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ES

Joyce Kilmer

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

A poem lovely as a tree.

A tree whose hungry mouth is pressed

Against the earth’s sweet-flowing breast;

A tree that looks at God all day,

And lifts her leafy arms to pray;

A tree that may in summer wear

A nest of robins in her hair;

Upon whose bosom snow has lain;

Who intimately lives with rain.

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

But only God can make a tree.

나무들

조이스 킬머

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를 볼 수는

결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네.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종일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나무.

여름에 자신의 머리 위에

울새 둥지를 허락하는 나무.

가슴엔 눈이 쌓이지만

비와 친밀하게 사는 나무.

시는 나와 같은 바보들이 짓지만

나무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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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의 추구 - 하버드대 최고의 행복 강의
탈 벤 샤하르 지음, 노혜숙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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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딴짓 하는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도 나도 불쾌한 순간이다.  

그래도 아이가 엄마를 보며 웃어준다. 고맙다.  

기다리지 못하고 소리지르는 엄마도, 자기 할 일을 미루고 딴 짓하는 아이도 이유가 있겠지.  

어떤 순간이든 평안하기를 바라는데 자꾸 깨진다. 왜 나는 다정한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할까 하고 자책한다. 아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엄마인 내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를 알아도 벗어나기가 힘들다. 그게 인간이라는 것, 내 한계라는 것. 그 한계를 알고 나서는 그 문제로 고통받지 말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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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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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삶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살기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하가. 좀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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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歌客)

- 정현종



세월은 가고
세상은 더 헐벗으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새들이 아직 하늘을 날 때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니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동안

무슨 터질 듯한 立場이 있겠느냐
항상 빗나가는 구실
무슨 거창한 목표가 있겠느냐
나는 그냥 노래를 부를 뿐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동안

나그네 흐를 길은
이런 거지 저런 거지 같이 가는 길
어느 길목이나 나무들은 서서
바람의 길잡이가 되고 있는데
나는 노래를 불러야지
사람들이 乞神을 섬기는 동안

하늘의 눈동자도 늘 보이고
땅의 눈동자도 보이니
나는 내 노래를 불러야지
우리가 여기 살고 있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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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다녔던 잡지사에서 겪은 일이다. 월급이 한동안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사를 쓰고 인터뷰를 나가고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감은 중력과도 같았다. 어느 날 회사 경영자의 가족인 동시에 편집자이기도 했던 ‘홍길동’이 기자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일종의, 그러니까 아마도 위로였을까. “너희들 어차피 돈 벌려고 이 일 하는 거 아니잖아.” 홍길동이 탄 외제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기자들의 콧방귀를 ‘원기옥’처럼 모아 저 차에 전달한다면 기름을 넣지 않고도 평생 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언론의 선정적인 제목과 기사

또 한 명 작가가 죽었다. 언론은 파편화된 팩트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취사선택해 기사의 형태로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특정 언론의 정파적 입장이 드러나기도 한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다루는 데 <한겨레>는 ‘남는 밥 좀 주오’라는 문장을 제목으로 꼽았다. 이는 매우 선정적인 데스킹의 결과였지만, 어찌되었든 큰 틀에서 사실관계를 완벽하게 어그러뜨릴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사회적 모순이 죽음을 양산했다는 행간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겨레>가 취사선택한 팩트 안에 ‘작가의 죽음’은 없었다. 다만 ‘굶어 죽은 작가’가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어떻게 이야기되느냐에 따라 ‘애도’될 수도 혹은 ‘구경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한겨레>의 선정적인, 즉 매우 파괴력이 있었던 이 기사는 후자의 수군거림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양산했다. 물론 그 선정성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죽음은 애도와 구경거리 가운데 어느 쪽에도 거론되지 못했을지 모른다. 비극적인 노릇이지만 이 또한 언론과 독자가 함께 만들어낸 현실이다.

문제는 ‘굶어 죽은 작가’라는 파괴적 행간이 논의의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버렸다는 데 있다. 지금 와서 최 작가의 죽음은 그녀가 정말 굶어 죽었느냐, 혹은 굶어 죽지 않았느냐라는 층위에서 논의되는 중이다. 굶어 죽었다면, 굶어 죽지 않았다면 죽음의 본질이 달라지는가?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간에, 죽음은 결국 죽음이다. 작가가 그 자신의 재능과 실력에도 불구하고 외롭게 죽었다. 약자였기 때문이다. 글 쓰는, 돈벌이가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자기 고집에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렸던, 그래서 어쩌면 돈 못 버는 게 당연한 우리 사회의 약자였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 아내가 내 어머니를 잠시 만나고 왔다. 대화 중 최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데,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그에 관련된 보도를 보고는 일면식도 없는 죽음 앞에서 한참을 엉엉 울었다고 했다. 내 아들과 거의 같은 나이인데 그렇게 외롭게 죽었다는 게 안쓰러워서 울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을 향한 우리들의 연민과 걱정은 동냥과는 다른 층위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기자나 데스크가 독자들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 것인지 미리 결정하고 방향을 제시해주지 않더라도 말이다. 아직은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

최고은 작가가 2006년에 연출한 단편영화 <격정 소나타>는 피아노 콩쿠르에 응시한 여고생의 이야기다. 지난 콩쿠르에서 그 여고생은 긴장한 나머지 창피한 일을 저지른 채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잠적하다시피 했던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긴장되고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이 앞선다. 시험장 화장실에서 그녀는 자신이 작년에 저질렀던 실수를 언급하며 욕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것이 부조리하다 해도 세상의 시선을 어찌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의 약점과 세상의 시선 모두를 떳떳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시험장에 들어간다.

<격정 소나타>는 섬세하게 감정의 결을 잡아내는 연출의 묘와, 선언과도 같은 작가로서의 소명을 드러내려는 박력이 돋보이는, 매우 특별한 데뷔작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녀의 차기작을 궁금해하며 이 데뷔작을 기억할 것이다. 서른두 살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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