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유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무릇 이렇다"라고 말하는 반면, 팡탱의 그림은 "화가의 생활이란 실은 이렇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모네는 세잔을 "그림의 플로베르"라고 불렀다.

플로베르는 문학을 하는 친구가 결혼을 하면 그것을 플로베르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이 공유하는 예술에 대한 배신으로 보았다.

보나르는 야외 생활을 그릴 때조차 실내 생활의 화가다.

보나르는 마르트의 초상을 그렸다기보다는, 마르트가 거기 있다는 사실과 그 분위기를 그렸다. 가장자리에 그녀의 일부만 등장하는 그림이 많은데, 이는 화가가 의식 또는 무의식에서 그녀를 무시하려 했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정반대, 그녀의 내재성에 대한 증거다. 그뿐 아니라, 팔꿈치나 뒤통수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가정생활의 풍요 속에 직관으로 엿보이는 무상함을 그렇게 강렬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면 물론 대답은 양쪽 다일 수 있다. 축제가 강렬할수록 그 여운은 그만큼 더 슬프기 마련이니까.

보자마자 바로 내 톱 10 리스트에 등재되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림이 있다. (...그 리스트에 몇 개가 포함되는지는 아직 세어보지 않았다. 아마 100개도 넘지 않았을까.)

화가가 "형태와 색에 매혹"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관객을 불안하게 하고 혼란에 빠뜨리고 당황하게 만드는 형상들. 마그리트가 데 키리코에 관해 썼듯이 "관객에게 자신의 고립을 인지하게 하고 세상의 침묵을 듣게 하는" 그림들.

팝아트를 할 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실수는 바로 거창한 의미를 적재하는 것이니까.

미학의 제1규범은 흥미라고, 위대한 소설가 존 치버는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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