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학입시문화사 - 시험의 탄생에서 SKY 캐슬까지
강창동 지음 / 박영스토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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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지구에는 인간이 세운 장벽들이 굳건히 서 있다. 인도에서 흔히 들리는 달리트 여성에 대한 성폭행과 살인, 1960년대에 들어서야 법적으로 금지된 미국의 흑인 차별과 그 이후. 그리고 한국은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폐지되었으나, 해방 이후 등장한 (신분제의 한 축인) 문벌의 후신 격인 학벌. 신분제는 여전히 지구촌에서 국가, 민족, 인종 등 여러 형태의 인간 집단에서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질서를 유지한다.

한국에서 뭘 해도 서울대나 SKY캐슬은 돼야 명함을 내밀 수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리더는 서울대와 SKY캐슬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한국의 고위공직자의 대략 절반이 명문대 출신이란 사실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이들이 사실상 한국이란 국가를 운영하며 의사결정을 하고 각종 법과 제도를 만든다. 실제로 20대 국회에서 명문대 출신 의원이 41%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비중은 의사, 법조인, 외교관 등 특수 전문직일수록 압도적으로 높아진다. 5급 이상 공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단 명문대뿐만 아니라 경찰대 같은 특수대 출신도 경찰 고위직을 독점하고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교육 제도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여 오늘날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에 의해 운영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 한국은 독일과 같이 국립대 중심의 공교육이 자리잡지 못한 것일까? 한국의 교육 제도는 대학 교육에서 그 본질이 잘 나타나는데, 21세기인데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대학 서열에서 그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독일의 대학을 한국식으로 묘사하면, 바흐가 살던 18세기에 명문대였던 라이프치히大가 오늘날 지방대로 전락하며 서울 소재의 베를린大에 명함을 못 내미는 격이다. 이런 신분주의의 모순은 예술 분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울대 미대와 홍익대 미대는 예술학교의 정체성이 아니라 입시 성적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서울대 출신의 화가가 후자 출신보다 예술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신분주의는 중국, 일본, 미국,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는 소르본 같은 일반 대학 이외에 국립행정학교 같은 그랑제콜들이 생겨나 파워 엘리트를 양산하는 곳이 되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사학이 공교육 제도보다 발달했는데, 최충의 9재학당이나 조선 시대의 서원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최충이 지공거로 명성을 떨치면서 그의 사숙은 노량진 수험가처럼 문전성시로 붐빈다. 이로부터 개경에는 사학 12도가 생겨나 유명무실한 국자감을 대신하여 사학이 정착된다. 고려•조선 시대의 사학은 과거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과거제는 국가공무원을 선발하는 시험 제도로 오늘날 5•7•9급 국가(지방)공무원 시험으로 남아 있다. 그중 잡과는 지금의 7-9급에 해당하는 기술직 하급 관리를 뽑는다. 과거제는 불완전하나마 신분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됨으로써 사학이 번성하는 원인이 된다. 이는 과거제의 폐단에 대한 조광조의 현량과 시행이나 유형원, 정약용의 개혁안과는 별개의 문제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조선의 교육 제도와 과거제와 연관해 볼 때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 곳일까?

한국의 서원은 단순히 사학이 아니라 사림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거나 향촌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적 공동체였다. 한편 현대 한국의 대학은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현 교육 제도 하에서) 한국 사회의 계층을 형성하거나 한 인간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한다. 영화 가타카(Gattaca)에서 유전자가 한 인간의 신분을 결정하듯이, 출신 학교가 사회적 신분을 결정한다. 조선 시대에 양천을 구별하고 양인이라 해도 양반과 다른 신분을 구별했듯이, 고졸 신분, 대졸자라 해도 서울대, 명문대, 특수대, 서울권, 지방대 등 출신 학교를 구별함으로써 신분이 한 인간의 생애와 진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출신 학교로 표시되는 신분은 고려 초기에 정착된 本貫(성씨의 발원지나 시조의 출신지로 신분의 우열을 상징함.)처럼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를 의미하며 직업, 결혼, 승진 등 사회적 관계의 배경이 된다. 물론 어떤 분야의 자격이나 능력을 갖췄느냐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대학입시는 그러한 신분의 기준이 되는 학교를 결정하는 시험이다. 오히려 취업 시험이나 자격 시험보다 인생을 좌지우지할 더 중요한 시험으로 평가된다. 대학입시는 직업 이전에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근본적인 시험이기 때문이다. 가령 고졸 출신의 변호사는 자격과 능력 면에서 아무 문제 없지만, 법조계 내의 보수적 인식은 사뭇 다르다. 고졸 출신의 검사가 그보다 더 드문 이유를 생각해 봐도 좋다. 신분은 종래의 신분이 출생으로 결정되면 바꿀 수 없듯이, 예외적인 경우 말고는 평생을 따라다닌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도 과거 합격과 관직의 유무에 따라 幼學으로 불렸는데, 김수봉이란 노비는 유학이 되기 위해 대대로 부단히 노력하였다. 신라의 중위제, 대학 편입, 폐지된 사법시험 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스스로 得難(신라의 문벌인 진골과 대비되는 귀족 신분)이라 부른 唐 시대의 최치원뿐만 아니라 元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분 제약을 느낀 이들이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지금도 서울대 석박사 취득이나 미국 명문대 유학에서 그런 노력을 부분적으로 읽을 수 있다.

학벌이란 과거의 문벌처럼 독점과 차별이 특징인 폐쇄적 신분 질서이자 출신 학교를 배경으로 한 사회를 지배하는 소수의 패권 세력 또는 그런 사회 현상이다. 한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로서 선진적인 교육 제도를 운영한다면, 전국의 학생이 서울대든 전북대든 사립대든 고졸이든 자격과 능력으로 인정받되 어떤 특권도 부여돼서는 안되며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아야 한다. 명문대든 지방대든 어떤 형태의 교육 제도든 그것이 특권과 차별을 형성한다면 그런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현재 사립대가 전체 대학의 거의 80%에 육박할 정도로 사립대 전성시대이지만 이미 레드오션으로 구조조정 단계에 있다.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전국의 서원을 대부분 철폐한 데서 그런 폐단의 한 면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사학 중심의 공교육에서 신분주의를 구축한 리더십은 이제 폐기돼야 한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본연의 국공립대 중심의 공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국의 학생이 서울이나 수도권에 모일 필요가 없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서울대에 모일 것이 아니라 전북대든 전국의 어느 국공립대든 사립대든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학업을 하면 된다. 전국의 국공립대가 서울대보다 교육 역량이 부족하다면 현재의 국공립대를 고려의 국자감처럼 둘 것이 아니라 강력히 혁신해야 한다. 단계적으로 국공립대 수를 늘려 가며 전국에 그 혜택이 고르게 주어져야 한다. 카스트 제도, 흑인 차별, 신분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한다. 교육 개혁은 단순히 대학 평준화나 경쟁의 회피가 아니라 교육 제도가 형성한 신분주의를 혁파하고 교육의 제자리를 찾는 데에 목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후 한국의 교육 제도에서 대학입시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성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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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의 사상 세계 - 동아시아 문맥과 지적 여정 포스텍 융합문명연구원 문명학 총서 3
이혜경 외 지음 / 나남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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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형원 이후 사회개혁 내지 국가개혁 안들은 현실 정치에서 정책화되지 못했다. 그렇게 전근대적 체제에서 변화를 추구하던 개혁사상은 박규수를 거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근대 문명의 최전선에 서 있던 유길준의 개화사상과 한국의 근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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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시재 최성환 연구 실시학사 실학번역총서 13
권오영 외 지음, 재단법인 실시학사 엮음 / 학자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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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한국은 신분제의 한계, 문벌의 패권, 공직자의 부패로 들끓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지배 체제의 모순과 지역 차별로 인한 홍경래 세력의 저항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 19세기 한국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진단한 최성환의 국가개혁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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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학사 (보급판, 반양장) - 원효부터 장일순까지 한국 지성사의 거장들을 만나다 한국 철학사
전호근 지음 / 메멘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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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한국철학사란 이름으로 삼국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는 한국철학으로 부를 만한 사상들을 집대성하고 있다. 마치 한국철학백과에서 중요한 부분들만 모아 놓은 보급판 같다.

주로 한국사나 한국문학에서 흔히 보는 전통 사상, 승려들, 정치가들, 학자들, 문필가들을 아우르고 있다. 그들의 삶과 저술을 통해 그동안 한두 줄로 암기하던 사상들을 만나게 된다.

가장 먼저 최제우 편을 읽어 보며 동학의 인간평등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동학의 인간평등사상은 사회 개혁의 기저를 이루는 것이기에 앞선 양반 중심의 개혁 사상보다 진일보된 것이다. 헌법 11조 1항 누구나 평등할 권리는 영화 가타카에서의 신분 사회에서 보듯이 여전히 현실과 거리가 멀다. 한국의 LH 사태는 한반도에서 땅 위에 누구나 평등하지 않다는 걸 정면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흔히 실학으로 불리는 사회개혁 또는 국가개혁 사상을 주창한 일군의 학자들의 움직임이다. 17세기 한국에서 유형원을 시작으로 지배 체제의 모순을 자각하고 조금씩 변화가 시도되었다. 그런 점에서 유형원->이익->정약용의 실용주의의 사상적 계보가 형성되었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좀더 급진적인 유수원의 개혁 사상에서 당대의 법과 제도 전반에 왜 변화가 필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외양은 다를 지 모르지만 21세기 한국의 현 정부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학으로 통칭되는 최한기의 사상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양의 자연과학과 동아시아의 성리학으로부터 독창적인 기학 사상과 그로부터 개혁 사상을 제시했다. 개혁 관료였던 박규수의 개화 사상과 별도로 최한기의 개혁 사상이 어떻게 개화 사상에 영향을 주었나 하는 점은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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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1 - 나는 코리안이다 동경대전 1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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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판본을 둘러싼 이야기들도 눈길을 끌지만 조선사상사 부분이 가장 흥미롭다. 그동안 한국사상사, 한국철학사, 한국유학사 등의 제하로 한국철학을 통시적으로 조명하는 저술들이 있었다. 김용옥의 조선사상사에서 동학사상과 한국철학의 전개를 한 뭉텅이 꺼내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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