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2. 26.
북한의 역사
박헌영에 대한 재평가
레닌 사후 여러 공산 국가들은 크게 흔들렸다. 김일성이 북조선인민공화국을 건설하던 시기, 소련은 스탈린주의의 여파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었다. 공식적 통계 보고에 따르면 소련의 대숙청 당시 희생자 수는 681,692 정도였고, 반면에,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일명 나치)은 600만 명 이상으로 여전히 집계되고 있다. 이 점에서, 단순히 대숙청보다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 수의 더 많음을 주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다만 북한의 역사 역시 진행 중이므로, 차기의 행보를 둘러싼 인민 권력의 형성이 아닌, 이쪽에서는 동일한 소수 집단 간의 치열한 생존 투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브루스 커밍스의 『6 · 25 전쟁사』, 스칼라피노의『한국 공산주의 운동사』는 방대한 사료를 다루지만, 서구 사회에 대한 우위나 부르주아 국가관에 기반한 편향된 시각이 잔존한다. 이러한 서술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주체적 과정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는 요소 역시 다분하다. 두 저작이 가진 학술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김일성 중심 사관이 아닌 내부 투쟁의 실상을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복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어떤 경우라도, 역사적 서술에서 생존자의 증언은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들의 주장 역시 회고에 따라 상반될 수 있으며, 이는 당시 사건에 대한 인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박헌영이다. 그를 두고 6.25 전쟁의 장본인이나 북파 공작원으로 모는 일련의 소문들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사료적 근거가 부족한 또 다른 선동에 가깝다. 역사 서술은 자극적인 증언에 의존하기보다, 사건의 당사자와 주변 정황을 토대로 다각적으로 고려하는 엄밀한 분석을 우선해야 한다.
이를테면, 대숙청과 홀로코스트를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각 역시 냉전적 시각에 여전히 국한되어 있다. 당시 독일이 반공주의를 명분으로 소련과의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럽 전반을 덮친 경제 공황과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위기가 논리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전개로 본다면, 제국주의적 이해 관계를 대변했던 미국의 입장 또한 당시 독일의 행보와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역사는 과거의 서술 이전에 현재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제 정세의 속에서 여러 논란이 있더라도, 박헌영은 양 진영 모두에게 표적이 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 그는 베트남의 호치민과 함께 소련 레닌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드문 수강생이자 혁명가였다. 최근의 역사 서술은 박헌영 행적을 격하하기 위해 광주로 피산한 사례 등을 부각하거나, 여전히 내용마저 생략하고 그를 평가절하한다. 본질적으로 그의 몰락은 분단 과정에서 발생한 치열한 내부 투쟁의 결과로 해석되어야 한다. 비록 부르주아 사학계가 그를 단순히 비운의 인물로만 박제하려 할지라도, 분단의 모순을 몸소 겪고 있는 인민만이 그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