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풋가지行 시작시인선 178
성선경 지음 / 천년의시작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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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조나무 아래서

 

형이 내게 물었다

너는 다음에 뭐가 되고 싶니?

나는 형에게 되물었다

형은?

형은 푸조나무 그늘 아래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앉았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형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방금 한 질문을 잊어버리고

형도 해야 할 대답을 잊어버리고

나는 잠깐

형의 팔베개에 머리를 누이고

오랫동안 하늘을

하늘의 구름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푸조나무 아래서

 

다시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푸조나무 한 세상이

잠깐 왔다 갔다

 

그 푸조나무 아래에 눕고 싶다

그 나무 아래 누워 있으면 이 한 세상이

그저 왔다 갈 것이다

언니는 무어라 할까?

일어나 밥이나 하라고 하겠지

그래 밥해서 언니를 먹여야지

 

백화만발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텃밭의 장다리꽃이 나비를 부르면

걷지 못하는 아버지의 신발은 하얗다

중풍의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은

삼월의 목욕탕을 다녀오는 길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등이 따스워 웃고

아들의 이마엔 봄 햇살이 환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아버지의 웃음에 장다리꽃이 환하고

장다리꽃은 배추흰나비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중풍의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은

삼월의 온천을 다녀오는 길이다

장다리꽃이 나비를 부르는 봄이다

나비가 장다리꽃을 찾는 봄이다

걷지 못해도 아버지 신발은 하얗고

뛰지 못해도 아들은 신명이 나 훨훨

장다리꽃이 배추흰나비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배추흰나비가 장다리꽃을 안고 건너는 봄이다

방금 장다리꽃이 빙긋이 웃고

따라서 배추흰나비가 빙긋이 웃어

장다리꽃이 배추흰나비를 업고 건너는 봄이다

배추흰나비가 장다리꽃을 안고 건너는 봄이다

 

백화만발이라니

이런 눈물나게 아름다운 장면을 노래하는 시인이라니

아버지가 돌아가신 아들들이 눈물나겠다

아버지를 한번도 업어보지 못한 아들들은 한숨짓겠다

아버지를 업고 봄 햇살을 맞이하고 싶은 봄이겠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 에서

 나비는 겁먹은 지식인이었다면

이 시에서 나비는 아름다운 아버지가 되어 봄을 건너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을 만나고 있구나

고마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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