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큰 어른이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겠지만, 반대 운동을 하는 주부들 틈에 끼어 있으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잖아. 나무는 숲에 숨기고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는 장승처럼 서 있는 주부들 사이에 숨기라는 거지."-38쪽
곤란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적당히 다른 것으로 위장하는 수법은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것이 성에 대한 것이거나 죽음에 대한 것, 공공연히 밝히기 힘들 것일 경우에는 그런 식으로 은폐할 가능성이 높다. -75쪽
제물이 된 자들의 흔적이 동굴 안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목숨이 붙은 채로 갇혀버린 자들의 흔적, 가령 벽을 손톱으로 긁은 자국이라든가 피로 쓴 저주의 말,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한이나 증오의 덩어리 같은 것이 체류하는 묵중한 공기가 동굴 안쪽에 분명하게 존재할 것이다. 벽에 찬 습기나 부서진 돌멩이의 틈새기마다 숱한 영혼들의 음울한 집념들이 서려 있을지도 모른다.-124~125쪽
"공범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의심받을 염려가 없는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해.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는 거지. 그런데 공범이라고 의심받지 않을 가장 적합한 인간은 누굴까." - "공동체를 이끌어가려면 권위만으로는 부족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통치하는 사람은 미움을 받고 두려움의 대상도 되면서,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야만 해. 그 대신 개개인의 공포나 불안, 불만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하지. 엄격하면 굴욕이, 만만하면 경멸이 생겨나지. 제대로 거느리려면 그 양쪽의 균형이 필요해."-127~128쪽
정보라는 건 진실의 정도나 증거보다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수요에 반응하는 거야.-130쪽
"큰 문제가 있다. 사악한 것이 번창하고 올바른 것은 짓밟힌다는 흔해빠진 사실이다. 악은 응징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언젠가는 파멸한다는 일반적인 경우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선한 자가 승리를 얻었다는 예는 최근 듣기 힘들지 않은가." 158 "아버지 말씀이, 중요한 것은 직업이나 직함이 아니라 준비라는 거예요." "준비?" "강한 육체와 흔들림 없는 마음. 그것들을 익히는 준비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요."-157쪽
"내 고독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맹렬함 앞에 고래마저도 달아날 것이 틀림없다." 152 "내 용기가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거대함과 젊음으로 햇빛을 반사하는 수면을 한층 빛나게 할 것이다." 177 "내 좌절이 물고기라면 그 지독한 비통과 우스꽝스러움에 강에도 바다에도 살 곳이 없어질 것이다."-139쪽
이 단어는 좋아하고 저 단어는 싫어하는 경향이 저한테는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로서는 좋아하는 단어를 계속해서 선택해왔던 지난 6년의 작업이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 강한 단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 단어를 선택하고 싶습니다.-310쪽
포테이토칩이라는 소설이 있으면 귀엽고 멋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서 포테이토칩이라고 10번 정도 입력해 봤는데 ‘역시 좋아!’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315쪽
"지금 갈 테니까." 이마무라는 머리카락을 세차게 쥐어뜯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여자의 깔보는 말투에 짜증을 느끼면서도, ‘정말로 죽으면 안 되는데’ 하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하고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기린을 타고 갈 테니까 장소 말해"하며.-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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