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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고 사랑하라
헤르만 헤세 지음, 신혜선 옮김, 나태주 해설 / &(앤드) / 2026년 5월
평점 :
때 이른 가을
어느덧 시든 잎들의 냄새가 매캐하고,
곡식 밭은 텅 빈 채, 눈빛도 없이 서 있다.
우리는 안다, 다가올 날씨가 한 번에
지친 여름의 목을 꺽어버리라는 걸.
금작화 꼬투리가 바스락거린다. 지금
우리 손에 쥐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아득한 전설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모든 꽃은 기이하게 길을 잃은 것 같다.
놀란 영혼 속에 소망 하나 불안스레 움튼다.
생존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를.
나무처럼 시드는 것을 깨우쳐 알기를,
그들의 가을에도 축제와 색채가 함께하기를.
'때 이른 가을'이란 것이 초가을인지, 아니면 예년보다 일찍 닥친 가을인지, 아니면 인생의 실패나 비극을 말하는 것인지 다만 그것은 시인만이 아는 일일 뿐, 독자의 입장인 나는 몰라도 좋은 일이다. 아무튼, 때 이른 가을,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시들어가고 있고 나아가 죽어가고 있다. 그러한 만상(萬象)을 보면서 시인은 조상(弔喪)하듯이 차근차근 언어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역시 헤세가 즐겨 다루는 형식인 3연 형식인데 1연과 2연에 객관적인 풍경을 그렸고, 3연에 주관인 감회를 담았다. 이는 동양 한시 형식인 전경과 후정의 기법과 많이 닮았다. 밖으로부터 안으로 잦아들게 하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시의 분위기는 지극히 고즈넉하고 명상적이다. 역시 마지막 연에서 우리는 인생에 대한 수중한 충고를 만난다, '놀란 영혼 속에 소망 하나 불안스레 움튼다. /생존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를. /나무처럼 시드는 것을 깨우쳐 알기를, /그들의 가을에도 축제와 색채가 함께하기를.' 이런 구절은 이전의 번역본 시집을 읽을 때는 얼핏 스쳐 읽은 대목인데 이번 시집에서 새롭게, 놀랍게 읽는 구절이다. 뒤늦게 만난 기쁨의 하나라 할 것이다.
헤세의 시에 나태주 시인이 해설을 달아놓았다. 헤세의 흔한 시도 있고 새로이 보는 시도 있는데, 나태주 시인이 새롭게 읽고 놀랍게 읽는다는 말씀이 놀랍다. 팔십이 넘은 시인도 새롭게 읽으시며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 시보다 더 반가운 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