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포스트니코프는 농민들 사이의 경제적 갈등을 기록하는 데만 머물지 않고 이러한 과정의 격화에도 주목한다.

 

그는 농민 집단들 간 생활수준의 다양성은 이 나라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삼십여 년 사이에 농민 인구 내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아주 뚜렷해지고 있고, 꾸준히 증대되고 있다는 게 명확하다”(130)고 말한다. 저자의 견해로는 1891년의 어려운 경제사정³이 이러한 과정에 새로운 추진력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다. 농민 인구 전체에 그렇게 막대한 영향을 발휘하는 이와 같은 현상의 원인들은 무엇일까?

 

포스트니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우리가 주는 유럽에 속한 러시아 영토 내에서 가장 토지가 풍부한 지역 중 하나로, 농민들의 분여지 면적이 가장 넓은 주다. 여기서는 공동체의 집단적 토지 소유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한 사람당 토지가 어느 정도 공평하게 분배된다. 시골 인구는 사실상 농사에만 의지하고 있지만, 가구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15퍼센트가 농사용 가축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고 약 3분의 1 가량은 자신들의 분여지를 경작하기에 충분한 농기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106) 그리고 그는 이렇게 되묻는다. “농민들 사이의 이러한 광범위한 다양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며, 특히 순수한 농업 경제에서 우리가 현재 발견하는 것과 같이 경작지나 농사용 가축을 갖지 못한 농가의 비율이 이렇게 높은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130)

 

이런 현상의 원인들을 찾아 나선 포스트니코프는 완전히 방향을 잃고 헤매다(다행히 그리 오랫동안은 아니었다) “게으름”, “술독”, 심지어 방화나 말을 훔치는 행위까지 거론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원인들에서 문제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것은 가족의 사별, 즉 일할 수 있는 성인 구성원들의 부재로도 전혀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타우리가 소재 군들에서 경작할 땅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않은 비농업 가구들 중에서 가족과 사별한 가구는 18퍼센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구마다 농사를 짓지 않는 주된 이유를 찾으려면 농민들의 경제 생활 중에서 다른 요인들을 들여다봐야 한다”(134)는 결론을 내린다. 특히 포스트니코프는 특정 농민들 사이에 농사를 짓는 비율이 하락하는 이유들로 열거된 것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불행히도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이 아직까지 거의 해명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바로 분여지의 해체와 농민이 활용하는 토지의 제한된 양, 그리고 농장의 평균 규모 감소에 있다”(141)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적 빈곤의 근본 원인은 농민이 보유한 토지와 그 농장의 규모가 작아서 가족 내 노동력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341)는 것이다.

 

가족을 편안히 부양하려면 농장의 평균 규모(17~18데샤티나)가 충분해야 하고, 농장 규모에 관해 전체 농민층을 일반화시켜 도매금으로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포스트니코프의 부정확한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농민의 노동생산성이 농장 규모가 커질수록 증가한다는 일반 법칙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의 추정에 따르면, 가족(과 가축)의 노동력을 완전히 활용하는 것은 오로지 상위 집단뿐이며, 예를 들어 타우리가 소재 군들에서도 부유한 농민들밖에 없다. 즉 인구의 절대 다수는 막대한 노력을 쓸데없이 낭비하며 비생산적으로 토지를 깨지락거리고 있다”(340)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노동생산성이 농장 규모에 달려 있고 하위 농민 집단들에서는 생산성이 극도로 낮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법칙을(포스트니코프는 그것을 러시아의 농업 인구 과잉, 농업 노동력 포화라 부른다) 농민층 해체의 원인이라 여겨서는 안 될 노릇이다. 농업 인구 과잉은 이미 그런 해체가 존재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문제는 농민층이 왜 그렇게 다양한 집단으로 쪼개졌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소규모 및 대규모 농장들과 그들의 수익성을 비교함으로써 바로 그 인구 과잉이라는 개념에 도달했다. 따라서 농민들 사이의 이러한 광범위한 다양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하는 질문은 농업 인구 과잉을 논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올 수가 없다. 포스트니코프 자신도 분명히 이 점을 깨달았지만, 그는 그런 현상의 원인들을 조사하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단편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견해들과 더불어 올바른 사고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토지 소유를 둘러싸고 현재 농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렬한 투쟁이 장차 주민들 사이에서 공동체성과 화합의 원칙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일시적인 차원이나 우발적인 원인들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다. …… 우리가 볼 때 그것은 농촌에서 발달하고 있는 개인주의와 공동체 전통 간의 다툼이 아니라 현존하는 토지 부족을 고려해볼 때 인구의 특정 집단에게 필연적으로 유리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경제적 이해관계의 순수한 충돌이다.”(XXXII)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토지 부족과 농장들의 영세한 규모, 그리고 제대로 된 산업의 부재로 인해 농민층 사이에는 번영이란 게 있을 수 없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 모두는 조만간 어떻게든 농업으로부터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주 분명한 사실이다.”(368)

 

이런 서술들은 질문에 대한 정답에 훨씬 더 가깝고, 더군다나 앞서 규명된 주민들의 차이에 전적으로 들어맞는다. 정답은 바로 대규모 비농업 가구들의 등장과 그들의 수적 증가는 농민층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은 무엇을 토대로 벌어지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을까? 방식에 있어서 그것들은 토지 규모의 증가가 낮은 생산 비용으로 이어짐에 따라 토지의 확보를 추구하는 데(방금 인용한 포스트니코프의 주장의 결론일지도 모를)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이 무엇을 토대로 발생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포스트니코프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 농장 내에는 농장 서비스 구역이 더 이상 그 밑으로 떨어져서는 안 되는 분명한 최저선이 존재한다. 만약 그 밑으로 떨어질 때엔 이윤이 나지 않고 심지어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식량 구역도 가족과 가축의 유지를 위해서는 일정 수준이 필요하다. 외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없거나 적은 농장은 생산물을 팔아서 세금을 내고 옷과 신발을 사며 농기구와 건물 등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돈을 벌어들이는 특정 수준의 시장 구역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농장의 규모가 이 최저선 이하로 떨어지면 농사를 짓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럴 경우 농민은 농사를 포기하고 노동자가 되면, 지출이 더 줄어들고 필요로 하는 것들을 더 적은 총소득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어 더 이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141)

 

한편으로 농민이 자신의 곡물 수요를 훨씬 뛰어넘는 면적으로 경작을 확대하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농산물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농사를 포기하고 노동자가 되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한다면, 자신의 요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현금, 즉 매출³이 필요한데 자신의 농장 생산물을 팔려고 하니 시장에서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상대와 맞닥뜨리게 되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노동력을 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앞에서 서술한 현상들이 자라나는 토양은 판매를 위한 생산이다. 농민층 사이에 불거지는 경제적 이해관계 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은 시장이 사회적 생산의 조절 기관을 담당하는 시스템의 존재에 있는 것이다.

 

농민 생활의 새로운 경제적 양상에 관한 서술과 그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마무리하면서 포스트니코프는 농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들의 윤곽을 계속해서 그려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저자를 따라 그 지점까지로까지 접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이 글이 애초 계획했던 바가 아니며, 둘째, 그 부분은 포스트니코프의 저술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글 가운데 모순되는 부분과 불완전한 주장들의 대부분이 저자가 경제 과정을 설명하려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겨나며, 그것들이 완전하고 정확하게 해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떠한 실질적 방안도 제시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아주 명확해질 것이다.

 

| 1893년 봄에 집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