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무산 독재라는 당면 과제
프롤레타리아트와 독재
독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고,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다음과 같은 논의를 진행할 수는 없다. 바로 독재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과거 운동권들은 강렬하고, 또 강력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부터 혁명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어오기도 했지만, 돌아온 폭풍은 반동이라는 자본주의 성취로 퇴행하고 복귀했을 뿐이었다. 여러 파업과 시위들에서도 볼 수 있는 임금 인상, 안정화 등에 대한 요구가 도리어 체제에 대해 더욱 효과적이거나, 장기적이지도 못한 이유에 대한 원인은 무엇일까. 바로 결정권에 대한 물음을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재는 곧 결정권을 가진다. 그리고 부르주아 독재와 군부 독재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흠은 바로 그러한 결정권 앞에 소수 결정만을 앞세웠다는 점이다. 여기서 소수란 바로 가진 사람들, 곧바로 지배·권력은 누구인가를 뜻하기도 한다. 쉬운 예시로는 한 무리나 집단에서도 볼 수 있다. 직장에서 서열화로는 의사를 두고 토론하지도, 주어지거나 맡은 일에 대해 바른 물음을 던지지도 못하게 막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은 언제나 서열이 높거나, 직권이 높은 사람들을 중심으로만 모여지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사람을 하대하는 관료주의가 작동하거나, 기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조직들로는 한치 앞도 모르거나. 정작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과 위험을 내재한 채로 질주하기만 한다는 여러 특징들도 보인다.
특히 부르주아 독재와 군부 독재를 겪고 있거나, 경험한 국가들로는 그러한 민주주의 요구가 달성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폭력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폭력을 쉽게 도덕·윤리에 대한 수단으로만 여기거나,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바로 죽음과 희생을 두렵게만 느끼거나, 그리고 도달해야만 하는 필수로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행사하는 폭력은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제기하는 폭력과 매우 다르고, 전개로도 발휘할 때는 여러 혁명가들도 지적했지만, 소수 시위나 파업 투쟁과는 매우 다른 전투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불황기에도, 그러한 전투로까지 확장될 수 없다고 믿는 여론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결정권에 대한 물음이라면 전개와 양상도 매우 달라질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다르다는 점도 간과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늘 체제로부터 잔존하는 물음으로는 딱 한 가지가 있었다. 누가 조직 안에서도 결정권을 가지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음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달성하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정치·경제적인 한 표를 획득하기 위한 결정권이었는가. 아니면 혁명을 결정한다는 결정권이었는가에 따라서도 목적이나 수단은 그리고, 투쟁으로도, 또 경과로도, 과정과 결과로도, 잘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새삼 놀랍지는 않지만. 집회와 파업이 끝나고나면 무서울만큼 반복되는 일상 복귀라는 이름으로도. 정상화를 위해 기여를 한다는 점에서도. 사람들은 그러한 투쟁을 추상적으로만 이해하지. 정작 투쟁을 하는 원인이나, 체제를 지적하고, 혁명을 제기해야만하는 물음을 잘 던지지는 못했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로는 식민지로부터 달성되는 자유·의회 민주주의만이 문명화를 가늠하는 척도이거나, 꼭 진보를 뜻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유로운 민주주의로부터 노동 인민들이나 대중들에 대한 의사들도 꼭 반영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그러한 물음들은 누가 대신해서 처리해준다는 안일한 태도로도 아니고. 모든 추상적인 의식에서가 아니라 당면한 제기할 수 있는 물음들이나 문제들에도 직접 참가하고, 스스로 따져보고, 결정한다는 뜻에서 발휘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참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원론적인 민주주의보다 더욱 혁명으로도 성취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