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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 문정희 산문집
문정희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8월
평점 :
내가 한 일 / 문정희
어머니에게 배운 말로
몇 낱의 시를 쏟아낸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랑이 아니라
욕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고
거두고 기른 일도 있긴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한 일일 뿐이네요
태어나서 그거 늙어가는 일
나의 전 재산은 그것입니다
그것조차 흐르는 강의 일이나
기실 저 자연의 일부라면, 그러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만 싶습니다
강물을 안으로 집어넣고
바람을 견디며
그저 두 발로 앞을 향해 걸어간 일
내가 한 일 중에
그것을 좀 쳐준다면 모를까마는
강물을 안으로 집어넣고 바람을 견디며 그저 두발로 앞을 향해 걸어간 일을 쳐 줄 수 있다는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
먼길 / 문정희
나의 신 속에 신이 있다
이 먼 길을 내가 걸어오다니
어디에도 아는 길은 없었다
그냥 신을 신고 걸어왔을 뿐
처음 걷기를 배운 날부터
지상과 나 사이에는 신이 있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뚱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뿐
새들은 얼마나 가벼운 신을 신었을까
바람이나 강물은 또 무슨 신을 신었을까
아직도 나무뿌리처럼 지혜롭고 든든하지 못한
나의 발이 살고 있는 신
이제 벗어도 될까, 강가에 앉아
저 물살 같은 자유를 배울 수는 없을까
생각해보지만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가파른 계단
나 오늘 이 먼 곳에 와 비로소
두려운 이름 신이여!를 발음해본다
이리도 간절히 지상을 걷고 싶은
나의 신 속에 신이 살고 있다
삶이란 비상을 거부하는 계단임을 단호하게 말하는 시인. 물살같은 자유를 배우고 싶은 시인의 말이 흐른다.
아들에게 - 문정희
아들아
너와 나 사이에는
신이 한분 살고 계시나보다.
왜 나는 너를 부를 때마다
이토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네 뒷모습에 대고
언제나 기도를 하는 것일까?
네가 어렸을 땐
우리 사이에 다만
아주 조그맣고 어리신 신이 계셔서
사랑 한 알에도
우주가 녹아들곤 했는데
이제 쳐다보기만 해도
훌쩍 큰 키의 젊은 사랑아
너와 나 사이에는
무슨 신이 한분 살고 계셔서
이렇게 긴 강물이 끝도 없이 흐를까?
자신의 시를 비행기 안에서 들었다고 한다, 비행기 기장이 낭송하는 시를 듣는 시인은 행복하겠다. 이런 행복한 순간이 살아 있어 고통과 모욕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