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책.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나 귀곡자가 전한 삶의 노하우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역사의 안개에 가려진 비서(祕書). 이제 그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무렵 서서히 전모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귀서(貴書).
권모술수와 음모는 비열한 술수이다. 하지만 고고한 도덕을 고집하면서 몰라서도 안 되는 노하우다. 유학자들은 당연히 이런 귀곡자를 혐오했다. 당나라 유종원(劉宗元)은 “그 말이 매우 기괴하고 그 도리가 매우 좁아터져 사람을 미치게 하고 원칙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했고, 명나라 송렴(宋濂)은 “귀곡자가 말하는 패합술(捭闔術)과 췌마술(揣摩術)은 모두 소인들의 쥐새끼 같은 꾀로서 집에 쓰면 집안이 망하고 나라에 쓰면 나라가 망하며 천하에 쓰면 천하가 망한다”고 혹평한다.
《귀곡자》는 전국 시대 종횡가(縱橫家)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문헌이다. 《한서》 <예문지>에서는 종횡가를 이렇게 평가한다.
“종횡가의 유파는 행인(行人)의 관직으로부터 나왔다. ...... 그 말이 상황에 합당했고 임기응변으로 일을 마땅하게 처리했다. 군주의 명령을 받되 구체적인 행동 명령은 받지 않았다. 이것이 이들의 장점이다. 그러나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이를 행한다면 사기술만을 숭상하고 신의는 저버린다.”(縱橫家者流, 蓋出於行人之官, ...... 言其當權事制宜, 受命而不受辭, 此其所長也, 及邪人爲之, 則上詐諼而棄其信.)
행인이란 외교관을 의미한다. 외교관들은 정치적이고 언어적 능력에 뛰어난 사람들이다.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했고 소피스트(sophist)들의 수사학(修辭學)을 비난했듯이 공자는 정나라 음악을 물리치고 말재주 좋은 사람을 멀리 했다.
선진 제자 가운데 말재주로 유명한 종횡가는 주목받지 못했다. 서양 철학에서도 소피스트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요즘 소피스트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 정치 사회에서 소피스트들의 수사학이 주목받고 있다. 마찬가지다. 종횡가도 이런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한비자》가 군주와 신하들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군주의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던 탐욕스런 신하들을 다스리는 통치술을 주장했다면, 《귀곡자》는 신하로서 화를 당하지 않으면서 포악하고 어리석은 군주를 제어하는 정치적 전략과 유세술(遊說術)을 주장했다. 《한비자》가 군주론이라면 《귀곡자》는 이에 대항하는 이른바 신하론이라 할 만하다. 언어의 힘과 정치적 능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권력에 대항하는 신하들의 기술과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