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밭 걷기 문학동네 시인선 214
안희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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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드볼트

금고를 열면
씨앗처럼 웅크린 사람이 있다

함부로 열지 말랬잖아 한번 죽었으면 됐잖아 비극도 습관이야
그는 항상 투덜대면서도
번번이 밖으로 걸어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는 같은 이야기를 매번 다르거 하는 재주가 있다

그가 다녀간 후엔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방안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개들은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시름시름 앓고
온 벽은 이끼료 뒤덮이지만

나는 그가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 좋다
나는 이 누수를 멈추고 싶지 않다

그는 귀신같이 내 눈빛을 읽는다
누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너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언제니 그는 처음의 자리로 돌아간다
흙에 묻혀 기다리는 씨앗의 일을 한다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듵릴 거야, 그게 너의 영윈이야
그의 마지막 인사는 십 년이 지나도 똑같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 새는 곳은 없다
그래도 물이 떨어진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금고를 열어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
나는 누구의.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아버지, 할머니,
그분들은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씨를 뿌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 씨앗이 자란 열매를 먹고 아픈 이들이 나았으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이야기를 잘 듣는 귀가 필요하다. 내 귀를 잘 돌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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