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2. 15. 


새로운 세대

 

국민학교 시절이 아닌, 초등학교를 다녔고 공립의 의무를 완수하기 이전에, 공립과 사립이 잔존하여 '야간 자율 학습''교내 체벌과 학교 폭력'이 대두된 시점은 2008-2013 무렵이었다. 지금과 같은 교내 모습과 큰 차이를 보였을 정도로, 초등학교 이전 세대들은 30-50명 정도가 수용되는 학교는 19세기의 각축장과 닮았고, 서서히 노동 인구가 감소하여 지금과 같은 교실을 보이게 되었다. 지금은 한 학급당 10-20명 정도가 수용되지만, 예전에는 10-11반이 초과되는 학교가 많이 존재했다

 

국민학교 출신들은 방과후에는 대가족 어르신들의 집안일을 돕거나, 명절이면 분비는 큰댁의 차례상을 지내며 잔치날보다 더 분주하고, 번거로울 정도로 집안일을 많이 치렀던 것도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이 유교적 영향이 깊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전통 방식이란 오히려 가난한 백성일수록 차례상을 자신의 형편에 맞게 지냈다. 그것이 '전통적'으로 해석된 고질적인 차례상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고정됐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방학과 명절은 대체로 반가운 날이지만, 학교를 간다는 것 자체가 노동과 다를 바 없어진 지금의 사회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세대들의 공통점이라면 오래되고 습한 나무 바닥의 작은 가시에 찔리거나, 교내 청소를 학생들이 담당한 적이 있었다. 외국인 학생들은 이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19세기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낙후된 교실의 환경과 지저분한 놀이터에서 가난한 아이들은 비싼 학원비를 감당하고, 자신의 자유를 곧 '성적의 기준'이라 여기면서 자라 왔다. 그것이 곧 지금의 '어른'이 된 이들이 체감하는 삶에 대한 깊은 소외와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이들 중 일부는 그것에서 이탈했다고 볼 수 있는 '홈스쿨' 교육을 별도로 받거나, 사교육을 그만두었고, 공교육의 대안을 고려하여 성적을 중심에 두지 않는 자유 교육관을 가진 부모들도 존재했다. 이들은 자신이 유명한 명문대를 나왔음에도, 사교육 시장의 형성까지 어느 정도 체감했기에, 그것에 일부 반대를 표하며 자녀들을 학교 생활 내에서, 또는 그러한 박탈감을 더 이상 겪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도 일부분 사실이다. 지금도 현 세대 부모들은 자녀의 학원과 양육에 대해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지만, 그것은 '결혼과 자녀'에서 부담의 의무로만 여기는 고정된 관념에 대한 불만으로 표출되어 밀집하여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임금 노동 생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그만두어 자녀 양육의 분배를 주위와 나누고 싶어한다. 이는 결혼 생활의 유지 비용마저 개인의 책임으로만 한정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소득의 격차'마저 줄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아이들은 긴 초등학교의 일정 수준의 의무 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노동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 사회적 평균 조건을 따지고, 이러한 국공립과 사교육의 대립이 남긴 허점은, 자신들의 이익이 먼저인 '자본의 문제'와 실질적으로 직결되고 있을 때조차 대학 교육의 실상을 체감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교내 성적을 1위한 것은 자신에게만 중요한 것이다. 특히 기계 공학자에 대한 진로를 가진 이들은, 그러한 부모에게 교내 성적을 대단히 중시하는 경향을 물려받았다. 그러한 부모의 '안정적 바램'이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이는 '협소한 시각'일 뿐이다. ·문과로 분리해서 사고하는, 또는 대학의 '융복합화'를 위해 더욱 사회적 평균의 수준을 상향 조정하는 방식을 부추기고 전제한 결과가 결국 시장화된 대입 시험 문제의 결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업의 형성''성적에 대한 고집'이 빚은 '취업'의 실태와 '자포자기'의 측면도 생겨났다. 이는 곧 '생계가 아니면 대안은 없다.'는 극단적인 사회적 시각이 사회 전반에 형성될 우려가 있다

 

앞으로 학교는 더 이상 의무가 아닐 것이다. 4년제가 꼭 인생을 좌우하는 의무가 아니듯이, 지금의 정규 교과를 반복한다는 것이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기초의 인식들도 저변에서 확대되고 있다. 그것은 세대의 차이로 인한 부모의 간극이 자본의 '현대화'에 따른 극심한 피해를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일제식 국가의 통제하에 잔존하던 일정 시간에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의 곡조를 듣는 관습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다닌 부모들은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그 고역을 그만두고 싶은 기조가 생겼다. 이러한 세대 차이로 인한 간극은 '자본 사회'로 편입되기 위한 극심한 경쟁 및 충돌을 빚었고, 그것은 서로 간의 '타협할 수 없는 산물'을 거쳐 가족 구성원의 일부가 된다. 이는 곧, 한국 사회가 가부장적 전통 사회에서 곧바로 식민지에 의한 제국주의 과정을 거쳐왔던 산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이다

 

이를테면, 반드시 정규 교육을 마치지 않더라도 노동 현장에 종사하거나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격과 계산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우하는 태도와 독서를 중시하는 풍조에서 자라날 수 있다. 따라서 교실보다 도서관이 앞으로 더 중요한 자양분인 셈이다. 결국 이전 세대가 각자 안고 있던 부모의 고민이 이제는 더 이상 '개인의 고민'만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이상적인 단상'일 뿐인 것일까. 자신의 직업과 진로의 적성이 생계로 인해 지금까지 불일치되는 지점에서, 미술을 하려면 학원을 다니는 그러한 편협한 시각이 모여 지금의 '예술가''천재''재능'의 영역으로만 치부하여 한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적어도, 아이들은 각자의 성장통을 겪더라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 세대와 독립하여 자신의 둥지를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아이들을 '새장의 둥지''개구리의 우물'만이 이 세계의 전부라고 여긴다

 

'아이들은 학교와 대학이 아니라, 도서관과 놀이터에서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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