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이자와 기업가 이득

 

이자는 이윤, 곧 잉여 가치 중 기능 자본가 (산업가 또는 상인)가 차입 자본의 소유자인 대부자에게 지불해야 하는 부분에 불과하다. 이는 이자의 초기 발생 형태이자 현실적인 본질이다. 기능 자본가가 전적으로 자기 자본만을 운용한다면 이윤의 분할은 발생하지 않으며, 창출된 모든 이윤은 자본가 개인에게 귀속된다.

 

자본 소유자가 재생산 과정에서 자기 자본을 직접 사용하는 한, 이들은 이자율 결정을 위한 경쟁 체제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이자라는 범주가 이자율의 확정을 전제로 하며, 본질적으로 산업 자본의 독자적인 운동 외부에서 규정되는 영역임을 시사한다.

 

이자율은 일정 기간 화폐 자본을 사용하는 대가로 대부자가 수취하고자 하며 차입자가 지불하고자 하는 금액의 비율로 정의된다. 자본 소유자가 자신의 자본을 직접 재생산 과정에 투입할 경우, 그는 이자율 결정 원리에 참여하는 대부자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투크, 1838, : 355-356)

 

결국 이자라는 범주는 자본가가 화폐 자본가와 산업 자본가로 기능적으로 분리되면서 비로소 성립하며, 이윤의 일부가 이자로 전환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이자율은 이들 두 자본가 집단 사이의 경쟁 관계로부터만 결정적 형태를 갖추게 된다.

 

자본이 재생산 과정에서 기능하는 한, 비록 그것이 산업 자본가 자신의 소유로 대부자에게 상환할 의무가 없더라도, 자본가가 개인적 수입으로 처분할 수 있는 영역은 이윤에 국한될 뿐 자본 그 자체는 아니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자본은 재생산 과정에 고착되어 있으며, 소유권의 존부와 무관하게 노동 착취를 위한 자본으로 운용되는 동안에는 다른 용도로 전용될 수 없다. 이는 화폐 자본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 자본이 대부되어 화폐 자본으로 기능하며 이윤의 일부인 이자를 발생시키는 과정에 있는 한, 자본가는 그 원금에 대한 임의적인 처분권을 행사할 수 없다.

 

자본가가 자본을 수년에 걸쳐 대부하고 원금 상환 없이 이자만을 수취하는 경우, 자본의 구속성은 명확히 드러난다. 설령 원금을 상환 받더라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해당 자본이 이자 낳는 자본으로 지속해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시 대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소유자의 수중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자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자본으로의 기능을 상실하며, 반대로, 이자를 창출하며 자본으로 기능하는 동안에는 소유자의 수중을 떠나 있게 된다. 이 지점에서 자본의 영구적 대부 경향성이 도출된다.

 

따라서 보상케트의 주장 (1842: 73)을 비판한 투크의 견해는 타당성을 결여한다. 보상케트는,

   

이자율이 1% 수준으로 하락할 경우, 차입 자본이 자기 자본과 실질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것에 대해 투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러한 이자율, 또는 그보다 더 낮은 이자율로 차입한 자본이 자기 자본과 실질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납득하기 어렵다. 해당 분야의 부차적인 논점들에 정통한 현명한 저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이는 진지하게 고찰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는 상환이라는 조건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거나, 또는 그 사안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투크, 1844: 80)

 

이에 대해 투크는 상환 의무라는 전제 조건을 간과한 기이한 발상이라며 이를 일축했으나, 이는 자본이 기능하는 동안 소유권과 처분권이 분리되는 본질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처사이다.

   

이자율이 영 (0)에 수렴할수록 차입 자본을 운용하는 산업 자본가는 자기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실질적으로 대등한 지위를 점하게 된다. 양자 모두 동일한 평균 이윤을 획득하며, 각자의 자본은 이윤 창출이라는 본연의 목적에 따라 자본으로 기능한다. 상환 조건의 존재 여부는 이러한 기능적 측면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자율이 1%와 같이 저리에 머물 경우, 화폐 자본이 자본으로의 성격을 유지하려면 산업 및 상업 자본가 계급에게 현행 이율로 지속해서 대부되어야 하며, 이는 차입 자본과 자기 자본 사이의 경제적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결국 기능 자본가로 두 집단의 실질적 차이는 이자 지불 여부에 따른 수익 배분 방식, 곧 전체 이윤 p을 점유하느냐 또는 이자를 제외한 잔여 이윤 (p-i)을 점유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자 (i)가 영에 가까워질수록 양자의 수익 구조는 상호 근접하게 된다. 한쪽은 자본을 상환하고 재차 차입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다른 쪽은 생산 과정에 자본을 지속해서 재투입하며 처분권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 남는 유일한 차이는 자본의 법적 소유권 유무라는 자명한 사실뿐이다.

 

이윤의 양적인 분할, 곧 순이윤과 이자로의 구분이 어떻게 질적인 분할로 고착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차입 자본 없이 전적으로 자기 자본만을 운용하는 자본가조차 총이윤의 일부를 이자라는 특수한 범주로 분류하여 별도 계상하는 현상의 근거를 묻는 것이다. 나아가 차입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자본이 스스로를 이자 낳는 자본으로 규정하며, 이로부터 발생하는 순이윤을 가져오는 기능 자본과 자기 자신을 분리하여 파악하게 되는 연유에 대한 고찰이 요구된다.

 

이윤의 우연적이고 양적인 분할이 모두 질적인 범주적 분할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복수의 산업 자본가가 결합하여 단일 사업을 경영하며 법적 협약에 따라 이윤을 배분하는 경우와, 단독 자본가가 사업을 영위하는 경우를 전제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자신의 이윤을 개인 이윤과 존재하지 않는 동업자를 회사 이윤으로 명목상 분리하여 계상하지 않는다. , 양적 분할이 질적 분할로 전환되는 현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윤의 분할은 소유 주체가 복수의 법적 인격으로 구성될 때에만 실재하며, 단일 소유 구조하에서는 범주적 분리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제기된 문제에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자 형성의 실증적 출발점에 주목해야 한다. , 화폐 자본가와 산업 자본가가 단순히 법률적으로 독립된 인격체만이 아니라, 재생산 과정 내에서 상이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체로 대립한다는 전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는 동일한 자본이 각 주체의 수중에서 실질적으로 이중의 상이한 운동을 전개함을 의미한다. 한쪽은 자본을 대부하는 기능에 국한되는 반면, 다른 쪽은 이를 생산 과정에 투입하여 운용하는 기능만을 담당하면서 양자의 현실적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

 

차입 자본을 운용하는 기능 자본가 (산업·상업 자본가)에게 총이윤은 대부자에게 지급할 이자와 이를 초과하여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몫이라는 두 부분으로 분할된다. 일반적 이윤율과 이자율이 주어져 있다면, 자본가의 최종 수입은 이 두 지표의 상관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특히 개별 사례에서 총이윤의 현실적 가치량이 평균 이윤에서 크게 이탈하더라도, 기능 자본가의 몫을 규정하는 결정적 변수는 이자이다. 이자는 특별한 법률적 계약이 없는 한 일반적 이윤율에 따라 확정되며, 생산 과정의 결과물인 총이윤이 실현되기 이전 단계에서 이미 확정된 수치로 전제되기 때문이다.

 

자본의 본질적 생산물은 잉여 가치이며, 구체적으로는 이윤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차입 자본을 운용하는 자본가에게 실질적인 수익은 총이윤이 아니라 이자를 공제하고 남은 잔여 부분에 국한된다. 따라서 이 이윤 부분은 그에게 현실적으로 기능하는 자본의 직접적인 생산물로 파악되며, 이는 자본의 인격화로 그가 수행하는 기능적 역할에 부합하는 실체적 사실이 된다.

 

자본이 기능한다는 것은 수익 창출을 목적으로 산업이나 상업에 투입되어 자본가가 해당 부문에서 요구되는 제반 활동을 수행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대부자에게 지급되는 이자에 대비되는 총이윤의 잔여분은 필연적으로 산업 이윤 또는 상업 이윤의 형식을 취하게 되며, 이를 포괄하는 개념인 기업가 이득의 형태로 정착된다.

 

총이윤이 평균 이윤과 일치할 경우 기업가 이득의 크기는 전적으로 이자율에 따라 규정된다. 반면, 총이윤이 평균 이윤과 불일치될 때, 양자에서 이자를 공제한 후 발생하는 차액은 일시적 변동을 야기하는 제반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

 

어느 특정 생산 부문의 이윤율이 일반 이윤율에서 벗어나거나, 개별 자본가의 수익이 해당 부문의 평균치를 상회 또는 하회하는 경우를 모두 포괄한다. 이윤율은 생산 과정 내의 잉여 가치뿐만 아니라 생산 수단의 매입 가격, 생산성 향상, 불변 자본의 절약 등 여러 요인에 의존하며, 유통 과정에서의 시장 상황과 자본가의 역량, 곧 구매 및 판매 시점의 전략적 판단에 기반한 잉여 가치 취득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총이윤의 양적 분할은 질적 분할로 이전된다. 특히 이 분할의 실질적 양태가 자본의 구체적 활용 방식 및 기능 자본으로 창출한 성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은, 양적 구분을 질적 규정성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기능 자본가가 자본 소유자가 아님을 전제할 때, 자본 소유권은 기능 자본가와 대립하는 대부자 (화폐 자본가)에게 대표된다. 이에 따라 기능 자본가가 지급하는 이자는 총이윤 중 자본 소유 그 자체에 귀속되는 몫으로 규정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능동적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몫은 그가 재생산 과정에서 수행하는 활동, 특히 산업이나 상업의 기업가로 발휘하는 기능으로부터 발생하는 기업가 이득으로 나타난다. , 기능 자본가의 관점에서 이자는 재생산 과정과 분리된 채 노동이나 기능 없이 획득되는 자본 소유의 단순한 과실로 파악된다. 반면, 기업가 이득은 자본가가 자본을 운용하며 수행하는 기능적 활동의 직접적인 성과로 간주된다. 화폐 자본가가 생산 과정에 관여하지 않음에 따라, 자본의 운동과 그에 따른 성과는 온전히 기능 자본가 자신의 주체적 활동에 따른 결실로 형상화된다.

 

총이윤이 이자와 기업가 이득으로 질적으로 분할되는 현상은 자본가들의 주관적 견해만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다. 이자는 생산 과정과 무관한 자본 소유 그 자체의 과실로 대부자의 수중에 귀속되는 반면, 기업가 이득은 실제 재생산 과정에서 자본을 운용하는 기능적 활동의 과실로 기능 자본가의 수중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 이자는 생산 과정 외부에서 자본 소유를 대표하는 화폐 자본가에게 귀속되고, 기업가 이득은 소유권과 분리되어 생산 현장에서 자본을 인격화하는 기능 자본가에게 수취된다는 실체적 분배 구조가 이러한 질적 규정성을 뒷받침한다.

   

동일한 자본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윤에 대해 서로 다른 법적 권리를 지닌 두 주체 사이의 양적 분할은, 화폐 자본가와 산업 자본가의 대립에서 질적 분할로 고착된다. 이로부터 이윤의 한 부분은 자본 소유 그 자체에 귀속되는 과실인 이자로 규정되며, 다른 부분은 자본의 기능적 운용에 따른 고유한 결실인 기업가 이득으로 형상화된다. , 전자는 자본 소유권의 단순한 과실로, 후자는 재생산 과정 내에서 능동적으로 기능하는 자본 또는 자본가의 주체적 활동이 낳은 성과로 파악된다.

 

이처럼 총이윤의 두 구성 요소가 본질적으로 상이한 원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자립화하고 화석화되는 현상은 자본가 계급 전체와 자본 일반의 규정성으로 확립된다. 따라서 이러한 질적 분할의 논리는 능동적 자본가가 운용하는 자본의 차입 여부나, 화폐 자본가의 직접적인 자본 사용 여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적 분배 구조 전반에 관철된다.

 

개별 자본의 이윤과 자본 간 균등화에 기반한 평균 이윤은 각각 특수한 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이자와 기업가 이득이라는 질적으로 상이하고 상호 독립적인 두 부분으로 분할된다. 자기 자본을 운용하는 자본가 역시 차입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총이윤을 자본 소유자로 수취하는 이자와 능동적 기능 자본가로 획득하는 기업가 이득으로 구분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적 분할에 있어 자본가가 실제로 이윤을 타인과 분배하는지 여부는 본질적 변수가 되지 않는다. 자본 사용자는 자기 자본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자본의 단순 소유자와 자본의 사용자라는 두 인격으로 분열된다. 자본 그 자체 또한 이윤 범주와의 상관관계 속에서 생산 과정 외부에 존재하는 이자 낳는 자본 소유와 생산 과정 내부에서 기업가 이득을 창출하는 과정 중의 자본으로 이원화된다.

 

이자는 단순히 타인의 자본을 운용할 때 발생하는 생산 외적 분할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 자본가가 자기 자본으로 활동하는 경우에도 그의 이윤은 이자와 기업가 이득으로 분할된다. 이로부터 양적 분할은 질적 분할로 이전되며, 이러한 분할은 자본의 실질적 소유 여부라는 개별적 사정과 무관하게 관철된다. , 이 분할은 서로 다른 인격에게 배분되는 이윤의 몫만이 아니라, 이윤의 두 가지 질적 범주를 형성한다. 이는 자본에 대한 상이한 관계, 곧 자본의 소유기능이라는 서로 다른 자격에 대응하는 필연적 규정성으로 확립된다.

 

총이윤의 분화가 질적 성격을 획득하고 자본가 계급 전반에 관철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객관적 근거에 기인한다.

 

첫째, 대다수 산업 자본가가 자기 자본과 차입 자본을 다양한 비율로 배합하여 운용하며, 그 비율 또한 시기에 따라 부단히 변동한다는 실증적 사실 때문이다.

 

둘째, 이자가 독자적인 범주로 확립됨에 따라 총이윤의 잔여분이 필연적으로 기업가 이득이라는 대립적 형태를 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윤의 분화에 관한 연구는 본질적으로 총이윤의 일부가 어떻게 이자로 자립화하고 고착되는가에 관한 연구로 귀착된다. 역사적으로 이자 낳는 자본과 그 생산물인 이자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 성립 이전부터 완성된 형태로 존재해 왔으며, 이로 인해 통속적 관념 속에서 화폐 자본은 진정한 의미의 자본으로 간주되어 왔다. 특히 대부 자본이 생산적 활용 여부와 무관하게 이자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은 이 자본 형태의 독립성을 강화하였고, 18세기 중엽 매시와 흄에게 이자가 총이윤의 일부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이자는 화폐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셋째, 화폐 자본가 계급이 산업 자본가와 대비되는 특수한 자본가 집단으로 실재하며, 화폐 자본과 이자가 각각 독립된 자본 종류와 잉여 가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질적 관점에서 이자는 재생산 과정 외부에 머무는 자본 소유권이 생산 과정과 분리되어 스스로 창출하는 잉여 가치로 규정된다.

 

양적 관점에서 이윤 중 이자 부분은 산업 및 상업 자본이 아닌 화폐 자본에 대응하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자율은 이러한 관계를 고착시킨다. 이자율은 일반 이윤율에 의존함에도 독립적으로 결정될 뿐만 아니라, 파악하기 난해한 이윤율과 달리 시장 가격처럼 항상 명백히 주어진 크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든 자본이 산업 자본가의 수중에만 있다면 이자와 이자율은 성립할 수 없으나, 총이윤의 양적 분할이 취하는 독립적 형식이 이러한 질적 분할을 야기한다. 산업 자본가는 화폐 자본가와 비교할 때 이자율에 따라 확정된 평균 이자를 초과하는 기업가 이득으로만 구별된다.

 

반면, 자기 자본으로 사업하는 산업 자본가는 이자를 타인에게 지불하지 않고 스스로 수취한다는 점에서만 화폐 자본가적 성격을 지닌 채 일반 산업 자본가와 구별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산업 자본가에게 총이윤 중 이자를 제외한 부분은 기업가 이득으로 규정되며, 이자 그 자체는 자본의 생산적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자본 소유권 자체가 창출하는 잉여 가치로 실체화된다.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자본을 이자 낳는 자본으로 대부할 것인지, 또는 직접 생산적 자본 (산업·상업 자본)으로 운용할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는 전략적 판단이다. 그러나 자본이 생산 과정과 무관하게 본연적으로 이자를 낳는다는 관념을 사회적 총자본에 일반화하여 이를 이윤의 근거로 삼는 속류 경제학적 견해는 명백한 오류이다.

 

화폐로 존재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한 총자본이 생산 수단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이를 구매하여 가치를 증식시키는 주체 없이 총자본이 화폐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발상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 곧 잉여 가치의 창출 과정 없이도 자본이 이자를 낳을 수 있다는 관념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기초를 부정하는 논리적 모순이다.

 

대다수 자본가가 자본을 화폐 자본으로만 운용하려 한다면, 화폐 자본의 과잉 공급으로 인한 이자율 폭락이 발생할 것이며, 결국 이자 수입만으로 생계 유지가 곤란해진 자본가들은 다시 산업 자본가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는 이자와 기업가 이득의 취득이 엄격히 분리된다. 따라서 자기 자본을 운용하는 자본가라 할지라도 총이윤 중 평균 이자에 해당하는 몫을 생산 과정과 분리된 자본 그 자체의 과실로 간주하며, 이를 초과하는 잔여분을 기업가 이득으로 규정하게 된다.

 

넷째, (엥겔스: 원고 공백).

 

이처럼 기능 자본가가 대부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이자는, 차입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자본이 창출한 이윤 중 특정 부분이 이자라는 이름으로 분리된 독립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윤에 대해 서로 다른 법적 권리를 가진 주체들 사이의 단순한 양적 분배는 자본과 이윤의 본질적 성격에서 기인하는 듯한 질적 분할로 고착된다. 일단 이윤의 일부가 이자라는 범주로 확정되면, 평균 이윤과 이자의 차액은 필연적으로 이자에 대립하는 기업가 이득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두 범주는 잉여 가치라는 단일한 원천과의 연계성보다는 상호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 이윤의 한 부분이 이자로 정립되면서 비로소 다른 부분이 기업가 이득으로의 고유한 형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언급되는 이윤은 항상 평균 이윤을 의미한다. 개별 이윤이나 특정 생산 분야의 이윤이 평균 이윤에서 이탈하는 현상, 곧 경쟁이나 기타 제반 사정에 따른 이윤 및 잉여 가치 분배의 변동은 본 고찰의 본질적 논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자는 람지가 규정한 순이윤이 되며, 이는 재생산 과정 외부에 존재하는 대부자나 자기 자본을 직접 운용하는 소유자 모두에게 자본 소유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결실로 파악된다. 자기 자본을 사용하는 자본가에게 자본 소유가 순이윤 (이자)을 안겨 주는 이유는 그가 기능 자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본을 이자 낳는 자본으로 기능 자본가인 자기 자신에게 대부하는 화폐 자본가의 지위를 겸하기 때문이다.

 

화폐와 가치 일반이 자본으로 전환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의 필연적 결과이듯, 화폐가 자본으로 실재하는 것은 해당 과정의 항구적 전제이다. 화폐가 생산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력에서 미지불 노동을 지배하며, 이로부터 상품의 생산 및 유통 과정을 화폐 소유자를 위한 잉여 가치 창출 과정으로 변모시킨다.

 

결국 이자는 현실의 생산 과정에서 생산 수단의 형상을 취한 가치 일반 (사회적 형태의 대상화된 노동)이 자립적인 위력을 지닌 채 살아있는 노동력과 대립하여 미지불 노동을 탈취하는 수단이 됨을 표상한다. 또한 가치가 이러한 지배력을 획득하는 근거는 그것이 노동자와 대립하는 타인의 소유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자라는 구체적 형태 안에서 임금 노동에 대한 이러한 직접적 대립 구도는 은폐된다.

 

이자 낳는 자본이 대립물로 전제하는 대상은 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기능하는 자본가이기 때문이다. 대부 자본가와 직접 마주하는 주체는 재생산 과정의 실체적 집행자인 기능 자본가이지, 생산 수단을 결여한 임금 노동자가 아니다. , 이자 낳는 자본은 기능으로의 자본에 대립하는 소유로의 자본을 의미한다. 자본은 기능하지 않는 한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으며, 따라서 노동과 직접적으로 대립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업가 이득은 임금 노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자와 대립할 뿐이다.

 

그 근거는 첫째, 평균 이윤이 고정된 상태에서 기업가 이득률을 결정하는 변수는 임금이 아니라 이자율이기 때문이다. 기업가 이득률은 이자율과 반비례 관계를 형성하며 그 고저가 결정된다.

 

둘째, 기능 자본가는 기업가 이득의 근거를 자본 소유권이 아닌 자본의 기능, 곧 비활동적 재산으로의 자본과 대비되는 동태적 운용에서 도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 구도는 차입 자본을 운용하여 이자와 기업가 이득의 수취 주체가 분리될 때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기업가 이득은 재생산 과정에서의 자본 기능, 곧 산업 및 상업 자본의 제반 기능을 매개하는 자본가의 작업과 활동의 결과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에서 기능 자본의 대표자는 생산과 유통 과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며, 생산적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직접적이든 대리인을 거쳐서든 구체적인 노력을 투여해야 한다. 따라서 자본가에게 기업가 이득은 소유권과 무관한, 비소유자이자 노동자로 수행한 기능적 활동의 결실로 파악된다.

 

이로 인해 자본가의 의식 속에는 기업가 이득이 임금 노동과 대립하는 타인의 미지불 노동이라는 본질이 소멸하고, 대신 그것이 감독 임금이라는 관념이 들어선다. 이는 자신의 노동이 전문 노동이며, 스스로에게 지급하는 고액 임금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된다. 자본가의 본질적 기능이 미지불 노동을 가장 경제적인 조건에서 생산하여 잉여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는 사실은 망각된다. 이러한 망각은 자본가가 아무런 기능을 수행하지 않아도 소유자로 이자를 수취하는 현상과, 자본을 소유하지 않아도 기능 수행에서 기업가 이득을 얻는 현격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윤을 구성하는 두 부분의 외견상 차이로 인해, 양자 모두 노동자의 미지불 노동에서 유래한 잉여 가치의 파생물일 뿐이라는 본질적 성격은 철저히 은폐된다.

 

재생산 과정에서 기능 자본가는 임금 노동자에 대립하여 타인의 소유물인 자본을 대변하며, 화폐 자본가는 이러한 기능 자본가를 매개로 하여 노동 착취에 가담한다. 능동적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립하는 생산 수단의 대표자로만 자신의 기능, 곧 노동력을 예속시키고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 가동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본질적 사실은 재생산 과정 내부의 자본 기능과 생산 과정 외부의 단순한 자본 소유 사이의 대립 구도로 인해 은폐된다. 이로부터 자본의 기능적 운용이 지닌 착취적 성격은 망각되고, 자본의 소유와 기능 사이의 관계만이 표면화된다.

 

사실상 이윤 또는 잉여 가치가 이자와 기업가 이득으로 분할되어 취하는 형태는 노동과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나타내지 않는다. 노동과의 본질적 연관성은 노동과 이윤, 곧 이자와 기업가 이득의 총체인 잉여 가치 전체 사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윤의 분할 비율과 그 근거가 되는 권리 관계는 이미 이윤이 창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자본가가 운용 자본의 실질적 소유자로 이윤 전부를 점유하든, 또는 그 일부를 법적 소유자인 제3자에게 지급하든, 이는 노동자와의 관계에서는 무의미한 사정이다.

 

그럼에도 두 자본가 주체 간의 이윤 분배 사유는, 분배 이전의 이윤 또는 잉여 가치 그 자체가 존재하게 된 근본 원인으로 치환된다. 이자와 기업가 이득이 상호 대립할 뿐 노동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외적 현상으로 인해, 이윤과 잉여 가치의 원천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 두 부분의 대립적 형식 속으로 매몰된다. , 이윤이 자본 고유의 속성인 이자와 자본가의 노동인 기업가 이득의 합이라는 왜곡된 견해가 도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윤은 분할이 논의되기 이전, 생산 과정에서 이미 창출되어 존재하는 실체이다.

 

이자 낳는 자본의 실체는 대부된 화폐가 현실적으로 자본으로 전환되어 이자의 원천인 초과분을 생산할 때 비로소 입증된다. 그러나 이것이 생산 과정과 독립적으로 이자를 창출하는 자본 고유의 잠재적 속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노동력이 노동 과정에서 실현될 때 비로소 가치를 창출하지만, 가치 창출이라는 속성 자체는 노동 과정의 결과가 아닌 전제로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 노동력이 가치 창출 능력을 지닌 상품으로 거래되듯, 자본 또한 잉여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적 유용성을 지닌 특수한 상품으로 취급된다.

 

차입자가 대부 받은 자본을 실제로 자본으로 운용하여 잉여 가치를 생산할 것인지, 또는 비생산적인 개인적 목적으로 소비할 것인지는 차입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차입자가 지불하는 대가는 자본이라는 상품에 잠재력으로 내재해 있는 잉여 가치 창출 능력에 대한 보상이다. , 이자는 자본이 기능 자본으로 전화하기 이전부터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 증식력에 대한 지불인 것이다. (CW 32: 487-489)

 

 

 기업가 이득의 본질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하에서 타인의 노동을 지배하는 자본의 특수한 사회적 속성이 확립됨에 따라, 이자는 이러한 원리 속에서 자본이 창출하는 잉여 가치의 고유한 몫으로 규정된다. 이에 대비되는 잉여 가치의 잔여분인 기업가 이득은 필연적으로 자본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자라는 형태로 이미 외화된 자본의 사회적 속성과 분리된 별도의 생산 과정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생산 과정이 자본이라는 규정성에서 분리될 경우, 이는 단지 추상적인 노동 과정 일반으로 수렴된다. 그 결과, 자본 소유자와 대비되는 산업 자본가는 기능 자본의 인격화로가 아니라 자본과는 무관한 직무 수행자, 곧 노동 과정 일반을 담당하는 단순한 노동자이자 임금 노동자의 형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자가 체현하는 실질적 의미는 노동 조건이 자본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곧 생산 수단이 노동에 대해 사회적으로 대립하며 노동을 지배하는 개별적 권력으로 실체화되었음을 뜻한다. 이자는 타인 노동의 생산물을 사유화하는 수단으로 자본 소유 그 자체를 표상한다. 그러나 이자는 이러한 자본의 본질을 생산 과정 외부에서 규정되는 속성으로 나타내며, 이를 생산 과정 내의 특수한 자본주의적 규정성과 무관한 것처럼 드러낸다.

 

특히 이자는 자본의 성격을 노동과의 직접적인 대립 구도로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과는 무관한 자본가와 자본가 사이의 관계로만 형상화한다. 이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실질적 관계를 외면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규정이다. 따라서 자본의 대립적 성격이 독립적인 형식을 획득한 특수한 이윤 형태인 이자 속에서, 자본과 노동 사이의 근원적 대립은 완전히 소거된다. 이자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닌, 오직 두 자본가 사이의 분배 관계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자 형태의 정립은 모순적으로 이윤의 잔여 부분에 기업가 이득또는 감독 임금이라는 질적 형식를 부여한다. 자본가로 수행해야 하는 특수한 기능, 곧 노동자와 구별되고 대립하는 자본가 고유의 역할이 이 지점에서 단순한 노동 기능으로 전치된다.

 

자본가가 잉여 가치를 획득하는 근거가 자본가로의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라는 자격과는 무관하게 그 역시 노동을 수행하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잉여 가치의 이 부분은 노동 착취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가가 투여한 노동의 정당한 등가물로 오인된다.

 

자본의 소외된 성격과 노동에 대한 대립적 속성이 현실적 착취 과정 외부의 이자 낳는 자본으로 고착됨에 따라, 실제 착취 과정은 단순한 노동 과정으로 변모한다. 여기에서 기능 자본가는 일반 노동자와 종류만 다른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로 인식되며, 착취하는 노동과 착취되는 노동은 노동이라는 동일한 층위에서 질적으로 등치된다.

 

결국 자본의 사회적 형태적 속성은 이자에 위임되어 중립적인 현상으로 고착되는 한편, 자본의 경제적 기능은 기업가 이득으로 수렴되면서 그 특수한 자본주의적 성격이 완전히 소거된다.

 

자본가의 의식 속에서는 잉여 가치의 분할을 결정하는 보상 근거들 (2편 제123)이 왜곡되어, 이윤 발생의 본질적 원인이자 주관적 정당화의 근거로 전치된다. 이는 평균 이윤의 균등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부합한다.

 

기업가 이득이 감독 노동의 임금이라는 관념은 기업가 이득과 이자 사이의 대립 구도에서 파생되나, 이는 실증적인 현상 속에서 더욱 공고해진다. , 이윤의 일부가 실제 임금의 형태로 분리되거나, 반대로, 임금의 일부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수적인 이윤 구성 요소로 간주되는 사정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양태는 애덤 스미스 (국부론1편 제6)가 이미 파악한 바와 같이, 분업이 고도로 발달한 부문에서 경영자에게 지급되는 관리 임금을 매개로 순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서 경영자의 임금은 이윤 전체나 기업가 이득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며, 이들 범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항으로 나타난다. (CW 32: 495-496)

 

감독 및 관리 (지휘) 노동은 직접적 생산 과정이 고립된 개인의 노동이 아닌 결합된 사회적 과정의 형태를 취하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며, 이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다수의 개인이 협력하는 모든 노동에서 과정의 통일성과 상호 관련성을 유지하는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는 관현악단의 지휘자와 같이 부분적 노동이 아닌 작업장 전체의 활동을 관장하는 지휘 주체에 위임되며, 어떠한 결합된 생산 방식에서도 수행되어야만 하는 생산적 노동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감독 노동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와 생산 수단 소유자 사이의 대립에 기초하는 모든 생산 양식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이 대립이 심화될수록 감독 기능의 비중 또한 확대되며, 이는 노예제에서 극단에 이르고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도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자본주의하에서의 생산 과정은 동시에 자본가에 따른 노동력의 소비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전제 국가의 통치 행위가 공동체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공동 사업의 수행과 정부와 인민 간의 대립에서 기인하는 특수한 억압 기능이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포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노예 제도 시기의 고대 저술가들은 감독 노동의 두 측면, 곧 기술적 편성과 사회적 억압을 이론적으로 결합하여 파악하였으며,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절대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근대 경제학자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특히 근대적 노예 제도의 옹호자들은 감독 노동의 필요성을 미국 남부 노예 제도의 정당화 근거로 활용하였는데, 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감독 노동을 근거로 임금 노동 제도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변호하는 논리 구조와 일치한다.

 

카토 (고대 로마의 정치가) 시대 농장 관리인:

 

카토 시대 농장 조직의 정점에는 출납과 매매를 관장하는 노예 신분의 농장 관리인이 존재했다. 그는 주인의 지시를 수행함을 물론, 주인 부재 시에는 여타 노예들에 대한 명령권과 처벌권을 행사했다. 관리인은 일반 노예보다 폭넓은 자유를 누렸으며, 마고의 저술은 관리인에게 혼인과 가정을 허용하고 사유 화폐 소유를 권고했다. 카토 역시 관리인과 여성 관리인의 결합을 장려했다. 오직 관리인만이 성실한 품행을 전제로 해방의 전망을 가졌던 반면, 다른 노예들은 집단적 공동 세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관리인을 포함한 모든 노예는 주인의 비용으로 정기적으로 고정된 양의 생필품을 지급받아 생활했다. 배급량은 노동 강도를 기준으로 책정되었기에, 일반 노예보다 노동 강도가 적은 관리인은 오히려 더 적은 양의 배급을 받기도 했다.’ (몸젠, 1856, : 809-810)

 

아리스토텔레스:

 

주인 (자본가)은 단순히 노예를 획득하는 능력 (노동력 구매력을 갖춘 자본 소유)이 아니라 노예를 실제로 사용하는 행위 (생산 과정에서 임금 노동자를 운용하는 것)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실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은 결코 고귀하거나 위대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노예가 수행해야 할 과업이 무엇이든 주인은 그저 명령하는 법만 익히면 족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직접 감독 업무에 투여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면 관리인이 이 소임을 대행하며, 주인은 그 여가를 국가 정치나 철학적 사색에 할애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 권 제7)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와 경제를 막론하고 지배란 지배자에게 군림하는 기능을 부과하며,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지배자는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방안을 체득해야 함을 직시하고 있다. 그는 감독 노동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며, 주인이 일정 수준의 부를 축적하여 경제적 여유를 확보하는 즉시 감독이라는 수고스러운 영예를 관리인에게 위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관리 및 감독 노동이 사회적 결합 노동 일반의 필요가 아닌, 생산 수단 소유자와 노동력 소유자 사이의 길항 관계에서 비롯되는 한, 직접적 생산자 (피지배자)에 대한 예속은 종종 그 관계 자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오용된다.

 

이 경우 타인의 미지불 노동을 착취하고 취득하는 행위는 자본 소유자가 마땅히 수취해야 할 임금으로 둔갑한다. 이러한 논리의 극치는 18591219일 뉴욕 집회에서 미국 노예 제도 옹호론자인 변호사 오코너가 행한 남부에 정의를이라는 구호 아래 행한 연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여러분, 흑인을 노예 상태로 운명 지운 것은 다름 아닌 자연입니다. 자연은 그에게 강인한 체력과 노동할 힘을 부여했으나, 정작 그 힘을 다스릴 지능과 일하려는 의지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청중의 박수) 흑인에게는 그 무엇도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노동할 의지를 거두어간 자연은 그 대신 그 의지를 강제할 주인을 예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흑인에게 적합한 풍토 속에서 그 자신은 물론 그를 다스리는 주인을 위해 스스로를 유용한 종으로 변모시킬 주인을 점지한 것입니다. 흑인을 자연이 정한 질서 속에 머물게 하는 것, 곧 자신을 관리할 주인을 대면하게 하는 것은 결코 불의가 아닙니다. 그에게 노동을 강제하고 그 과정에서 그를 관리하며 그 자신과 사회에 유용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주인이 투여한 노동과 재능에 대하여, 주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보상을 거두게 하는 것은 결코 흑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가 아님을 단언하는 바입니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18591220일자

 

오코너는 청중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흑인의 노예 상태를 자연적 질서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자연은 흑인에게 강인한 체력과 노동 능력을 부여했으나, 이를 관리할 지능과 노동할 의지는 결핍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 의지를 갖추지 못한 흑인에게는 그 의지를 강제할 주인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이는 흑인을 스스로와 사회에 유용한 존재로 만드는 자연적 섭리라고 강변하였다. 그는 흑인에게 관리자를 배정하는 것이 결코 불의가 아니며, 오히려 흑인에게 노동을 강제하여 그를 관리하는 주인의 노동과 재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지불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질서라고 선언하였다. , 노예의 노동에 기반한 주인의 이윤 획득을 관리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치환하여 정당화한 것이다.

 

임금 노동자 역시 노예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노동시키고 관리할 주인을 가져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러한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전제되면,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 외에도 자신을 지배·감독하는 노동에 대한 보상, 감독 임금을 창출하도록 강요받는 상황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수용된다. 이는 관리자의 노동과 재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감독 및 관리 노동이 자본의 대립적 성격인 노동 지배에서 기인하며, 계급 대립에 기초한 모든 생산 양식에 공통되는 한,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이 노동은 결합된 사회적 노동이 요구하는 기술적·생산적 기능들과 불가분하게 고착된다.

 

고대 그리스의 에피트로포스나 봉건제하 프랑스의 레지쇠르와 같은 관리인의 임금은, 사업 규모가 확대되어 관리직을 별도로 둘 수 있게 되는 즉시 이윤으로부터 분리되어 전문 노동에 대한 임금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비록 현대의 산업 자본가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한 주인처럼 곧바로 국가 사무나 철학에 전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닐지라도, 이윤의 분할 구조는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앤드루 유어가 이미 지적했듯이, ‘현대 산업 제도의 실질적인 동력은 자본 소유자인 산업 자본가가 아니라 실무를 담당하는 산업 경영자에게 있다. 사업의 상업적 측면에 관련된 제반 사항은 이미 제4편에서 규명된 바와 같이, 자본의 소유와 기능이 분리되는 필연적 과정을 뒷받침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감독 노동을 자본 소유로부터 완전히 분리하면서 자본가가 이 기능을 직접 수행할 필요가 없는 구조를 확립하였다.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반드시 악기의 소유자일 필요가 없으며, 단원들의 임금 지급 사무가 지휘자 본연의 기능에 속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협동조합 공장은 자본가가 생산의 기능자로 불필요해졌음을 실증하며, 이는 자본가가 대토지 소유자를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하는 논리와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자본가의 노동이 단순히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 기인하는 타인 노동의 착취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결합 노동과 협업을 편성하는 일반적 필요에서 발생하는 한, 그 노동은 본질적으로 자본이라는 규정과 무관하다. 이는 자본주의적 외피를 벗어던지는 즉시 명백해지며, 이러한 노동을 반드시 자본가의 기능이라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전한 형태들을 그 대립적 성격으로부터 분리할 줄 모르는 속류 경제학의 한계를 드러낼 뿐이다. (CW 32: 497-498, 504)

 

산업 자본가는 화폐 자본가에 비견될 때는 노동자로 간주될 수 있으나, 이는 타인 노동의 착취자로 수행하는 노동에 불과하다. 그가 이 노동의 대가로 요구하는 소위 임금은 실상 타인 노동을 취득한 양과 등치된다.

 

비록 그가 착취를 위해 수고를 투여하더라도, 그의 수취액은 착취의 강도에 직결될 뿐 관리인에게 위임할 수 있는 관리 노동의 크기에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공황 이후 이전의 공장주들이 채권자 등의 새로운 소유주 밑에서 낮은 임금을 받는 관리인으로 전락하여 자신의 옛 공장을 감독하는 영국의 사례들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관리 임금은 상업 및 산업 관리인 모두에게 기업가 이득과 완전히 분리된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자본주의적 주식회사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다른 생산 양식에서 이러한 분리가 우연적 현상에 머물렀다면, 여기서는 항상적인 체제적 성격을 띤다. 특히 협동조합 공장에서는 관리인이 노동자에게 고용되어 노동자에 대립하는 자본의 대리인이 아닌 만큼, 감독 노동이 지녔던 기존의 대립적 성격이 소멸한다.

 

신용 제도와 함께 발달한 주식회사는 관리 노동이라는 기능을 자기 자본이나 차입 자본과 같은 자본 소유로부터 철저히 분리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부르주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이전 봉건적 토지 소유의 부속물이었던 사법 및 행정 기능이 토지 소유로부터 독립된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결국 한편으로는 기능 자본가가 단순한 소유자인 화폐 자본가와 대립하고, 신용의 발달로 화폐 자본이 은행에 집중되어 직접적 소유자가 아닌 대출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 소유와 무관한 단순 관리인이 기능 자본가의 모든 실질적 업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생산 과정에는 오직 기능자만이 남게 된다. 이로부터 자본가는 생산 과정에서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는 불필요한 인물로 소거된다.

 

영국 협동조합 공장들의 재무제표에 따르면, 이들 공장은 개인 기업보다 높은 이자를 지불하고도 관리인의 임금을 제외한 이윤이 평균 이윤을 상회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높은 이윤의 핵심 동력은 불변 자본의 효율적 운용에 따른 비용 절감에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평균 이윤 (= 이자 + 기업가 이득)이 실질적으로 관리 임금과는 무관한 독립적 크기로 산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 이윤 총액이 평균 이윤을 상회함에 따라 기업가 이득 또한 여타 부문보다 높게 형성되었다.

 

이와 동일한 현상은 주식회사 은행과 같은 자본주의적 기업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1863년 런던 앤드 웨스트민스터 은행은 연 30%의 배당률을 기록했으며, 유니언 은행 등은 15%의 배당을 실시했다. 이 경우 총이윤에서는 관리인의 봉급뿐만 아니라 예금주에게 지급되는 이자까지 공제된다. 이러한 높은 이윤율은 납입 자본 대비 예금 자산의 압도적인 비중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1863년 런던 앤드 웨스트민스터 은행의 납입 자본은 1,000,000파운드였으나 예금액은 14,540,275파운드에 달했으며, 유니언 은행 역시 600,000파운드의 자본금으로 12,384,173파운드의 예금을 운용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기업가 이득과 감독 임금 사이의 전도는 본래 이윤 중 이자를 초과하는 부분 (기업가 이득)이 이자와 대립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발생하였다. 이러한 전도는 이윤을 잉여 가치, 곧 미지불 노동의 산물이 아닌 자본가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으로 합리화하려는 변호론적 의도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이윤을 이론적 주장과 부합하도록 실제 감독 임금 수준으로 축소하라는 요구를 제기하였으며, (CW 32: 497) 이는 자본의 이론적 합리화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전개는 두 가지 측면에서 가속화되었다.

 

첫째, 산업 및 상업 경영자 집단이 폭넓게 형성됨에 따라 감독 임금이 기타 임금과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시장 가격을 형성하게 되었다.

 

둘째, 교육과 훈련의 보편화로 특수 노동력의 생산비가 하락하면서 감독 임금 역시 일반 전문 노동의 임금처럼 하향 평준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자 측의 협동조합과 자본가 측의 주식회사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기업가 이득과 관리 임금을 등치시키려던 최후의 근거마저 소멸하였다. 이로부터 이윤은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본질, 곧 아무런 등가물도 지불되지 않은 채 실현된 미지불 노동이자 순수한 잉여 가치임이 실증되었다.

 

결과적으로 기능 자본가는 현실적인 노동 착취자이며, 그 착취의 결실은 자본의 차입 및 동원 방식에 따라 이자와 기업가 이득으로 분할될 뿐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물적 토대 위에서는 주식회사의 등장은 관리 임금을 매개로 한 새로운 형태의 기만을 수반한다. 실무를 담당하는 현실적인 관리자 상부에 포진한 수많은 이사진과 감사진에게 있어, 관리와 감독이라는 명분은 사실상 주주들의 자산을 잠식하여 사익을 취하기 위한 단순한 구실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실증적인 사례는 1845년 발간된 시티(런던의 금융 중심가)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은행가나 상인이 8-9개에 달하는 기업의 중역을 겸임하며 벌어들이는 수익은 막대한 수준이다. 일례로 커티스라는 인물이 파산했을 당시 파산 재판소에 제출된 대차 대조표에는 중역직 수임료로만 매년 800-900파운드의 수입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가 잉글랜드 은행과 동인도 회사의 중역을 지냈다는 이력만으로도, 개별 주식회사들은 그를 중역으로 영입하는 것을 대단한 자산적 가치로 간주한 결과였다.’ (81, 82)

 

이런 기업의 중역들이 주간 회의에 참석하는 대가로 받는 보수는 최소 1기니 (21실링)에 달했다. 파산 재판소의 심리 기록에 따르면, 이른바 감독 임금이라 불리는 보상의 크기는 명목상의 중역들이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실질적 감독 업무의 양과 철저히 반비례하는 양상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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