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 02. 


부르주아지의 폭력

 

 

부르주아지의 평화

 

여기서 부르주아지는 지배 계급 일체를 말하며, 유산 계급에 속한 사람들도 모두 포함된다. 현대 부르주아지는 더욱 이 둘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든 폭력은 해로우며, 발휘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급에 대한 시각과 이론이 조금씩 무르익고 있을 무렵, 평화에 대한 강박이 꼭 지배 계급 간 전쟁이라는 양상으로도 나타난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조금씩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사용하는 폭력이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특히 이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은 모든 폭력에 대해 보편성을 거론한다. 특히 구조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으로 구분짓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막상 폭력을 사용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 처하게 될 때는 어떻게 사용할지조차 몰랐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일정 부분 지식인이기에, 자신의 계급에 갇힌 협소한 소시민적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결론을 체제에 순응해야만 한다거나, 그마저도 교훈적인 폭력의 결과에 따른 단상으로만 그치고 만다. 하지만 적어도 본인은 자신의 위치에서나, 계급적인 요구에서 한 조건이 알맞다면, 폭력의 사용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국가나 체제를 수호한다거나,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부 군부에 의존한 무력 간 충돌에 따른 폭력이라거나, 익히 들은 내전의 양상을 띠는 전쟁을 주도하고, 제국주의를 더욱 암묵적으로 드러내고자, 수 많은 무고한 인민들을 학살한 사건들을 보더라도, 오히려 그것이 국내와는 무관한 일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물론 자본주의자들의 끝은 언제나 인민 간 내전으로 가장한 지배 계급 간 전쟁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바로 부르주아적인 평화주의자들도 내세우는 전쟁에 대한 협상에 앞서 더욱 지배 계급 간 협상을 중재하려는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표현된 바는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더욱 고도로 억누를 수 있다는 생각과 통제할 수 있는 시각적인 매체와 지배 계급들의 선동에서도 보여왔다


저항을 대표하던 한 정권이 집권을 하게 되면 순식간에 모든 일들은 사라져버리고, 모든 인민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환호를 보내는 듯이 보여진다. 하지만 유산자들은 너무나 손 쉽게 노동 자들을 자신의 소유지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로부터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몬다. 늘어나는 노동자의 수가 대변이라고 해주듯이, 우리는 폭력을 감추고 살거나, 시각적인 매체로부터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 간의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를 축하하면서, 저항한 사람들을 역사적으로 기리고 만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여야당을 막론했다. 우상 숭배에 대한 끝을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기만 하면, 지배 계급들로부터 협상되는 국가의 보호라는 안전망이 언제나 대중들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지배자들과 자본가들은 더욱 튼튼한 건물과 보안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신들의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해간다. 어쩌면 부르주아적인 평화론자들이 구축하고 있는 또 다른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의 모습들인 셈이다. 더 높이 세워지는 건물들과 더 나은 인민을 통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이념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져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지배자가 국내의 모습을 보며, 혁명과 숙청이 일어나냐고 물었을 때도, 같은 방식으로 협상에 대한 기대를 그들만의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음으면서, 자신들의 손에서 일궈낼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 그들은 정부의 무기를 가졌고, 방위 업체까지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 쉽게 진압하면서, 앞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그려내며, 인민들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기대하는, 싸울 수 없도록 노동자마저 줄어들게 만드는 그들의 전략 속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을 바로 자신들로부터 손 쉽게 진압하고, 학살할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과 자만에서 때로는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프롤레타리아트 폭력

 

가끔 체 게바라의 게릴라전을 읽는다. 가진 것이 없어서 범죄를 일으키고, 소요에 그치고 마는 과격한 시위로 머무는 운동들은 군대와 경찰들에게 체포되면서 쉽게 멈추고 만다. 그러한 간접적인 장면이라도 볼 때면, 단순히 지도자의 부재라기 보다는, 오히려 현대 혁명 전략과 전술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실 전 세계에서도 시위가 일어나는 양상들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그 힘이 미숙해서 충분히 발휘해내지 못하거나, 일찍 그치기도 하기도 해서, 장기적으로 분명한 목적과 끈기 면에서 아쉬울 때도 많이 보였다. 심지어 그러한 훈련의 경험이 없어 은행마저 어떻게 점거하는지를 미숙한 태도마저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이제는 게임에서도 시뮬레이션으로 손 쉽게 이러한 경험을 체험해볼 수 있지만, 현실은 아무리 훌륭한 전략과 전술을 갖추더라도, 모든 범죄들로 재판 받고 곧바로 없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는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들만의 의회가 자신들의 복장 따위로 논쟁을 벌인, 그러한 연회의 수준마저 은연 중에 드러내고 말았다. 여기서는 군부 독재를 일으켜 반대를 부르짖는 장본인들마저, 이제는 국회 속으로 하나가 되어, 그들만의 파티를 즐기는 중이다. 우리에게는 폭력을 사용할 여지도, 그러한 힘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파괴적인 본능에 힘 입어 때려부실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과 우리가 같다는 점만 드러낼 뿐이다. 이러한 논리를 각국의 평화론자들은 자신의 희생으로 귀결시키면서, 부르주아지들에게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양상도, 변화되는 과정도 분명 다를 수밖에는 없다. 지금과는 다른 고도의 기술적인 발전을 앞세우고, 지배 정부를 앞세운 모든 국가들에서는 하물며 유산 계급들의 파티마저 지배 계급들도 자신들의 벗들을 찾아 노동 계급과 무산 계급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판되는 연구 이론들은 대체로 앞으로 희망찬 전망을 말하면서, 더욱 무의미해지는 혁명의 필요 조건과 필수 조건에 대해서는 단순히 위험하고, 잔인한 생각이므로 멈추기를 바라고 만다. 노동자들이 사고로 가장한 자본으로부터의 살인마저 꾸준하게 그 수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말이다. 더욱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가고, 생계에 대한 위협을 받는 사람들도 늘어났다는 요즘에도, 포화 속의 글만큼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또 아니면 부유한 사람을 꿈꾸며, 뼈 빠지게 일해서 그나마 누릴 수 있는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인민 대중에게 있어 부르주아지들의 폭력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소시민이 말하는 평화적인 방식과는 무엇이 달라야만 하는가. 가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무산 혁명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을 많이 듣고는 했다. 하지만 한강에서 가만히 앉아 생각해봤다


그 말이 과연 희박한 확률일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자본주의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배 계급과 유산 계급이 무너질 수 있을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교과서처럼 민주주의를 배워왔고, 체제를 잘 유지하고, 세우는 게 당연하다고 배웠다. 정작 세상 밖으로 나와 겪은 것은, 소중한 사람들의 헛된 죽음이었고, 돈이라는 욕망에도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그 눈으로 가려진 채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은 폭력을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단순하기 때문에, 폭력에 따른 혁명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왜 그러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폭동에 더욱 가담했을까. 무산 계급에게도 군대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정부 속의 군대로부터 억지로 징집되거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단순히 인민을 대변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필연적인 결과이지만, 어쩌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준비를 앞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덧, 저 부르주아지들의 비웃음에 갇혀버린 우리들의 무력한 모습 속에서, 계급 운동이 더욱 살아나도록 도울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정부군의 역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혁명군이라는 무산 계급의 무장을 위해서도 미리 전략과 전술을 앞서 잘 세울 필요는 있어 보인다. 더욱 당연해지고, 첨예해진 계급 간 관계와 사유 재산를 두고 둘러싼 긴장 간 전쟁, 착취된 토지의 부름에 있어서도, 그리고 조국으로 인해 먼저 간 노동자를 위해서도 비록 건장한 체력은 아니지만, 본인도 필요하다면 군부 폭동의 가담이 아니라, 누군가 죽음을 비웃고, 아무리 실패로 끝나더라도, 부르주아지들에게 맞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참가하고, 도울 의지는 충분해진다. 그리고 그 문제는 단순히 노동 계급으로부터 표출된 그 이상의 요구를 담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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