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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2004.06.25 , 교보 제 북로그에 올렸던 것입니다.
쭉 올리고 나서, 새로운 리뷰 쓸 예정입니다.
난관에 부딪쳤을 때.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온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라 한다. 이 작가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다. 오래 전에 읽었던 "감상적 킬러의 고백"에 나름대로 감동을 받고, 다른 작품을 찾아 몰두하려 했지만, 비슷한 감동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외면"에서 그 맥을 이어갔다.
아마 이 두 작품이 작가의 성격이 대번에 드러나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작가 특유의 강렬함이랄까.
여유와 낭만, 환상이 가득한 공간에 심취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흡인력으로 꽤 스피디하게 읽혀진다. 단편 하나씩 회를 거듭할수록 이번엔 어떤 진기한 소재, 절묘한 반전으로 나를 놀라게 할까 호기심이 커져 갔다. 짧은 단편에 요모조모 알차게 담아 내 식으로 판단해서 소장가치는 좀 높을 듯하다(지극히 내 식으로;;)
"커피", "자동응답기", "바다를 보는 방법들", "추억을 버리는 방법", "탈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란 단편에 특히 주목했다. "커피"는 반짝이는 재치와 상징적인 면이 돋보였고, "자동응답기"는 독특함이 빛을 발했고, "추억을 버리는 방법"은 시간의 연금술이 빚어낸 행복한 추억과 결정적으로 어긋나게 된 순간을 포착한다. "탈선"은 혀를 내두를 법한 기묘한 반전으로 마지막에서 눈을 번쩍 뜨고 책을 놓칠 뻔했던 기억이 있다. 반듯하고 진지한 전개에서 그토록 섬뜩한 작은 공포가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치밀한 구성을 취한 배울 만한 소설. 하지만, 다른 단편들 또한 각각 특별함이 숨쉬고 있고, 다양한 주제의식과 평범하게 흘러가던 삶이 하루아침에 어긋난 순간, 남미의 정치상황에 대한 냉소로 일관한 비판을 찾아볼 수 있어 다른 작가의 소설집과 구별되는 독특함이 소설에 녹아있고, 뻔한 소재, 구성, 결말이 아님에 싫증을 불러일으킬 요소는 없는 듯하다. 책을 읽는 순간은 굉장히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원에서 사탕과자를 파는 남자〉에서 ‘외면’은 폭력적 정치현실에 정면대응하지 못하는 나약한 소시민의 증거지만, 〈이 세상 위대한 이의 작은 전기〉에서 눈을 내리깔고 권위를 냉소하는 등장인물의 몸짓은 권력의 전복을 꿈꾸는 이들 특유의 제스처일 것이다. 대비되는 두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동응답기'- “안녕하세요? 당신은 지금 부재중이거나 여러 다양한 이유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누군가의 자동응답기와 말씀 나누고 계십니다._ 나를 아는 분이라면 지금 나오는 이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라는 자동응답기의 독백은, 서로가 마음을 나누는 것을 잊고 서로를 외면하는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서 ‘그’는 오랜만에 한 가수의 테이프를 찾아내 카세트에 넣는다. 그러나 그 테이프에서 나오는 것은 어머니와 동생, 삼촌의 목소리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삶과 추억을 외면함을 뜻한다.
실패와 죽음이 다가올 삶의 모습들은 결코 한순간도 너절하거나, 누추하지 않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안개의 분위기를 닮아 몽롱하게 빛나고 때로는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작품은 끝까지 유머와 낭만적 경쾌함을 유지한다.
역시 이 작가의 소개에서도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적자임을 명확하게 보여 주는 소설집이라 극찬을 해놓았다. 이런 사실은 무시해도 좋다. 그냥 소설을 읽다보면 비참한 현실에 주저하거나 포기는 금물이며, 빛을 볼 기회를 찾아보라는 희망의 메시지, 어깨를 다독이는 따뜻한 손길이 기다리고 있어 흐뭇해진다. 그 시간을 즐기면 될 것이라 본다. 결국 재미는 거기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