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권의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

‘태산명동에 서일필’(泰山鳴動에 鼠一匹)이란 말이 있습니다. 태산이 울리고 들썩이더니 고작 쥐 한 마리가 나왔다는 뜻인데요, 대단한 성과라도 나올 듯 미리 생색을 내더니만 정작 초라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를 이르지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데요, 왜 하필 쥐일까요?

이 한자성어에는 특이한 점이 있어요. 말의 생김을 보면 중국의 무슨 고사성어 같지만 동양 고전을 뒤져도 이 말의 출전은 확인되지 않거든요. 좀 생뚱맞지만, 이 표현은 라틴어 격언을 번안한 말 같대요. 에라스뮈스가 지은 라틴어 격언집 <아다기아>에는 “산고를 겪는 것은 산, 태어날 것은 우스꽝스러운 쥐”(파르투리운트 몬테스, 나스케투르 리디쿨루스 무스, parturiunt montes, nascetur ridiculus mus)라는 구절이 나와요.

이 말은 호라티우스의 <시학>에서 왔습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 짓기에 관한 한 편의 긴 시를 썼어요. 시시한 시인의 작품일수록 첫머리가 너무 거창하다며, 그는 따끔한 말을 했지요. “그렇게 큰소리치며 약속한 자가 과연 그 약속에 부합되는 것을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그러다간 산들이 산고를 겪되 우스꽝스러운 쥐 한 마리를 낳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호라티우스, <시학>, 138~9행)

고대 그리스까지 올라가 보죠. 아이소포스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산등성이 마을에서 땅이 들썩이자 마을사람들이 모여들어 걱정스럽게 지켜봤대요. 신화 속 티탄족이 튀어나와 세상을 쓸어버릴까 두려웠거든요. 그러나 땅에서 솟아오른 건 쥐 한 마리였고,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다며 웃음을 터뜨렸죠. ‘서일필’, 쥐 한 마리가 어디서 왔나 했는데, 출처는 <이솝우화>군요! (아이소포스의 영어식 이름이 이솝이거든요.)

거대한 자연을 접하며 느끼는 전율. 독일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패러디했어요. (중국 화가 석도의 <나부산 그림>을 배경에 섞어 보았습니다.) 원작 그림에선 어떤 사람이 발아래 구름바다를 굽어보고 있지요. 얼핏 보면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당당한 인간의 뒷모습 같아요. “인간은 자연을… 뜯어고쳐 인공의 환경을 만들어낸다. …근대 철학자들은 (이를) ‘자연의 인간화’라 불렀다. 하지만… 이게 우리에게 마냥 축복이기만 할까?”(진중권) 반면 이 사람은 자연의 거대함에 짓눌려 넋이 나간 듯 보이기도 합니다. 도도한 자연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게 마련이잖아요.



 

» 김태권 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처음부터 초라한 결과를 바라고 일을 벌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누군들 시작부터 시시한 시를 쓰고 싶겠습니까. 다만 능력부족할 따름이죠. 대통령님 임기가 절반을 지나 반환점을 돌았다죠? (이제야 겨우!)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란 말도 ‘자연의 인간화’라는 말도 생각나는 요즘이지만, 나라님 하나 바꾼다고 모든 문제가 술술 풀리기엔 우리 사회도 너무 복잡해졌지요. 뭐든 해결하겠다고 약속하는 허황된 지도자를 꿈꾸는 대신, 우리가 직접 나서 지혜를 모으면 어떨까요? ‘서일필’을 다시 겪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으니까요.







김태권 만화가·<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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