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를 그리 즐겨 읽지는 않는다. 맹자와 같은 강직한 스타일이나 과도한 이상주의적 태도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현실적 기득권을 강고하게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도덕을 정당화하려는 위선이나 고상한 이상을 떠들면서도 현실적 문제에 무기력한 무능력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이상하게도 교활한 현실주의자나 무능력한 이상주의자들이 맹자를 들먹이는 것이다

 

 

 

 

 

 

 

 

 

 

 

 

 

 

맹자를 평가하는 말이 있다. 우활(迂闊)하다는 말이다. 우활하다는 말은 사전적으로 사리에 어둡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이 우활하다는 말의 어원은 사기<맹자순경열전>에 나온다. 거기서 맹자를 그의 말이 현실과 거리가 멀고, 당시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見以爲迂遠而闊於事情)라고 평하고 있다.

 

 

 

 

 

 

 

 

 

 

 

 

 

당시에는 군사 전략가이며 현실주의자들인 상앙이나 오기 혹은 합종연횡을 펼치며 정치와 외교에 뛰어났던 소진과 장의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꾀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맹자의 말들은 동키호테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북송 시대의 정이천이라는 사람이 내린 평가는 이와는 다르다. “()을 아는 사람 가운데 맹자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知易者, 莫若孟子) ()이란 주역을 의미한다. 주역의 핵심은 시세를 알고 때를 아는 것이다. 정이천의 평가에 따른다면 맹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서생만은 아니었다.

 

 

 

 

 

 

 

 

 

 

 

 

 

분명 맹자는 이상주의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한 이상은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 기반한 이상이 아니었을까? 현실을 몰랐거나 현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현실 속에서 실현가능한 구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우활하다고 평가했을 뿐.

역사는 무모한 이상주의자보다는 교활한 현실주의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일까? 맹자의 바람과는 달리 진시황에 의해서 천하는 통일되었다.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현실주의자였던 상앙(商鞅)과 이사(李斯)였다. 그러나 천하가 통일되었다고 해서 민중들의 삶에 평화와 안정이 찾아왔던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민중들의 삶은 피폐하다.

맹자가 말하는 우활한 왕도(王道) 정치가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지. 맹자를 즐겨 읽지 않는 나는 답할 순 없다. 그러나 뻔뻔한 비굴과 아첨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잘못된 정치로 죽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하필 왜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왕에게 간언했던 맹자의 강직한 호연지기가 아쉬운 것은 비단 나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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