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되는 책들 밑줄 긋기

: 4월 19일 독서 완료.

 

p. 44~45
작품을 이해하고 분류하려는 두뇌의 오랜 욕망에 앞서 몸과 마음이 먼저 작품과 연결되는 순간은 각별한 데가 있다. 전시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람자인 ‘나’의 일부와 작가의 일부가 만나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감상을 이끈다. 일종의 공명 현상이다. 누군가가 자기 삶의 일부를 떼어 만든 작품은, 그 떼어진 삶이 가지고 있던 인식 및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이 파장은 감상을 통해 다른 이에게 전달된다. 이때 작품의 파장이 관람하는 이의 삶이 갖고 있는 다양한 파장 중의 일부와 비슷한 형태를 그리면, 관람하는 이의 내면은 공명 현상을 일으키면서 크게 출렁이는 것이다. 출렁인다. 예상치 못했던 체험 또는 인식을 향해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간다.

p. 103
매혹 당한 이가 매혹의 신비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니라 매혹이 속해 있는 낯선 세계의 구조와 논리를 받아들여 사용할 필요가 있다.

p. 130
월터 머치는 관객들이 영화에서 감동을 받는 건 바로 그 모호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 안의 복잡한 서사 및 편집 구조에는 객관적인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발생하는데, 관객의 내면이 그 빈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영화는 관객의 일부가 된다. 즉 ‘이 영화는 나를 위한 영화’라고 느낀다는 것이다. 영화 내의 가능한 모든 요소를 효과적인 원칙을 통해 배치한 와중에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태어나버린, 마치 성소처럼 남겨진 빈방. 1인실. 누군가가 그 작은 방에 들어가 각자의 문을 잠그는 순간 영화는 완성된다. 비행이 시작된다.

p. 199
글 속의 고통은 승화되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영원한 현재로,
상처 또는 흉터로 잔존해야만 한다.

p. 209
나는 후배가 조언으로 구해 들었던 ‘열심히’라는 말이 단지 외부적인 고난을 의미한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추호도 인간을 위한 리얼리즘을 의심한 적 없다는 그가, 의심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과 얼마만큼 싸워야 했을까 싶어서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잦아드는 회의와 의심을 평생 동안 ‘아주 열심히’ 막아내며 살아야 했던 게 아닐까.

p. 219
어떤 맥락에도 소용되지 않는, 아무래도 좋으니 그저 좋아서 노래하는 풍경. 한국이라는 관념적 압력을 거절하는 순전한 색의 세계. 프로 다큐멘터리 사진가와 취미 풍경 사진가 사이의 회색지대를 두려움 없이 떠도는 독특한 방랑자의 기록지.

p. 240
그러나 답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브리의 여정은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끝나지 않았으므로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브리와 함께 커온 아이들은 이 해결되지 않은 물음을 유산으로 떠안음으로써 지브리가 선사한 세계를 계승할 것이다. 남겨진 질문으로부터, 선대의 빚 또는 저주로부터 또다른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해가 뜨지 않는 몰락한 땅에서 출발하는 어둠의 대항해시대가. 검은 바다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린다.
어떤 장르 내에서 ‘차이와 반복’을
발견하는 건 늘 재미있는 일이며, 그렇게
열린 시야는 다른 무언가를 볼 때에도
더 넓은 시각을 제공하게 마련이다.

삶의 조각들이 모여 하나의 체계를
증거하고 그 체계는 또다시
다른 생각과 사건들을 꽃처럼 피워낸다.

p. 297
『사할린 섬』을 쓴 체호프는 작가 체호프가 아니라 마치 계몽주의의 일반의지처럼 보인다. 천재적인 묘사력과 스토리텔링을 통해 인상적으로 각색된 풍경을 보여주는 작가가 아니라 지식과 교양을 갖춘 ‘교양 시민’ 중의 한 명이다. 체호프는 문학을 위해 사할린이라는 실재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대신에 마치 카프카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압도적으로 불가해한 ‘현실’이라는 성 주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분석하고 관찰한다.

p. 302
『사할린 섬』은 체호프의 남은 인생을 부여잡을 고통스러운 사색, 즉 작가는 세계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고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작가됨에 대해 치열하게 사색했으며, 그 사색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운데 눈앞에 펼쳐진 처연한 삶들을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사랑한다고 해도 막연한 애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상대를, 세계를 내 안에서 전유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그러려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존재론이나 문학론의 여부를 떠나서 삶의 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저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체호프는 답하기를 원했고, 답을 찾기를 원했으며, 그렇게 했다. 『사할린 섬』은 그 위대한 발견의 기록이다.

p. 307
감식안은 지성만으로는 원활히 작동하지 못한다. 늘 더 많은 경험과 자극을 필요로 한다. 이는 수많은 교양 예술서들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렇게 감식안이 키워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되면 세상은 그 사람에게 또다른 문을 열어 보인다.

p. 312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속에 효용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 있어서 그 저울이 모든 사건을 측량한 뒤 각 사건들에게 합격 불합격을 선고하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불합격한 사건들, 불가해한 동시에 불쾌한 것들, 함량 미달의 기억―존재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물론 이 상상은 세월호라는 슬픔이 불러일으킨 감정적이고 편파적인 반작용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저 내 문제였다. 저 아름다운 소설에서와는 달리 실제 세계가 보여주는 비극은 그저 비참하고 절망적일 뿐이었다. 나는 세월호의 침몰에서 어떠한 선(善)도 추론해내지 못했다.

p. 318
이 홀로됨,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단자로부터 어떻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조화로운 우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예술을 소개한다는 것은 이런 방식이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질문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또 무엇을 아주 사랑하는지. 이 완전히 내밀한, 분리 불가능한 단자로부터 모험은 시작될 것이다. 이 낮은 곳에서 저 하늘 위의 별자리들 속으로, ‘잃어버린 시간’들 속으로 향하는 모험이.

p. 328
필립 퍼키스의 사진들이 주는 감동은 이 아무렇지 않게 자존하는 피사체들의 굳건함에서 출발한다. 의미에 기대지 않는, 도그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작은 것들의 힘. 태생적인 완벽함이다. …이들이 처한 상황이 보여주는 치욕적인 숙명은 피사체들의 무심한 침묵 속에 삼켜져 녹아버린다. 다른 강렬한 도큐먼트들이 ‘삶이 그렇게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다, 이것을 보라’라고 말할 때, 필립 퍼키스의 사진은 침묵을 통해 판단을 무력화시켜 사물들을 존엄한 위치로 끌어올린다. ‘나는 자신을 동정하는 야생동물을 보지 못했다.(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영국의 소설가 D. H. 로렌스(D. H. Lawrence)의 말을 빌렸다.

p. 333
가장 짧은 시간과 영원한 시간 사이의 틈에는 모든 존재가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정확히 지금 이 우주만큼 광활하지만 어떤 각본이나 기대나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로운(또는 버려진) 빛들로 이루어진 ‘틈의 우주’다. 빛과 소리의 떨림이(또는 은총의 전달 체계가) 언어를 대체했으므로 모든 피조물들이 의미로부터 벗어나 홀로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곳. 필립 퍼키스는 그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두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것들 사이로 가기. 틈의 일부가 되기.

"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변화무쌍한 공간, 울림, 빛, 공기, 움직임, 삶과 죽음에 조응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밖으로 나가서 내 ‘자신’을 찾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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