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프란치스코 예찬은 이러한 한탄으로 끝난다--지금 이 ‘맑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가난한 사람은 이 ‘기뻐하는 자, 청춘의 힘에 넘치는 자’의 존재를 느끼지 않는 것인가? 어찌하여 이 ‘가난의 거대한 저녁별’은 뜨지 않는가? 프란치스코의 전설들을 담은 책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꽃들>이 이름 지은 바대로, 릴케가 예찬한 가난도 ‘성스러운 가난’이었다.

그러나 가난을 넘어서 부를 얻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이다. 최소한의 부는 생존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부를 향한 욕망은 급기야 사회 안에 빈부 격차와 불평등을 격화하고 욕망들의 갈등, 정의의 투쟁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대하여 성스러운 가난의 이야기는, 빈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고 거기에 모든 존재를 돌보는 맑은 샘물이 흐르고 있음을 말한다. 양분된 세계에서 싸움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궁극적인 평화는 존재의 깊이에 흐르는 정신적 맑음의 원천에 이어짐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성스러운 가난의 우화가 전하는 것은 멀리에서 다가오는 이러한 예감이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어렵게 얻어내야 하는 과실이다. 그것이 사람을 이 열린 세계로 이끌어 준다.( 2013. 4. 2. 경향신문)

 

 

지금은 욕망의 과잉이거나 욕망의 쳇바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세상이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알아차리는 것 만으로도 쳇바퀴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되리라.

그럼 쳇바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쳇바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발견한다면 어떨까

드물게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보며 힘을 얻고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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