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귀농이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가난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세련된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발적 가난'이라고도 한다. 가난을 정치적이나 도덕적 실천 차원에서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난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그러나 가난은 '무소유'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가난'이라는 언어마저 가난한 이들은 빼앗기고 있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이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열심히 '노오력'한다고 해도 빈곤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을 때 노동 의욕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벗어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점차 사라지고, 빈곤은 그렇게'순환'한다. p39

 

지금도 여전히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하는 운명에 처해진 '가난한 아이들'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를 모른 척하는 사회의 방관 속에서, 그 아이들은 가해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관심은 내팽개치고 '감시와 처벌'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꼼수만 부린다. 느슨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는 있으나 처벌강화가 곧 사건의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적 안전장치도 부모의 보호도 없는 빈곤 계층의 아이들이 무방비로 놓여 있는 허술한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 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가해자 응징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한 아이들이 '실종'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튼튼하고 촘촘한 사회적 제도다. p49

 

여성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출산을 하거나 남성의 성욕을 위한 '거대한 자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면 여성이라는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물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산을 했으면 여성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셈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땅히 공격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많은 담론들이 이렇게 여성의 몸에 갇혀 있다. 반면 그들의 생각이나 표현은 아버지, 남편, 애인, 오빠라는 남성의 영향 아래에 둔다. 여성을 비판하는 방식에서'성별'을 떠나 그가 맡은 역할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p63

 

 

24시간 영업은 고객의 입장에서는 편하지만 그 때문에 누군가는 한밤중에 일해야 한다. 주말, 밤, 점심시간, 여름휴가 등을 챙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어느 계층에 속해 있느냐와 직결된다. 노동 빈곤 계층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약자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꽉 찬 노동의 시간, 휴식 없는 고된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의 일상을 상징한다. 이들은 시간을 빼앗기고 빼앗기다 극단적으로는 '삶'을 통채로 탈취당한다. 자살이라고 명명되는 타살이 그것이다. 살아갈 시간이 부족하다. p91

 

설치 반대를 위한 오체투지와 결사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삭발 투쟁이 둘 다 벌어졌다. 자연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사안에서 늘 반복되는 일이 있다. 한쪽에서는 지역 경제를 살리자며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의 마음을 드러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태 파괴를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 문제가 과연 경제 발전과 환경보호의 충돌일까. 경제와 환경의 대립이라는 틀은 눈속임에 가깝다. 경제 효과의 실체는 알 길이 없다. 경제를 살린다'는 언설은 많은 사안들을 아주 단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메르스로 인한 경제 손실'로 불안감을 조성 하고 '임시 공휴일로 인한 경제 효과'로 기대를 부풀린다. 급기야 재벌 사면도 국민경제를 살인다고 한다. 재벌을 위한 특혜가 국민경제 살리기로 둔갑하듯이, 지역의 케이블카 설치는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추진된다. 케이블카 설치는 실제로 '국민'이나'지역'보다는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주는 사업이다 .수년간 진행이 안 되던 사업이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추진위원회 방문 이후 가속도가 붙었다. (주)설악케이블카는 박정희의 사위인 한병기에서 그의 아들 한태현과 한태준에게로 이어지는 사업체다. p101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 않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어디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와 목적어다. '누가'표현하는가. '무엇을'표현하는가, 특히 표현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자의 위치이며, 표현의 주제가 표현의 맥락을 완성한다. '누가'라는 주어를 괄호 속에 감춘 채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종종 오만한 힘의 과시가 되기 십상이다. 탈북자 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여졌지만 트위터로 '우리민족끼기'를 리트윗한 박정근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 박정근은 북한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풍자와 조롱'의 의미로 리트윗했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정작 자기 검열이 필요한 이들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행위, 가령 약자 조롱과 혐오)을 하고 있으며, 표현을 제한받는 이들은 과하게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검열하는 자와 검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와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나눠진 이 규범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이성애의 표현을 동성애자가 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엇이 검열당하는가'보다 '누가 검열하는가'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얻는 표현의 자유는 특정 표현의 독주가 될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p109

 

여성의 몸이 '미'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데 반해 벗은 남자의 몸은 금기시된다.여성이 '이미지화' 된다면 남성은 '언어화' 되기 때문에, 남성은 의미를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지 미적 대상이나 성적대상의 주제가 되지 않는 편이다. 주체/능동/남성적-객체/수동/여성적이라는 문법 속에서 '말 없는 여성의 이미지'는 계속 육체를 중심으로 의미를 가지며, 남성의 시선에 의해 해석되고 관찰되는 것을 넘어 폭력적인 시선의 침범을 받고 있다. p157

 

'페미니즘은 노동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공격은, 늘 노동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을 지속적으로 지우는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의도적 무시가 일어나고, 그 무시가 굳어져서 실제로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무지하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에 대한 의제를 남성의 것으로 만들며, 여성을 남성의 경제력에 의지해서 사는 비노동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비노동 인간이 남성의 돈으로 즐긴다는 공식은 점점'요즘은 남자가 불쌍한 여자들 시대'라는 망상을 낳는다. 시장에서는 부추기고 일상에서는 혐오하는 여성의 소비는, 그 실체와 무관하게 화려하고 거대한 포장지로 싸여 있다. p168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공감 능력은 감수성의 영역만이 아니라 치밀한 이성과 부단한 노동으로 얻을 수 있다. '애처가'나 '공처가'라는 말의 존재가 이미 남성의 감정 노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려 준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애처가'라고 분류될 정도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애기다. 또한 남성은 '현부'이기를 강요받지 않고 '가장'으로 산다.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감정 노동을 못하는 동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부라는 것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 여자들은 이벤트를 좋아한다? 이벤트를 좋아한다기 보다 옆구리 찔러서라도 감정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감정 표현은 여성에 비해 협소하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감정 노동을 강요받는다면, 남성의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최급되는 등 남성은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남성답게 여기기때문이다. 감정은 통하고 흘러야 한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p188-9

 

술맛과 커피맛을 돋게하는 여자는 필요로 하지만 묘하게도 술자리 바깥에서 그들은 도덕의 심판을 받는다. 다방 여자'나 '술집 여자'는 비하와 멸시의 대상이다. 또 술을 남자처럼 마시는 여자도 기존의 도덕에 어긋난다. 술에 취해 몰래카메라 퐐영을 당하거나 물리적 성폭력을 겪었을 때 피해 여성을 향한 비난은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낸다. 술 먹고 제 몸을 못가누는 여자에는 자기 몸 관리 못한다고 탓하지만, 술 먹고 남의 몸을 침범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술 탓'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그래서 많은 가해자들이 여성을 성폭행해도, 살인을 해도, '술김에'라는 변병을 하고는 한다. 실제로 친절한 판사들은 '술 탓'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고 있다. 술, 도박,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빠지지'말아야 하는 대표적인 위험물이기에 남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내탓이 아니라 술과 여자 탓이기 때문에 '소라넷'이라는 사이트에서 술 취한 여성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강간 모의를 벌이기도 한다. 술취한 여성은 일종의 '공공재'다.p226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다 좋다. 다만 그 이전에 필요한 질문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생명체인다. 그것이다. 바뀌지 않는 '나'들이 바꾸려는 대상과 세상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을 품평하고 세상을 논하는 자들이 주변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들은 제 주변의 약자를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이끈다. (...)구타 그 자체가 아니라'구타유발자들'을 교정시키려는 습관이 있다. 여성은 '악의 유발자'이며 동시에 '악의 배출구'다. '맞아야 할 이유'혹은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p240

 

여성이 조심하도록 강조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남성의 폭력을 불가피한 본능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진짜 폭력은 바로이 관념에 있다.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기럴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러진다. 남성의 폭력성을 통제 불능의 본능처럼 여기기에 상대적으로 그들의 행위는 법 앞에서도 고의성이 적은 폭력으로 인정받는다. 남성의 폭력은 늘 '우발적'으로 규정된다. '위威'는  창으로 여자를 위협하는 것으로 '위엄'을 뜻한다. '남자다움'의 밑바탕에는 약자를 향한 힘의 과시가 깔려 있다.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 치마를 덜렁 틀쳐 올리며 낄낄거리는 행동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건 일종의 '놀이'다. 놀이지만 여자아이는 운다. 추행과 놀이의 개념은 이렇게 혼선을 빚는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가해'를 했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사소한 농담, 장난, 친근감 표시일 뿐인다. 피해자가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으려면 누구나 명명백백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죽기 직전까지 되거나 죽어야만 한다. 목숨을 걸고 저항의 흔적을 남겨야 폭행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해괴한 상황이다. p243

 

 

성매매가 필요악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분석보다는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배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성욕을 '받아 주는'여성이 필요하다는 가부장적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울러 성매매에'유연한'사회에서도 남성 판매자와 동성애 성매매에 대해서는 이중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성 판매자가 아닌,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판매자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 판매자는 성매매의 비주류다, 이들은 더욱 음지 속에 있다. 성매매가 함법화된 국가에서도 자연스럽게 성 판매자는 여성에 국한된다, 성 판매자가 특정 성별에 집중되어 있듯, 성 구매자 역시 특정 성별과 성적 지향성에 편중되어 있다면 이는 불가피한 성욕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성매매라는 제도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p257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의 '배우자 동의'조항에도 모순이 있다. 이법에 따르면 산모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는 물론, 강간이나 인척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도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낙태가 가능하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의 배우자(남성)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했을 때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느 주체는 되지만, 임신이나 출산. 양육등의 문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p261

 

임신은 오직 여성의 몫이고 불법 수술을 맡은 남자는 이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성관계(성폭행) 요구도 서슴지 않는다. 생명 존중? 사람이 '살아가는'세상이 사람을 존중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낙태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출산률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p263

 

그렇듯 성희롱은 대체로 권력관계에서 벌어지기에 여성과 성소수자의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약자를 더욱 약자로 만든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성희롱은 개인간의 분쟁이라기보다'차별이 가능한 사회'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희롱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의 결핍, 즉 차별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차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취향의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하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포스터의 글귀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다."p278-9

 

사랑을 바라보는 인간 사회의 기준은 아주 편파적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범주도 한정적이며, 욕망이라는 상당히 협소한 개념에 갇혀 잇다. 욕망은 이성애 어른의 전유뮬이다.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성적욕망이란, 법적 기혼자만이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권리다.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욕망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국립국어원에서 '사랑'의 의미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했듯이, '강제적 이성애'속에서 사랑,욕망, 성관게 등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대부분 자역적으로 발생하는 성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결과이다. 이 '되는'과정은 법과 제도, 관습 등에 대한 순응을 필요로 하며, 그 순응하는 '나'에게 우울이란 질병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니 성소수자 청소년 집단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을 이 강제적 이성애 사회에서 지극히 논리적인 현상이다. p287

 

성욕이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본 욕구라는 관념이 다른 많은 담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성적 욕망과 자극이 모든 인간의 본능이고 필수처럼 여겨지는 관념 속에서 무성애의 삶은 뭔가 문제가 있는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때로 무성애자들은 '정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소수이며, 보편적으로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기는 하지만 소수라고 해서 비정상으로 구정하면 곤란하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리프 브레노는 "만약 성생활이 없는 삶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라고 한다. 그렇다 문제 없다. p307

 

노동, 여성, 성소수자등 삶의 변방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짧은 글들이 묶여져 있다.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서 양성평등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강제적으로 사회 제도가 바뀌어야 그 제도에 맞추어서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게 될것 이라는 글을 보았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수세기동안 맞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해도 참고, 상냥하게 말하고 그리고 또 참고 상냥하게 말해왔다.(저한테 왜이러세요.......라고) 이제 그러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송곳처럼 찌르고 일어나니 너희들이 그러는 건 양성 평등도 아니고 페미니즘도 아니라고 난리난리다. 특히나 글 좀 읽었다는 사람들, 자칭 진보적이며 꽤나 가정적입네 하는 치들이 오히려 더 그런 말과 행동으로 맨스플랜 하려고 든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자기쪾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느끼는게 쉽지 않을 것이란것 안다. 그런것을 느껴야할 불편함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여자들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느니, 남자들이 요새는 더 불쌍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무뇌아 처럼 할수 있는거겠지. 나 역시도 내가 숨쉬듯 누리는 많은 권리들에 대해서 일일이 고맙거나 대단하다고 생각치 않았으니까.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 페미니즘은 이런것이다. '이 세상이 많이 기울어져 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을수도 있구나.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구나' 라고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만드는것이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것이고 메갈이나 워마드는 페미나치지 페미니즘이 아니다. 라는 말따위는 그만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페미니즘 행동하면 된다. 단톡방에서 여자사람동료 성희롱 하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몰카 찍지 말고 , 소라넷따위 하지 말고, 여자니까 조심해야하고 남자니까 그래도 괜찮고 하는 습관적인 말과 행동들 하지 말고, 가사노동 도와주는게 아니라 각각 분담해서 하는게 당연한거니까 나부터 하고. 3차로 여자 있는 좋은데 가자고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회식때 꼭 젊은 여직원이랑 부르스 추려고 하거나 추라고 강요하는거 그만 두고, 커피랑 술은 여자가 만들고 따라야 맛있다는 개소리도 그만하고,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양성평등을 위해 행동하면되는 것 뿐.

요새 여자들 무섭다고 울지 말고. 행동하면 된다. 당신이 아는 그 페미니즘. 그 양성평등.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하는것.

 

 

*메갈이나 워마드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이라 할순 없다. 그들도 페미니즘의 다양한 층위속에 포함된 부분이란것.

실제로 메갈이나 워마드는 법을 어긴적도 없고, 남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자가 낙태사진도 정말 놀랍겠지만 여성들의 월경혈일뿐이고 실제로 남성에게 부동액 먹이고 강간한 사실도 없고(여성 강간용 약물은 시중에 절찬리에 판매중이며 어마무시한 사용후기가 있다), 남아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살해한 적도 없다(현재도 경제 형편이 어려우니 하나만 낳으려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한다). 부동액, 번식탈락, 좆린이. 자가낙태 등은 그동안 남성들이 여성과 어린이에게 수세기 동안 해왔던 일들에 대한 반짝이는 미러링일뿐이다.*

 

 

 

 

궁금증. 남자 화장실에도 이런 비상벨과 문구가 있나?

 

벨누르면 이 언니들이 와주면 좋겠다. 

WHO YOU CONNA CALL?  GHOSTBU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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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0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나중에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 다시 나오면 내가 사줄게요.

저 책도 읽어야지.

2016-09-0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9-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양성평등이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근래에는 그런 생각을 버렸어요.
남성들 스스로가 양성평등의 길로 오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결국에 제도의 문제로 풀어야겠죠.
법으로 해결해야죠.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차별하고, 산후휴가 쓴다고 눈치주고, 산휴휴가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책상 치울 수 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것 모두 불법으로 만들어야죠.
우리 할 일 많네요. ㅎㅎㅎ

아무개 2016-09-08 11:06   좋아요 0 | URL
그 비싼 대학등록금도 똑같이 받으면서 어째서 정원의 10%만 여성을 채용한다고 하고
임금격차는 40% 가까이 되는걸까요?
그렇게 어렵게 취직하고 애낳는다고 하면 책상을 빼버리죠, 애 안낳으면 안낳는다고 또 뭐라하고.

어떻게든 강제로 사회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만 생각하는 권리들이
서로 나누어도 한쪽이 지거나 빼앗기는게 아닌 기본권이라는것을
제도로 만들어서 느끼게 만드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기엔 소위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이 하는 행태나 진보주의자 라는 남성들의 빻은 소리 들으면
어느 세월에 될까 싶기도 합니다...

 

후세에 유가는 정통이 되었고, 그중에서도 공자와 맹자는 정통 중의 정통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들 너무나 자명한 사실 하나를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공자, 맹자와 관련있는 경전이 쓰였던 시기에는 그들의 생각이나 말이 결코 정통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공자와 맹자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당시의 흐름에 대항하였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진리는 단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은 강제로라도 남에에게 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만한 권력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맹자도 살아 있을 때 이런 권력을 가진 적이 없지요.

"내가 어찌 논변을 좋아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하는것일 뿐이다"라는 말은 결코 아무렇게나 한 말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논변하지 않으면, 논변에 기대어 명성을 쌓지 않으면, 손에 아무런 구체적인 권력을 쥐지 못한 맹자에게"선생님께서 천 리를 마다하지 않고 오시니"라고 겸손하게 인사하는 양 혜왕을 만날 기회 따위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p84-85

 

 

 

 

 

  책을 점점 더 제멋대로 읽고 있다.

이 구절을 읽으며 트위터에 '빛의 한규동' 님을 떠올렸다.

물론 그분이 어떤 명예나 권력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이 말하는 것이 모두 진리도 아니고,

페미니즘이 정통학문이 될리도 만무하지만

그 수많은 헛소리들에 대해 말하는 내용과 방법 모두

압도적으로 우월한 그분을 떠올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애인덕에 트위터를 하니, 전혀 몰랐던 신세계를 영접중이다.

리우 올림픽중계나 보도 중에 성차별적 발언을 한꺼번에 모아보자 라고 했던 트윗덕에 기사까지 나는것을 보면 찻잔속 태풍만도 아닌것 같다는 애인의 말에 격하게 동감하게된다.

 

 

 

 

 

 

맹자는 "인성의 선함을 논"하며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믿었는데, 이는 그의 이론상 논리적으로 필요합니다. 선정을 펼쳐 선량한 사회를 만든다면 무엇에 근거해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선'에 대해 가진 판단과 그'선'에 대한 바람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에 똑같이 아름답다는 감정을 느끼고 똑같이 아름다운 기대를 가지는것, 이것이 '인성의 선함'에 대한 증거입니다. 선을 누리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람은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공통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공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개개인의 마음속에 깃들 선에 대한 인정과 바람과 기대를 실현하고 , 그렇게 함으로써 호응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지 압니다. p144

 

우선...나는 인간의 본성자체가 선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기준에서는 악이 본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해맑게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거나 작은 동물이나 곤충에게 고통을 주는 모습을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교육되지 않은 인간은 자신만을 인지한다. 자신만이 세상의 모든것일뿐이다. 수많은 법률들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선해서 모두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소한'이것은 하지 말아라 라고 하한선을 만든것이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법을 어긴다는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최소한 하지 말아라 하는것들 중에는 강간하지 말라 같은 것도 있다. 그런데 그런 최소한도 지키지 않고 그런것을 자랑스러워 하고 타인의 고통을 장난거리로 삼는 소라넷이 또다시 오픈준비를 하고 있다. 무수한 격려속에서....

모든 인간이 같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나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강간당하는 영상을 보고 싶지 않다. 아름답지 않다. 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이다. 소라넷충들도 인간이다. 나의 선과 그들의 선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진정 인간이 한가지 같은 모습의 선만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면 나든, 소라넷충이든 둘중에 하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다. 물론 매우 기분 나쁘게도 둘다 인간이기에 인간이 모두 같은 모습의 선만을 추구한다라는 명제가 틀린것이 된다.

 

 

인간은 선하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스멀스멀 나오는 소수자와 약자 혐오. 그것이 혐오인지도 모르는, 자신은 그런적이 없다는 사람들. 그렇다면 그 수많은 혐오의 경험담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진것인가.

나역시 살면서 수많은 혐오를 겪었다. 하지만 나도 분명히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나보다 약한 자들과 나보다 더 소수자의 위치의 있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혐오 발언과 행동을 해왔다는 것을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세상을 바꿀순 없지만, 나 하나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끼게 해준 것은 아직까지는 페미니즘뿐이다.

 

 

 

 

 

책 내용도 책 크기도 얇고 가볍습니다만, 실생활의 여성혐오에 지쳐버린 분들께

실천편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입.트.페> 로 시작 하셨다면 다음은 바로 이책입니다.

 

 

2016년 7월30일자 한겨레신문 메갈리아 논쟁-여성학자 정희진의 시각

2016년 8월 5일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위의 두 기고문도 읽어 봅시다.

 

 

 

 

 

 

 

 

 

 

 

 

여성 살해 하지마, 여성 폭행 하지마, 여성 강간하지마 라고 이야기 하는 방식에 미러링도 포함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더럽게 추하다면 그만 좀 광광 울고 그 거울이 무엇을 비치고 있는지 부터 좀 보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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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1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아무개님.
저는 제가 정의롭고 선한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알았어요. 제가 무수히 많이, 여러차례 혐오 발언을 해왔었다는 것을요. 제 잘못을 깨닫게 해준 게 바로 페미니즘 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불공평한 사회와 시스템 그리고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자신의 잘못 또한 인지하게 되니까요.

그나저나 소라넷이 재오픈 준비중이라고요? 미친..

아무개 2016-08-12 08:49   좋아요 0 | URL
내안의 여성혐오에 대해서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도록 부끄러웠어요.
다른것들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를 먼저 돌아 보게 해준 페미니즘에 감사하죠.

네 네
어떤 욕을 해도 모자랄 새끼들이 또 준비중이라고 공지를 띄웠는데
응원 댓글이 줄줄.....................................ㅜ.ㅜ.

단발머리 2016-08-10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세상에 대해 알아가면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저는 자기 성찰이라고 생각해요.

위의 문장에 아무개님이... 나역시 혐오를 겪었지만 그만큼 아니 그 이상 나보다 약한 자들과 나보다 더 소수자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혐오 발언과 행동을 해왔다... 고 쓰고 있잖아요. 바로 이거죠.

페미니즘을 공부하다 보면, 불평등한 여성의 위치를 자각할 때 이런 자기 성찰과 깨달음을 통해 자신도 어느 면에서는 강자였고 다수였다는 걸, 그리고 다수로서의 지위를 만끽했다는 걸 깨닫는거죠.
돌아보고 다시 생각하고...
페미니즘이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외양적으로 가장 명확한 소수자니까요. 그런데....

그런 자각과 자기 성찰이 없는 글을 자주 보게 되네요. 피곤해서 요즘은 제목만 봐요.
넘 피곤해ㅠㅠ

나는 정희진님 글 다 읽는데 저번주에 못 읽었네요. 찾아봐야겠어요~~^^

아무개 2016-08-12 08:53   좋아요 0 | URL
여성 스스로도 여혐을 하고 게다가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걸 보면
남성들, 그러니까 여혐하고 있다는것을 반성해야할 필요조차 못느끼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잘못하고 있다 라는걸 알리는게 정말 쉬운 일은 아닌듯 싶어요.
공부꽤나 했네 진보입네 하는 남자들은 더 심하구요.

자각과 성찰아 없는 글. 저도 얼마전에 그런 느낌이 드는 글을 읽었어요.
그저 시류에 맞게 이쯤에서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쓴 글 같아서 좀 뭐 그랬던 글도 있네요.

정희진 님이 녹색당원이라니까 바보같이 어깨가 으슥했더랬어요 ㅎㅎㅎ
 

 

 

 

이들은 페미니즘보다 휴머니즘 혹은 양성평등을 지향해야 한다며 오만하게 용어를 문제 삼는 위치에 서기 전에, '왜 자신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끼는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유효하지 않은 것 같고, 누구도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고, 자신의 설 자리가 마련되지 않은 것 같아서는 아닙니까? 여성이 바로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페미니즘은 여태껏 소회되었던 여성의 목소리에 설득력을 부여하려는 운동입니다.

페미니즘은 평등을 지향하며, 지향하는 바에 도달하기 위해 마치 평등이 이미 온 것처럼 남성과 여성을 한 번씩 언급하기보다 현재의 간극에 주목합니다. 평등에 도달한다면 남성들이 가진 현재의 불만도 사라질 겁니다. 더 이상 '여성을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아직도 요원해 보이므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한참이나 유효할 것입니다.그럼에도 여태껏 소외당했다고 해서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게 아니라 , 모두의 목소리를 포용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별에 관게없이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주목하여, 그 목소리를 지지하는 이라면 누구든 지지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남성중심주의에 기여하는 목소리마저 포용할 수야 없습니다. 남성중심주의에서 배제된 이를 포용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므로, 페미니즘이 차별주의자의 목소리를 수용한다면 자기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남성도 페미니즘의 편에 얼마든지 설 수 있습니다.그러나 남성이 끼어야만 진정한 페미니즘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성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반드시 남성이 중심이 아니어도 세상이 돌아갈 수 있음을 보이는게 바로 페미니즘입니다. p120-121

 

 

 

 

 

 

 

 

 

 

 

 

 

 

 

 

 

 

 

 

 

그러나 그와 별개로 차별은 분명 존재합니다. 제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고, 다른 여성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고, 모두가 거의 예외 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었으니까요. 그러나 피부로 겪은 경험이 무시당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순간은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일이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남성에 의해서 주로 생겨납니다. 그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작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은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밖에 없는 문제를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차별은 수치나 공신력이 있는 근거로 입증해야 하는것이 아닙니다. 물론 수치로도 명백히 입증되고 있으나, 당사자가 직접 느낀 고통이 먼저이며 그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쌓여 수치가 되고 기록이 되는 거니까요. 아까 말한 직관이라는 게, 바로 이 고통이 쌓여 얻게 된 결과물 입니다. p27

 

내 경험이다. 감히 너따위가 판단하려 들지마라.

 

남성이 모자라고 여성이 지헤로우니 품는 수밖에 없다는 식의 말도 다시 생각해봅시다. 여성이 어쩌다 지혜로워졌습니까? 가진 것 없는 인간이 맹수에게 죽기 싫어서 지능을 이용해서 살아 남았습니다. 여성도 있는 그대로 살수 있었다면 굳이 지혜롭지 않아도 괜찮았을 겁니다. 생존을 위해 지혜를 짜낸 쪽더러, 모자라도 충분히 살 수 있었던 팔자 좋은 본인들을 너그러이 품으라 종용하는 건 아무래도 얄밉습니다.

책으로나 영화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합니다. 그러니 기득권 이어서 몰랐다면, 더더욱, 몰랐던 입장을 그들이 조금 이해했다고 바로 감동하지 않아도 됩니다. 몰론 벽인줄 알았는데 귀가 있다니 얼마나 감동이겠냐만은, 귀가 있었는데 왜 이제 들었냐고 열 받아도 됩니다. 그러니 꺼니면 씁쓸해질 수밖에 없는 자기의 경험을 소중히 하자는 취지에서 정말 놀라운 순간을 위해 감동은 아껴둡시다.p32-33

 

 

여성이 공감능력이  남성들에 비해 높을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세력에게 공감과 지지를 표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 남겠는가, 그걸 제대로 못하면 죽임을 당해왔고 당하고 있지 않은가. 강남역 살인만해도 '여자가 나를 무시해서'죽인 것이다. . 공감하고 이해해 줘야 하는데 무시하니까 죽어도 마땅한 거다. 그러니 미안해 하지도 않는다.

 

 

체화된 지식은 아무도 당신에게서 앗아갈 수 없고, 금방 얻어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의 직관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비록 한 번도 원한 적은 없으나 감각으로 익혀왔기에 다른 종류의 불평등과도 쉽게 연결됩니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스페인어를 금방 익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당신이 알고자 하고, 차이만 유념하면 금세 응용할수 있습니다. 불평등을 놀할 때는 어떤 통계자료도 부당함이 안겨준 감각보다 더 정확할 수 없습니다. 감각이 모여 수치가 되었지, 수치가 모여 감각이 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별을 말하면서 정확한 근거를 운운하는 이유는 상대가 객관적이고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있는 직관이 그에게 부재한 탓입니다. 학습하고 모방해야 할 쪽은 우리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직관 없는 자들의 무지한 주장이 왜 이토록 강력하게 통용될까요? 간단하게도, 이 사회에서 그들의 힘이 센 탓입니다.p44-45

 

여성들에게 자기 방어를 위해서 무술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 우리에게는 있는 직관이 그들에게는 없는탓. 강남역 살인사건이후 여성들은 '내가 죽을수도 있었다'라고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남성들은 '너희 엄마나 여동생일수도 있었어"라고 이야기 해줘도 여성혐오범죄가 아니고 묻지마 범죄라고 우긴다. 웃긴다.

 

 

가부장제는 경제권을 독점하고, 여성과 달리 '군대에갈 자격이 되는'남성의 우월성을 토대로 작동합니다. 따라서 가부장제에 반기를 든 게 아니라면 남성은'김치녀'와 터치페이를 할 수 없습니다. 남성의 돈으로 사치를 하는 여성은 가부장제의 가공물이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에, 가부장제의 유지를 위해 남성이 전부 부담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군말 없이 혼자 벌어 책임져야 합니다. 남성만이 군대에 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부당함을 여성에게 토로하는 치졸한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성만 진정한 시민으로 인정받는 기제는 가부장제가 만들었으므로, 가부장제를 없애지 않는 한 남녀가 동등하게 군대에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우월한 남성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성 개인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 의무를 부과했고, 보상으로 권위와 특혜, 남성이 우월하다는 훈장을 주었습니다. (...) 더치페이를 하고 싶은 이에게 돈을 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주는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가부장제입니다. 가부장제가 좋으면 남자답게 군말 없이 압박감을 떨쳐내고 돈을 낼 것이며, 가부장제가 싫으면 이에 반기를 들면 됩니다. 가부장제가 싫은데 맞설 용기가 없거나 귀찮다면 그냥 살아도 됩니다. 대신 그로 인한 압박감과 울분을 애꿎은 여성들 혹은 페미니스트에게 터뜨려서는 안 되겠지요.

(...)

지켜달라 말한 적이 없는데 여성을 지키러 군대에 갔다 왔다고 주장하며 화를 내는 남성이 속출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남성들은 여성도 군대에 가야 한다고 국방부에 요구하거나 헌법 소원을 내지 않습니다. 이 문제로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는 여성이었습니다. 대신, 남성은 여성을 비방하며 자신의 힘듦을 토로하는 대표 무기로 언제까지고'군대'를 내세웁니다. 군대는 뻔뻔한 여성들이 지지 않으려 하는 힘든 짐인 동시에 여자 따위는 감히 질 수 없는 대단한 사명이라는 모순이 그들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중요하다는 걸, 남성들은 잘 아는 겁니다. p53-55

 

군대이야기는 이걸로 끝.

기득권은 유지하면서 지고 있는 의무만가지고 징징거리지 말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바꾸려고 노력해라.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이 뭔지 모르겠다고? 그건 날때부터 누리고 있었기때문에 뭐가 기득권 인지 조차도 모르는거다.

 

 

연습코너

<말은 해야 는다>

이럴땐 이렇게!

 

 

 

 

 

 

 

상대가 나의 차별에 대한 경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고 해서 굳이 대답할 필요는 없다. 알아 들을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착하게 설명하려고 진뺄필요도 없다. 대화에 응할 것인지 친절할지 말지는 내가 그리고 당신이 정한다. 그들이 아니라.

 

 

 

 

 

 

이 책은 이렇게나 포스 넘친다. 내가 낸데!!!!!!!!!!!!  하하하

 

 

 

 

 

물론 추천하는 책들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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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6-07-1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서는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검색되지 않네요.

책 정보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

아무개 2016-07-13 12:45   좋아요 0 | URL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http://naver.me/F2qVvrqS

독립출판서점들에서만
구매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락방 2016-07-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 얘기 속이 다 시원하네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남자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남자들이 군대가는 것에 대해 여자들은 특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여자들은 군대도 안가니까 손해를 봐도 돼, 라는 관점을 가진 사람이 많더라고요. 남자 군대 보낸 게 여잡니까.... 하아- 자기들이 비장애인 남자들 등급 매겨서 군대 보내놓고는, 그래놓고 군대 갔다왔다고 월급도 더 주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도 이거 주문해야겠어요.

2016-07-13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7-1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아무개님 페이퍼를 2번 읽었어요.
인용해주신 첫번째 문단에, 굵은 글씨가 특히 마음에 겹쳐 오네요.

남성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중요한 이야기들은 이렇게 단순한 것 같기도 하구요.
말을 둘러서, 둘러서, 에둘러서 할 필요가 없기도 해요.
남성들과 같이, 함께, 이 문제들을 보게 되면 좋겠지만...

남성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됩니다.

맞아요. ㅎㅎㅎ

아무개 2016-07-18 13:34   좋아요 0 | URL
1쇄는 매진되었고 2쇄가 8월쯤에 나오는듯 해요.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고 관련해서 공부를 좀 했다는 이유만으로
남자들의 성의 없거나 무례한 질문에 반드시 대답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할 필요가 없는거더라구요.
진심으로 궁금하고 알고 싶다면 본인이 스스로 공부해야하는건데요.....


2016-08-08 16: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09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부족은 무엇보다 죄파가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권력자들의 비리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걱정하는 좌파 정책이 필요하다. 지배 계급이 가난한 이들에 대해 전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지금이야말로 비판의 목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정책이, 계급 전쟁을 확실하게 끝낼 수 있는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p67

 

언론에 의해 지배 계급이 무산 계급보다 도덕적을 더 우월하고 낫다고 믿도록 사회화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협력하려 들지 않는다. 부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지배할 권리를 획득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탐욕과 착취를 비난하는 윤리적 가치도, 경제적 정의를 추구하는 정치적 신념도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린다. 미국 역사상 지금처럼 신념이나 인종을 불문하고 부자들의 요새에 드어갈 기회가 희박한 때도 없었다. 설령 들어간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배신하지 않고는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 p107-8

 

요즘 젊은이들은 인종 차별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하면서 정작 정치적 활동에 참여해 자신이나 사회를 변화시켜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고통과 적대적 태도에도 맞설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패배자만이 고통을 겪으며 행복한 삶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는 삶이라는 언론의 속삭임을 들으며 자랐다 .평화와 행복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통해, 자신의 욕구가 충족될 때 실현될 수 있다고 배우며 자랐다. 병적인 나르시시즘이 유행인 세상에서 어떻게 인종차별주의나 다양한 형태의 압제에 도전할 수 있는 집단적인 노력을 조직해 나갈 수 있겠는가? 환상 속에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속삭이는 세상에서 저항 의지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 p112-3

 

인종 차별 폐지는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백인 정치가들이 독립적이고 호전적이며 결단력이 있는 흑인이 현 상태에 미칠 수 있는 위협을 깨달았고.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전략적 차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종 차별 폐지는 호전적인 시민권 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의 결과인 흑인들의 급진화를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급진적이고 똑똑한 소수가 흑인대중을 선도해 반란과 문화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이미 특권을 부여받은 흑인들에게 기존의 사회 구조에 편입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p125-6

 

지금의 아이들은 사회 정의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급진적인 운동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이런 운동을 통해 현실에 눈을 뜨고 반란을 꿈꿀 수 있도록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체제의 현상 유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두려운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인종 차별이 사라지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흑인들 대다수가 가난한 것은 지배 계급이 조직적인 착취와 억압을 자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술, 의지력, 노하우가 부족하개 때문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주류 사회는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가르쳤고 아이들은 그런 사고방식에 젖어 들었다. 이들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가장 꼭대기 계급으로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고, 최고로 올라가는 내내 그들 곁에는 타락한 '능력 있는 소수'가 있다. p133

 

혁명적인 페미니즘 사고는 항상 여자들 사이의 계급적 편견 문제를 거론했다. 페미니즘이 태동할 때부터 페미니즘 운동의 내부에는 개량적인 해방 모델과 좀 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모델들 사이의 알력이 존재해 왔다. 전자는 기본적으로 기존의 계급 운동 내에거 여성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요구한 반면, 후자는 기존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서 낡은 패러다임을 몰아내고 상호 관계와 평등의 모델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흑인들이 더 많은 취업의 기회를 얻게 되자 계급적 편견을 철페하라느 호전적인 흑인해방 운동이 불필요하게 느껴진 것처럼, 여자들, 특히 교육 수준이 높으며 상류계급의 백인 여자들에게도 계급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남자들과 동등하게 주어지자 혁명적인 페미니즘이 밀려나고 개량적인 페메니즘이 주류로 떠올랐다. p137

 

처음부터 개량주의를 지지는 백인 특권 계급의 여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권력과 자유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신과 같은 계급의 남자들이 향유하는 것과 동일한 권력과 자유를 원했고, 가정에서의 가부장제에 저항함으로써 계급을 불문하고 남자들의 지배에 진절머리가 난 모든 여자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인종과 게급을 떠나 레즈비언들은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여자들의 급진적인 활동 중에서도 선봉에 섰다. 그렇게 한 데는 레즈비언들이 성적 취향 때문에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이성애 사회에서 이미 밖으로 내몰렸기 때문인 것도 있다. 계급에 상관없이 이들은 사회의 이방인이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학대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이성애자인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레즈비언들은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기대지 않았다. 그들은 남자와 같은 일은 하면서 같은 보수를 받기를 원했다. 상당히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페미니즘 사상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훨씬 일찍부터 고민하고 맞서온 경험을 지닌 레즈비언들의 경험의 소산이다. p139

 

 

많이 소비하고 조금만 감사하라고, 최대한 많이 움켜쥐고 조금만 내놓으라고(이게 바로 사기이다.)가르치는 자본주의의 소비주의가 머릿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쉽게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압제와 착취가 벌어지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계급이 곧 돈은 아니다. p209

안타깝게도 다국적 백인 우월주의와 자본주의에 물든 가부장제도가 야기한 심각한 불평등, 그로 인해 심화되는 빈부 격차 때문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계급을 돈 문제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p210

 

서구의 여자들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구 어딘가에서는 여자들이 노예처럼 일을 하고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자국의 자본주의 체제와 전 세계 자본의 관계를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인류의 반은 여자이다. 인류 전체 노동의 3분의2를 담당하고 전체 소득의 10분의 1을 받지만 소유 재산은 지구 전체의 100분의 1에 불과한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서 최고 극빈층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한다면 인종, 계급과 성이 서로 실타래처럼 얽힌 상황을 더 정확하게 직시할 수 있다.p214

 

내가 투쟁해야 할 지배 체제를 다국적 백인 우월주의 성향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도라고 부를 때는 그 무엇보다 계급 정치를 타파해야 한다는 뜻이다. p213

 

 

글은 쉽지만 가장 중요한 계급의 정의가 명쾌하게 정립되질 않는다.

돈이 계급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인거 같은데, 그러면 나머지는 어떤거지? 

 

 

 

 

 

 

 

 

 

 

 

 

 

 

 

 

 

 

 

 

 

이어서 읽을 책. 

 

 

 

 

 

 

 

 

 

 

 

 

 

 

어제가 동생이 떠난지 두달되는 날이었다. 예감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전화로 어머니는 온몸으로 슬픔을 터트렸다. 나에게.

일년에 몇번쯤 바쁜 회사에서 지금이 그 몇번이고 운동을 시작한지 이제 삼일째. 몸도 마음도 안밖으로 지쳐있던 어제.

나는 나의 불리한 상황을 나의 슬픔을 팔아 덮으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주 꽤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길 들으니 내가 아주 우습게 느껴진다. 한심하긴. 쯥.

 

 

 

 

 

 

안부를 걱정해 주시는 이웃분들께 일일이 답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았던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저도 제가 어떤지 잘 모르는 상태이지만

아마도 잘 지내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위로의 말씀들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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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9 0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BDSM(Bondage, Discipline/Dominance, Sadism/Submission, Macoshism 의 약자로, 결박, 피학, 가학적 성적 행위를 일컫는 말)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동의'라는 것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다. 동의는 모든 인간의 상호 관계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만 몸과 마음을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맡길 때는 이 단어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날 아프게 해주세요." 혹은 "나를 모욕해 주세요." 혹은 "나를 지배해 주세요." 그러면 그쪽에서 응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어떤 형태나 방식이건 "그만하라."고 말할 때는 그 고통이나 모욕이나 지배가 끝나야 하고 어떤 이의도 제기되어선 안 된다. 굉장히 강력하고 완벽한 순간이다. 언제든 내가 이전의 동의를 철회한다면 그 고통이 긑난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 안에서 통제권을 갖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p43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도  직업적인 동의로 성관계를 하는 것이다. 돈을 받고 하는 것이지만, 안돼, 싫어  하지마. 라고 주장 할수 있다. 선지불 후지불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어째서 여성이 더 야심이 넘치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표를 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고, 집 밖에서 일을 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싸워야 했고, 성희롱 없는 근무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대학이나 학과를 스스로 선택하기 위해 싸워 왔으며, 작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나를 증명하고 또 증명해 내야 했다. 여성들은 분명 이전보다 능력 발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전 국방부 장관이자 2016년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은 아직도 패션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있다. CNN방송국은 여성 유권자들은 투표할 때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는 기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있다. p130

 

더 큰 선, 더 큰 사회적 정의를 위해 과연 나는 어디까지 희생할수 있을지를 묻지 않을 때도 많다.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 우리는 롤 모델이 우리를 대신해 완벽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상황이 나아진 걸 알지만 갈길이 멀다는 것도 안다.(...)그렇다면 우리가 더 큰 선을 위해 나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까지 침해를 받고 어디까지 무력감을 느껴야 할까? 내게는 가장 궁금한 질문이다. p162

 

 

 

고통은 언어 바깥의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세계 안을 헤메고 서성이고 더듬더들거리며 적당한 단어를 찾아보려 한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이 문제를 대략 어떻게라도 이해하려 해본다. p255

 

아...그렇구나, 고통은 언어 밖에 존재하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더듬거리고 헤메고 서성이며 나의 고통을 표현하려 애를 써도 안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안되는 거였구나.  말로는 안되는거였어.

 

 

 

 

몇달만에 책을 읽었다. 리뷰쓸 기력은 없다. 페미니즘이 처음이거나, 근본주의 페미니즘(유머 감각 없고 제모도 안하고 남자라면 무조건 치를 떨면서 맨날 화만 내는 여자들의 말 이라고 오해받고 있는 페미니즘)에 질렸거나 제1세계 백인 여성들의 페미니즘에 물렸다면 읽어 볼만한 다른 시선이다.

 

나쁜페미니스트란 근본주의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의 페미니즘이 잘못한 일도 있으며 실수한 일들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더 많은 질문과 시도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을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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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문득 이런 계급순위가 떠올랐다. 물론 돈 겁나 많은 유색인게이장애 여성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이건희가 아닌다음에야 뭐.

나 혼자 정한 순위이기에 각자 어느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계급은 바뀔수도 있다.

어디보자 나는 몇번째 계급인가.... 아버지가 이건희나 빌 게이츠가 아닌 이상 위의 주어진 계급에서 벗어나긴 힘들다고 보여진다.  돈이 많으면 장애정도에 따라 어느정도는 계급변동이 가능할 것이고, 성별도 외과적 수술로 바꿀수는 있겠지만 인종은 절대로 바꿀수가 없다. 그래서 유색인동성애자였던여성인 저자 같은 사람들의 책이 좀더 많이 출판되고 읽혀지길 바란다.

 

인종은 선택할수 없다. 장애도 선택할수 없다. 성적취향이라 불리우지만 이것도 내 보기엔 선택할수 없는 문제다.

내가 선택할수 없는 이 조건들이 나의 계급이 되고 죽을때 까지 그 계급에 맞는 억압을 견디며 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장애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인종, 성별 장애등으로 인해서 억압당하고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언젠가는 이런 방식으로 떠날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줄 몰랐던  때에 동생이 떠났고 내게는 부양해야할 병들고 늙은 그리고 각자를 지독히도 증오하는 이혼한 부와 모가 있다. 나와 함께 아니 나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는 다섯고양이가 있고, 남겨진 빚이 있고, 불안한 직장이 있고 그리고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행복까지는 아니여도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너무 편하게 살면서 너무 바라는게 많은 건가......

 

 

가진건 빚과 의무감 뿐이라

내 미래에 당신이 있다고 말할수 없었다.

벌써 조금 많이 비참해진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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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6-06-2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는데 아무개님과 겹쳤네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지나친 배려는 때로는 배려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2016-06-28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