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쩌허우(李澤厚) 자신은 미학자로 불리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고 한다. 의외다. 벼르고 별렀던 리쩌허우의 <미의 역정>을 읽었다. 덩리준(鄧麗君)의 노래를 들으며 <미의 역정>을 베껴쓰는 모습이 1980년대 중국 젊은이들의 자화상이었다니 놀랍다. 그 정도로 중국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책인가? 그 이유는 1978년 이후 문화대혁명의 금욕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젊은 중국인들에게 자신의 욕망의 충동에 대한 이론적 지지가 필요했다는 것이고 리쩌허우의 미학 사상은 이런 충동에 대한 학술적 응답이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미학 이론을 약간 접했던 나로서는 80년대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랄까? 약간의 촌스러움이 있기도 하며 또 이 책에도 약간의 국뽕 아니 중화뽕이 있다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아마 중국어로 읽지 않았기 때문에 리쩌허우의 문체에서 나오는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서양 미학의 몇몇 개념을 개입시키며 논의하는데 주목할 만한
내용은 이런 것이다. 중국 시가(詩歌) 문학에서 표현된 “외부 사물과 풍경은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정감의 색채가 더해지고 정감은 더 이상 주관적 정서가 아니라 이해, 상상이 융합한 객관 형상(타자가 공감할 수 있는 형상)이 된다. 이것은 외부 사물의 직접적 모방도 아니고 주관적 감정의 발산도 아니며 개념적 인식에만 호소하는 것도 아니고 주관적 감정에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감화력(흥이 있는)이 있는 형상이다." 바로 이렇게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고 인식으로 포괄할 수 없는 예술과 심미의 특징은 “경물로써 정감을 마무리한다.”(以景結情)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결국 정감, 이해, 상상의 요소 및 심리적 작용이 통일된 산문문학이 중국 시가의 민족 미학의 특징이라는 점이다. 정감의 표현이 이성의 형식보다 더 강조된다는 것이지만 서양에서도 정감의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포괄적인 규정보다는 일본 미학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와비(わび)나 사비(さび)처럼 구체적인 정감과 그것이 표현된 형식적 미를 구체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이 좋을 텐데.
송명 시대 문인화와 문예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런 내용이 나름 설명되고 있기는 하다. 놀라웠던 것은 소동파에 대한 견해였다. 소식(蘇軾)은 이백이나 두보에 비해 한참 떨어진다고 전제하며 지식인의 모순된 심리를 최초로 선명하게 드러낸 화신이라고 본다. 주희가 왕안석을 찬양할지언정 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소식은 퇴은(退隱)하거나 귀전(歸田)한 적이, 즉 세속을 등지고 은둔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시에 표현된 허무나 슬픔이라는 심경은 “정치에 대한 도피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도피”이며 “정치적 살육에 대한 공포와 애상이 아니라 근본적 인생의 문제이며 해탈과 포기의 바램이었다”는 점이다.
소식은 굴원과 완적의 근심이나 불만, 이백과 두보의 호방함과 성실함, 백거이의 명랑함과 유종원의 고고함, 한유의 안하무인의 오만한 기세와 다르고 단지 해탈할 수 없으면서도 해탈을 요구하는 인생 전반에 대한 넌더리와 슬픔과 억지 위안을 통한 초월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물론 꾸미지 않고 소박하며 수수하고 자연스러운 정취는 있기는 하지만.
결국 소식은 “인생 전반에 대한 허무감, 회한, 담담함, 초탈을 구하지만 이룰 수 없고 감정을 해소하고자 하지만 우스꽝스러워지는 이런 상황”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리쩌허우가 소개하는 독특한 인생태도를 표현한 시구절 하나를 소개한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을 저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나?
인생 머무는 곳, 무엇과 같은지 아는가? 날아다니는 기러기가 눈밭을 밟는 것과 같을 지니. 눈밭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지만, 기러기 날아가면 어디로 갔는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蘇東坡, 和子由澠池懷舊)
#리쩌허우 #<미의 역정>(글항아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