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8. 30.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예술이란, 내용적으로는 시대 정신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특수성을 자꾸만 드러내는 작품일수록, 소모적인 예술일 뿐이다. 물론 잔인한 말이다. 하지만 무산 계급의 공통적인 요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는 작품에서도자꾸만 식민지나 여러 지면으로나, 내용 상의 이유를 들어서, 예술가들에게도 교육을 요구하거나, 정작 작품에 대해 충분히 비판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셈이다. 그 판단은 관람하는 독자가 과연 누구에 따라서도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는 과연 어떠한 생각으로, 그 대상을 누구에 대한지를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면, 그건 소수를 위한 작품으로 남을 여지도 앞으로는 충분해진다. 저작권을 가지는 출판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냐면, 예전에 중국에서 발생한 '문화 대혁명'과 관련된 배경을 알게 됐을 때, 보이는 반응에서도 충분히 보여질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와 관련된 배경적인 지식과 문제 인물에 대한 의식에 따른 관심도 저절로 생겨나듯이, 특히 예술 작품에서는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밝혀낼 수 있다면, 특히 자본주의에 따른 현대화로부터 잊어버렸거나, 죽어가던 개념도 충분히 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되는 예술일수록, 창조보다 파괴가 더 쉽다.

 

특히 플레하노프도 훗날 당신이 사회배외주의로 빠지기 이전에도, 일찍부터 마르크스주의 미학에 대한 높은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전 혁명가들은 예술에 대한 관심과 철학적인 조예도 매우 높았고, 훌륭했다. 자국의 뛰어난 문학을 외울 정도로 접했으니, 그 지식을 일찍부터 수용해서 함양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 홍위병으로부터 이뤄진 문화재 훼손과 파괴라는 결과를 생기도록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공산주의 예술에 대한 함양이라는 측면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기존의 전통적이고, 담론적으로 머물렀던 문화를 새롭게 창시한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과 파급력에 있어서는 또 다른 시각도 충분히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준은 북조선만큼 이색적이더라도, 질적으로는 한참 낮은 수준으로 보일 따름이다. 물론 인민 예술의 발생을 인위적으로도 막을 수는 없다는 점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현대 예술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근대 인상주의, 현대 미술, 추상적인 담론들이라는 관찰된 개념을 지나볼 때도 공통점을 충분히 추론해볼 수 있다. 그것이 매우 계급적인 시각에 있어, 시대적으로, 특히 대중 인민들에게도 더욱 난해해지고, 복잡하게 전개되지는 않았었나. 특히 예술의 현실적인 요구와 맞물려서, 대중 인민들에게 더 어려워졌다는 책임를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도 국내 문화재에 대한 역사적인 관심과 반환에 대한 요구와 조예도 깊어진만큼, 봉건적인 전통 문화에 비해볼 때면, 그동안 혁명 문화를 수용하지 않았던 결과를 염두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그 한계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이 부르주아지로부터 한정되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수입된 서적들에 더욱 의존하고, 무산 예술가들이 직접 창작한 창조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시각적인 제한만을 오히려 강화하는 방식으로, 또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배척에서도, 주관적인 감상에 치우친 경향과 비평에만 몰두한 결과를 오래 전부터 지적했지만, 지금은 앞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심히 우려하는 바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국내 문화는 자본주의와 상업성이 가진 문화적인 개념으로부터 모호하고,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한다. 그러나 앞선 예술의 목적에 있어 충분한 인민 대중에 대한 계급 투쟁의 함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시각마저, 주관적인 현상으로만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명해본다.

 

무산 혁명의 시금석

 

시험 지면에서도 자주 나오는 예술 비평에서, 객관식은 단순히 선택 사항이 아니다. 자신의 계급적인 시각에서도, 예술에 대해 과연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체계적인 미학적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또 답하지도 못한다면, 그 예술가는 좋은 예술가라 부를 자격도 없으며, 심지어 소수의 입맛을 맞추는 미학적인 운동을 대변하는 주체들도 부상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 증명은 전적으로 자신이 아니라, 만든 사람인 본인에게도 있다.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에 있어 계급 예술이란, 바로 예술가의 성취하는 목적이자, 비로소 그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여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현실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안주해서는 해체하기만 하는 예술가들이 더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므로,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반대로도,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만 해서 예술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물을 필요도 있다. 따라서 그들만의 예술이 더욱 저급해지기 전까지는, 더 이상 현실적인 고민 하나 없던 예술에 대해 과연 가난한 예술인지를 부를 수 있었는지도 충분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어 예술가는 자신의 멋대로가 아니라, 그 고민을 더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면 좋겠다. 모든 인공 지능이 그 영역을 대신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세상에서, 어쩌면 예술가들에게도 현실에 대한 노력을 더더욱 요구하게 된다. 새로운 예술가라면 충분히 많아졌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에게는 정말로 어떤 예술가들이 과연 필요한가.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창작은 없고, 소비만 남은 우리 예술계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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