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꾼다.
밋밋한 텅 빈 종이에
잿빛 배경을 채운다.
동그라미를 여러 번 거듭 그린다.
모양이 고르지 않고,
들쭉날쭉한 동그라미가
무수한 둘레를 그었다.
몇 겹을 씌워도
잔상이 떠오른다.
희끗희끗한 라인이
바닥에 과감히 들어차 있다.
누가 알아차릴세라,
후다닥 검정막을 다시 끼운다.
여기저기 제멋대로
채 그러모으지 못한 잔여물이
부스스 흩어져 있다.
*
S의 방.
출입구를 열쇠로 채우지 않았다.
활짝 무방비하게 열려 있지만,
때때로 의뭉스럽게 단단히 걸어 잠근다.
그 주기에 돌입하면,
철저한 소통 거부가 된다.
장치조차 떨어뜨린다.
오고 가는 이 자유롭고,
배경은 훤히 드러나지만,
언뜻 희희낙락 밝은 천성인 듯 비치지만,
실제 건져지는 건, 겉보기만.
단 1%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한 줌 모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