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꿈 산지니시인선 4
조향미 지음 / 산지니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재난

 

아이들은 등에 공부를 잔뜩 지고

공부의 사막을 걷는 낙타다

누군가 낙타의 눈을 가리고

바늘 구멍보다 작은 문으로 이끈다

애초부터 눈이 없는 양 낙타는 고분고분하다

등에 진 공부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으므로

낙타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다

막상 공부를 펼쳐 세상을 탐구하지도 않는다

하여간 공부의 사막은 험난하였으므로

많은 낙타는 짐에 짓눌려 허우적댄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맴돌거나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꾸벅꾸벅 졸았다

간혹 먼 곳으로 도망쳐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낙타가 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공부의 길은 단순도 하였으므로

낙타 떼는 눈을 감고 꾸역꾸역 걸어서

우글우글 바늘구멍으로 몰려든다

 

시인은 학교 현장에서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이 '재난' 현장에 있는 낙타와 같다고 한다.

우글우글 바늘구멍으로 몰려갈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딱하지만 시인은 그 현실에서 밥벌이를 하는 선생님이다.

그러면 시인은 그 재난 현장을 지키고 있는 감독일까?

감독인 시인은 아이들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칠칠하다

 

맑고 큰 눈을 가진 지민이가 수업시간에 잘 잔다

짐이 요즘 예쁜 눈을 안 보여 주네

밤에 잠 안 자냐?

지민이 여친 생겼어요

고 1 머슴애들 왁자지껄 덤벼든다

지민이 여친 아주 쪼끄매요

이마가 엄청 넓어요

이마 넓으면 시원하겠네

예 맞아요.청 시원한 애예요

지민이가 빨개진 얼굴로 말이 없다

칠칠하다, 낱말 뜻을 설명하던 중이었다

지민이 여자 친구는 칠칠하니, 칠칠하지 못하니?

칠칠해요

지민이 빙긋 웃으며 처음 입을 연다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따뜻하다. 현실이 재난일지라도 시인의 눈과 칠칠한 아이들이 있으니 세상은 아름답다.

 

 아무것도 안 하기

 

고비사막에 주막 차리기가 소원이라는

소설가 이시백 선생의 몽골기행단 일정에는

아무것도 안 하기가 있다

칠팔월 염천 사막에서

아무것도 안 하기 또는 마음대로 해 보기

햇빛과 바람은 무제한이다

전날 밤 일행들은 조금 걱정했다

민가도 없고 시장도 없고

와이파이도 안 터지는데

뭘 하지 아무것도 안 하는 날

책을 읽을까 휴대폰 영화를 볼까

떼어놓고 온 줄 알았던

인생의 짐도 슬글슬금 따라붙는데

 

막상 다음 날 일찍부터 눈이 뜨여

떠오르는 태양에 경배드리기

지구의 원주를 따라 슬렁슬렁 걸어보기

풀 뜯는 염소 떼와 말똥히 눈 맞추기

모래밭에 갓 돋은 풀싹 쓰다듬기

지평선 밖으로 팔을 뻗어보기

개르 천장으로 별빛 헤아리기

가만가만 내 숨소리듣기

크고 높고 무한한 것

작고 낮고 여린 것

경외하고 경탄하기 고요와 마주하기

정녕 아무 것도 안 하기

 

아무것도 안하고 태양에 경배드리는 시인, 염소 떼와 눈 맞추고 풀싹을 쓰다듬고 별빛을 헤아리는 시간이 왔다.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크고 높고 무한한 것과 작고 낮고 여린 것을 마주하며 경외하고 경탄하는 시간에 충만함이 가득하다.

 

시인은 자주 재난의 현실에 아파하지만 아름다움을 보는 밝은 눈이 있어 눈을 맞추고 존재의 충만한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 시간을 지나며 쓰인 시들이 밝게 빛나는 '봄 꿈'이 되었다.

시를 읽으며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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