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2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연락에 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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