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는 나의 힘 - 창비시선 281
황규관 (지은이) | 창비(창작과비평사)
시인을 동경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 때가 20년 전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되었는가?
까짓 혼자 끙끙대며 쓴 시가 활자화되었느냐를 따진다면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실 너무 오래 결핍에 괴로웠었다.
그것은 내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태생과 어린 시절이 그 배경이었다. 그래서 나의 이력서는 지금도 허름하고 심지어 영혼마저 누추하기 그지없다. 혹 내 시에서 ‘선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마도 나의 남루가 빚어낸 어떤 왜곡 때문이리라. 그러나 지금은 변두리에서 혼자 강물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면, 괜찮은 일 아닌가? 혹은 어스름과 통속적인 주점이라면?
‘나’라는 물건은 숱한 인연의 다른 이름이므로 여기까지 오게 한 인연들께, 그리고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어 준 모든 산파들께 따뜻한 자동판매기 커피 한잔 드린다. 다들 양지바른 곳으로 가시자. - 황규관
: 시인과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한다. ‘허름하고 누추한 영혼’ 에 가려진 ‘선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시인의 콤플렉스와 결핍, 감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리스본行 야간열차 -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언어의 혼동, 목소리의 혼란 속 틈새의 발견이 사물이나 관계의 명징함을 깨우치는 것 이상으로 근사하고 의미 있는 작업임에 주목하게 한다. 물리적 시간의 무게도 가뿐히 압축하고 지나쳐버리기 쉬운 순간의 기억을 올올히 새긴다. 단지 주어와 술어가 자리를 바꿔 앉거나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건너뛴 그 자리에서 얄밉도록 짤막한 그러나 긴요한 시구를 뽑아내는 시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실체를 확인하는 찰나다.
: ‘지나쳐버리기 쉬운 순간의 기억’을 헤집어본다. 기록해두지 않은, 사소하다 넘기고 마는 그 찰나의 풍경 속에서 보물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를 동동 띄우며, 연결고리를 만든다.
차가운 웃음 - 랜덤시선 032
유승도 (지은이) | 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유승도 시인의 주인공은 자연이다. 숲도 나무도 청설모도 흑염소도 바람도 그가 부르면 친구처럼 온다. 그러나 이번 시집 속의 자연은 앞선 시집과는 사뭇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번 시집에서의 자연은 입을 벌려 웃고 있는 채다. 그 웃음은 너무도 차다.
: 차가운 웃음의 너머에 새긴 조각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사뭇 궁금해진다. 표면에 차가운 웃음이 서려있다고 해도, 자연을 노래한, 자연을 친구로 둔 시인의 따뜻한 마음씨를 건져낼 수 있을 것 같다.
작별 -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은이) | 마음산책
소설 작업 뒷이야기와 소설가로서의 고민, 그리고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내놓은 공감의 언어가 담겼다. 문학하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담긴 글과, 책들을 읽은 뒤 느낀 감상들, 때로는 외로움을 지탱하기 위해 책을 읽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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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맞부딪칠 때, 나는 책을 읽는다. 철저히 외로워지도록. 내 안에 꽁꽁 유폐된 나를 아무도 발견할 수 없도록. 그리하여 어떻게도 훼손하지 못하도록.
여기, 문학하는 자로서의 자의식이 담긴 글 편과, 타인이 쓴 책들을 훔쳐본 뒤 느낀 단상을 모았다. 이것으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덮은 독자가 문득 나직한 '안녕'을 읊조리고 싶어진다면, 당신에게 나도 당신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 정이현
: 내 안의 웅크린 나는, 외로움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나는,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듯 실실 웃을 때가 많다. 주위에서 웃음을 터뜨리면 덩달아 웃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반면, 웃을 이유가 없을 때는,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나의 아이템을 손에 쥐고 있을 때는 무언가 탐구하듯 번뜩이는 눈동자를 굴리고 있겠지. 그럴 때, 외로움마저, 아니 외로움을 느낄 여유마저 달아나버린다. 작가는, 더욱 자신을 구석으로 몰면서 외로움을 뭉개는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은이) | 마음산책
젊음의 날들이 미숙하면서도 아름답고, 암울하면서도 풋풋한 것은 언젠간 반드시 터져버리고 말리라는 예민한 긴장감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구름 위에 달콤한 풍선들을 띄워 멀리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서는 후우, 후우, 풍선 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못 견디게 두렵다면 눈을 꼭 감아도 좋다. 위태로워 더 황홀한 그 설렘의 힘으로 나는 오늘을 살겠다.
명랑한 청춘의 사랑아, 마음껏 풍선을 불자. 날리자. 날려버리자.
저기, 시력으로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의 끝에 살며시 닿도록.
이곳에 실린 글들은 소설을 쓰는 틈틈이 썼다. 소설 쓰기가 고통이었을 때, 산문 쓰기는 고통을 다독여주는 사랑스러운 알약이었다. - 정이현
: 바탕의 긴장감을 바닥에 늘어놓고, 달콤한 풍선을 확보한다. 그 간격의 시간을 손에 가득 쥐는 것이다. 두려움을 멀리 던지기보다 조각조각내서 흡수하기도 하고, 작가의 말처럼 풍선을 불어 날려버리기도 하자. 그렇게 다짐하며 보관함에 넣었다.
차가운 밤에 | 원제 つめたいよるに
에쿠니 가오리 (지은이), 김난주 (옮긴이) | 소담출판사
<냉정과 열정 사이>, <반짝반짝 빛나는>, <도쿄 타워>의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테마 단편집. 총 스물한 편의 소설이, 작품의 성격에 따라 두 파트에 나뉘어 실렸다. 1부 '차가운 밤에'에 수록된 단편들은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음식을 소재로 쓴 단편을 모은 2부 '따스한 접시' 역시 흥미롭다.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과 섬세한 묘사, 삶과 죽음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이 돋보이는 소설집이다.
: 원서를 가지고 있는 책, 이제야 번역본이 나오는구나. 예약주문을 하던데, 적립금이 모이는 대로 지를 생각이다. 가오리 작가의 소설은 흥미를 끄는 소재라던가, 파격적인 전개,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거나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당연히, 평소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읽게 되는 건, 그녀가 그리는 풍경에서 어린 시절을 재생시키거나 때마다 각기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