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따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 지음, 부희령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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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따.
0605
서평단 모집 도서였다. 서평단에 처음 신청했던 터라 달리 기대란 걸 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도 덜컥 뽑혀서 당시에 혼란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서평단 모집 글에서 스토리와 작가의 의도를 확인하고, 아, 읽고 싶다는 막연한 이끌림에, 그냥 신청 한 번 해보자 생각했던 것이다. [몇 번 눈을 깜빡거려 확인 거듭 확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라고 독서일기에 밝힌 바가 있다. 어쨌거나, 5월 12일 무사히 책을 받았고, 기한을 지키기 위해 꽤 발버둥을 쳤다. 오늘에서야 마지막 커버를 덮을 수 있었다. 여건 상,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었고(책 두께가 사전 수준이다), 여러모로 생각을 펼치다보니, 느릿느릿 진행되었던 것이다. 바짝 다가온 마감일(?)에 엄청난 긴장 상태다. 별다른 탈 없이 리뷰를 올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사전 수준이라 그랬는데, 대개 양장본으로 나오고 글자가 큼직할 경우 그런 방향으로 많이들 가는데, 이 책은 양장본도 아니었고 글자 크기도 꽤 작았다.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내 시력이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작가가 담고자 했던 의도와 정비례한다면, 엄청난 무게를 가지는 책이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도 했다.
스타트의 대사가 확 끌어당겼다. 이런 시작 달가워하지 않음에도, 단번에 강렬한 흡입력으로 소설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눈에 드러나 보이는 구성적인 면에서 몇 가지 언급한다면, 첫째, 여러 등장인물들의 특징과 성격을 잘 잡은 치밀한 묘사를 군데군데 발견할 수 있었다. 초반에 선명하고 빈틈없는 상황전개는 환호성을 지르며 파고들었던 것 같다. 지루하고도 개인적으로 난잡하다 평가한 소개가 조금 거슬렸긴 하지만.
4분의 1지점부터 본격적으로 주인공 에르미따가 등장했고, 서서히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라고 생각했다.
필리핀의 역사와 더불어 동아시아,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덧씌워 영상을 그릴 수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딱딱한 역사를 풀어 쓴 게 아니라, 주인공의 삶과 연관을 지어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개인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한다.)
현 상황을 때로는 비참하게, 때로는 주인공의 적절한 대처로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에르미따의 삶에 오버랩하여 투영되는 필리핀의 그림자는 또한 우리 지나간 역사를 되짚게 되기에 견디기 어려운 침묵을 낳는다.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어쩜 전지전능한 신과 가깝게 묘사하고 있다. 과장이 섞였긴 했지만, 적절한 한 마디로 꼬집자면 그렇다. 신속한 상황 파악, 과감한 선택, 적절한 수습 그리고 대처. 뜻하지 않은 위기에 기지를 발휘해 기회로 뒤집는 그런 타입이라고 판단했다. 간혹 너무 주인공의 능력을 찬란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만큼 다른 등장인물이 부각되지 못해 아쉽기도 했다. (이를테면, 맥이나 릴리) 마냥 씁쓸해지며, 거의 중*종반에 등장한 릴리라는 소녀에게서 작은 혁명가의 모습을 발견했기에 다소나마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간당간당한 선에 머물러 있지만. 안심&안일한 스스로에게 채찍질) 환경의 영향이 무척 크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기만을 바라거나 축 쳐져 있어서는 안 되고, 무엇이든 집중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때때로 과감해질 필요도 있다고. 늦었다는 생각에 앞서, 도전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는 것도.
무엇보다도 반복적 일상에 벗어난 에르미의 마지막 결단에서 ‘능동적 대응’의 짜릿한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고정되어 머무르는 것보다, 의지를 가지고 변화를 원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는 거. 느긋하게 돌아보기도 하고, 부끄러움, 후회를 쓱싹 지우기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해야 이상향에 도달한다는 것. 
마무리는 이렇다하게 확정된 사항이 없다. 주인공의 아름다웠던 시절(쾌락에 빠지고, 복수를 꿈꾸기 전)만을 뇌리에 각인하고 떠올리는 수녀의 모습에서, 현재 주인공의 내면 - 복수만을 꿈꾸며 숨 가쁘게 달려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빠트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 을 상징적으로 그려낸 게 아닐까 싶다. 앞으로 지나온 과거보다 더욱 소중한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변화해갈 주인공에게 기대를 모은다. 조국 필리핀을 사랑하는 작가의 바람이 절실히 담긴 부분이다.
역자는 필리핀의 역사를 자세히 몰랐기에 번역을 시작하기 전, 필리핀 역사에 관한 책을 찾아보고 공부를 했다고 한다. 나 또한 마지막 커버를 덮으면서, 도서관에 들러 필리핀 역사에 관한 책을 몇 권 비교 분석해 그 중 나은 것을 골라, 새로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효과란 이런 게 아닐까. 이럴 때 나는 소설에서 여러 가지 요소를 건졌다고 한다. 담아두고픈 표현을 찾았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계기를 심어주었다는 데 한편으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듭 펼칠수록 새로운 양상을 가져다주는 소설이 될 수 있기를. 내가 그렇게,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결말은 완성이 되지 않았다. 그 양상은 나 자신과도 닮았다. 흠이 있고, 흠을 매끄럽게 해야 하고, 내면에 의식의 균열이 생겼고,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해체하여, 뒤죽박죽된 스스로를 다시 정립할 수 있도록 오늘도 한 걸음 내딛는다. 조각조각, 광적인 번득임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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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쪽
가문 이 -> 가문이
270쪽
가문 으로부터 -> 가문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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