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앞의 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보도록 하자.

 

첫 번째 결론은 '시장'이라는 개념이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상품 생산의 보편적 기초"인 사회적 분업이라는 개념과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장'은 사회적 분업과 상품 생산이 등장하는 곳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 생겨난다. 시장의 규모는 사회적 노동의 전문화 정도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상품)은 화폐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사회적으로 인정 되는 보편적인 등가물의 속성을 획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화 폐는 누군가의 주머니에 있다. 화폐를 그 주머니 밖으로 유인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우리 친구의 상품은 화폐 소유자에게 사용가치여야만 한다. 그러려면 상품에 쏟아부는 노동력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종류의 것이어야 하고, 사회적 분업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게 필요하다. 그러나 분업은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생산 시스템이고, 생산자들의 등 뒤에서 성장을 계속 하고 있다. 교환되는 상품은 아마도 새로이 생겨난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거나 심지어 새로운 요구 조건들을 스스로 발생시키는 척하는 어떤 새로운 부류의 노동의 산물일지 모른다. 하나의 특정한 활동은, 비록 어제는 어떤 특정한 상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한 사람의 생산자가 행한 수많은 활동 중 하나였을지 물라도, 오늘은 그런 관계로부터 스스로 분리돼 독립적인 노동의 한 부문으로 자리 잡은 채 자신의 불완전한 생산물을 하나의 독립적인 상품으로서 시장에 내보내게 될 수도 있다."¹(강조는 저자)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 발전의 한계는 사회적 노동의 전문화 한계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화는 바로 그 본질상 기술 발전만큼이나 그 한계가 무한하다. 한 예로 전체 생산물의 일정 부품을 제조하는 데 있어 인간 노동의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그 부품의 생산이 전문화되어야 하고, 대량 생산이 개입돼 기계의 활용 등이 허용(그리고 발생)되는 특별한 제품이어야 한다. 그것이 한 측면이라면, 다른 한 측면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의 진보는 노동의 사회화로 이루어지고 이런 사회화는 반드시 생산 과정의 다양한 기능들에서의 전문화, 즉 이런 생산에 관련된 모든 시설에서 따로라 로 반복되는 분산적이고 고립적인 기능들로부터 사회 전체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산된 하나의 새로운 시설에 사회적 기능들이 집중되는 방향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하나의 사례를 인용해보겠다.

 

"최근 미국에서는 목공 공장들이 점점 더 전문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도끼 자루, 빗자루, 펼침탁자 등만을 제조하는 신규 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 기계 제작은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계들이 계속 고안돼 생산의 일부를 단순화하고 비용을 낮추고 있다. …… 한 예로, 가구 제작의 전 분야는 특수 기계와 전문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는 사업이 되었다. …… 마차를 제작할 때 바퀴 테두리는 특수 공장들(미주리, 아컨소, 테네시)에서 만들어지고, 바퀴살은 인디애나와 오하이오에서 제작되며, 중심축은 컨터키와 일리노이에 있는 특수 공장들에서 만들어진다. 이런 각각의 모든 부품들은 바퀴 전체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공장들이 사들인다. 따라서 싸구려 탈것을 만드는 데 수십 개의 공장들이 참여하는 셈이다."(트베르스코이, 미국의 10, 베스트니크 예브로피, 1893, 니콜라이-[Nikolai-on]¹¹의 책 91쪽 각주 1에서 인용)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노동의 전문화가 불러온 시장의 성장은 모든 자연 생산자들이 상품 생산자가 되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러시아의 마차 제작이 상품 생산이 된 건 오래전 일이지만, 바퀴 테두리는 여전히 각각의 마차 제조업자의(또는 수레바퀴 제조 목수의) 작업장에서 만들어진다. 기술 수준은 낮고, 산은 수많은 생산자들 사이에 분산돼 있는 것이다. 기술적 진보는 다른 생산 부품들의 전문화와 사회화, 그리고 결과적으로 시장의 확대를 수반해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바로 다음과 같은 의구심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방금 말한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 국가가 해외 시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과 소비의 균형은 오로지 일련의 파동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생산 규모가 더 크고 그것이 기여하는 소비자 폭이 더 넓을수록, 파동은 더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생산이 높은 수준의 발전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민족국가의 경계 안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된다는 사실은 이해가 될 것이다. 경쟁은 자본가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생산을 확대하고 대량으로 생산품을 내다 팔 해외 시장을 찾아 나서도록 충동질한다. 자본주의 국가가 해외 시장을 보유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상품경제하에서 시장은 사회적 분업의 단순한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분업만큼이나 무한대로 성장할 수 있다는 법칙에 거의 위배되지 않는다. 위기가 가치 법칙에 거의 위배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 나라 자본주의 생산의 특정 부문들(예를 들어 면직업)이 완전한 발전에 도달하고 전체 국내 시장을 거의 포괄하며 몇몇 거대 기업에만 집중될 때, 그제야 비로소 러시아의 문헌들에서는 시장에 대한 비탄의 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장에 관한 부질없는 이야기와 '물음들'의 물질적 토대가 이 나라의 대규모 자본주의 산업의 이해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걸 가장 잘 증명해주는 건, 수공업 생산품들이 가치로 따지면 모두 합쳐 10억 루블이 넘고 바로 그 가난한 '인민들'에게 일용품을 제공해줌에도 불구하고 문헌에서 그 누구도 '시장'의 실종 때문에 이 나라 수공업이 몰락하게 될 거라는 예견을 내놓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시장이 부족해 이 나라 산업이 몰락했다며 통곡하는 건 자본가들의 속이 뻑히 들여다보이는 솔책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정책에 압력을 가하고, 자신들의 주머니 속 이익을 '국가'의 이익과 동일시하며(자신들의 '무능'에 대한 겸손한 고백이다), 정부로 하여금 식민지 정복에 나서게끔 만들고, 심지어 그런 '국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에 끼어들게 한다. 바닥이 어딘지 모를 인민주의자들의 공상적 이상주의와 단순함이란 구멍은 시장에 대한 이러한 통곡을——입지를 확고히 다진 채 이미 자만에 빠져든 부르주아들의 악어의 눈물이다——러시아 자본주의의 '무능'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데 요긴하다!

 

두 번째 결론은 (시장에 관한 모든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인) '인민 대중의 빈곤화'는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반대로 자본주의 발전의 표현이며 자본주의의 조건이자 그것을 강화해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을 필요로 하며, 빈곤화는 소생산자들이 임금노동자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의 빈곤화는 소수 착취자들의 부의 축적을 동반하며, 소규모 사업체들의 몰락과 쇠퇴는 대규모 사업체들의 강화와 발전을 동반한다. 그리고 두 과정 모두 시장의 성장을 촉진하며, 과거에는 스스로 농사를 지어 생활했던 농민이 '가난에 빠져' 이제는 '소득', 즉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하는 걸 의미한다. 이제 그는 필수 소비품들을 (아무리 양이 적고 품질이 조약하다 할지라도) 직접 사서 써야만 한다. 반면 이 농민의 손을 떠난 생산수단은 소수의 손아픈에 집중돼 자본으로 전환되고, 생산품은 이제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개혁 이후 시대에 사는 이 나라 농민들이 겪은 대규모 재산 강탈이 러시아 총생산력의 감소가 아닌 증가와 국내 시장의 성장을 동반해왔다는 사실에 대한 유일한 해명이다. 큰 공장들의 생산량과 작업량이 엄청나게 증가해왔으며 수공업이 상당 부분 확대되고둘 다 주로 국내 시장을 대상으로 한다——국내 시장에서 유통되는 곡물의 양도 비슷하게 증가해왔다는(국내 곡물 거래의 발전)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생산수단의 생산의 중요성에 관한 세 번째 결론은 표에서 수정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표는 자본주의 발전의 전 과정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자연경제가 상품경제로 대체되고 상품경제가 다시 자본주의 경제로 대체 되는 과정이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결 목 적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표에서 축적이 무시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는 축적 없이 는 존재할 수가 없다. 경쟁이 모든 자본가로 하여금 몰락을 각 오하고서라도 생산을 확대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 표는 그와 같은 생산 확대를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세 번째 시 기와 네 번째 시기 사이의 막간에 생산자 Ic의 생산량을 2c 에서 6c로 세 배 더 늘렸다. 그는 예전에는 자신의 작업장에서 홀로 일했으나, 이제는 두 명의 임금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다.

 

분명 그러한 생산의 확대는 축적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그는 여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특수한 작업장을 지어야 하고, 생산 도구들을 대규모로 확보해야 하며, 많은 양의 원자재를 구입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b의 생산을 확대한 생산자 IV에게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개별 사업체의 이러한 확장과 생산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을 위한 기계, , 석탄 같은 생산수단의 생산을 필요로 한다(별 차이는 없지만, 증가시킨다고도 할 수 있겠다). 생산의 집중은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며, 인력을 기계로 대체하고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을 해고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가들에 의해 불변자본으로 전환돼 이제 가변자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한 기계와 여타 생산수단들의 생산에도 발전이 있었다. 한 예로 네 번째 시기와 여섯 번째 시기를 비교해보면, 생산수단의 생산이 50퍼센트 증가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시기의 경우에는 불변자본의 증가를 필요로 하는 자본가 기업이 두 개였다면, 여섯 번째 시기에는 세 개였다). 이러한 증가를 소비품 생산의 증가와 비교해볼으로써 우리는 앞서 언급한 생산수단의 생산이 보다 더 급속히 증가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생산수단의 생산이 보다 더 급속히 증가한다는 이러한 법칙의 의미와 중요성은 인력을 기계 노동으로 대체하는 것이 생산수단 중에서도 진정한 생산수단이라 할 수 있는 석탄과 철 생산의 급격한 발전을 요구한다는 한 가지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저자가 이런 법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과정을 묘사해주는 공식들이 진정한 본질을 가리는 걸 허락했음은 다음의 진술에서 아주 분명해진다. "옆에서 볼 때 생산수단으로서의 생산수단의 생산은 완전히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플류시킨이 돈 그 자체를 위해서 돈을 축적하는 행위도 아주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돈은 모두 자신들이 무슨 것을 하는지 모른다." 인민주의자들이 러시아의 자본주의가 인민들을 몰락시키면서도 더 높은 생산 구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하며 그 부조리를 증명하려고 전력을 다 쏟고 있는 것도 정확히 그런 부분이다. 물론 그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다. 기계 노동이 인력을 대체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지 않다. 정반대로 인간 기술의 혁신적인 역할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기술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인간의 육체노동은 점점 설 곳을 잃고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기계들에게 밀려나게 된다. 그 나라 총생산에서 기계와 그 제조를 위해 필요한 품목들이 훨씬 더 큰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결론들에는 두 개의 추가 설명이 덧붙어야 한다.

 

먼저, 앞서 말한 대목은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의 모순"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상품의 구매자로서의 노동자들은 시장에서 중요한 존재다. 그러 나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이 지닌 상품——노동력——의 판매자로서의 그들을 최소 가격에 묶어두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품을 생산하는 사회적 생산의 일부도 마찬가지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은 앞서 드러난 바 있다. 생산수단의 생산의 발전은 앞에서 이야기한 모순을 단지 옆으로 밀어놓을 뿐,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를 제거함으로써만 일소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발전하는 데 있어서의 장애물로 여기는 것은(인민주의자들이 선호하듯이) 아주 어리석은 생각임이 분명하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표에서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만 덧붙여두자.

 

둘째로, 자본주의의 성장과 "시장"의 성장 사이의 관계를 논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산업 프롤레타리아를 포함한 전체 인구의 요구 수준을 끌어올린다는 분명한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러한 요구 수준의 상승은 대체로 상품 교환이 점점 더 빈번해짐으로 인해서 생겨나며, 그것은 다시 지리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도시와 시골 주민들 사이에 접촉이 보다 더 잦아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또한 그것은 산업 포를레타리아가 매 지어 모여드는 집중화 현상에 의해 초래되며, 이는 그들의 계급의식과 자존감을 강화해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체제의 약탈적 경향에 맞서 성공적인 투쟁을 벌이는 걸 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요구 수준 상승의 범칙은 유럽 역사에서 전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예로, 18세기 말과 19세기 말의 프랑스 포를레타리아나, 1840년 대16와 오늘날의 영국 노동자들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러한 법칙은 러시아에서도 똑같이 작동된다. 개혁 이후 시대의 상품경제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달은 "농민층"의 요구 수준도 끌어올려, 그들은 "보다 깨끗한" (의복, 주택 등)을 살기 시작했다. 명백히 진보적인 이런 현상은 다름 아닌 러시아 자본주의에 그 공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은 공업 소재지의 농민들이 자본주의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시골에서 오로지 농업에만 종사하며 살아가는 농민들보다 훨씬 "더 깨끗한" 생활을 한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물론 그러한 현상은 순전히 표면적이며 과시적인 "문명화"의 측면을 받아들이는 데서 주로, 그리고 쉽사리 나타난다. 그러나 V. V. 선생 같은 극악한 반동들은 그것을 비통해하며 거기에서 "퇴조"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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