 곡해하고 왜곡하는지 뼈아프게 파헤친다. 미하일롭스키는 체계적이고 명료한 비판 대신, 문맥에서 이탈시킨 단편적 주장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상대를 조롱·정복하려는 기만적 방법론을 사용한다.
마르크스의 독창적 공헌은 유토피아주의와의 차별성에 있다. 전통적·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는 현 체제의 억압을 고발하고 이상적 체제의 우위성을 제시하며 이것이 도덕과 ‘인간 본성’에 부합함을 밝히는 데 머물렀다. 반면 마르크스는 현 체제에 대한 단죄에 그치지 않고 이를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로 체계화하였으며, 객관적 분석에 기반하여 체제 내 착취의 필연성과 사회주의로의 필연적 이행 법칙을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이에 대한 미하일롭스키의 궤변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객관적 분석의 본질을 배격한 채, 단지 ‘필연성’이라는 껍데기 단어 하나에 전체 이론이 의존하는 것처럼 변조했음을 레닌은 폭로한다.
레닌은 미하일롭스키가 “역사적 필연성이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개인의 역할과 도덕성을 무력화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이를 관념론적 속물의 허구적 산물이라 반박한다. 결정론은 인간 행위가 필연성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혀 ‘무조건적 의지 (자유 의지)’라는 착각을 제거하며, 이는 인간의 이성, 양심, 행동을 정밀하게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 토대이다. 실천적 핵심 과제란 모든 역사는 주체적 개인의 실천으로 구성된다는 점에 있다. 핵심은 “어떠한 조건에서 인간 행동의 유효성이 보장되며, 반대 작용에 묻히지 않고 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의 해답은 러시아 경제 체제가 이미 부르주아 사회이며 해방의 길은 부르주아지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투쟁뿐이라는 것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이 핵심 현실을 회피하고 ‘필연성’이라는 일반적 범주 뒤로 숨어버렸다. 또한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학자층의 인정을 기대했다고 주장했으나, 마르크스는 『자본』 후기 (마이어 인용)에서 밝힌 바와 같이 부르주아 학자가 아닌 독일 노동자 계급이야말로 자신의 이론을 수용하고 실천할 진정한 주체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 분석이 아닌 ‘헤겔의 삼단논법 (정·반·합)’이라는 관념적 수수께끼에 기반을 두고 미래를 억측한다고 공격한다. 레닌은 이 비난이 독일의 뒤링 (E. Dühring)이 썼던 진부한 논리를 그대로 도용한 것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삼단논법과 ‘부정의 부정’의 참의미는 다음과 같다. 미하일롭스키 (및 뒤링)식 주장에 따르면 자본주의 파멸과 공동 소유로의 이행 (착취자의 착취)은 구체적 사실 증명이 아니라 헤겔식 ‘부정의 부정’이라는 언어적 마술과 종교적 교리문답 (원죄와 구원)에 의존한 허황된 주장이다. 이에 대한 엥겔스의 반박 (『반뒤링론』 인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부정은 생산 수단을 직접 소유하던 소규모 자가 노동 (자본주의 이전)이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으로 전환되는 과정 (소생산자의 재산 박탈)이며, 두 번째 부정 (부정의 부정)은 자본 집적과 노동의 사회화가 극에 달해 자본주의적 외피를 폭발시키고 토지 및 생산 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확립하는 과정 (착취자의 재산 몰수)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삼단논법으로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려 한 것이 아니다. 엄연한 역사적·경제적 사실 관계를 연구하여 입증을 마친 후, 그 진행 과정을 변증법적 법칙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과학적 변증법적 방법론은 삼단논법을 동원하는 외형적 유희가 아니라, 사회를 기계적 집합체가 아닌 ‘끊임없이 발전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다루는 과학적 접근법이다. 관념 (사상)이 아닌 객관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존하는 질서의 필연성과 이전 질서로부터 새로운 질서로의 필연적 이행 법칙 (자연사적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노동의 사회화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 대해서 마하일롭스키 및 《조국 연보》 (1883년 포스트로니의 기고문)는 자본주의하 노동의 사회화를 단순한 현상으로 비하했으나, 레닌은 이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엄밀히 재정의한다. 《조국 연보》는 노동의 사회화를 단지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한 공장 지붕 아래에서 각자 일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이는 오해에 해당한다. 레닌이 밝히는 진정한 노동의 사회화란 생산의 전문화와 사회적 분업을 뜻한다. 수공업 시대에는 한 생산자가 방적·직조를 독점했으나, 자본주의는 이를 방적, 직조, 기계 제작, 석탄 채굴 등 독립된 산업 부문으로 분화·전문화시킨다. 상호 의존성이 극대화됨에 따라 고립된 소생산자는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지만 (‘각자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 대공업하의 자본가는 타 산업 (원자재, 기계, 원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전체 생산 과정이 단일한 사회적 생산 과정으로 통합된다 (‘각자가 모두를 위해 일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근본적 모순은 생산 형태는 완벽히 ‘사회적’으로 변했으나 점유 형태는 여전히 자본가의 ‘사적 사유 재산’으로 남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필연적 귀결로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점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은 오직 사회주의적 형태로의 이행 (생산 수단의 사회화)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
레닌은 1877년의 미하일롭스키와 1894년의 미하일롭스키를 직접 비교하며 그의 이념적 변절과 속물성을 극명하게 대조한다. 1877년의 미하일롭스키는 『자본』에 대해 ‘형태와 물질적 조건의 관계를 명확히 밝힌 불변의 가치를 가진 기념비’라고 평가한 반면, 1894년의 마힐롭스키는 ‘유물론 원리가 어디에서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고 선언한다. 역사적 전환의 원인에 대해서도 1877년의 미하일롭스키는 ‘생산 방식과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맞서지 못해 발생한다’고 인정했으나, 1894년의 미하일롭스키는 ‘자본주의 소멸 확신이 전적으로 헤겔 삼단논법에만 의존한다’고 강변한다. 노동의 사회화에 대해서도 1877년의 미하일롭스키는 ‘주콥스키에게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의 사회화를 무시할 도덕적 권리가 없다’고 비판했으나, 1894년의 미하일롭스키는 ‘스스로 노동의 사회화 문제를 무시하고 미래에 대한 억측’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미하일롭스키 퇴보의 역사적·이념적 원인은 1870년대의 혁명적 농민 사회주의가 쇠퇴하면서 그가 자유주의적 속물성에 굴복하고 부르주아적 현실에 타협했기 때문이다. 이념적 한계 자각에 대한 반발로 인해 플레하노프 등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주관적 사회학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양립할 수 없음이 드러나자, 성찰 대신 분노와 비방을 선택한 것이다. 레닌은 서유럽 노동자 운동을 바라보는 속물적 태도를 폭로했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들에게 근거 없는 ‘미래의 비현실적 전망’을 약속하며 맹목적 수용을 강요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레닌의 반박은 명확하다. 미래에 대한 관념적 이상을 제시하려 했던 이들은 현실과 단절되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었으며, 마르크스는 관념적 구호 대신 부르주아 체제에 대한 엄밀한 과학적 분석을 제시하고 대규모 자본주의 기계 공업의 발전이라는 현실적 조건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주체적 의식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인민의 벗들’의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자적 계급 투쟁과 1페니짜리 사회민주주의 소책자를 배격하고, 자신들의 속물적 학문과 도덕적 온정주의에 노동자들이 순응하기만을 바라는 소부르주아 관념론자이자 기만자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레닌은 명백히 폭로한다.
2부 서문
레닌은 이 단락에서 미하일롭스키를 필두로 한 초기 러시아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적 인민주의자)들의 관념론적 방법론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학적 방법론을 선명하게 대조한다. 서두의 목적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지향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있다. 마하일롭스키가 마르크스 이론을 왜곡했듯이,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표와 지향 역시 자의적으로 곡해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이에 레닌은 초기 러시아 사회주의자 (《조국 연보》, 《러시아의 사상》 기고자들)의 논리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비하여 사태의 진실을 엄밀히 규명한다.
레닌은 미하일롭스키의 1892년 기사를 인용하여 나로드니키가 지닌 주관적·형이상학적 사회학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로드니키가 제시하는 “좋은 것만 취하자”는 논리의 배후에는 절충주의적 기만이 숨어 있다. 이들은 중세적 노동 형태 (경작자의 토지 소유)에서 토지 소유만을 추출하고, 서구 자본주의에서 자유와 문화를 취해 실용적 편의에 따라 이상적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이에 대해 사회를 제도의 단순한 기계적 조합으로 보는 형이상학적 착각이라 반박한다. 특정 사회 형태의 단편을 건물 벽돌 옮기듯 자의적으로 이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관계 전체 구조에 대한 이들의 무지 또한 폭로된다. 토지 소유는 독립된 단편이 아니라 봉건적 지주-농민 착취 관계라는 전체 생산관계의 한 고리일 뿐이다. 나로드니키는 잔존하는 농민 노동 형태가 왜 상실되어 가는지, 상품 경제의 발전이 왜 농민의 몰락과 부의 축적 (양극화)을 가져오는지에 대한 유기체적 역학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채, 이념적 기치와 관념적 도덕률에 의존하여 현실을 이상화하는 유토피아의 영역으로 도피했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주관적 방법론을 비판하며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은 개혁 이후 러시아 역사를 대중의 몰락, 부의 독점, 상품 경제 발전에 따른 자본주의적 양극화 과정으로 분석했다. 착취와 대중의 가난은 단순한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경제 구조의 필연적 결과임을 규명해 낸 것이다. 자본주의는 대규모 기계 공업으로 생산을 사회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동력인 공장 노동자 계급을 창출한다. 공장 노동자는 기존 착취 체제와 이해관계가 전혀 없으며, 고유한 노동·삶의 조건으로 인해 정치가 요구되는 유일무이한 혁명적 주체이다. 이들은 관념적 농촌 공동체에 기대는 대신, 부르주아지와 자산 계급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결합한다. 나아가 공장 노동자 계급의 계급 의식을 발전시키고 이들의 정치 투쟁을 지원하여, 전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으로 견인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미하일롭스키 비판
레닌은 미하일롭스키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론적 입장을 어떻게 ‘추상적 역사 도식’으로 곡해하는지, 그리고 합법 출판물의 검열이라는 조건을 악용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실제 정치 활동을 어떻게 ‘세 가지 부류 (방관자·소극적·적극적)’로 위장·비방하는지 집중적으로 폭로한다. 미하일롭스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러시아가 역사적 필연성으로 자본주의를 거쳐야 하고, 농민이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된 뒤 마술처럼 행복해질 것이라는 추상적 도식을 강요한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서구에 자본주의가 존재한다고 해서 러시아도 당연히 자본주의를 거쳐야 한다고 본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 마르크스 본인도 자신의 이론을 보편적·필수적 역사 철학 도식으로 보는 시각을 단호히 배격했다.
사담에서 접한 불합리한 발언이나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함량 미달 인사의 말을 마르크스주의 전체의 공식 입장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비열한 비난 방식이다. 플레하노프는 『우리의 차이점들』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이름의 권위에 기반하여 강령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추상적 도식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현실의 사회적 관계를 해명하기 위한 과학적 분석 도구로서 마르크스 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을 뿐이다. 이는 ‘당위 (~헤야 한다)’가 아닌 ‘현실 진단’으로, 관념론자들은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거쳐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질문을 던지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는 이미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현실의 실질적 전개 과정에만 집중한다.
‘인민의 벗들’의 유치한 현실 진단으로 미하일롭스키 등은 러시아 자본주의가 단지 150만 명의 공장 노동자에 국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앞으로 ‘창출해야 할 대상’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인구 절대다수의 몰락, 소수의 부 축적, 농민의 수탈과 토지 분리라는 러시아 개혁 이후의 역사적 현실에 눈을 감는 타조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직시는 수백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면서도 곡물 수출이 늘어나는 현실 자체가 이미 대중이 착취받는 프롤레타리아 상태임을 입증한다.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인민 대중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로 분리하는 부르주아적 사회 구조 및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여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을 유일한 해법으로 제시한다.
미하일롭스키는 불법화된 혁명가들이 합법 매체에서 정직하게 반론할 수 없다는 검열 상황을 악용하여, 마르크스주의자를 세 부류로 왜곡·희화화했다.
미하일롭스키가 왜곡한 마르크스주의 세 부류와 이에 대한 레닌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마르크스주의적 방관자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이들이 사회적 변화 과정에 무관심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출발점은 현 체제에 맞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이며, 미하일롭스키가 속물이나 얌체, 명칭만 도용한 비겁한 자유주의자를 사회민주주의자와 동일시하는 허구적 분류를 저질렀다고 반박한다.
둘째로, 소극적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이들이 생산 수단과 분리된 대상에만 기대며 수수방관한다고 비난한다. 이에 대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명제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 집단으로 행동한 적도 없는 인물들에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명칭을 덧씌운 기만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셋째로, 적극적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미하일롭스키는 이들이 농촌의 몰락이 가속화되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자들이라고 왜곡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인민을 토지에서 쫓아내려는 악당’으로 몰아가기 위해 가공해 낸 중상모략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레닌은 마히일롭스키의 이러한 분류법이, 과거에 누군가 나로드니키 (인민주의자)를 향해 “정부의 태형 정책에 부응하는 지조 있는 파, 결사 방식으로 외국의 혁명을 주입하려는 겁쟁이 파, 부농이 되어 땅에 정착한 대담한 파”로 분류하여 저속하게 조롱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천박한 궤변이라고 비판한다.
미하일롭스키의 ‘비판’은 이론적 엄밀성이나 정당한 논거가 전혀 없는 일련의 왜곡, 곡필, 날조,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사회민주주의의 진짜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위선적인 온정을 베푸는 척하는 소부르주아 ‘인민의 벗들’을 배격하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의식을 발전시켜 이들을 현 체제에 맞선 직접적인 정치 투쟁으로 조직·단결시키는 것이다.
3부
레닌은 ‘인민의 벗들’ (유자코프, 크리벤코 등)이 러시아 수공업과 농촌 사회의 실상을 어떻게 은폐하고 곡해하는지, 그들의 통계적 오류와 소부르주아적 유토피아주의를 구체적인 통계 자료 (벽돌 산업, 도자기 산업, 보로네시 농민 예산 등)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파헤친다.
발행자의 주석 (1894년 7월)에 따르면, 출판이 2개월 이상 지체됨에 따라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미하일롭스키 비판을 다룬 제1부를 우선 발행했다. 제2부와 제3부에서는 러시아의 경제적 실상을 규명하고, 《러시아의 부》 핵심 필진인 유자코프와 크리벤코의 관점을 다룬다. 초판을 정확히 복원하여 출판한 이유는 이 책자가 사회민주주의 정치 선전을 부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부》는 도발적 논조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의 권익에는 관심이 없고 대중의 파멸만 초래한다”며 중상모략을 일삼고 있다. 저들은 거대 잡지와 도서관 등 물질적 수단을 독점하고 있으나, 특권이 결코 승리를 보장하지 않음을 입증하기 위해 본 책자와 마르크스주의 선전 기관지를 전면적으로 재발행·배포해야 한다.
크리벤코 (「우리의 문화 용병들」, 「여행 중에 보낸 편지」 기고)는 미하일롭스키 (사회주의자 역할), 유자코프 (경제학자 역할)와 달리 《러시아의 부》잡지의 성격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실용적 정치가이다. ‘인민의 벗들’은 체계적 강령을 제시한 적이 없으므로, 크리벤코의 글에서 이들의 실질적 목표, 전술, 정치 강령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유자코프와 크리벤코는 소규모 수공업을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과 대비시키며 이를 “인민의 생산”이라 부르고 자본주의적 성격을 부인하지만, 레닌은 이것이 지적 무지와 사실 왜곡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나로드니키의 주장에 따르면 수공업자는 400만~700만 명에 달하며, 이 ‘소규모 인민 산업’은 생산자와 생산 도구가 결합된 독립적 산업이다. 그러나 레닌은 통계학자 S. 카리조메노프 (Kharizomenov, 《법률 통신》 1883년)의 조사를 인용하여, 중부 지방 수공업 매출액의 절대다수 (모스크바주 86.5%, 알렉산드로프·포크로프 군 96%)가 대규모 가내 생산 체계에서 발생하며 소규모 독립 산업은 4~13.5%에 불과함을 밝혀낸다. 즉, 대다수 수공업자는 상인 자본으로부터 원료를 제공받아 임금을 받는 종속적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다.
크리벤코는 파블로보의 날붙이 사업을 장인의 성격을 띤 인민 산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N. F. 안넨스키 (Annensky)의 통계를 인용하며 이 산업이 이미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 단계에 도달해 있음을 폭로한다. 니지니노브고로드주 요리용 칼 제조자 (396명) 중 독립 수공업자는 16% (62명)에 불과하며, 69% (273명)는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고 15% (61명)는 임금 노동자이다. 고르바토프군 산업 인구 (10,808명) 중 시장 생산자는 35.6%에 불과하고, 주인 대상 생산자 (46.7%)와 임금 노동자 (17.7%)가 과반을 차지하여 자본 예속 관계가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나로드니키의 근본적 오류는 노동자가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데 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명에 따르면, 노동자를 토지에서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대규모 기계 공업 단계의 특징일 뿐이다. 단순 협업이나 매뉴팩처 단계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가 농지를 일부 보유하더라도 자본주의적 착취의 본질이 상실되지 않는다. 데멘티예프 (Dementyev)의 통계가 입증하듯, 기계화된 생산 체계는 노동자의 완전한 토지 박탈로 이어지며 러시아는 이미 자본주의 국가에 진입했다.
크리벤코가 “생산 비용이 낮아 자본주의화되지 않는다”고 제시한 벽돌 산업과 이사예프 (Isayev)가 “순수 가내 공업”이라 칭한 도자기 공업의 통계를 레닌이 직접 재분류·분석하여 부르주아적 계급 분화를 입증한다.
① 모스크바주 보고로즈코예 군 벽돌 산업 (233개 시설, 1,402명 노동자)
수공업자 집단 (노동자 수) | 시설 비율 | 임노동자 비율 | 총생산 분배 비율 | 비고 및 분석 |
I. 1~5명 고용 (소규모) | 72% | 19% | 34% | 가족 노동 중심, 대규모 업자에게 미가공품을 저가 매각하여 종속됨 |
II. 6~10명 고용 (중간) | 18% | 58% | 22% | 임금 노동 착취 본격화 |
III. 10명 초과 (대규모) | 10% | 91% | 44% | 소수(10%)가 생산 수단을 독점하고 전체 생산의 44%를 차지함 |
생산 단위가 커질수록 임금 노동 착취가 심화되며, 소규모 생산자는 자금 부족으로 원청 (대규모 경영주)에 예속된다.
② 도자기 공업 (121개 시설, 452명 노동자)
수공업자 집단 (노동자 수) | 시설 비율 | 임노동자 비율 | 총생산 분배 비율 | 비고 및 분석 |
I. 1~3명 고용 | 60% | 19% | 36% | 소농민 공업 형태 |
II. 4~5명 고용 | 27% | 20% | 32% | 중간 단계 |
III. 5명 초과 | 13% | 65% | 32% | 시설의 1/8이 전체 노동자의 30%, 생산액의 1/3을 독점 |
가장 단순한 ‘인민 공업’ 내부에서도 상층의 자본가 (부르주아)화와 하층의 임금 노동자 (프롤레타리아)화라는 자본주의적 계급 분화가 명확히 작동한다.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철학자들의 오류는 자본을 단지 “추가 생산에 유용한 축적된 노동”이라는 영구적 범주로 정의하여 역사적 특수성을 은폐하는 데 있다 (지버 (Sieber)의 “자본은 관계다”라는 정의에 분개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자본은 단순한 사물이나 축적된 노동이 아니라, 소수의 생산 수단 독점, 다수의 생산 수단 소외, 그리고 임금 노동 착취를 내용으로 하는 ‘특정한 사회적 생산관계’이다. 수공업은 단순 협업에서 상인 자본 (가내 공업 체제)을 거쳐 산업 자본 (대규모 기계제 생산)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전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이다.
크리벤코가 인용한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학자 시체르비나 (Shcherbina)의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농가 24곳 예산 자료를 레닌이 경제적 계급 기준으로 재분류하여 나로드니키의 ‘평균 수치’ 기만을 폭로한다. 크리벤코의 구분 (법적 범주)은 과거 국유지 농민 대 과거 지주제 농민으로 나누어 국유지 농민의 소득·지출이 높다는 점 (소득 격차 3:2, 자본 가치 격차 3:2)만을 강조하며 평균을 내는 방식이었다. 반면 레닌은 24개 농가를 부유층 (6가구), 중간층 (11가구), 빈곤층 (7가구)이라는 경제적 계급 범주로 재분류한다.
경제적 계급 범주 | 가구당 소득 | 가구당 지출 | 순수익 (손익) | 자본 가치 | 계급적 실상 및 특징 |
a. 부유층 (6가구) | 1,053.2루블 | 855.86루블 | +197.34루블 | 1,737.91루블 | 농업 노동자 8명 고용. 부업 수입은 타인 착취 기반(4개 산업 시설 소유, 상인 자본화). |
b. 중간층 (11가구) | 473.8루블 | 471.61루블 | +2.19루블 | 786.42루블 | 생계 유지 불능. 5가구가 적자. 소득의 19%를 부업에 의존하며 대다수가 임금 노동자로 전락. |
c. 빈곤층 (7가구) | 202.4루블 | 223.78루블 | -21.38루블 (적자) | 363.38루블 | 파산 상태. 소득의 24%~2/3를 타인의 농업 노동(임금 판매)으로 충당하는 프롤레타리아. |
실제 최상위와 최하위의 소득 및 자본 가치 격차는 크리벤코가 주장한 3:2가 아니라 최대 5:1에 달한다.
부유층의 순수익 (+197루블)과 빈곤층의 적자 (-21루블)를 합쳐 “농가당 평균 순수익 44.11루블”이라는 평균을 내는 것은 농촌 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계급 대립을 은폐하는 행위이며 통계적 착시의 전형이다.
분여지 소유에 관한 오류의 반박으로, 크리벤코는 “토지 (분여지) 규모가 농가의 번영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생산 수단 (말, 농구)이 없는 무마 (無馬) 농민은 토지가 있어도 농사를 포기하고 임금 노동자로 전락한다. 반면 작업마를 확보한 상층 농민은 타인의 토지를 임차하여 자본주의적 농장을 확장한다. 따라서 공동체 토지의 평등 분배만으로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와 자본주의 발전을 막을 수 없다.
레닌은 크리벤코가 인용한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 (시체르비나의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농가 예산 자료)를 철저히 재검토하여, ‘인민의 벗들’이 단순한 평균 수치라는 착시를 매개로 농촌 내 계급 분화와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라는 현실을 어떻게 은폐하고 있는지 폭로한다. 나아가 러시아 자본주의 발전이 지닌 역사적 필연성과 이행적 의의를 천명하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과학적 임무를 최종적으로 선언한다.
크리벤코는 “토지 (분여지) 빈곤이 농민 쇠락의 원인”이라 주장하나, 실제 24개 농가 통계를 보면 부유층 (6데샤티나 분여지)의 소득은 758.5루블인 반면, 더 넓은 토지를 가진 중간층 (7.1데샤니타)은 391.5루블, 빈곤층 (6.9데샤티나)은 109.5루블에 그쳤다.
부유한 농가는 추가로 평균 8.8데샤티나를 임차해 영농을 확장한 반면, 빈곤층은 2.8데샤티나만을 임차하는 데 그쳤다. 즉, 부의 편중을 낳은 결정적 요인은 단순한 토지 소유 규모가 아니라 생산 수단 (자본과 축력)의 독점과 계급 분화이다.
이러한 평균 수치의 기만성은 시체르비나와 크리벤코가 서로 다른 계급의 농가들을 단순 평균하여 전체적으로 44.11루블의 잉여가 남는 것처럼 왜곡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를 계급별로 재분류하면, 전체의 10%에 불과한 부유층 1가구의 순수익 (+197.34루블)이 하층 농가 9가구의 적자를 메우고도 남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농민의 과반 (무마 농민 26% + 1두 소유 농민 31.3% = 57.3%)은 적자 영농 속에서 지속적인 몰락을 겪으며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상층 (부유층)은 상업적 농업을 매개로 자본가 (부르주아)로 이행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반면, 하층 (빈곤층)은 소득의 24%~2/3를 임금 노동력 판매 (농업 노동 등)에 의존하는 프롤레타리아로 몰락한다. 상품 경제 체제는 농민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가차 없이 분화시키는 거대한 ‘학교’로 기능한다. ‘인민의 벗들’은 이러한 객관적 현실을 외면한 채, “자본주의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공허한 수사나 토지 부족이라는 관념적 설명 뒤로 도피하고 있다.
단순한 이념적 대조의 수준을 탈피하여 젬스트보 통계 등 구체적 실증 자료를 바탕으로 러시아 농촌 내부에서 작동하는 부르주아적 본질과 계급 분화 법칙을 입증해야 한다. 이러한 실증 분석을 매개로 ‘인민의 벗들’이 실상은 소부르주아지의 이념가에 불과하며, 그들의 개량책이 소부르주아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이 폭로된다. 농촌은 가부장적 동질성을 지닌 공동체가 아니라, 파편화된 국지 시장 속에서 영세 상인과 고리대금업자 같은 소규모 착취자들이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현장이다.
자본주의는 분절된 국지 시장을 단일 시장으로 통합하고, 영세 착취자 무리를 해체하여 대자본으로 재편하며 노동을 사회화한다. 비록 가혹한 착취와 억압을 동반하지만, 전근대적 예속 구조를 파괴하고 노동자 계급의 계급 의식 각성 및 조직적 계급 투쟁의 물질적 토대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거대한 역사적 이행적 의의를 지닌다.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비판은 사슬을 장식하던 가공의 화한을 걷어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인민적 생산 체제’라는 환각적 장식 (화한)을 해체하여, 농민 대중이 자신들을 속박하는 수탈과 예속의 족쇄를 정확히 자각하고 이를 깨뜨려 실재하는 해방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끈다.
노동 인민의 해방을 부르주아 국가 기구 (‘정부’와 ‘사회’)에 의존하려는 소부르주아 집단이야말로 계급적 자각이 결여된 기만자들이다.
‘인민의 벗들’ 비판
레닌은 ‘인민의 벗들’ (나로드니키)이 주장하는 개량주의적 정치 강령 (저금리 신용, 집단농장 (콜호스)론, 관료적 개혁, 지식인의 시혜적 계몽 등)의 소부르주아적 한계와 반동적 본질을 낱낱이 해부한다. 나아가 이들이 국가 권력을 계급 중립적인 ‘시혜의 주체’로 오인하며, 실제로는 농촌의 부르주아 (쿨락, 여관 주인, 곡물 투기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나로드니키의 주요 개량책으로 유자코프는 농민 은행 개편, 식민화 부서 설립, 국유지 임대차 규제, 마을 공동체 보호 감독 철회 및 공동 경작·가공 도입을 주장했다. 크리벤코와 카리셰프 역시 저금리 신용, 집단 농장, 이윤 배제, 기술 혁신, 물류·유통 기반 시설 확충을 내세웠다.
레닌은 이러한 개량주의의 계급적 실체를 비판한다. 이들이 제시한 저금리 신용이나 기술 개량 등의 조치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기는커녕, 안정적인 농장을 가진 극소수 소부르주아 (부농) 계급에게만 선택적으로 혜택을 줄 뿐이다.
생산 수단의 독점과 사회적 수탈이 만연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집단 농장’이나 ‘공동 경작’을 도모하는 것은 관념적 허상에 불과하다. 참된 생산의 사회화는 착취자 계급의 생산 수단을 몰수하는 계급 투쟁을 필수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이 온이 지적했듯, 신용 확대나 이민·세제 개량은 낙후된 봉건적 잔재를 제거하여 도리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레닌은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관념론적 개량주의와 타협성을 비판한다. 크리벤코는 “지식인층 공장주들의 기업 통제를 매개로 대중 산업을 주도할 수 있다”며 지식인의 시혜적 계몽과 관료적 행정 수완을 미화한다. 그러나 생계 유지를 위해 소부르주아지에 흡수되는 지식인들이 스스로 부르주아지의 범주에서 벗어날 리 없으며, 이는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는 기만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인민의 삶으로 들어와 농업과 결합할 수 있다”며, 농민이 토지에서 분리되지 않고 강탈과 착취가 없는 소부르주아적 상품 경제가 성립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100루블 이하의 주식 기반 합자회사 (마을 공동체가 지분을 소유하고 주민은 임금 노동자로 종사하는 구조) 같은 구상은 임노동 착취를 공동체적 외양으로 포장하는 소부르주아적 타협의 극치이다.
유자코프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본연의 임무”라며 글래스스톤 (영국)이나 비스마르크 (독일)의 노동자 보험·복지 정책을 옹호한다. 레닌은 이들이 부르주아 사회를 수습하고 재편하려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모든 계급 위에 존재하는 ‘전지전능한 중립적 국가’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한다.
자유주의자는 정부에 ‘가급적 개혁을 해달라’고 간청하다가, ‘적어도 일부라도’ 달라고 구걸하고, 마침내 ‘아무렇게나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달라고 애원하는 굴종의 길을 걷는다. ‘인민의 벗들’ 역시 기근의 참상 속에서도 정부가 인민을 몰락에서 구제했다며 정부를 칭송하고 바닥에 이마를 찧는 괴테의 속물 (두려움과 자비 바라는 자)과 다름없다.
크리벤코 등은 “농민의 토지 매매나 상점·선술집 개업, 여관 주인의 의회 진출, 곡물 투기 업자 지원”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타인의 노동을 수탈하는 쿨락과 유통업자, 여관 주인은 명백한 농촌 부르주아지임에, 이들은 이들을 ‘농민의 보호자’로 포장하여 부르주아적 영리 행위에 적극 동참하라고 부추긴다.
이들은 과거 헤르첸과 체르니셰프스키의 혁명적 전통을 왜곡하여, 체제의 제도적 기구 (젬스트보, 지방 감독관 등)에 진입해 미봉책을 수행하는 행위를 ‘개혁의 활용’으로 포장한다. 결국 체제 수용적인 온건 자유주의 노선으로 완전히 퇴행하여 반동적 언론인 부레닌의 찬사나 받는 부르주아적 아첨꾼으로 전락했다.
크리벤코는 체르니셰프스키를 다룬 마르크스의 편지 내용을 자의적으로 오독하여 “마르크스도 러시아의 특수한 발전 노선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 길)을 인정했다”고 왜곡한다. 그러나 실제 마르크스는 러시아가 서유럽을 모범으로 한 자본주의 길로 진입한다면 대다수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피할 수 없는 수순임을 명확히 밝혔다.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구체적 토론과 견해차는 운동의 분열이 아니라, 유물론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분석하는 이론적 역동성을 증명한다.
관념론적 미사여구와 지배 질서의 온정에 의존하는 ‘인민의 벗들’을 배격하고, 농촌을 장식한 가공의 화한 (환각적 장식)을 걷어내어 노동 인민이 자신들을 속박하는 족쇄를 깨뜨리고 계급 투쟁에 나서도록 이끄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자의 유일하고 참된 임무이다.
결론
레닌은 인민주의자(나로드니키)와의 논쟁이 지닌 역사적 의의를 되짚으며,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착각과 완전하고 최종적인 결별을 선언해야 함을 천명한다. 나아가 소부르주아 이념의 반동성을 비판하는 한편, 그들이 제기한 민주주의적 요구 (봉건적 잔재 철폐 등)는 지지하되, 궁극적으로는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독자적인 정당으로 조직하여 계급 투쟁과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함을 촉구한다.
인민주의자들과의 긴 지면 논쟁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이 뼈저린 교훈을 얻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의 최종적 결별을 감행하도록 만들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과거 체르니셰프스키 시대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불가분의 단일체였으나, 오늘날 인민주의는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로 타락했다. 따라서 이들과의 절연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스트루베가 인민주의의 ‘분여지 옹호’와 ‘마을 공동체 옹호’를 ‘전국민적 사회주의’라는 공상주의로 비판하자, 크리벤코 등 인민주의자들은 격분하며 반발했다. 그러나 이는 착취 체제의 완전한 철폐가 아닌 부르주아적 소유권 틀 내의 개량에 안주하는 그들의 반동적 본질을 모순적으로 입증할 뿐이다.
레닌은 인민주의가 초기 혁명적 열정에서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로 전락한 궤적을 단계별로 정식화한다. 이들은 농민 공동체에 내재된 ‘공산주의적 본능’을 상정했으나, 객관적 경제 현실에 대한 실증적 검증이 결여되어 있었다. 토지 소유권이라는 법적 형태에만 집착한 나머지 농촌 내부의 실질적 경제 관계 (계급 분화와 수탈)을 은폐했다. 농민 속으로 들어갔던 초기 운동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전제 정부에 맞선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강령으로 귀결되었다. 오늘날의 ‘인민의 벗들’은 정부에 간청하고 시혜적 개량을 구걸하는 굴종적 속물주의 (괴테가 정의한 ‘두려움과 자비를 바라는 속물’의 구도를 정부에 대입한 형태)로 전락했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농민 개혁의 부르주아적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다. 지주가 주도하는 개혁과 상환금 제도는 농민을 실질적으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고 농민을 몰락시켜 부르주아 질서에 예속시키는 기만적 타협책임을 직시했다. 불긴 (체르니셰프스키의 분신)의 입을 빌려 “농민들이 상환금을 치르지 않고 토지를 확보하는 것과 대금을 치르고 사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상환금 제도는 농민을 몰락시킬 뿐”이라며 개량주의의 허상을 폭로했다. 1860년대 선구자들은 비록 한계가 있었을지라도 금권 정치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조소를 보내며 체제 자체에 맞서고자 했다. 반면 오늘날의 ‘인민의 벗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부르주아적 개량 조치를 ‘인민적 생산’으로 미화하며 지배 질서의 온정에 의존하는 반동적 아첨꾼으로 전락했다.
소부르주아 이론 전체를 거부한다 해도, 그 내부에 포함된 민주주의적 요구 (중세적 잔재 철폐)까지 배척해서는 안 된다. 토지 상환금 및 차별적 세금의 즉각 폐지, 수탈된 농민 토지의 반환 (봉건적 토지 소유권 폐지), 농민의 완전한 공민적 권리 보장 및 관료적 감독 철폐가 이에 해당하며, 절대 왕정, 신분제, 관료 체제 등 반봉건적 잔재는 자본의 노동 탄압을 강화하는 보루다. 따라서 절대주의에 맞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과의 임시적 공조·연합은 필요하나,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정당의 건설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 농민에 대한 착취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띠며, 대규모 기계 공업에 집적된 착취는 자본 대 노동의 적대 관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파편화된 소생산자와 달리, 대규모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적 단결과 조직화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는 리프크네히트의 명제로 수렴하는 실천이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이론적 완성에만 안주하거나 실천을 유예하지 않고, 파편화된 경제적 투쟁을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러시아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정치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소부르주아 관념론자들의 환각적 장식 (화한)을 걷어내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을 속박하는 족쇄를 깨뜨리고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것이 유일하고 참된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이다.
부록
레닌은 앞서 제3부에서 다룬 보로네시 젬스트보 통계 (24개 농가 예산)의 상세한 원자료를 부록으로 첨부하고, 스트루베 (P. B. Struve)의 논문과 니콜라이 온 (Nikolai-on, 본명 니콜라이 다니엘손)의 공상적 인민주의 경제학을 정밀하게 비판한다. 나아가 검열의 제약 속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왜곡된 실상과, 인민주의 계열의 또 다른 정치 조직인 ‘인민의권리당 (나로도프랍치)’에 대한 평가를 덧붙인다.
부록 1: 오스트로고즈스크 군 24개 농가 통계 원자료 요약
레닌은 본문에서 분석했던 보로네시 주 오스트로고즈스크 군의 전형적인 농가 24곳 (부유층 6, 중간층 11, 빈곤층 7)의 상세한 예산 및 자산 구조 통계를 부록으로 제시하여 자신의 분석적 객관성을 뒷받침한다.
24가구 총인원은 176명이며, 분여지 총면적은 291.6데샤티나이다. 부유층의 가구당 분여지는 22.1데샤티나인 반면, 중간층은 9.2데샤니타, 빈곤층은 8.5데샤티나로 격차가 벌어진다. 부유층은 추가 임차지 (8.8데샤티나)를 포함해 총 경작지가 20.6데샤티나에 달하며, 가축과 농기구를 독점하고 있다. 총자산 가치 평가에서도 부유층은 가구당 평균 1,737.91루블인 반면, 빈곤층은 363.38루블로 약 5:1의 계급적 격차를 명확히 보여준다.
부유층의 소득 (가구당 1,053.2루블)은 농업 수입과 타인 착취를 기반으로 한 공업·운반 수입으로 구성되며 상당한 흑자 (+197.34루블)를 기록한다. 반면 빈곤층 (가구당 202.4)은 수입의 23.8%를 외부 임금 노동 (노동력 판매)에 의존함에도 적자 (-21.38루블)와 파산 상태에 놓여 있다.
부록 2: 스트루베의 논문과 니콜라이 온의 공상적 인민주의 비판
레닌은 경제학자 스트루베가 니콜라이 온의 이론적 오류 (자본주의 계급 투쟁의 역동성 부재)를 지적한 대목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니콜라이 온의 주장과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대조한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가율이 인구 증가율에 미치지 못한다”며 러시아 자본주의가 자체적 발전을 제약하고 있으므로 ‘서유럽과 구별되는 독자적 발전 경로’를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용하며, 자본주의의 변혁적 역할은 단순한 ‘공장 노동자 수의 수량적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산 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단련하고 조직화하는 데 있다고 반박한다.
니콜라이 온은 공장 노동자 비율 (전체 인구의 1% 미만)만을 근거로 자본주의의 실패를 주장하나, 이는 (1) 수공업자, 가내 노동자, 농업 임금 노동자 등 자본주의적 관계에 포섭된 광범위한 임금 노동 대중을 누락하고, (2) 비생산 부양 인구를 단순 농촌 인구로 분류한 명백한 통계적 오류이다.
엥겔스가 『주택 문제에 대하여』에서 지적했듯, 농촌 가내 노동의 확대는 농촌을 자본주의적 산업 지형으로 결합하여 혁명적 노동 운동을 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시키는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부록 3: 검열 아래의 마르크스주의 왜곡과 ‘인민의권리당 (나로도프랍치)’
절대주의 체제의 검열 제약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은 계급 투쟁과 적대 관계를 도려낸 표피적 변증법적 이행론만 남긴 채,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 자칭하는 자의적 왜곡을 저질렀다.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직접적 임무는 현상에 대한 도덕적 탄식이 아니라, 현실의 경제적 적대와 계급 투쟁의 객관적 법칙성을 규명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 투쟁에 구체적 행동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다.
1894년 간행된 소책자 『시급한 쟁점』에서 등장한 나로도프랍치는 관료적 절대주의 체제의 수탈 정책 (지방 감독관, 특권 귀족의 이권 등)을 고발하며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비록 이들도 ‘사회주의적 의제’를 회피하고 입헌주의적 틀에 머무르는 한계를 지녔으나, ‘조국을 위한 독자적 경로’라는 공상적 인민주의를 탈피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민주주의 정당 건설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다.
인민주의자들은 국가를 중립적 기구로 미화하고 지배 질서의 온정에 의존하는 개량주의로 전락했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의 환각적 장식 (화한)을 걷어내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완전하고 최종적인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
파편화된 경제적 투쟁과 간헐적 파업에 머물러 있는 노동자 운동을 부르주아 체제를 겨냥한 러시아 노동 계급 전체의 조직화된 정치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본성에 의존하여 이들을 독자적인 혁명 정당으로 결집시키고, 전(全) 민주주의적 세력의 최선두에서 절대정을 타도하며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유일하고 참된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