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표범 여인 - 민음의 시 144

질주하는 언어는 확실히 검은 표범을 닮았다. 시가 달릴 때, 그 검은 가죽 아래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근육과 뼈의 움직임까지 전달하는 시인의 저력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관능적이면서도 문명 저편의 야성의 부름을 담고 있다. - 남진우 (시인, 문학평론가)
*흘러넘치는 피처럼 야성의 냄새를 풍기는 언어들, 때때로 외설스러울 정도로 대담한 성적 표현들,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본능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공격적이고 도발적이다. - 최승호 (시인)

: 소개와 평 중에서, 개인적으로 유독 끌리고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붙였다. 미끈한 검은 표범의 라인과 저돌적이고 매서운 사냥 영상이 깜짝할 새에 가로지른다. 이토록 자자한 칭찬, 수상작품이란 것,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시큰둥하면서, 내심 어쩌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곧잘 무너졌음에도, 번번이 마찬가지로.) 뼛속까지 찌릿찌릿한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부쩍 기대. 주문을 했으니까, 이번 주 안으로 손에 쥘 수 있겠지. 


선인장 크래커 - Aguantar Report 
봄로야 (지은이) | 리더스컴

그림과 소설, 그리고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책. 스물다섯 살 회화 전공생인 '나'는 자신이 앓고 있는 범불안장애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보고서에는 열네 살 때의 심한 따돌림으로 인한 특정공포증, 스물두 살에 겪은 사랑으로 알게 된 섹스 강박증과 부모님과의 애증. 소멸관계, 스물네 살에 겪은 우울증 등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통과 연관된 주변의 각기 다른 고통을 인터뷰하고 수집함으로써 보고서는 마무리된다.
아픔을 드러내 햇빛에 닿게 하는 순간 치유는 시작된다. 세포 분열처럼 빠르게 자라나는 모든 20대의 영혼의 성장통을 그리고 노래한 아주 진실한 목소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모두가 숨기려 했던 20대의 상처를 치유받도록 들여다보게 하는 아름답고 독특한 현미경. - 이상은 (가수)

: 책 소개에 더 나아가 이상은의 추천 평에도 마음이 끌린다. 그녀에게서 퐁퐁 생겨난 표현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벽에 달라붙는다.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들일 생각마저 없었던 공간. 벽으로 막아놓은 그 굳건함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다. 꽁꽁 숨겨둔, 고등학교 2학년 어느 즈음&대학 초의 조각조각을 흩어놓아 슬그머니 내밀었다 허겁지겁 도로 감추기도 한다.

붕대 클럽 | 원제 包帶クラブ (2006)  
텐도 아라타 (지은이), 전새롬 (옮긴이) | 문학동네

도쿄 외곽 변두리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여고생 와라. 이혼한 부모님과 철없는 남동생, 진학 문제로 뿔뿔이 흩어진 친구들 사이에서 심란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어린 시절 가족들과의 추억이 담긴 병원 옥상에 올라갔다가 환자복 차림에 괴상한 오사카 사투리를 쓰는 소년 디노를 만난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와 함께 그가 남기고 간 것은, 옥상 난간에 리본 모양으로 묶여 바람에 휘날리는 새하얀 붕대.
기존의 중후한 작품 이미지와는 달리 이번 <붕대 클럽>에서는 웃음을 선사하려는 작가의 노력도 엿보인다. 대폭소를 자아낸다기보다 소소한 혼자웃음에 가깝겠지만, 앞으로 작가 자신도 독자들 앞에 좀 더 부담 없이 나올 수 있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이전보다 쉽게 텐도 아라타의 작품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해준다. - 전새롬 (옮긴이)

: 오사카 사투리라니까, 가느다랗게 찢기는 소리, 아주 가벼운 자국을 남기며 누군가 튀어나온다. 댕글댕글한 눈동자의 그 누군가는 소설을 읽기도 전에 풋, 하고 ‘소소한 혼자웃음’을 짖게 도와준다. 그 녀석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보통 흐느적흐느적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그렇게 평가받지만) 작은 불꽃을 튀며 열정을 뿜어낼 때, 모두의 놀란 눈을 감추지 못하는 걸 보며 속으로 킥킥거릴 수 있는 것이다. 최근, 소설로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 신간 리스트의 소설에 무작정 기대를 걸고 있다.

삼엽충 - 고생대 3억 년을 누빈 진화의 산증인, 오파비니아 04 | 원제 Trilobite 
리처드 포티 (지은이), 이한음 (옮긴이) | 뿌리와이파리

삼엽충의 독특한 겹눈을 통해 바라본 흥미로운 고생물학의 세계와 진화 이야기를 다룬다.
지은이 리처드 포티는 삼엽충을 통해 까마득히 머나먼 지구의 옛 모습을 멋지게 재창조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개인적인 이야기, 과학계의 숨겨진 일화 등을 곁들여 자칫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여겨질 법한 고생물학의 세계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또한 지은이는 이 책에서 삼엽충이야말로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탁월한 ‘지질학적 시계’의 가치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10년도 채 지나기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핵물리학이나 생리학 분야와는 대조적으로 삼엽충 분야에서는 역사 전체를 살펴볼 수 있으며, 삼엽충을 척도로 삼으면 과학적 과정의 창조적인 부분을 조금 더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한다.

: 이제 한계라 느꼈던 그 감각을 뒤엎고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계기를 잡은 것 같다. ‘독특한 겹눈’에 비칠, 그 속을 비집고 유유히 날아가며 전해지는 모습. 곁들인 여러 가지 일화에 펑펑 솟아날 궁금증을 애써 감추지도 않으며, 제멋대로 헤집어질 전체와 부분에 은밀히 신호를 보내면서. 

용의 이 
이영수(듀나) (지은이) | 북스피어

<용의 이>는 수입된 번역 SF의 모방물이 아닌 순전히 우리말로 쓰인 '우리 동네에서도 일어날'(예를 들면 ‘부천’이라든지) 법한 사건들을 그리면서도 그동안 한국 SF에서 목격하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듀나 외에도 그것을 실천하는 SF 작가들이 있지만 그만큼 독자들과 평론가들에게 동시에 인정받은 작가는 없다. 그것은 그가 장르문학의 상상력을 작가주의적 가치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방치하면 어떻게 되나? 그것들은 새끼를 친다. <용의 이> 앞에 실린 세 편의 단편들은 모두 당시 완성되지도 않았던 장편에서 파생되었다. 슬쩍 봐도 아이디어나 문구들이 흩어져 독립한 것이 보인다. 이 정도는 괜찮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방치했다면 난 장편을 쓸 핑계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을 거다. 이미 단편 재료로 다 써먹은 뒤였을 테니. - 듀나

: ‘방치되는 이야기’ 어라, 하고 딱 멈춘다. 꼬물거리며, 방향을 정하지 않은 이야기는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내게 잡힐 수도 있고, 스르르 퍼져 허공에 흩어진 이야기는 순간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그전에 노트를 펼쳐 쓱쓱 재빨리 기록해두거나, 창을 켜고 조각 메시지나 파편 아이템이라도 끼적여둬야 한다. 단편과 장편, ‘파생’되었다가, 경계를 넘나드는 정의할 수 없는 ‘재료’들을 언제든 꺼내보며, 나 또한 분발할 것이라 새삼 다짐한다.


보이즈 비 Boys be | 원제 ボ-イズ.ビ- (2004) 
가쓰라 노조미 (지은이), 양윤옥 (옮긴이) | 에이지21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쳐온 할아버지와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린 소년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 고집불통 구두 직인 소노다 에이지와 초등학교 6학년 가와바타 히야토, 사랑스러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도쿄에서 전차로 세 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 대형 터미널 뒤에 자리 잡은 지상 6층짜리 건물.
작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친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심성 고운 등장인물을 통해 삶을 긍정하고 희망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소설은, 자칫 흔한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것은 삶의 어려움과 고통의 깊이를 헤아리는 작가의 시선에서 기인한다. 2003년 데뷔한 일본 작가 가쓰라 노조미의 작품이다.

: 신간으로 기록해두기 전, 이미 매장에서 발견하여 슬쩍 들춰본 기억이 있다. 번역된 문장이 생생한 풍경으로 가득 그려졌기에, 당장 사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같은 소재를 끌어와도 ‘작가의 시선’이 따라가는, 주목을 모으는 지점이 어떠한가에 따라 각각의 양상은 다르게 펼쳐진다.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소개. 어떤 파동을 전해줄 지 기대를 모은다. 오랜만에 심취하는 [따뜻하고 섬세한, 희망의 스토리]라는 걸 생각해내고, 힘내자는 입 모양을 만든다.

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 캐럴 태브리스 (지은이), 박웅희 (옮긴이) | 추수밭(청림출판)

지은이는 실수를 저지른 현실과 자신의 자기존중감이 충돌할 때 인지부조화가 일어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정당화가 작동한다고 말한다. 자기정당화는 책임을 면제해주는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어 자신이 똑똑하고 도덕적이며 옳다는 믿음을 되찾게 한다. 거짓된 믿음이 거짓말이 진화하는 자양분이 되며, 우리를 어리석고 부도덕하며 그른 행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분석 아래 우리 사회의 ‘거짓말 시스템’을 통쾌하게 바라보고 있는 책이다.

: 인물의 심리를 좀 더 세밀히 하기 위해, 살까 싶은 책이다. 스스로 까다롭게 정한 M과 T의, 대비되는 두 주인공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억지로 쥐어짠 느낌이 남지 않도록. 관계를 어려워해 속이는, 어쩌면 속여야만 하는. 심리학에 관해 찜한 책 중 첫 번째로 구실을 달아 소개하는 책이 아닌가 싶다.

마사 퀘스트 - 세계문학전집 162 | 원제 Martha Quest (1952)  
도리스 레싱 (지은이), 나영균 (옮긴이) | 민음사

식민지 아프리카의 영국 여성이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도리스 레싱의 체험이 다분히 녹아들어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구세대와 신세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간의 불화의 세기인 20세기가 키워 낸 세대, 그들이 겪어야 했던 성장통과 그들이 발견한 새로운 세계를 묘사한 작품.
부모와 농장과 어린 시절의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온 도시는, 아프리카라는 대륙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광대하지만 뚜렷한 한계가 그어져 있다.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로 보이나 인종적 긴장감과 적대감이 짙게 깔려 있는 것. 마사는 공산주의 모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데, 새로이 맛본 자유는 그녀에게 충격과 혼란을 준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도 모순을 발견한 마사는 마침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데 계기를 심어준, ‘그녀가 발견한 모순’ 마찬가지로,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주위 환경, 지인들에게도 그녀가 발견한 모순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스로의 모순은 깨닫지 못한 채, 자기와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왈가왈부 함부로 떠들고 있지 않을까 하고. 언뜻 지나쳐간 성장하면서 겪은 통증, 그 당시 입은 충격에 이보다 더한 건 없을 거야 싶었던, 지금에서 되돌아보면 피식 웃을 수 있는. 그때보다 더한 타격, 끙끙하면서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헤쳐보일 거라 불끈 주먹을 쥐는, 더욱 강해진 자신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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