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귀농이나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가난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세련된 이들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자발적 가난'이라고도 한다. 가난을 정치적이나 도덕적 실천 차원에서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가난이 아니다. 삶의 태도다. 그러나 가난은 '무소유'를 선택하는 삶의 태도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가난'이라는 언어마저 가난한 이들은 빼앗기고 있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이다.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뜻이다. 열심히 '노오력'한다고 해도 빈곤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을 때 노동 의욕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벗어날 수 있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점차 사라지고, 빈곤은 그렇게'순환'한다. p39

 

지금도 여전히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하는 운명에 처해진 '가난한 아이들'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를 모른 척하는 사회의 방관 속에서, 그 아이들은 가해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관심은 내팽개치고 '감시와 처벌'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꼼수만 부린다. 느슨한 처벌을 강화할 필요는 있으나 처벌강화가 곧 사건의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적 안전장치도 부모의 보호도 없는 빈곤 계층의 아이들이 무방비로 놓여 있는 허술한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한 , 같은 문제는 반복될 것이다. 가해자 응징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난한 아이들이 '실종'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튼튼하고 촘촘한 사회적 제도다. p49

 

여성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출산을 하거나 남성의 성욕을 위한 '거대한 자궁'이라는 틀에서 바라보면 여성이라는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물학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출산을 했으면 여성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셈이고, 그렇지 못하면 마땅히 공격받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많은 담론들이 이렇게 여성의 몸에 갇혀 있다. 반면 그들의 생각이나 표현은 아버지, 남편, 애인, 오빠라는 남성의 영향 아래에 둔다. 여성을 비판하는 방식에서'성별'을 떠나 그가 맡은 역할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형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p63

 

 

24시간 영업은 고객의 입장에서는 편하지만 그 때문에 누군가는 한밤중에 일해야 한다. 주말, 밤, 점심시간, 여름휴가 등을 챙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결국 어느 계층에 속해 있느냐와 직결된다. 노동 빈곤 계층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없는 시간의 약자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하는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꽉 찬 노동의 시간, 휴식 없는 고된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의 일상을 상징한다. 이들은 시간을 빼앗기고 빼앗기다 극단적으로는 '삶'을 통채로 탈취당한다. 자살이라고 명명되는 타살이 그것이다. 살아갈 시간이 부족하다. p91

 

설치 반대를 위한 오체투지와 결사적으로 유치하기 위한 삭발 투쟁이 둘 다 벌어졌다. 자연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사안에서 늘 반복되는 일이 있다. 한쪽에서는 지역 경제를 살리자며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의 마음을 드러내고, 다른 한쪽에서는 생태 파괴를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한다. 이 문제가 과연 경제 발전과 환경보호의 충돌일까. 경제와 환경의 대립이라는 틀은 눈속임에 가깝다. 경제 효과의 실체는 알 길이 없다. 경제를 살린다'는 언설은 많은 사안들을 아주 단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메르스로 인한 경제 손실'로 불안감을 조성 하고 '임시 공휴일로 인한 경제 효과'로 기대를 부풀린다. 급기야 재벌 사면도 국민경제를 살인다고 한다. 재벌을 위한 특혜가 국민경제 살리기로 둔갑하듯이, 지역의 케이블카 설치는 지역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추진된다. 케이블카 설치는 실제로 '국민'이나'지역'보다는 특정 계층에게 특혜를 주는 사업이다 .수년간 진행이 안 되던 사업이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의 평창동계올림픽 추진위원회 방문 이후 가속도가 붙었다. (주)설악케이블카는 박정희의 사위인 한병기에서 그의 아들 한태현과 한태준에게로 이어지는 사업체다. p101

 

현실에서 표현할 수 있는 권리는 모두에게 있지 않다. 게다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어디부터 폭력이 되는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어와 목적어다. '누가'표현하는가. '무엇을'표현하는가, 특히 표현하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표현하는 자의 위치이며, 표현의 주제가 표현의 맥락을 완성한다. '누가'라는 주어를 괄호 속에 감춘 채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종종 오만한 힘의 과시가 되기 십상이다. 탈북자 단체의 대북 삐라 살포는 표현의 자유로 받아들여졌지만 트위터로 '우리민족끼기'를 리트윗한 박정근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 박정근은 북한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풍자와 조롱'의 의미로 리트윗했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정작 자기 검열이 필요한 이들은 과도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행위, 가령 약자 조롱과 혐오)을 하고 있으며, 표현을 제한받는 이들은 과하게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검열하는 자와 검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와 타인을 심판하는 자가 나눠진 이 규범은 전혀 정의롭지 않다. 이성애의 표현을 동성애자가 심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무엇이 검열당하는가'보다 '누가 검열하는가'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고 검열의 대상이 되지 않는 표현에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누군가의 침묵을 담보로 얻는 표현의 자유는 특정 표현의 독주가 될 뿐, 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p109

 

여성의 몸이 '미'의 대상으로 추앙받는 데 반해 벗은 남자의 몸은 금기시된다.여성이 '이미지화' 된다면 남성은 '언어화' 되기 때문에, 남성은 의미를 만들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지 미적 대상이나 성적대상의 주제가 되지 않는 편이다. 주체/능동/남성적-객체/수동/여성적이라는 문법 속에서 '말 없는 여성의 이미지'는 계속 육체를 중심으로 의미를 가지며, 남성의 시선에 의해 해석되고 관찰되는 것을 넘어 폭력적인 시선의 침범을 받고 있다. p157

 

'페미니즘은 노동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공격은, 늘 노동하고 있는 여성의 노동을 지속적으로 지우는 습관과 무관하지 않다. 의도적 무시가 일어나고, 그 무시가 굳어져서 실제로 사회는 여성의 노동에 무지하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에 대한 의제를 남성의 것으로 만들며, 여성을 남성의 경제력에 의지해서 사는 비노동 인간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비노동 인간이 남성의 돈으로 즐긴다는 공식은 점점'요즘은 남자가 불쌍한 여자들 시대'라는 망상을 낳는다. 시장에서는 부추기고 일상에서는 혐오하는 여성의 소비는, 그 실체와 무관하게 화려하고 거대한 포장지로 싸여 있다. p168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공감 능력은 감수성의 영역만이 아니라 치밀한 이성과 부단한 노동으로 얻을 수 있다. '애처가'나 '공처가'라는 말의 존재가 이미 남성의 감정 노동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려 준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애처가'라고 분류될 정도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애기다. 또한 남성은 '현부'이기를 강요받지 않고 '가장'으로 산다.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감정 노동을 못하는 동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들이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고 아부라는 것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 여자들은 이벤트를 좋아한다? 이벤트를 좋아한다기 보다 옆구리 찔러서라도 감정 노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들의 감정 표현은 여성에 비해 협소하다 .사회적으로 여성이 감정 노동을 강요받는다면, 남성의 눈물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최급되는 등 남성은 감정을 억제할 줄 알아야 남성답게 여기기때문이다. 감정은 통하고 흘러야 한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p188-9

 

술맛과 커피맛을 돋게하는 여자는 필요로 하지만 묘하게도 술자리 바깥에서 그들은 도덕의 심판을 받는다. 다방 여자'나 '술집 여자'는 비하와 멸시의 대상이다. 또 술을 남자처럼 마시는 여자도 기존의 도덕에 어긋난다. 술에 취해 몰래카메라 퐐영을 당하거나 물리적 성폭력을 겪었을 때 피해 여성을 향한 비난은 여전히 큰 목소리를 낸다. 술 먹고 제 몸을 못가누는 여자에는 자기 몸 관리 못한다고 탓하지만, 술 먹고 남의 몸을 침범하는 남자에게는 그저 '술 탓'이라며 관용을 베푼다. 그래서 많은 가해자들이 여성을 성폭행해도, 살인을 해도, '술김에'라는 변병을 하고는 한다. 실제로 친절한 판사들은 '술 탓'에 어느 정도 동조해 주고 있다. 술, 도박,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빠지지'말아야 하는 대표적인 위험물이기에 남자들이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내탓이 아니라 술과 여자 탓이기 때문에 '소라넷'이라는 사이트에서 술 취한 여성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강간 모의를 벌이기도 한다. 술취한 여성은 일종의 '공공재'다.p226

 

세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무엇을 할 것인가, 다 좋다. 다만 그 이전에 필요한 질문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생명체인다. 그것이다. 바뀌지 않는 '나'들이 바꾸려는 대상과 세상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타인을 품평하고 세상을 논하는 자들이 주변을 피폐하게 만든다. 이들은 제 주변의 약자를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이끈다. (...)구타 그 자체가 아니라'구타유발자들'을 교정시키려는 습관이 있다. 여성은 '악의 유발자'이며 동시에 '악의 배출구'다. '맞아야 할 이유'혹은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p240

 

여성이 조심하도록 강조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남성의 폭력을 불가피한 본능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진짜 폭력은 바로이 관념에 있다.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기럴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 줄 모르게 길러진다. 남성의 폭력성을 통제 불능의 본능처럼 여기기에 상대적으로 그들의 행위는 법 앞에서도 고의성이 적은 폭력으로 인정받는다. 남성의 폭력은 늘 '우발적'으로 규정된다. '위威'는  창으로 여자를 위협하는 것으로 '위엄'을 뜻한다. '남자다움'의 밑바탕에는 약자를 향한 힘의 과시가 깔려 있다.

어릴 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 치마를 덜렁 틀쳐 올리며 낄낄거리는 행동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그건 일종의 '놀이'다. 놀이지만 여자아이는 운다. 추행과 놀이의 개념은 이렇게 혼선을 빚는다. 가해자는 자신이 도대체 어떤 '가해'를 했는지 인식하기 어렵다. 사소한 농담, 장난, 친근감 표시일 뿐인다. 피해자가 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으려면 누구나 명명백백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로 죽기 직전까지 되거나 죽어야만 한다. 목숨을 걸고 저항의 흔적을 남겨야 폭행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해괴한 상황이다. p243

 

 

성매매가 필요악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에 대한 분석보다는 남성의 성욕은 반드시 배출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성욕을 '받아 주는'여성이 필요하다는 가부장적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울러 성매매에'유연한'사회에서도 남성 판매자와 동성애 성매매에 대해서는 이중적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 성 판매자가 아닌,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판매자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남성 성 판매자는 성매매의 비주류다, 이들은 더욱 음지 속에 있다. 성매매가 함법화된 국가에서도 자연스럽게 성 판매자는 여성에 국한된다, 성 판매자가 특정 성별에 집중되어 있듯, 성 구매자 역시 특정 성별과 성적 지향성에 편중되어 있다면 이는 불가피한 성욕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성매매라는 제도는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p257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의 '배우자 동의'조항에도 모순이 있다. 이법에 따르면 산모의 건강을 해치는 경우는 물론, 강간이나 인척에 의한 임신 등의 경우에도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만 낙태가 가능하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의 배우자(남성)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했을 때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느 주체는 되지만, 임신이나 출산. 양육등의 문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것이다. p261

 

임신은 오직 여성의 몫이고 불법 수술을 맡은 남자는 이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성관계(성폭행) 요구도 서슴지 않는다. 생명 존중? 사람이 '살아가는'세상이 사람을 존중하고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면 낙태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출산률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p263

 

그렇듯 성희롱은 대체로 권력관계에서 벌어지기에 여성과 성소수자의 노동환경을 더욱 악화시킴으로써 경제적 약자를 더욱 약자로 만든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런 측면을 감안한다면 성희롱은 개인간의 분쟁이라기보다'차별이 가능한 사회'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범죄'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타자에 대한 희롱은 그 존재에 대한 존중의 결핍, 즉 차별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차별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행동은 취향의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와는 무관하다. 파리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포스터의 글귀다. "차별은 견해가 아니라 범죄다."p278-9

 

사랑을 바라보는 인간 사회의 기준은 아주 편파적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범주도 한정적이며, 욕망이라는 상당히 협소한 개념에 갇혀 잇다. 욕망은 이성애 어른의 전유뮬이다.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성적욕망이란, 법적 기혼자만이 당당히 표출할 수 있는 권리다. 이성애자라 하더라도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욕망을 드러내기는 어렵다. 국립국어원에서 '사랑'의 의미를 "남녀 간의 사랑'으로 한정했듯이, '강제적 이성애'속에서 사랑,욕망, 성관게 등의 언어가 가지는 의미는 제한적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대부분 자역적으로 발생하는 성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는' 결과이다. 이 '되는'과정은 법과 제도, 관습 등에 대한 순응을 필요로 하며, 그 순응하는 '나'에게 우울이란 질병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니 성소수자 청소년 집단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것을 이 강제적 이성애 사회에서 지극히 논리적인 현상이다. p287

 

성욕이 인간에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기본 욕구라는 관념이 다른 많은 담론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성적 욕망과 자극이 모든 인간의 본능이고 필수처럼 여겨지는 관념 속에서 무성애의 삶은 뭔가 문제가 있는 '비정상'으로 치부된다. 그래서 때로 무성애자들은 '정상'이 될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물론 그들은 소수이며, 보편적으로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기는 하지만 소수라고 해서 비정상으로 구정하면 곤란하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 필리프 브레노는 "만약 성생활이 없는 삶에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라고 한다. 그렇다 문제 없다. p307

 

노동, 여성, 성소수자등 삶의 변방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짧은 글들이 묶여져 있다.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서 양성평등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고, 강제적으로 사회 제도가 바뀌어야 그 제도에 맞추어서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게 될것 이라는 글을 보았다. 지금까지 여성들은 수세기동안 맞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해도 참고, 상냥하게 말하고 그리고 또 참고 상냥하게 말해왔다.(저한테 왜이러세요.......라고) 이제 그러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송곳처럼 찌르고 일어나니 너희들이 그러는 건 양성 평등도 아니고 페미니즘도 아니라고 난리난리다. 특히나 글 좀 읽었다는 사람들, 자칭 진보적이며 꽤나 가정적입네 하는 치들이 오히려 더 그런 말과 행동으로 맨스플랜 하려고 든다.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자기쪾으로 기울어져 있는지 느끼는게 쉽지 않을 것이란것 안다. 그런것을 느껴야할 불편함이 없이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여자들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느니, 남자들이 요새는 더 불쌍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무뇌아 처럼 할수 있는거겠지. 나 역시도 내가 숨쉬듯 누리는 많은 권리들에 대해서 일일이 고맙거나 대단하다고 생각치 않았으니까.

 

 

반복해서 이야기 하지만, 나에게 페미니즘은 이런것이다. '이 세상이 많이 기울어져 있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을수도 있구나. 내가 모르고 있는 것들이 많구나' 라고 스스로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하면서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만드는것이다.

 

내가 아는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한것이고 메갈이나 워마드는 페미나치지 페미니즘이 아니다. 라는 말따위는 그만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 페미니즘 행동하면 된다. 단톡방에서 여자사람동료 성희롱 하면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몰카 찍지 말고 , 소라넷따위 하지 말고, 여자니까 조심해야하고 남자니까 그래도 괜찮고 하는 습관적인 말과 행동들 하지 말고, 가사노동 도와주는게 아니라 각각 분담해서 하는게 당연한거니까 나부터 하고. 3차로 여자 있는 좋은데 가자고 하는 짓도 그만 두고. 회식때 꼭 젊은 여직원이랑 부르스 추려고 하거나 추라고 강요하는거 그만 두고, 커피랑 술은 여자가 만들고 따라야 맛있다는 개소리도 그만하고,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양성평등을 위해 행동하면되는 것 뿐.

요새 여자들 무섭다고 울지 말고. 행동하면 된다. 당신이 아는 그 페미니즘. 그 양성평등. 오만한 나를 변화하게 하는것.

 

 

*메갈이나 워마드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이라 할순 없다. 그들도 페미니즘의 다양한 층위속에 포함된 부분이란것.

실제로 메갈이나 워마드는 법을 어긴적도 없고, 남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을 자가 낙태사진도 정말 놀랍겠지만 여성들의 월경혈일뿐이고 실제로 남성에게 부동액 먹이고 강간한 사실도 없고(여성 강간용 약물은 시중에 절찬리에 판매중이며 어마무시한 사용후기가 있다), 남아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살해한 적도 없다(현재도 경제 형편이 어려우니 하나만 낳으려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한다). 부동액, 번식탈락, 좆린이. 자가낙태 등은 그동안 남성들이 여성과 어린이에게 수세기 동안 해왔던 일들에 대한 반짝이는 미러링일뿐이다.*

 

 

 

 

궁금증. 남자 화장실에도 이런 비상벨과 문구가 있나?

 

벨누르면 이 언니들이 와주면 좋겠다. 

WHO YOU CONNA CALL?  GHOSTBU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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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9-0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나중에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 다시 나오면 내가 사줄게요.

저 책도 읽어야지.

2016-09-08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9-0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성들의 의식이 바뀌어....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양성평등이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생각했었는데...
근래에는 그런 생각을 버렸어요.
남성들 스스로가 양성평등의 길로 오지 않겠다면, 그렇다면 결국에 제도의 문제로 풀어야겠죠.
법으로 해결해야죠.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차별하고, 산후휴가 쓴다고 눈치주고, 산휴휴가 들어가는 사람들한테 책상 치울 수 있다, 이런 이야기 하는 것 모두 불법으로 만들어야죠.
우리 할 일 많네요. ㅎㅎㅎ

아무개 2016-09-08 11:06   좋아요 0 | URL
그 비싼 대학등록금도 똑같이 받으면서 어째서 정원의 10%만 여성을 채용한다고 하고
임금격차는 40% 가까이 되는걸까요?
그렇게 어렵게 취직하고 애낳는다고 하면 책상을 빼버리죠, 애 안낳으면 안낳는다고 또 뭐라하고.

어떻게든 강제로 사회제도를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기득권 세력이 기득권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라고만 생각하는 권리들이
서로 나누어도 한쪽이 지거나 빼앗기는게 아닌 기본권이라는것을
제도로 만들어서 느끼게 만드는 수밖에는 없는데
그러기엔 소위 진보정당이라는 정의당이 하는 행태나 진보주의자 라는 남성들의 빻은 소리 들으면
어느 세월에 될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