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짐승의 연애
이응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 교보 제 북로그에 올렸던 것입니다.
쭉 올리고 나서, 새로운 리뷰 쓸 예정입니다.

 

"무정한 짐승의 연애"
“서정은 장르가 아니잖아요. 문체에 가려서 제가 지어낸 스토리와 메시지가 주목받지 못한다면 저는 실패한 겁니다. 서정성이란 그림(소설)을 그릴 때 사용하는 크레파스일 뿐입니다.”
-작가의 말.
“문장이 궁극에 달해도 별로 기이할 것이 없다. 다만 알맞음에 그칠 뿐이다”- ‘채근담’의 한 구절.
아홉 편의 소설 모두 ‘짐승’을 화두로 삼았다. “20세기는 인간이 짐승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웠다. 종족을 살육하는 끔찍한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이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다. 21세기에 지난 세기의 짐승스러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다.”
표제 소설을 비롯하여, ‘초식동물의 음악’ ‘짐승의 편지’ 등 9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은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동물적 속성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면서, 결국에는 그 속성의 잔악함으로 인해 빚어지는 어두운 현실을 사랑의 윤리로 끌어안는 글쓰기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물적 속성에서 비롯된 원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수사의 과잉보다 적합한 문장을 찾아 쓰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색깔로 비유하자면, 표지처럼 회색 이미지가 강한 소설이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낸다. 한때 어두운 분위기를 열정적으로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찾아서 읽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책읽기에 몰입해 들어갔다.
단편 ‘해시계를 상속받다’는 그의 문제의식이 모아진 작품이다. 북파 간첩이었던 아버지는 공작을 하던 중 인육을 먹었다. 아버지는 수도원에 들어가 묵언수행을 한다. 검사인 화자는 다른 사람의 죄를 벌하면서도, 부친을 벌할 수 없다. 부친은 20세기 짐승 같은 인간의 대표단수다. 인간은 자기 안의 짐승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도 스스로를 비판할 수 없다.
단편 ‘초식동물의 음악’에서 화자는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펜팔 친구인 호주 이민자 해수와 함께 추억을 나눠왔다. 성인이 되어 편지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게 된 두 사람은 우정을 이어간다. 화자는 이혼하고, 해수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아픔을 겪고 서로를 위로하면서도 두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일찍 이상한 방법으로, 굉장히 어두운 얘기들을 나눴어. 그래서 그만 이렇게 돼버린 거야.” 작가가 보기에 어떤 이들은 짐승의 몸을 가졌지만 가련하고 연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오로라를 보라’에서는 사자떼와 악어떼에 둘러싸여 소름 돋은 등판으로 죽어 가는 물소의 이미지가, ‘짐승의 편지’에는 푸른 초원을 황량한 사막으로 바꿔놓는 심판을 행하는 하얀 양떼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뚱뚱하고 날씬한 물고기 잔치’는 뚱뚱하고 날씬하고 똑똑하고 멍청하고 강하고 빌빌거리고 밝고 어둡고 괴롭고 기쁜, 이런저런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수족관에서 삶의 희망을 찾는다.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가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간 한 줌의 기억조차도 믿지 못해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소심한 초식동물로 여겨진다면. 왜 유순한 초식동물의 각을 뜨고 피를 뿌려, 교활하고 무정한 육식 동물의 죄를 씻어야 하는지 신(神)에게 따져 묻고 싶다면’이라는 가정은 자신에게 묻는 것이기도 하다. 초식동물은 물론 문학의 다른 이름이며, 작가가 묻는 것은 이 시대에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주인공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짐승스러움"은 파괴 본능에까지 충실한 맹목성, 윤리가 발붙일 데 없는 무반성성, 근원을 알 수 없는 야성적인 연민 등인 것 같다.
희미한 빛을 내며 타오르는 촛불은 위태로운 자아를 표현한다. “세계는 캄캄한데 혼자 타오르고 있어 무참히 고독한 촛불. 곧 바닥에 고름처럼 눌어붙어 꺼져버릴 촛불.”(‘초식 동물의 음악’) “검은 태양을 향해 전진하는 나의 존재는, 골수부터 녹아들며 무의미해졌다. 오, 촛불 꺼지듯 확,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그녀는 죽지 않았어’)
소설 속의 나는 스스로가 ‘무정한 짐승’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무정한 짐승이고자 애쓰는 초식동물’일 뿐이다. 나의 잔인함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스스로가 상처받곤 하는 존재일 뿐이다
안타까운 것이, 작품 어디에서도 구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이따금 빨간색 이미지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추상은 역설적인 구원의 메시지임이 드러난다. 짐승을 화두로 삼은 아홉 편의 소설들을 휘돌고 있는 것은 죽음의 기운이다. 빈번하게 묘사된 ‘촛불’은 타오르는 생과 타서 사라지는 죽음을 동시에 표현한 것일지도.

“짐승스러움 자체를 얘기하고 싶었지, 인간적인 것과 비교해 열등한 짐승스러움을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21세기의 문학’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지나간 20세기 문학의 정신이 유효하다는 것, 의미 있게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맞이한 21세기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럼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를 쓸 때 치유 받는다. 시 정신을 놓지 않는 한 처음의 진지한 마음, 뜨거운 열정을 잃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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