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의 시위대가 도쿄나 오사카 거리에서 “조선인은 떠나라” “조선인을 죽여라”는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거나 밉다기보다 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도 가족이 있을 것이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중요한 일원일 것이다. 좋은 아빠이고, 남편이고, 친구일 것이다. 그런데 그 입에서 “좋은 한국인이든 나쁜 한국이든 다 죽여라”는 말이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전쟁·반인륜범죄와 함께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로 꼽히는 제노사이드(대량학살)는 선량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인디언을 절멸시킨 백인들이 특별히 악하거나 나쁜 양심을 가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오늘날 그들의 행동에 대해 분노하는 미국인보다 오히려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하느님의 집을 찾는 종교적 심성을 가졌다는 연구도 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동원된 사람도 모두가 손에 피를 묻혔던 것은 아니었다. 지방 공무원은 서류를 확인하고, 경찰은 역에 모인 유대인의 머릿수를 헤아리고, 기관사와 역무원은 운행 계획에 따라 열차를 움직이고, 아우슈비츠의 장교는 유대인을 쓸모에 따라 선별하면 그만이었다. 철저하게 조직된 살인 공정의 각 단계에서 자신의 업무에만 전념하면 되었지 인간적인 고통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과거에 일어난 최악의 제노사이드인 르완다 사태도 마찬가지다. 경상남북도만한 크기에 인구 800만명 정도밖에 안되는 나라에서 100일 동안 80만명이 죽었다. 죽고 죽인 사람은 남이 아니라 이웃이고 학교 동창이고 직장 동료, 친척이었다. 수도 키갈리 인근 추모소의 ‘당신 스스로가 진정 누구인 줄 알았다면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글귀가 말해주듯이 선량한 후투족 청년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한지도 모르고 자신이 죽인 투치족의 목을 걸고 맥주를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다.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 재판관으로서 이 사건을 직접 담당했던 박선기 변호사는 제노사이드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헤이트스피치를 꼽았다.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는 증오연설, 증오언설, 증오발언, 증오(혐오)표현, 증오언어 등으로 번역돼 쓰이고 있는데, 나는 ‘증오선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특정한 범주의 사람들에 대해 편견이나 폭력을 부추기려는 목적성을 갖기 때문이다. 헤이트스피치의 대상은 인종, 성별, 연령, 민족, 국적, 종교, 성 정체성, 장애, 정치적 견해, 사회적 계급, 직업, 외모, 지적능력 등 인류 보편의 가치 규범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헤이트스피치가 악마의 주술이 되는 것은 시대를 관통하는 제노사이드의 법칙이다. 백인들은 인디언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죄인’ ‘야만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절멸은 하느님과 자연이 정해놓은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서캐가 자라면 이가 된다”는 슬로건 아래 어린이를 죽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르완다 사태 또한 투치족을 바퀴벌레에 비유해 말살을 선동한 헤이트스피치가 기름 역할을 했다. 후투족 젊은이가 제노사이드 기간에 마치 지하드(성전)를 하는 듯이 착각하게 만든 것이 바로 그것이다. ICTR 법정은 헤이트스피치를 제노사이드의 한 유형으로 규정하고 이를 주도한 RTLM라디오방송국 설립자 등 언론인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조선인을 죽여라”는 재특회의 구호는 명백히 헤이트스피치에 해당한다. 그것도 90년 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연상케 하는 것이라 섬뜩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난 7일 재특회에 대해 일본 법원이 내린 판결은 업무방해와 손해배상이지 헤이트스피치 그 자체를 단죄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은 국제범죄에 대한 형사처벌 재판 관할권을 인정하는 로마협약에 가입해 있지만 헤이트스피치 규제 등에 대한 법제화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재특회의 야만적인 헤이트스피치에 혀를 차지만 눈을 국내로 돌리더라도 사정이 별로 나은 것 없다. 최근 국내 언어가 증오로 오염되는 것은 피부로 느낄 정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세이던 ‘분노’가 어느 새 ‘증오’로 변한 듯하다. 국가정보원 댓글에, 조세회피처 명단에, 갑을(甲乙)문화에, 기초연금 공약 파기에 분노했던 사람이라면 느낄 것이다. 종북·좌파라는 해묵은 헤이트스피치의 2013년판이 개봉된 것을.
증오의 힘은 맹목적이고 강력하다. 정당한 분노를 잠재우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내부를 증오의 언어로 경계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제노사이드와 같은 비극이 먼 나라의 일이라는 법은 없다. 우리 역사에서 홀로코스트에 버금가는 대참사가 없었던 것은 유달리 평화를 사랑해서라기보다 다른 문화를 지닌 민족이나 종족과 한 땅에서 오랫동안 살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