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고정희 유고시집 창비시선 104
고정희 지음 / 창비 / 199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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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과 자본주의 

   평화를 위한 묵상기도


어둠이 가득한 세상 속으로

악령이 깃을 치는 땅으로 

첫 열두 제자를 파송하던 날의 

그리스도 마음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돈주머니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양식자루를 지니지 말며

평화를 전하러 가는 너희는 

여벌 신발도 지니지 말아라, 분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그것이 평화의 길인 줄 


추수할 곡식은 익어가는데 일꾼이 너무 적구나, 적구나

열두 제자를 파송하던 날의 

그리스도 말씀을 묵상합니다.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배척하는 집에 머물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모르는 식탁에 앉지 말며

평화를 추수하러 가는 너희는 

내 평화를 외면하는 땅에서 묻은 

신발의 먼지도 다 털어버려라, 당부하신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그것이 평화의 삶인 줄

그것이 평화의 삶인 줄


우리의 소원은 평화

꿈에도 소원은 평화통일

칠천만 겨레 삼천리 외침 속에 

그리스도 말씀 들려옵니다


너희가 입으로 평화를 원하면서

마음엔 두 주인을 섬기고 있구나

진실로 평화를 원하거든 

너만의 밥그릇을 가지지 말며

진실로 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돈주머니를 책기지 말며

진실로 평화통일을 원하거든 

너만의 천국을 꿈꾸지 말아라, 이르시는 그 말씀 

내 오늘 깨닫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부름인 줄

이것이 평화의 부름인 줄


91년 지리산에서 돌아가신 시인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어떤 시를 쓸까?

너희들이  입으로는 평화를 원하면서, 마음엔 두 주인을 섬기며 돈주머니를 차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고 있다고 질타하실까?

두 주인을 섬기며 돈주머니를 챙기는 인간의 마음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일까?

받아들인 상태에서 우리의 세상이 가야 하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미워한 고정희 시인은 자본의 모순과 타락을 끊임없이 지적했지만 

자본주의가 태도를 변화하며 공동체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온갖 모순을 가진 자본주의지만 굳어진 형태는 없다.

변화하는 것 속에 내가 있고 내가 가진 태도가 이 세상의 변화를 끌어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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