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면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뺏길 터이지만 나는 그보다는 책 속에 씌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싶었다. 마치 책 속에 있는 사고와 문장, 방정식들 사이에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 모든 과거가 있는 것 같았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기도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읽으면서 모든 글을 머리에 새기고 싶었다. 그들이 와서 내게 가할 고문이 아니라, 즐거워하며 외웠던 책의 단어들을 기억하는 것처럼 내 과거의 색깔을 기억하고 싶었다.-19쪽.쪽
자정이 가까워지자 그는 별과 행성이 가장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열린 창문을 통해 달빛이 들어왔다. 달과 지구 사이에 있는 그 별의 존재 혹은 부재에 관한 정확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던 하루를 보낸 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우리 둘이 유사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호자는 이제 ‘가르치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연구해야 하며, 함께 찾아야 하며, 함께 걸어가야 했다.-47~48쪽.쪽
이스탄불에 돌아가면 자신의 계획을 더욱더 발전시킬 것이며, 모형 하나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 체계 이론과 새 시계로 파샤를 감동시킬 거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모두에게 전염시킬 ‘부활’의 씨를 심을 거라고 했다. 우리 둘 다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52쪽.쪽
그가 일상적인 것에 대해 묻는 것처럼 "왜 나는 나일까?" 라고 말했을 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호자에게 왜 그가 그인지 모른다고 말한 후, 그 문제는, 그곳에서, 내가 살던 나라 사람들이 많이 질문하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질문하던 것이라고 덧붙였다.-86쪽.쪽
우리는 몰락이라는 말을, 제국의 손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했던가? - 그렇지 않다면, 몰락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는 의미였던가?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이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166쪽.쪽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몇 년 동안 우연하게 경험했던 많은 것이 지금은 필연이라는 것을, 우리 군대가 성의 하얀 탑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219쪽.쪽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 라고. 파디샤는 이 문을 통해 내 머리 내부의 서랍으로 들어온 것 같다.-229쪽.쪽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속수무책에 슬퍼 보이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의 수치스러움, 분노, 죄책감 그리고 슬픔으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야생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내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를 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내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 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238쪽.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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